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참으로 힘겨운 영화. 좁아터진 영화관의 좌석과 좌석 사이의 공간을 뒤척이며 인내심을 요하는 영화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러닝타임 133분은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겐 너무나 길었고, 이를 참다못한 많은 관객들이 끊임없이 어둠과 탁한 공기로부터 벗어났다. 아마도 그들은 나같이 이 영화의 감독과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에 대해 사전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을게다. 솔직히 매우 힘겨웠다. 기왕 자리에 앉은거 끝까지 봐야하지 않겠느냐, 또 다른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함께했다.

"정말로 소박하게, 상대를 마주보는 기분자체를 소중히 한다는 느낌을 추억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 <비정성시>와 <카페 뤼미에르>로 유명하다는데 이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 어떤 것도 본 적이 없으므로 나에겐 신인이나 다름없다. 간략히 감독에 대해 말하면, 대만 출생으로 1980년 <귀여운 여인>으로 데뷔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비정성시>와 방황하는 젊은연인의 초상 <밀레니엄 맘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카페 뤼미에르> 등이 대표작으로 뽑힌다.

<쓰리타임즈>는 2005년 대만 금마장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2005년칸영화제 경쟁 부문. 2005년 부산 국제 영화제의 개막작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사랑의 꿈' '자유의 꿈' '청춘의 꿈'이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으며, 각각 대만의 1911년, 1966년, 2005년의 시대를 뛰어넘는 시간적 배경설정으로 각기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 어렵게 그녀를 찾아온 첸과 그를 보고 웃는 슈메이.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첫번째, 1966년 가오슝. 사랑의 꿈. 당구장 종업원 슈메이는 이전의 종업원에게 온 편지를 보게되고, 휴가를 나와 당구장의 그녀를 찾아온 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고 가고 첸은 슈메이가 떠난 당구장에서 그녀를 찾는다. 슈메이가 이곳을 떠나고 지나간 모든 경로를 추적하여 결국 어렵게 슈메이를 찾고, 그녀를 어렵게 찾아온 첸을 보고 그녀는 웃는다. 그건 사랑. 시간이 없어 함께 밥을 먹을 수 밖에 없는 두 사람, 함께 한 시간은 짧지만 충분히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차는 끊겼고, 버스만이 남은 어둠이 내린 인적없는 그곳에서 손을 잡는다.

* 양반신분의 지식인 창과 기녀 신분의 아메이. 날 사랑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실 순 없나요.

두번째. 1911년 대도정. 자유의 꿈. 양반임에도 개화사상을 주장하는 창과 기녀 아메이의 사랑. 창은 축첩제를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쓰지만, 정작 그녀의 동생이 누군가의 아이를 배자 아이의 아버지와 혼인시키기 위해 자신의 돈을 내놓기까지 한다. 축첩제 폐지를 주장하지만 정작 첩을 들이는데 있어 도움을 준 것이다. 지식과 행동이 서로 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렸다.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데려가줬으면 하는 아메이와 그녀를 받아줄 수 없는 창. 두 사람의 대화는 말이 아닌 글을 통해 자막처리된다. 속내를 다 털어놓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재밌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영화가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건 영화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형식미 때문이다.




* 도심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와 무표정한 두 사람. 가는 길은 알고 있는가.

세번째. 2005년 타이페이. 청춘의 꿈. 1911과 1966년의 모습은 관객에게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과거로 올라가면 갈수록 영화는 점점 지루해지고, 사람들은 떠나고 하품을 하지만, 2005년의 모습, 뻥 뚫린 아스팔트 도로 위로 질주하는 바람을 가르는 오토바이와 꼭껴안은 두 남녀의 모습은, 관객의 숨통을 틔여주었다. 간질병을 앓아 자신이 쓰러지면 어디로 데려가달라는 안내문까지 목에 걸고다니는 칭에게 반해버린 첸은 그녀의 사진을 찍으며 사랑을 나눈다. 애인이 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잘못된 만남은 점점 엇갈려만 간다. 삶에 생기를 잃은 두 남녀의 방황하는 삶, 무엇을 향해가는지, 목적지는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뉴얼이 없는 이들은 하루하루의 삶이 힘겹다. 정체성의 상실, 방향성의 상실.

 "현대인의 연애와 옛날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연애는 다양한 의미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비를 그리고 싶은 생각으로 찍은 것이 이 영화입니다. 지금은 다양한 연애의 세러모니나 이벤트가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로 소박하게 상대에게 마주보는 기분을 소중히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연애의 형태였습니다. 그런 정서를 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나는 최근이 되어서야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담을까’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현재’를 그리는 것은 자신들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객관화 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른바 현재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과거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 속도 또한 매우 빠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 번째로 등장하는 에피소드 “청춘의 꿈”에서 현재를 다루었고, 그 전에 두 편의 에피소드에서 과거를 이야기 했기에 ‘현재가 어떤가’라는 것을 좀 더 쉽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 힘겹고 지루한 영화는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의도를 읽고나면, 영화를 다 보고나면, 그제서야 서서히 빠져들게 된다. 러닝타임을 견디기 힘들었음에도 영화가 다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는건,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다가오는 사랑의 느낌 때문이다. 그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맞추어져있다. 행동과 글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말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나마도 '자유의 꿈'에서는 음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막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안다. 하지만 서로가 원하는대로 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청춘의 꿈' 은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네온사인 불빛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지만, 정작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만 귀청을 때리고 그들은 침묵하다. 침묵하다 툭툭 내뱉는 그 말들은 참참다못한 그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사랑도 자유도 청춘도 결국 찾지 못했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으며, 자유롭고 싶지만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를 찾고 싶지만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는 이들은, 계속해서 고민할 뿐이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핍은 고민과 방황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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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2-2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속닥님. 반가워요.
 



- 지구멸망

  2007년 1월 어느시점엔가 네이버와 엠파스 등의 검색어 1위는 '지구 멸망의 날'이었다. 검색창에 '지구 멸망의 날'이라고 검색하면 지금도 그 당시에 사람들이 질문을 올리고 대답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2007년 새해 당장 지구가 어떻게 되는것도 아니고, 어떤 질문자의 말마따나 북한의 핵실험으로 지구가 멸망한다는 시나리오도 아니다. 케이블티비 XTM 에서 방영한 영화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에 대답이 있다.

  극장용 영화는 아니고 2004년 미국티비방송용 영화인데, 174분(약 세시간)의 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지루하지 않다. 제목 그대로 '지구 멸망의 날'을 다루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상기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어디는 시베리아를 넘어 알래스카 기온이 되었다가, 어디는 세상에서 가장 더운 나라의 기온수치를 넘어서는 등, 미국 전 지역에서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기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주마다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허리케인이 밀려오거나 토네이도가 상륙하여 휩쓸어가거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자연재해가 미국을 덮쳤다.

  지구가 멸망하는 시나리오는 <아마겟돈> <투마로우> <딥 임팩트> <우주전쟁> <인디펜던스 데이>  등등을 통해 많이 접해봤지만, 지구가 멸망하는 원인은 영화마다 각기 다르다. 외계인의 지구침공으로 인해, 우주에 떠도는 거대한 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악의 댓가로서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함으로써, 지구는 멸망한다. 기존에 나와있는 극장용 영화 중에는 <투마로우>가 이 영화와 가장 근접하다고 하겠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대해 사람들의 여러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이 그동안 지구를 병들게 한 댓가이므로 당연하다며 운명에 순종하는 유형, 어떻게든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해 원인을 제거하려는 과학찬양 유형,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살고봐야하지 않겠느냐며 종말이 올때까지 벌벌 떠는 유형 등. 네이버와 엠파스에 질문을 올린 이들은 특히나 지구멸망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의 감정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같은 충격에 대해서 각기 다른 반응양상을 보이는 이들은 어디에서부터 그 차이가 드러나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이상기온에서부터 재앙을 감지하고는 기상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을 불러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원인을 찾아내고자 한다. 원인을 찾으면 재앙을 막을 수 있으니. 뉴욕에서 토네이도 두 개, 아니 세 개가 만나 도심을 휩쓸고 다니는 꼴이란, 고질라나 킹콩에 비할 바가 못된다. 토네이도는 방향성 없이 도심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며 자동차, 사람, 건물 등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어느날 우리 집 앞에 자유의 여신상이 떨어져있다면 아 토네이도구나 하면 된다.

  영화는 지구멸망에 다가가는 모습을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극장판 영화가 아니어서 그런지, 이 영화는 흥미진진한 기승전결의 스토리보다는 서서히 지구에 재앙이 닥치는 순간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주목한다. 영화는 지구멸망의 원인이 아주 사소한 부분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은 분명코 인간의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듯 하다. 자연 상태 그대로 놔둔다면 사실상 생태계는 문제가 생길리 없다. 모든 것이 인위적인 행위를 가함으로써 연쇄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 FTA

  재밌는 것은 영화 속 전기회사가 개인의 소유이고, 회사는 문제가 생기자 고객들에게 전기를 보급하고자 외부회사의 전력을 비싼값에 끌어오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사회의 공공재가 개인의 사적 소유 아래에 있을 때의 상황은 이 영화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물이나 전기, 가스, 지하철 등이 어떤 개인에게 소유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뻔하다. 하나의 재화를 놓고 몇몇 회사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고, 회사의 독점 내지 과점으로 인해 고객은 비싼 값에 기본재화를 사들여야할지도 모른다.

  지난주 어느 신문에서 한미 FTA가 체결된 그 이후의 모습을 그려놓은 글을 봤다. 소방산업이 민영화되었을 경우 여러 업체가 경쟁을 하면 서비스는 개선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대처하고 불도 더 잘 끌 것이며 인명피해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기업은 이익을 내야하고 주주들에게 배당도 줘야한다. 불이 났다고 무조건 불을 꺼줘서는 안되며, 돈을 받아야 한다는 앞선 전제가 깔린다. 경영자는 이왕하는거 돈 되는 강남지역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길 원할 것이고, 못사는 동네 주민들을 고객으로 유치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서비스가 뛰어난 만큼 이윤은 그만큼 많이 들어온다. 거꾸로 이윤이 많이 들어올 곳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결국 불이 났지만 아무도 꺼주지 않아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전화를 했더니 "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계신 지역은 저희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하고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에서는 전기재화가 민영화되었을 때 어떻게 운영되는지,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고, 어느 지역은 전기가 안들어온다. 회사는 비싼 돈을 주고 우리회사에 전기를 맡긴 고객들을 위해 외부 회사의 전기를 끌어온다. 애초 이 전기회사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심각한 시스템상의 문제가 있었고, 외부의 간단한 바이러스에서 쉽게 무너질 구조였던 것이다. 최고 시스템 책임자는 이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회사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무시해왔다. 그리고 결국 이런 사고가 터졌고, 그제서야 회사는 시스템 상의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역시 회사의 제일 목적은 이윤이다. 돈이 안되면 안한다. 돈이 많이 들면 안한다.

  지구의 생명이 어디까지인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지구가 얼마나 병들었는가를 분석/언급하고 있지만, 언제 지구가 멸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지금 현세의 삶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산다는 것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지구에 재앙이 닥친다는 사실에 대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있다는 신문지상의 기사는 그저 아침 식사와 병행해 한번 읽고 내려가는 정도의 것으로 치부되고, 막상 올해 겨울이 따뜻하더라도 그것이 지구재앙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오늘 겨울이 따뜻해서 활동하기 좋으니까 내일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로 일관한다. 오히려 지구멸망의 시작을 먼저 눈치채는 것은 과학자들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이 지구를 병들게 했고, 과학기술자들이 지구멸망을 감지한다는 사실은 재밌다.  

 감독 딕 로우리는 2004년에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을 만든데 이어, 2005년엔 <카테고리 7 : 토네이도>를 내놨다. 카테고리가 왜 1부터 시작하지 않고 6부터 시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시리즈는 이 두 편이 전부이고, 전편을 재밌게 본 나로서는 후편까지 관심이 간다. 아마도 비디오로는 없을 듯 하고, 어느날 우연히 케이블에서 마주하는 수 밖엔 없겠다.

p.s 지구멸망이라기보다는 미국멸망의 날이 더 맞다. 재앙의 대상은 미국 영토에 한정되어 있고, 타국은 지구로부터 소외되었다. 미국이 만드는 모든 영화에서 언제나 지구의 위기는 미국에 먼저 오고, 미국의 멸망이 주축이 된다. '좋은 것도 미국 먼저, 나쁜 것도 미국 먼저'는 공평함을 보여주기보다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 지구의 중심임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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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반지의 제왕> 피터잭슨의 야심작. 사실 피터잭슨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작업하기에 앞서 <킹콩>을 먼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고질라> 등 몇몇 괴물 영화들을 작업하고 있던 회사는, 이를 보류시키고 피터잭슨에게 <반지의 제왕>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엄청난 대작의 환타지 영화를 완성시켰고,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아주 어릴적 계획했던 <킹콩>을 만드는 일이다.

  9살때 피터잭슨은 티비에서 <킹콩>을 봤고, 저걸 영화로 꼭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년 뒤 어머니의 코트털과 침대 등을 이용해 킹콩흉내를 내는 등 실제 작업에 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영화감독이 되어 환타지 3부작을 완성시킨 다음, 그의 컨디션이 최고조에 도달해있을 때, 또한 영화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킹콩> 작업에 다시 들어갔다.

  <괴물>을 만든 봉준호 감독도 그랬다. 어린시절 한강을 배경으로 괴물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저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본 거 같은데, 당시 영화를 보기 전에 인터뷰 기사를 접했던지라, 에이 괴물은 무슨 괴물 하고 별거 아닌 또 고질라 같은 영화 나오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영화가 나왔던게다. 일반적인 괴물영화와는 전혀 다른.



<반지의 제왕> 골룸과 <킹콩> 킹콩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
(출생 : 1964년 영국, 수상 : 2004년 BFCA Awards 배우조합상( 이상 네이버인물검색 참조))

  피터잭슨의 <킹콩>도 그의 어린시절의 꿈을 현실로 바꾼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성취감, 만족감을 얻었을테지만, 관객입장에서 바라본 나로서는 그냥 그런 영화였다. 킹콩의 섬세한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 신경썼다는 것은 인정한다. 감독은 킹콩의 표정연기를 위하여, <반지의 제왕>의 골룸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를 불러 동물학자와 함께 르완다에 보내 고릴라를 연구하고 오도록 했다. 그냥 컴퓨터 기술로서 만들어낼 킹콩이 아니란 판단에서였다. 앤디 서키스는 그곳에서 온갖 고릴라의 울음소리와 행동을 연구하고, 자신의 몸으로, 목소리로 연기했다. 그리고 이에 컴퓨터 기술을 이용 덧씌우기를 함으로써 킹콩을 완성해 나갔다. 킹콩의 사랑녀 나오미 왓츠나 영웅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 등이 킹콩을 바라보듯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허공상태가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고, 앤디 서키스는 이를 충족시켜줬다.



* 왜 원주민들은 이 여자만 '골라서' 데려갔을까. 이뻐서, 아니면 여자라서, 것도 아니면 뭐. 그리고 왜 킹콩에게 바쳤을까. 제물일까. 장난감일까. 것도 아니면 뭐. 그리고 킹콩은 왜 얘를 살려뒀을까. 질문하지 말라니깐. 뇌 비워.

  영화감독 칼 던헴은 거리의 삼류 여배우 앤 대로우와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기타 스텝들을 이끌고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해골섬으로 향한다. 수억만년전의 고대 정글이 보존되어있는 해골섬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영화촬영을 하려는데, 난데 없이 나타난 원주민들로부터 습격을 받는다. 결국 여배우 앤 대로우를 그들에게 빼앗기고, 그녀는 킹콩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킹콩은 그녀를 먹지 않고 바라본다. 장난감처럼 건드리고 쓰러지면 좋아하고 하는 꼴이 꼭 아기같다. 왜 원주민들이 그녀만 골라서 데려갔는지, 킹콩에게 왜 바쳤고, 킹콩이 왜 그녀를 살려뒀는지는 물음표다. 킹콩영화, 괴물영화에 이것저것 질문하고 의심하는건 고상하지 못한 감상법이다. 그저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보고 있는 것이 최선이다. 질문은 삼가할 것.

 

* 아 저 불쌍하고 가련한 표정봐라. 너무나 인간적이다. 못생긴 귀여운 아이공룡둘리 보는 듯 하다.  이 킹콩 영화의 압권은 괴물의 섬세한 동작과 표정연기다.

   대개의 괴물영화, 공룡영화, 모험영화들이 그렇듯 꼭 문제아는 있기 마련이고, 문제아와 맞서 싸우는 동료가 존재하고, 영웅도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쁜 여배우도 하나 있어야 하고, 이 여자를 둘러싼 갈등관계도 필수다. 한쪽에선 문제 일으키고 다른쪽에서 죽어라 냅다 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을 보는 듯하다. 배경도 그러하거니와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줄거리도 비슷하다. 탐욕스런 인간의 욕심으로 희귀동물이 삶의 터전으로 옮겨져오게 되고 문제가 발생하는건, <쥬라기공원>이나 <에일리언>과 다르지 않다. 출연자 중 일부는 출연료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액의 로또대박을 위해 또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희귀물 앞에는 돈이 존재한다. 희소가치가 클수록 돈이 되니까. 지구상 마지막 남은 킹콩이 당연히 돈이 안될리 없고, 얘를 데려와서 문제가 안될리도 없다. 괜히 자극해가지고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킹콩>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어드벤쳐 괴물영화의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국 군대가 동원되고 미사일과 총알을 퍼붓고 괴물을 쓰러뜨린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 처치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헐리우드 킹콩은 절대 헐리우드 규칙을 깨지 않는다. 이쁜 여자 위해 내 몸 다 바쳐 방패막이하고, 스스로 몸을 떨구는 킹콩은, 영화 속 누군가의 말처럼 군인이 죽인 게 아니라 이쁜 여배우가 죽인 거다. 괜히 나타나가지고는. 그런데, 나오미 왓츠, 대사가 거의 없다. 꼭 나오미 왓츠가 아니어도 상관없지 싶은데. 뻔한 괴물영화지만 뻔한 괴물영화를 좋아한다면 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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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고독 2007-02-2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영화 재미있게 보았답니다 ^^ 저도 강추~~

마늘빵 2007-02-25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난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죠. 킹콩이 꽤 귀여웠어요. 불쌍하기도. 인간과 비슷한 행동방식과 표정에서 때문이겠죠. ^^
 



* 스포일러 경고 

 시간은 흘러흘러 BC480년. 고대 그리스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었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BC 469-399)가 태어나기 전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리스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키고 있다.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은 바다를 건너 이땅에 도착했고, 그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온갖 신기한 사나운 동물들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스를 위협했다. 300대 100만의 싸움은 보지 않아도 결말이 뻔하지만 그들은 용감히 맞서 싸웠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것이 대략적인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세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전쟁의 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은 BC492년에서 BC479년까지에 이르는 BC480년의 테르모필레 전투, BC480년의 살라미스해전, BC479년의 플라타이아이전투를 일컫는데, 이 중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는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어 페르시아를 물리쳤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그리스 연합국의 맹주역할을 했던 스파르타의 레오다니스왕과 군인 300명이 전사했다. 시간상 가장 먼저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뒷날의 승리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간을 벌었고, 이들이 전사한 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적했다. BC488년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칼리아스 화약이라는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그리스의 맹주역할을 했고, BC431년부터 404년까지 진행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아테네 세력 대 스파르타 세력의 싸움에서 아테네가 짐으로써 스파르타로 권력이 다시 넘어갔다.




  스파르타.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철학을 모르는 이들도 스파르타 라는 말은 한번씩 접해봤다. 우리가 현재 '스파르타'와 함께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는 '학원'이다. 스파르타식 학원.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를 배우기 전에 난 스파르타를 접했고, 그건 학원 전단지를 통해서였다.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칩니다. 무슨 말일까. 단어가 의미하는 본래적 의미를 알기도 전에 나는 전단지를 통해 대략 눈치를 챘다. 아 졸라 빡센 학원이구나. 방학동안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모든 스케쥴을 관리받고 짜여진대로 열심히 공부한다. 그럼 성적이 오른다. 뭐 이런식.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나라로서가 아니라 빡센 기숙학원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 스파르타 전사 300명을 이끌고 장렬히 전사한 레오니다스 왕의 어린시절. 굶주린 늑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늑대보다 강렬했으며, 그의 행동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잽싸게 공격하는 늑대보다 민첩했다.

  스파르타가 이렇게 빡센 학원을 지칭하게 된 것은 스파르타의 교육관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체격의 정도와 건강함을 체크받고 약한 녀석들은 바로 버려진다. 오직 태어날때부터 강한 아기만이 스파르타의 국민이 될 자격이 있으며, 이들은 7세가 된 뒤에는 부모와 떨어져 엄격하고 강도높은 체력훈련을 받는다. 레슬링, 달리기, 창던지기 등등의 온갖 전투기술의 기본기를 익히고, 밖으로 내보내져 어두운 밤엔 늑대와 같은 야생동물과 싸워 살아남아야 한다. 남자들은 20살에서 60살까지 병역의 의무를 지고, 30살까지는 혼인을 했더라도 병영 막사에서 동료들과 지내야 한다. 모든 것이 국가수호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그만큼 국방력은 강했다. 흔히 스파르타와 비교되는 아테네의 경우 스파르타와는 달리 글과 문학, 음악, 미술 등의 교육에 막대한 시간을 투자했으며, 여기에서부터 비록 노예와 여성이 제외된 절반의 민주주의였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태동했다.




* 300명의 군인으로 100만대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왼쪽 동료의 무릎에서 어깨까지를 보호하라. 단결된 300의 군사는 오합지졸 페르시아 군보다 훨씬 강했다. 절벽으로 떨어뜨리고, 놀래켜 떨어뜨리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감추었다 날렵하게 찌른다.

  영화는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분인 테르모펠레 전투를 다룸으로써 스파르타 군인들에게 주목한다. 이 영화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검투사들의 이야기 <글레디에이터>나 <알렉산더>, <트로이> 등보다는 흥미가 떨어진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재현하는데 충실했으며, 이 과정에서 흥미나 곁다리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대개의 고대 역사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비해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는 없고 러브씬만 잠깐 보인다. '<트로이>의 스케일, <글래디에이터>의 스펙타클, <매트릭스>의 영상혁명을 뛰어 넘는'다는 광고문구는 거짓은 아니지만, 흥미와 스토리는 없다고 보면 되겠다. 단순한 재미로 볼 영화라기보다는 역사의 한 장면을 영화로 재현해낸 것으로 만족할 영화.  역사교과서 속의 단 몇줄로 언급된 페르시아 전쟁을 눈으로 감상하는 재미란 이런 것. 스케일과 스펙터클함과 뛰어난 영상미에 푹 빠져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뒷말 1 :  꽤나 잔인하다. 시뻘건 피가 난무할 것이다. 게다가 몸땡이 잘라지는 장면도 리얼하다. 씬씨티를 보신 분은 그 정도를 예상하면 될 것.

뒷말 2 : 만화와 영화는 1백만 대 300명의 싸움이라 했지만, 역사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페르시아군이 15만 정도로 추정되고, 스파르타군은 300명에 수행하인의 수까지 더해 600명 정도로 추산된다.

P.S. 함께 보면 좋을 저 동네 역사 영화들.

대로마 제국을 뒤 흔든 노예 반란 사건을 다룬 <스파르타커스>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을 그린 호머의 서사시 <일리야드>를 스크린으로 부활시킨 <트로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킹덤 오브 헤븐>
고대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소재로 한 <글래디에이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불리우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를 그려낸 <알렉산더>
어린 시절 만화로 접해 익숙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전설 <킹 아더>
'아더왕의 전설' 중 기사 랜슬롯과 귀네비어 왕비의 삼각 관계를 다룬 <카멜롯의 전설>
토마스맬로리의 원작 '아서의 죽음'을 바탕으로 아더왕과 엑스칼리버를 소재로 한 중세시대극 <엑스칼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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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24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의 영화판인 모양이군요.
이틀전에 아이들에게 이 만화를 사줬답니다..


마늘빵 2007-02-2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그게 원작이라 들었습니다. ^^ 전 만화는 못봤어요.

마늘빵 2007-02-2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책이 원작이라는 것만 알았지, 만화인것도 몰랐고, 씬시티의 만화가 프랑크 밀러가 그린건지도 몰랐어요.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씬씨티를 떠올린건 이상한게 아니었군요. 영화 씬씨티를 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어요. 색감이 특히나요.

비로그인 2007-02-2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t's right. 아프락사스님.


백년고독 2007-02-2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잔뜩 기대하고 있답니다 ^^, 만화가 원작이었군요.

마늘빵 2007-02-25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습니다. 잔인함이 괜찮다면. 씬시티를 먼저 보시고 이 영화를 보셔도 좋을 듯 해요. 둘 다 만화같은 영상으로 재현해는 기법이 탁월합니다.
 



* 스포일러 경고

  4편째 시리즈물을 시도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매니아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매트릭스> 등등은 첫작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상업적으로 이윤을 획득할 만큼은 좌석을 채웠다. 다른 영화들이 하나의 일관된 제목을 가지고 관객에게 어필하는 반면, 이 시리즈물은 제목이 제각각이다. 또한 영화의 제작순서가 시리즈의 줄거리를 시간순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영화 속 시간에 따르면, 엄연히 이번에 개봉하는 <한니발 라이징>이 가장 우선이 될 것이고, 이어서 <레드드래곤> <양들의 침묵> <한니발>이 따라올테지만, 실제 제작순서는 91년에 <양들의 침묵>이, 01년에 <한니발>이, 02년에 <레드드래곤>이, 그리고 07년에 <한니발 라이징>이 따라간다.



* 이 잘생긴 꽃미남이 잔인한 살인마라니. 한번 나쁜 놈으로 찍히면 영원히 나쁜 놈이 된다. 이런걸 낙인효과라고 한다지.

  영화제 사상 최소 출연(16분)으로 9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소니 홉킨스는 불행히도 이번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한니발 라이징>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소니 홉킨스의 나이가 이제 우리나이계산으로 70세에 이르렀으니 2차 대전을 겪은 꼬마를 열연하기엔 너무나 나이가 많지 않은가. 안소니 홉킨스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청년으로는 가스파르 울리엘이라는 배우가 낙점되었다. 84년생 프랑스 출신의 이 배우는 <인게이지먼트>로 데뷔하여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니발 역을 따냈다. 전작을 보신 분들은 전작의 안소니 홉킨스 못지 않은 그의 살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가족들이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때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한니발은 처참에게 살해당한 동생 미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 그들을 추적한다. 버려진 옛 집터엔 그들의 인식표가 남아있고, 이를 토대로 한명씩 찾아가 피의 복수를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워낙 침착하고 머리가 비상한지라 경찰의 거짓말탐지기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프랑스의 의대에도 최연소 합격하였다. 이 모든 것이 복수를 위한 사전작업이다. 하지만 본능에 가깝다. 그의 치밀한 복수장면은 아주 깔끔하지만 처참하다. 머리를 동강내고, 척추를 베고, 볼따꾸를 버섯과 함께 꼬치구이 해먹는다. 그 누구도 한니발을 막을 수 없다.

  그는 왜 잔혹한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선하게 태어난다거나, 악하게 태어난다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는 그런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설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 순진하고 착하기만 하던 어린 녀석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2차 대전 중에 가족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살점을 씹어먹는 체험까지 해야했다. 영화 속 그루터스의 말처럼 그는 어쩌면 자신이 여동생의 살점을 먹었다는, 고깃국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내 여동생을 죽인 녀석들을 찾아 복수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들에게 가하는 복수라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가하는 복수다. 

  밤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잠을 설치고 괴로워하는 나에 비해, 나치로 활약한 그때의 이름을 감추고 귀여운 아들, 딸 잘 낳아 번듯한 레스토랑도 하나 차리며 그럭저럭 윤기나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아무도 그들을 처벌해주지 않는다. 법으로도 안되고,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이라면, 나만이 응당한 댓가를 치뤄줄 수 밖에 없다. 복수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을 죽임으로써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가해진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지도 모른다.

 

*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 오직 피만이 그대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양들의 침묵 시리즈라고 해야할까, 한니발 시리즈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부르건간에 이 작품들은 모두 잔혹하지만 깔끔하고 신사적인 범죄자를 다룬다. 비상한 머리와 고통을 가하는 다양한 살해방법, 게다가 인육을 먹는 설정까지. 이 모든 것들은 영화의 원작을 집필한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왔다. 괴물은 한니발이 아니라 토마스 해리스다. 토마스 해리스는 은둔 작가로 알려져있다. 온갖 인터뷰와 대외활동요청을 거부한 채 1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해온 이 사람은,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샐린저의 은둔생활은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를 통해서도 다뤄졌다.   

  토마스 해리스는 영화 한니발 시리즈의 모든 원작을 집필한 작가이다. 스릴러 소설로 먼저 완성이 되고, 이후에 이것을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감독 피터 웨버는 이전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통해 섬세함과 절제된 감성을 선보인 바 있다. 92년부터 시작된 한니발 시리즈는 조나단 드미로, 리들리 스콧(대표작 글레디 에이터), 브렛라트너의 손을 거쳤고, 피터 웨버를 통해 한니발의 성장과정에서의 상처와 치유,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섬세한 심리묘사를 완성시켰다. 토마스 해리스는 유일하게 피터웨버에게만 집을 개방했고, 그와 수없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도움을 줬다고 전해진다.

  더이상의 한니발은 이제 없다. 한니발의 어린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작품이 나왔으니 이후 한니발을 만나기는 힘들다. 이번 작품은 안소니 홉킨스의 <양들의 침묵>만큼은 아니지만, 젊은 한니발 가스파르 울리엘을 통해 깔끔한 피의 복수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이 잔인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니발'에게 있어서 '생각보다'임을 말해두고 싶다.

 p.s. 이런 시리즈물은 영화 속 시간순서대로 한번 쭉 훑어줘야 제맛인데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따로 즐겨도 무방하겠다. 전작을 전혀 보지 않은 사람들도 스릴러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재밌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뒤 <양들의 침묵>을 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래도 안소니 홉킨스를 먼저보고 젊은 한니발을 만나는건 강도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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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4-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의 글은 참 편안하네요.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