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래저래 순탄한 인생을 살긴 그른 모양이다. 세번째 전과를 했다. 고등학교 때 이과에서 문과로 첫 번째 전과를, 대학 때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두 번째 전과를, 그리고 이번에 교직에서 **로 전과를. 내 이력서과 내 자기소개서를 보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신다. 좋게 말하면 참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나쁘게 말하면 참 많이 옮겨다니셨군요, 라고. 그래 나 많이 옮겨다니고 너무 하고픈게 많아서 이거저거 다 시도해봤고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왔다. 어릴 때도 그랬고, 나이먹은 지금도 그렇다. 난 말이다, 언제든 내 마음이 가는대로 나를 내맡겨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며 몸담았던, 햇수로 3년간 몸담았던, 그 직업을 버렸다. 고등학교 때 이과에서 문과로 옮길 때도 그랬듯, 대학 때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옮길 때도 그랬듯, 이번에도 어머니는 한 소리 하셨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언제나 그대로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지금의 나를 믿고,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릴 때는 그래도 내 마음대로 가도 될까, 하고 스스로 의심해보곤 했다. 절래절래는 아니어도 갸우뚱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어머니는 시험 한 번 보지 않고 포기해버린다고 뭐라 하셨다. 그러나 난 '포기'한 게 아니다. '포기'는 내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난 포기 한게 아니란 말이다.그런 식으로 외부의 시각으로 나를 해석해선 곤란하다. 나는 교직을 원한게 아니라 '철학함'의 연속성을 원했다. 애초 대학을 졸업하며 생각했던 여러 갈래의 길을 놔두고 이 길을 택했던 것은, 많은 이들과 철학함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왜 이 길을 택했냐고 물으면 철학함을 원했다고.

  생각보다 그들은 많이 보수적이었다. 나는 나를 속여가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았고, 집에서 거리가 먼 곳을 힘겹게 찾아간 뒤에도 나를 굽히지 않았다. 난 언제나 나를 드러냈다. 기독교 학교에서 불렀을 때에도 예수를 믿으십니까, 라는 물음에 나는 선뜻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도 믿는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그건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날 맘에 들어하신 교감샘께서 나를 쓰기 위해 다시 물으셨다. 대답할 기회를 주셨다. 파스칼이 그런 말을 하잖아요. 신이 있다 없다에 내기를 건다면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역시 대답하기 어렵다 했다. 

  비기독교 학교인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날 속이지 않았고 내가 믿는 그대로, 내 생각 그대로 전달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철학함을 계속 해 나갈 수 없다면, 나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 생각했고, 철학함을 이어나갈 수 있는 다른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첫 출근을 하였다. 현장에서 가르치며 철학함을 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나의 철학함을 이어가련다. 내가 원한 건 어차피 특정한 직업이 아니었다. 단지 철학함이었을 뿐. 지금의 직업이 꼭 들어맞는다고 볼 순 없지만 하는 작업 중 절반은 내 뜻을 펼칠 수있는 길이었기에 이쪽으로 급선회했다. 

  대학 때 철학을 선택하면서 나는 특정 직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단지 그냥 끌려서 갔을 뿐. 먹고 사는 문제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한 지금 역시 철학과를 나와서 먹고 살기 왜 힘들다고 하는지는 깨달았지만,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대학을 가더라도, 그 시기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철학을 택했을테니까. 더불어 복수전공으로 국문학이나 사회학을 택했을테니까. 한 지인이 그런다. 친구가 심리학과인데 복수전공이라도 해라, 라고 말했더니 정말 복수전공을 했단다. 뭐 했냐 물었더니 어 철학, 그랬단다. 크게 웃어줬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아니까.

  내 인생의 커다란 세 번째 전과를 감행한 첫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만족스럽다. 이제 이 길을 걷는다. 언제 다시, 또, 내가 네 번째 전과를 감행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도. 난 내 마음이 가는대로 그렇게 살으련다. 내 마음이 철학함의 다른 변주를 원한다면 그곳에 내 발을 돌리련다. 지금은 이 길을 걷는다. 시간이 된다면 3년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바들을 풀어놓을 것이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하지 못하는, 분노하고 싶어도 분노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하나씩 풀어놓으련다. 그 입을 대신하련다.

p.s.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게다. 네 번째 아니냐고. 므흣. 엄밀히 대학에서 전공한 학문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학문은 그 이름을 달리하고 있으니. 하지만, 내게 대학에서의 전공과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다르지 않다. 같다. 그건 그냥 그 이름이 다를 뿐이고, 사람들의 구분방식이 그럴 뿐이고, 학제구분이 그럴 뿐이다. 그러니 난 전과를 네 번 한게 아니라, 세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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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2-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저번에 말한 직종으로 옮긴 거예요? 아무튼 세번째 전과 축하해요! 소신을 밀고 가는 삶, 아프님답고 멋집니다. 지난 3년의 시간도 아프님의 다음 행보에서 소중한 거름이 될 테지요. 잘 하셨어요!!!

2008-02-2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anne 2008-02-2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궁금해라. 비밀이신가요?
(방황하는 영혼에게 길잡이를...)

마늘빵 2008-02-2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 네 그쪽이에요. :) 뭐 제가 그렇죠. 주관만 뚜렷해서 지 고집만 세고 클클. 3년의 경험도 이쪽에 오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21:30 속닥님 / 님 비밀댓글 오랫만에 받아봐요. ^^ 감사합니다. 직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면 새로운 실험을 하나 더 계획 중입니다. 때가 되면 다시 자수(?)할게요.

21:39 속닥님 / 감사합니다. 이 길을 또박또박 걷겠습니다.

쟈스민님 / 오랫만인데욤. 음, 굳이 비밀일 필요는 없지만, 저도 이참에 신비주의를 한겹 써보려고. -_- 난 너무 많이 알려져있어서요. 사소한 것 까지도. 크크. 저도 뭐 하나 비밀 좀 만들어볼래요.

살청님 / 하일지가 누군가 검색해봤더니, 요렇게 나옵니다. "동덕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인문학부 문예창작전공 부교수" 이 분이 소설가인데다 전직 교사셨군요. 엇!!!!!! <진술> 요고 요고 강신일씨가 모노했던 연극 원작 맞죠?!! 으아 이 연극 진짜 완전 완전 좋았는데, 그 원작이 이 분 책이었군요. 전에 알아놓고서 또 까먹고 이런다... -_-

바람돌이 2008-02-2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신만만한 선택은 당연히 포기가 아니죠. 새로운 출발이죠.
축하드려요. 부디 새로운 곳에서 원하던 바를 이루시기를....

깐따삐야 2008-02-2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지는 몰라도 정말 잘되셨다! 축하드려요. 그런 의미에서 간장게장은 아프님께서 사주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ㅋㅋ

마늘빵 2008-02-21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 네 감사합니다. 새 출발이에요. 근무 환경이나 하는 일이나 만족스럽습니다. :)

깐따삐야님 / 감사합니다. 간장게장은 -_- 메피님꺼, 난 호두과자. ㅋㅋㅋㅋ

다락방 2008-02-21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아프락사스님.
정말 소신있게 사시는 멋진 분이시군요.

저는 전과든 뭐든 뭘 바꾼적도 없고, 뭘 시도해본 적도 없는데요.

계속 그렇게 소신대로 밀고 나가셔요. 물론, 어떤걸로 바꾸셨는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신비주의를 써보기로 하셨다니, 묻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마늘빵 2008-02-21 20:27   좋아요 0 | URL
전 제 주관, 소신 빼면 시쳅니다. :) 그걸로 사는 놈이기 때문에. 할 말은 하고 드러낼 건 드러내는 편입니다. 어떻게 좀 속여볼라고 하는거 잘 못해요. 새 직업 숨겨봐야 신비주의 되는 건 아니지만 - 너무 발가벗어서 - 그래두 신비주의를... :)

비로그인 2008-02-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일.
그동안 마음고생을 하신듯 한데..
축하합니다. 아프락사스님

승승장구를 기원합니다. 하하


마늘빵 2008-02-21 20:28   좋아요 0 | URL
네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정말. 대신 비정규직 체험도 해보고,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충분히 느낄 만큼 느끼고 나왔다는 건 인생살이의 큰 도움입니다. 이런식으로 각종 직업을 전전하며 경험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2008-02-21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1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2-2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길을 택했냐고 물으면 철학함을 원했다고."

헤에- 멋지잖아, 당신.

마늘빵 2008-02-21 20:30   좋아요 0 | URL
-_- 에헤. 그건 머 말을 좀 멋있게 해서 그런거구, 실제로는 고렇게 짧게는 대답 못하고, 대신 그 내용을 담아서 좀 완화시켜서 발언을 했다는. 결국 머 요약하면 그거지만요. :)

2008-02-2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1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1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1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2-2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보면 이래저래 방황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 사람은 한 곳을 보고 쭉 가는 것이고 한번도 방황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아프락사스 님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철학에세이의 첫 번째 명제를 설천하면서 이 위에 다시 한마디를 덧붙이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전과가 아니라, 혹은 네 번째 전과가 아니라 모두 한 가지일 뿐이었다"라고...^^

축하합니다!~!

마늘빵 2008-02-21 20:3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한 방향만 계속 바라봤습니다. 그게 직업이나 특정한 일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었기에 그렇게 여러 옷을 갈아입었을 뿐. 다음에 또 다른 무언갈 시도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문구를 들으니 오랫만에 <철학에세이> 꺼내보고 싶군요.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한참 찾아야 할텐데.

프레이야 2008-02-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출발, 축하드려요.
뭐든 선택한 것에 충실하시리라 믿어요.
무슨일인지는 아마 차츰 들려주실 것 같아요.
신비주의 오래 못하시는 거 다 안다구요^^

마늘빵 2008-02-21 20:35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일에 관해서는 당분간은 그냥 조용히 있고 :) 시간과 기억이 허락한다면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풀어볼까 합니다.

marr 2008-02-2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번 전과를 했어요.
자신이 좋아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또 얼마나 좋습니까?
70년대 학번인 어떤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옛날에 철학과 간다고 그러면 어디서 돗자리 펼려고 그러냐고 묻고, 사회학과 간다고 하면 사회보는 것도 대학에서 가르치냐고 그랬답니다.
사실 지구에서 제일 많은 광물이 철인데 말입니다. ㅎㅎ

마늘빵 2008-02-21 20:37   좋아요 0 | URL
네. 지금은 철학과에서 돗자리 펴지 않는다는건 사람들이 대략 알지만 - 아마도 논술 붐 때문에 그 인식이 달라졌을 듯 - 여전히 "철학과 나오면 뭐해요"라는 질문은 자주 받습니다.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할 거 없습니다, 하고.

antitheme 2008-02-21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의 선택이 뭘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하지만 한눈 팔지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잘 해나가시리라 믿습니다.

미소프로젝트 2008-02-2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전 용기가 없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취업준비를 계속하고 있어요.ㅠ

이매지 2008-02-22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않은 결정하셨을 것 같아요.
음. 국문과 나와서 뭐해요?라는 질문도 꽤 많이 받습니다ㅎ
요새같아서는 경영쪽빼고는 뭐 죄 그런 소리 들을 듯-_-;;
어쨌거나, 아프님의 새로운 시작이 창창하기를! ㅎ

마늘빵 2008-02-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티테마님 / 넵. 근데 얼마나 여기에 또 붙어있을지는 저도 몰라요. :) 워낙 다양한 분야를 건드리길 좋아해서. 일단은 만족스럽습니다.

미소프로젝트님 / 첨 뵙는듯. :) 어떤 준비를 하시는지 모르지만 일단 과감히 몸을 날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너무 '대세'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매지님 / 그래도 국문과는 '사철'보다는 낫더라구요. 학원을 가더라도 흐름을 타는 과목은 아닌지라 언제나 수요가 있고. :) 철학은 논술과 연계해서 학원으로 갈 수 있긴 하지만, 이제 새 정부 교육 정책 '덕분에' 이쪽도 수요가 없어요. 제가 아는 분은 철학과생이지만 처음부터 언어영역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스타강사가 되었다는. 매지님도 올해 취업 꼭 하세요.

군자란 2008-04-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 아프님의 방을 방문하면서 즐거운 글 읽었습니다. 혹시 초면에 실례지만 3번째 전과인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혼은 하셨는지? 아이는?나이는? 등등의 현실적인 조건속에서의 님의 3번째 전과를 이해하고 싶은데요. 너무 무례하지요.죄송합니다. 하지만 궁금한건 어쩔수 없네요........답을 안해주셔도 됩니다.

마늘빵 2008-04-17 13:47   좋아요 0 | URL
처음 뵙습니다. :) 결혼은 안했고, 아이도 없구요, 나이는 올해 계란한판 되었습니다. ^^

군자란 2008-04-17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했는데 ...답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님의 서재에 들어와사 정말 즐거웠습니다. 어쩌면 오늘 처음 보았지만 굉장히 낳익은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마늘빵 2008-04-17 21:14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