술통
장승욱 지음 / 박영률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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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아름답다고, 또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름답기는커녕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 청춘의 나날들. 청춘은 늘 내게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었고,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것이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같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춘을 본 적은 있다.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말 풀잎 끝 새벽이슬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런 청춘을 만난 적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즉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이 추억 하나로 한 십년은 족히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0쪽

장승욱에게 있어서 술은,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있어서 술이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뭍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에게 공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고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에게 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장승욱이라는 인간에게는, 술이 그와 같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숨을 쉬듯 술을 마시고, 물속을 헤엄치듯 술잔 속에서의 유영을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페이퍼 발행인 김원) -37쪽

술비 - 일찍이 조정권 시인은 비를 바라보는 마음의 형태를 일곱가지로 나눈 바 있지만, 술꾼들에게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둘일 수가 없다. 비 내리는 날 술꾼이 술을 마시는 것은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 술꾼들은 자기의 살과 피 속에 살고 있는 슬픔의 아이들을 불러내느 비의 호명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비는 똑같다. 술비인 것이다. -42쪽

인터뷰어 : 장승팔, 인터뷰이 : 고은 시인

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시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시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는 규정되지 않은, 어디에 가둘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왜 시를 쓰십니까?
비유하자면 나는 시라는 무기형을 선고받은 무기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나의 존재이유이며, 존재 증명입니다. 내가 시고, 시가 나입니다.

시인은 누구나 고갈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단 한번도 내 시의 샘이 마를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또 말라 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나는 죽어서도 시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시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나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시인으로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내 삶에 문제가 없다면 아마 나는 사막에 가서라도 문제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스승이 있다면?
나에게 스승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얘기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장님 시인 호메로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테와 중국의 시인 이백정도.

스스로 대표작을 꼽는다면?
어떻게 대표작이 있겠습니까. 오늘 쓰는 시 한 편이 대표작이랄 수 있겠지요. 남들은 '만인보'라고들 합디다만.
-129-130쪽

무덤: 무(無)에 덤을 붙은 것. 사람은 없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써 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결국 삶이란 없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통로일진대 없음인 죽음을 담는 무덤이야말로 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마장에 가는 말들>中)-219쪽

원래 나에게는 내 나름의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이 있다. 첫째, 반말을 하지 않는다(물론 말 자체를 거의 안하기도 하지만). 둘째 술은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으로 따른다. 셋째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나는 또한 누가 내 몸에 손 대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남의 손이 닿기만 해도 통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니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정한 원칙이다). 나도 초년병 시절에는 몸이 됐든 마음이 됐든 파트너가 된 여자와 뭔가 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다. 그러나 돈이 매개가 되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은 특히 술자리를 마치고 모두가 계산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실체를 또렷이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위와 같은 행동수칙을 정함으로써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아버리고 만 것이다. -321-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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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통 이 작품 장정일이 쓴 서평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읽어본 만한 작품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프락시스님이 올려주신 밑줄긋기를 읽어보니 더욱 읽고 싶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