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예전에 재밌게 봤던 그렘린이 떠올라서 토욜 퇴근 후 집에 와서 1,2편을 연달아 봤는데, 이거 대단한 영화였습니다. 전에 봤을 땐 그냥 아 귀여워 귀여워, 이러면서 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이건 굉장한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1984년, 1990년 미국에서 나온 그렘린은 지금의 미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는 듯 했달까요.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모습, 그리고 현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렘린 1,2편에서 제가 본 것들을 나열하자면,
* 스포일러 경고
1. 이명박식 불도저 개발계획
- 2편에서 무슨 거대한 센터를 세운다고 포크레인으로 다 찍어누른다. 놀란 우리의 귀염둥이 기즈모는 쭐래쭐래 겨우 도망나오지만. 그곳에서 살겠다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할아버지 윙이 병으로 죽자 요때다 하고 바로 삽질. 그래도 명박이보다 양심은 있는 게, 떠나지 않겠다는 할아버지 죽고 난 뒤에 포크레인으로 부숴버린다는 거. 살아있을 때는 돈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 명박이는? 청계천 공사를 떠올리자.
2. 이명박식 친환경 개발
-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랬다. 지금의 청계천은 수도꼭지에서 물틀어 연결해놓고, 진짜 청계천은 그 아래 흐르고 있다고. 우리(?)가 데이트 장소로 종종 활용했던 그 청계천은 청계천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 친환경 친환경 하면서 보기 좋은 공원이나 분수나 이런 것들 세우지만, 그건 친환경이 아니다. 그냥 인공환경이지. 나무 있고, 풀 있고, 물이 흐른다고 다 친환경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3. 효율과 경쟁 시스템
- 이명박식, 공정택식 경제 논리. 뭐든지 경쟁시키면 다 되는줄 안다. 경쟁 시켜서 올라갈 놈 올라가고 안되는 놈 떨어지고. 클램프 센터의 7단계 승진 시스템. 주인공 촌놈이 클램프 센터에 취직한 후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뭐든지 효율이 최고고, 경쟁이 최고다는 식의 사고.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그렘린 2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4. 유위(有爲)
-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려 하면 안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된다. 무위가 최선의 해결책이다. 유위의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5. 바보상자
- 그렘린을 티비를 좋아한다. 부우우우웅 자동차 경주도 좋아하고, 야한 것도 보고, 폭력적인 영화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따라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티비를 못보게 한다. 바보상자라고. 맞다. 티비는 바보상자다. 20년전에도 티비는 바보 상자였고, 지금도 바보 상자다. 티비 볼 시간도 없지만, 시간 돼도 티비는 잘 안 본다. 한번 보고 있으면 계속 보게 되는데 얻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
6. 80년대 미국은 그래도 살만했다?
- 오늘날의 미국은 살기 안좋은 국가 중 하나. 부자들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듯 하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영화 속 미국 사회는 지금의 한국을 보는 듯 하다. 점차 각박해져가는,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렇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그때는 아직 과도기였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지.
7.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샐러리맨의 삶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달이 봉급받는 월급쟁이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장소를 한국으로, 때를 현대로 옮겨놓으면 가장 극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OECD국가 중 근로시간이 압도적 1위인 국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주말에는 출근하는 삶은 이땅에선 흔히 볼 수 있다.
8. 유전자 실험
-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코 좋아할 게 못된다.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막무가내 유전자 실험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각종 유전액(?)을 먹은 그렘린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변해가는가를 2편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퀴벌레도 웬만해서는 약 먹고 안 죽는다. 예전에는 바퀴약 설치해놓으면 먹고 나와서 헤롱헤롱 거렸는데 요새 바퀴들은 먹어도 도통 발걸음이 느리지 않다. 쌩쌩하니 잘 달리는데 이젠 더 센 약을 뿌리고 먹여야 한다. 약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퀴도 내성이 강해진다. 거기에 아예 유전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돌연변이가 출연한다면? -_-
9. 쉬운 고용과 쉬운 해고
- 클램프 센터는 엄청나게 크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줄곧 5%안에 들어온 수재들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삼성 같달까. 그런데 회사 안을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공부만 잘해 자기 이익은 잘 챙기는 엘리트 유형과 박봉에 시달리며 온갖 굳은 일은 다 하는 소외된 비정규직 유형을 볼 수 있다. 고용된 배우가 투덜대며 문을 박차고 나오고, 일하는 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던 노동자 한 명이 즉각 해고 당한다. 거대 기업은 필요할 때 쉽게 사람을 채용하고, 쉽게 사람을 버린다.
10. 미국 우파 할아버지
-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사람인 듯 한데, 러시아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우파 할아버지를 잠깐 볼 수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냉혈한들의 모습이 아닌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모습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놀라운 발언을 한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면 바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러시아인이 그런 대상이 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러시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11. 동거 커플
- 영화는 1990년의 미국. 지금 보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래도 얼굴은 잘생기고 이쁜 두 남녀가 동거생활을 한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결혼은 아직 아닌 두 사람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동거는 문란함의 극치이다. 어떻게 동거를 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동거를 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12. 최신식 건물의 잦은 고장
- 최신식이라고 좋을 게 하나 없다. 과거에 손으로 하던 걸 지금은 손도 안대고 리모콘 버튼만 눌러 실행시키거나 손가락 까딱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려고 하는데 그런 물건일수록 고장이 잦다. 한번 고장나면 고칠 수가 없다. 최신식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발상, 수동보다는 자동,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이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
13. 약한 학생 무차별 폭행, 왕따, 고문
- 영화에 학생은 안나온다. 그런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즈모로부터 나온 나쁜 그렘린들이 약한 기즈모를 어떻게 괴롭히고 학대하는가를 보면 그게 딱 우리네 교실 안 모습이다. 어제 기사였던가 여고생들이 친구 하나를 변기통에 처박고 물을 먹이고 사진을 찍고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어디 하루 이틀 벌이지는 일이랴만. 이런 게 아직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뉴스란 모름지기 일반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건 너무 흔하잖아. 폭행하고 왕따시키고 감금하고 전기고문하고. -_-
14. 어리버리한 경찰
-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언제나 경찰은 사건이 다 해결된 뒤에 나타난다. 아니면 해결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 나타나거나. 사건종료되고 나타나 어리버리하게 여기저기 부딪치며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경찰들을 이 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도처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시체가 발견되지만 그곳에 경찰은 없다. 권력에 빌붙고 엄한 사람들 잡아가려고 어떻게 법을 적용할까를 고민하느라구. 촛불집회 현장에서 뻘짓하지말고 돈 빼돌리는 교수들,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정치인들이나 잡아라.
15. 공동체로의 복귀
- 크게 한 탕 벌어지고나서 다행히도(?) 클램프 사장은 깨달음을 얻고 공동체로 가자고 하는데, 내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비현실적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다가 사장이 깨달음을 얻어 자연과 공동체로의 복귀를 외치는 경우는 없다. 반성하는 척 잠깐 쇼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뭐하러 깨달음을 얻어. 권총들이민 한화그룹 회장이나 국가를 지배하려한 삼성그룹 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갑자기 정의로워지고 착해지는 경우는 없다.
16. 전지적 작가 시점
- 요건 그냥 보너스인데 중간에 깜짝 놀랐다. 영화 끝난 줄 알고. 감독은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찍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영화에 개입했다. 잠시 등장한 그 사람이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을 몰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던 영화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깜짝 전환한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17. 총평
- 온갖 사회적 문제를 곳곳에 맛깔나게 버무려 메세지를 잃지 않은, 재밌고 귀엽고 괴기스러운(?) 완벽한 영화다. 이명박과 똘마니들이 함께 모여 감상해야 할 영화. 청와대에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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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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