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봤다. X-man의 능력을 가진 주인공 장. 모든 냄새의 세세한 분자까지 기억하고, 수십키로 떨어진 곳의 냄새로 사람을 추적하고, 열쇠를 찾고, 냄새만으로 상대방의 심리상태를 안다. X-man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정작, 자신은 냄새가 없다. 텅 비어있다. 그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13명(?)의 여성의 냄새를 혼합하며 마침내 궁극의 향수를 만든다. 이 냄새를 맡은 사람은, 주인공 장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된다.

주인공 장 또한 처음 향기를 보존하려고 했던 것도, 어떤 소녀의 향기에 끌려서이다. 우연히 그녀를 죽이게 되고, 그녀의 향기는 죽음에 따라 사라진다. 이에 장은 향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려 하는 것.

주인공이 탐구하는 인간의 '향기'라는 감각은 신비스롭다.  물론 '잘 씼냐 안 씼냐'를 넘어선 각 개인 본래의 '향기'를 의미한다 ^^; 근대적인 시각을 넘어서, 향기라는 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은 모르지만 남은 '반의식적'으로 아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스어로 '프쉬케'가 영혼과 숨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만큼 '숨'이 드나드는 장소인 코의 신비함과, '향기'의 의미심장함을 암시한다. 또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때 코를 통해 뇌를 끄집어 냈다고 한다. 예전 우리의 시인 소월도, '엄마의 냄새'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적인 것을 넘어선 신비스러운 영적인 느낌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향기는 영혼의 본질로 이야기된다.

마침내 궁극의 향기를 만들어서, 그 궁극의 '영혼'을 통해서 타인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자기가 지금껏 했던 '소유'의 방식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고, '관계'내지는 소통이 자신이 바라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니면 그는 '소통'을 맺을 수 없다. 그는 주체의 자리, 텅빈 자리, 냄새가 없는 자리에 서 있다. 그러기에 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의 의지에 따르게, 그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는 정작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하고, 상대방과의 상호적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계몽의 주체는, 상대방을 폭력적으로 동일화할 뿐, 그들과 소통하거나 연대할 수 없는 것. '주체'의 자리는 텅비어 있다. 그러면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타자를 자신에게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할 것인가?

이의 해결로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궁극의 향수를 듬뿍 뿌리고, 그 곳 빈민들에게 '먹힌다'. 먹힘으로서의 소통.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타자에게 내주는 것. 지금까지 그가 타자를 전적으로 소유했다면, 이제 전적으로 자신이 타자에게 소유가 되는 것. 소통이나 연대를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것은 거꾸로선 계몽일 뿐. 그러나 소통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너와 나 사이의 변증법적 계몽이고, 그것이 또 나라는 '주체' 공간에서 시간에 따른 변증법적 계몽이 아니겠는가? 그럴때, 우리는 '계몽'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것을 '연대'나 '소통'이라고 이름붙인다.

* 냄새라는 것을 향기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냄새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구성물이, 나의 분자들이, 날아서 상대방의 코의 후각세포를 자극하는 것. 결국 나의 일부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광자의 반사로서의 시각과는 다르다. 근대적 시각은 서로 단절되어 서로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광자의 튕겨남을 서로 저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의 '내어줌'에 후각이 있고, 서로 냄새맡음에 서로를 '내어줌'이 바로 후각이다. 소통의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서로를 '내어줌' 서로 냄새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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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3-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평론 쓰셔야겠네요
 
 전출처 : 나비80 > 혁명. 토착주의. 초지역적 연합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 -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
아리프 딜릭 지음, 황동연 옮김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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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 간에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때 ‘과거’는 매우 중요한 기제임이 분명하다. 한 인간의 존재 조건이나 거대한 사회 변화의 모습을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추동된 총체적인 운동 양상을 통해서만 적확하게 파헤칠 수 있다. 개인의 삶과 동떨어진 거대한 사회 구조만을 말하는 데 목청을 돋우는 것은 치명적인 폭력일 수 있으며 사회의 변혁과 유리된 개인의 삶을 읊조리는 것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지엽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대문자 역사적(History)일 수 있으며 ‘사회’ 역시 소문자 역사(history)와 끊임없이 교접하며 연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각종 ‘포스트’ 주의자들은 ‘역사(History)’의 결정론 ․ 목적론적 시각을 배척하며 사회적 ․ 정치적 조건들을 소홀하게 대접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거대한 역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얼마나 위험하며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러한 논의를 진행하며 자신들이 가장 급진적인 것처럼 가장(假裝)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지우는 방식으로 귀결될 뿐이다. ‘혁명’을 이야기하던 과거의 온갖 거대한 시각들을 비판하며 혁명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오히려 현재에 순응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혁명은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며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들 주장의 전제 자체가 잘못된 지점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포스트’주의자들이야 말로 과거의 잘못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올바른 비판을 통해 새로움을 창출하지 못했고 반대로 과거의 낡은 것에 얽매였다. 또한 그들은 현재의 다양한 존재 가치들을 스스로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서구중심주의)에 스스로 투항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현재의 역사를 탈역사화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그 구조 자체를 논의 선상에서 빼 버리는 것은 오히려 순응과 퇴보를 의미할 뿐이다.

  아리프 딜릭은 이 책에서 중국사학자 답게 문화대혁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혁명의 역사성을 논하고 20세기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아리프 딜릭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른 근대’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한 까닭으로 보인다. 물론 중국 문화혁명의 오류와 패착에 대한 비판도 수용하면서 어떤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쟁점은 역시 역사의 쇠퇴가 아니다. 진정한 쟁점은 구미 근대성의 논리에 따라 과거를 배치했던 역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적으로 구미 근대성을 역사의 끝으로 간주하고 공간적으로는 민족을 역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매개체로 삼아온 그런 역사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이 이제 복수의 역사들(histories)을 인식해야 한다. 복수의 역사들은 민족의 목적론이나 하나의 근대성이란 목적론에 의해 정의되고 강제되는 하나의 역사(History)에 대항하며, 계급 ․ 인종 ․ 성에 관한 뿌리 깊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목적론이나 그 목적론을 형성하는 전제들이 이데올로기적 성질을 폭로하는데 역사의 실천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화 작업은 급진적 전망을 통해 비판적 학문들(각종 ‘포스트’ 주의)을 고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비판적 학문들이 교묘한 지적 사기나 허무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최악의 경우 비판적 학문들이 보수적 행보를 위해 전유되는 것을 막으려면 제대로 된 역사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리프 딜릭은 여전히 변함없이 혁명과 토착주의, 초지역적 연합이 서구중심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혁명은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이는 기존의 질서를 긍정하거나 심지어는 과거의 불평등과 부정으로의 후퇴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지금까지 혁명을 정당화 하고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적 서사는 유럽중심주의와 기막히게 결부되어 있었다. 아리프 딜릭은 그 연결고리를 파헤치고 올바른 역사의 전진을 담보하는 새로운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또 역사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무시하면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유럽중심주의를 뒷문으로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구미적 근대성과 자본주의 간의 모든 구별을 뒤섞음으로써 구미가 남긴 역사적 유산들을 탈역사화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토착주의 역시 급진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이는데 겉보기에 전근대주의로 보이는 이것이야 말로 근대적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식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초지역적 연합과 연결되는 구상인데 지역에 새겨진 불평등을 들춰내려면 외적 동인이 필요하다는 사시, 전지구적 자본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일종의 공동 방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일본의 오키나와 점령, 제주 4.3 사건 간의 긴밀한 공통점을 찾아보는 방식이다. 각각의 토착 역사가 전세계적인 거대 질서의 맥락으로 보자면 근대 국가의 폭력성의 측면에서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그 해결로는 어떤 연대의 전략이 필요한지에 대한 해명이다.

  분명히 아리프 딜릭은 허위와 가상의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그 가능성을 통해 근대의 문제들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혁명(문화혁명)과 토착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낡아 보이긴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오히려 새로운 것들이 더 순응적이고 보수 반동적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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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비80 > 문학의 과거와 문학 연구의 미래

 

 

 

 

위 책에 대해 짤막한 서평 하나를 올렸는데 의외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이 많아 내용을 좀 더 갈무리 해둔다. 서평도 좀 더 내용을 보강해 두었다.

또 마침 권보드래 선생이 이 책에 대한 비평문을 써둔 것이 있어(서평 격인데 스무페이지가 넘는다!?)

요약 정리한다. 현재까지 나온 평문중 가장 강위력한 것이긴 하지만 그 일목요연을 살펴보면 황호덕의 책에 대한 경탄이 밑바탕이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목은   <문학의 과거와 문학 연구의 미래>다.

-권보드래, 「문학의 과거와 문학 연구의 미래」, 『사이/間/SAI』창간호,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06. 11.

Ⅰ. 2006년, 근대문학 연구의 현재

 ① 황호덕의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소명출판, 2005)은 ‘문학’은 물론이고 ‘문학’의 전사(前史)를 논하는 데 포함되지 않을 다양한 텍스트와 이국종(異國種)인 시각자료,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무수하게 산포되어 있는 박사학위 논문이다.

 ② ‘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죽음’ 속에서 한국 문학 연구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성찰’에 집중하며 다양한 주제와 방법론이 도출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문학 텍스트의 관습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있지만 그 경계 너머를 탐사하는 방법이 소극적 실증주의로 수렴되고 있는 것은 문학-인문학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Ⅱ. 1876~95년과 ‘문학’의 가능성

 ①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개항기에서 갑오경장 직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독특하다. 1876~95년이라는 시기가 1894년부터의 시기를 낳은 선조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에서 소외되어 온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 이전, 조선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가 명백히 천명되기 이전이며 또한 민간단체나 신문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다. 오직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은 갑신정변 주도 세력이었던 소수의 개화파들과 관 주도의 몇 가지 근대적 조치뿐이었다. 과연 제도적 틀이 구비되지 않은 이 시기를 한국 근대 형성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② 1894년 이후 한반도에서 근대적 국민국가는 점차 현실화되어 가지만 1876~95년에 그 현실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황호덕은 이 시기를 1894년 이후 전개된 국어 - 국민국가 -민족문학의 현실을 매개하는 ‘지반’이요 ‘가능성’의 형성으로 보고 있다. 이 판단은 김옥균 - 박영효 - 유길준 등의 특정 인물군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김기수와 김홍집의 일본 체험 기록을 제외하면 이 책은 전적으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의 사상과 텍스트를 문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갑신정변 주도 세력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1894년 이후와 직선적 연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1876~95년 시기의 내부의 모순과 균열을 보기보다 1894년 이후와 연결될 수 있는 선진적 요소들만을 선택해 보려는 의도적 집중이 눈에 띈다. 갑신정변에 대한 적극적 의미부여가 없다면 이 책의 논리 자체가 구성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동일한 요소라도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 마련인데 1876~94년의 문명 - 독립 구상과 1894년 이후의 구상이 동일시 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시간이 개입해 있고 또한 사회 . 정치 . 문화 및 담론 지형의 차이가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③ 1894년을 1876~95년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신문 독자층의 성장이며 만민공동회 같은 대중 운동의 경험이다. 사대와 독립을 상호배제적 범주로 인식하는 논리는 고립된 개인의 인식으로 머무르는 한 결코 독립 - 문명의 대중적 운동과 동일시될 수 없다. 책 2장의 『일동기유』, 『대청흠사필담』, 『사화기략』은 분열과 갈등 자체를 조명하기보다 직선적 전진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다. 2․3년의 시차로 글쓰기의 ‘진화’를 도식화한 서술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근대 문학의 담론 지형을 20년쯤 소급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현재를 낳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다른 과거, 분열 .산포하는 이질적인 목소리를 복원하지 않고 ‘다른 역사’에 대한 관심을 소홀한 것이 아쉽다.


Ⅲ. 화폐 . 문학 . 에크리튀르

 ①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문학’과 ‘화폐’가 가상의 체계이며 국가의 존재를 각인 시키면서 국가 수준에서 유통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질서를 매개한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야 말로 국가-사회라는 주체를 형성하고 그 서사를 만들어낸 동력이라는 것이다. ‘문학’과 ‘화폐’가 하나의 분석 단위가 될 수 있다면 국가와 세계체제 간의 연결되어 있는 악의 연쇄를 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② 제 3장에서도 문학-화폐라는 개념은 시안(試案)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도로 . 우편 . 신문 등과 함께 ‘교통’이라는 개념으로 묶여 있다. 1876~94년 이 시기에 개화론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문명’이 아니라 ‘교통’이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교환체계와 부르주아 공공영역을 동일시하는 발상은 도로 . 우편 . 신문 . 화폐 = 교환의 체계 = 담론의 공공영역 = 평등론의 세계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 매커니즘은 밝히지 않은 채, 유추와 비약의 상상력에만 지탱하고 있다.

 ③ 화폐-문학을 제창하면서 황호덕은 근대초기에 ‘계몽’이라는 코드 외에 ‘시장’이라는 코드를 추가하고 있다. 에크리튀르에 대한 관심도 이처럼 물질적 근거를 확인하려는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 화폐-문학의 동일성에 대한 강조는 곧 문학의 물질성에 대한 강조였던 셈이다. 문학과 글쓰기라는 추상적 활동에서 시장과 경제의 구체적 현실을 읽어내는 작업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자칫 속류 사회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경제-제도, 국민국가 역시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Ⅳ. 에크리튀르와 표기의 체계

 ①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에서 ‘네이션’에 대한 개념은 정확하게 소개되지 않았다. 민족 . 국민 . 국가 같은 번역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션’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까닭은 이 책의 문제의식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용어를 입장 표명 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또 ‘민족국가’와 ‘국민국가’ 사이의 선택이 곤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선택이 자신의 관점을 좀 더 명료하게 해줄 수 있다.

 ② 제 4.5장에서는 근대 한국어의 에크리튀르 일반이 아니라 표기체계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 국어의 표기체계 형성 과정과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경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대 초기 표기 체계의 성립 과정 연구는 이미 상당량 축적되어 있고 황호덕의 책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876~95년에 주목하겠다는 애초의 의도가 4.5장에 와서 무색해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논의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진폭이 심한 것도 문제다. 일본의 국어 성립 과정을 중요하게 참조하고 국한문체의 성립 과정에 있어 강위라는 개인의 역할을 길게 논의하고 『독립신문』에서는 국문 논의를 살피는 쪽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논의 전개는 결국 국한문체의 혼종적 특징을 강조하는 데로 귀결되고 있을 뿐이다. 외부와 상부로부터 받아 쓰인 국한문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도 순국문체로 점차적 이행을 불가피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국한문체가 국가의 문자로 공식화될 수 있었던 까닭은 국문의 내 . 외부에 대한 구분이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 상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며 조선의 인문과 글자, 음성을 강조하면서 한자는 떨쳐야 할 불순물로 인식하며 국문체로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국한문체를 정치 담론’, ‘국문체를 서사 담론’으로 양분하는 시각은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국한문체는 1920년대까지도 서사를 자기 영역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보여 왔지만 국문체의 압도를 뒤집지 못했을 뿐이다. 서사 양식의 문자가 신성한 문자, 지식의 문자를 대치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두 영역이 각기 순수한 실체로 존재하진 않았다. 순국문체의 모아쓰기 방식이 한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민국가 외부의 배제란 언어의 층위에서도 언제나 상상적인 것이며 국한문체에서 순국문체로의 이행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질성과 혼종성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표기체계 자체를 실체화 . 고정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③1876~95년의 각종 구상을 과연 이후의 현실과 일직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 시기에 각종 ‘교통’ 제도=공공영역의 확장은 실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구상’되었을 뿐이다. 우편제도도 현실화되기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도로 정비나 화폐의 통일 ․ 보급 역시 난항을 겪었다. 관(館)의 도움을 받았던『한성순보』를 그 시기 이후의 신문으로 전진되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역사주의적 판단이다. 사후적으로 보장되고 지지된 역사 없이 1876~95년을 탐색하기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혼종성을 강조하고 전대의 질서가 균열 . 해체되어 간 지점을 역설하고 미래를 점치기보다 당대의 산포하는 가능성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갑신정변 역시 근대의 여러 갈래와 노선 중의 하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근대 사회가 전지구적 보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한국에 있어 오늘날과 같은 근대 제도의 형성은 당연한 결론이 아니었으며 국민국가의 형성과정 자체에도 우연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Ⅴ. 분열의 생산적 효과

 ①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역사주의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국민국가의 의식이 형성되고 언어의 변모 과정을 살필 때 진화-발전의 구도에 의지하고 도로 . 신문 . 화폐 등을 논할 때는 1894년 이후를 전제한 후 그 의의를 소급하며, 표기체계의 형성을 다룰 때도 순한글 모아쓰기라는 결론을 염두에 두는 식이다. 결국 이 책이 1876~95년을 지지하는 것은 이후 1백여 년의 역사이자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불가변의 실체가 아니다. 앞선 이행기를 살피면서 오늘날의 현실을 결론으로 전제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외부화되어 버렸던 다양한 가능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근대 초기 연대 . 합방론의 존재라거나 그 모순을 기억해야 한다.

 ②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화석화된 과거를 상대하는 훌륭한 응답으로 본보기가 된다. 문학을 국민국가와 국어로 환원하는 독특한 개방성은 주목할 만하다. 문학의 실제를 ‘경제’와 ‘에크리튀르’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다른 모든 요소들을 잉여에 불과하게 만든다. 또 문학은 오직 출발점일 뿐 귀환점일 까닭도 없다. 이 책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강렬한데 반해 모색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문학 이전과 문학 이후의 속하는 문학 연구가 어떻게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개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은 기억해 두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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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때부터 그리스-로마나 동아시아 고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그들의 정치체제의 발생적 과정이나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나를 매료시켰다. 특히, 대의정치의 허위성이나 폭력성에 신물이 난 입장에서, 페리클레스 즈음의 그리스나 카이사르 이전 로마는 매력적이었다. 노예라는 집단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겠지만... 근미래에 기계가 노동을 대체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소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정치집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해보곤 한다. 이러한 정치적 관심이 ‘아테네’와 ‘로마’에만 집중되었다면, ‘스파르타’에 대해서는 이종격투기에 대한 관심과 비슷하게 인간의 원초적인 육체적 강함의 극한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빼어나게 아름답고 매끈한 육체들. 태어날 때부터, 전사로서 길러지고 훈련된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





300. 이 영화는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100만 페르시아와 싸운 전쟁을 매력적인 화면으로 구성해낸다. 자유-이성-아름다운 육체-스파르타-서구 라는 계열과 노예-복종-기괴한 육체-페르시아-아시아라는 계열이 충돌한다.(반지의 제왕에서 백인-유색인종의 대립과 같다.) 자신의 조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스파르타와 이들에게 ‘단지’ 복종의 표시만을 바라는 페르시아. 스파르타 왕이 무릎을 꿇기만 하면, 자칭 신인 페르시아의 왕은 만족할 테지만, ‘자유’를 위해 스파르타 300전사들은 몰살당하는 것을 선택한다.

페르시아는 아랍인들의 인종적 특성을 지녔고, 스파르타인 들은 유창한 영어를 하는 백인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이를 이라크 vs 미국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후세를 위해, 머나먼 세계인들에게, 스파르타의 왕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하고, '이성'을 위해 싸웠다고 잊지 말라고 전한다. 이는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를 계승한 것은 정작 누구인가? 최근 다시금 불거진 미군의 인권유린 사태! 텍스트의 의도는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침략’해온 아랍인(9.11/이라크 생화학무기에 대한 루머)과 이에 대한 ‘적극적’ 방어로서의 미군의 개입으로 생각해보면.

권위와 존경으로 뭉친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왕, 그리고 의회가 있는 스파르타. ‘신’은 섬기지만, 이성을 신뢰하는 스파르타. 아름다운 육체를 드러내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라는 집단적 주체.

왕이 복종을 강요하고 군림하며, 할렘에 사지가 잘린 창녀가 웃음짓고 있는 페르시아. 왕이 신인 페르시아. 추하고 기괴하게 변형된 육체로, 왕의 명령과 채찍에 꿈뜰대는 페르시아. 페르시아는 왕만이 주체로 홀로 서고, 나머지는 왕의 수족이다.

민주주의라는 집단 주체 vs 독재라는 하나의 주체. 영화는 이렇게 둘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면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민주주의가 마침내 독재에 승리하는 것으로서. 영화의 영상은 매력적이고, 스파르타인들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와 폭력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스파르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은 ‘노예’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유를 위해 싸우지만, 그들의 물적 토대 자체가 노예제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 스파르타 사회에서 ‘자유인’인 전사의 수보다 이들을 위해 일하는 노예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 스파르타 육체파들은 ‘자유’를 부르짖으며, 노예를 부린다. 마치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경제적 이득을 채우고 인권유린을 행하듯...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지점에서, 텍스트는 많은 것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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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28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영화자체만으로 보고 싶은데...이게 요즘시국과 맞물려보면....
유쾌하거나 즐겁기만하진 않는게 사실이에요..^^
사실 현재 서구를 대표한다는 미국,영국과는 그리스는 근본적으로
많이 틀린데 말이죠..^^

기인 2007-03-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ㅎ 저는 전공이 문학이라서 그런지, 문학이나 영화나 그것을 '자체로' 보는 학파랑 안 친해서 그런지, '그 자체'만 보는 것은 별로 재미없는 것 같아용 ㅎ

기인 2007-03-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 영화 재미있던 데요! :)

2007-03-28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3-29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ㅎ님/ ㅋ 감사합니당. 주위에서 모두들 그 책 강추라고 해서요 ^^;

2007-03-2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3-2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ㅎ님/ 옷; 가지고 계신 것 아니었어요? 오옷; 안 그래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ㅎ 님 생일때 기대하세요 :)

2007-03-2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트소녀 2013-06-07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까지 안 봤는데 꼭 보고싶어졌어요.
 

맑스주의 문예이론 세미나에서, 워밍업이자, 결국 (서구) 맑스주의 문예이론가들의 '작업대상'이었던 서구 문예사를 개괄한다는 의미에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고 있다. 역시 재미가 없다. 하우저의 '역사'에 대한 감각이랄까, 이론에 입각해서 정리되고 명쾌하게 서술되었다기 보다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당연히 조동일 선생이 떠오르게 한다.

조동일 선생의 한국문학통사도 선생이 서문에서 밝히듯, 일단은 '전체'로서의 문학사를 지향한다고 했고, 이는 '한국'(?)이라는 공간적, 민족적(?) 범위와 '문학'이라는 장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또 하우저, 헤겔, 루카치 이후에, 김현-김윤식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방법론적 의식과 긴장이 뚜렷이 보여서 읽는재미가 있다.

사실 하우저보다는 조동일 선생에게 더 관심이 많고, 조동일 선생의 역사에 대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나 이론과 대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연구해보고 싶은 문학사가는 조동일과 김윤식인데, 내가 학부 다닐때 이 두분 모두 강의를 하셨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가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연구년이네 뭐네 해서 한번도 직접 수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물론 특강 형식은 꽤나 좇아다니기는 했지만. 한 학기 동안 꾸준히 선생님을 뵙고 수업을 들은 적은 없어서, 더욱 나에게는 '신화'같이 남아있는 분들이다. (특강 형식과 수업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특강은 신경림, 고은 등도 하는 것이고, 수업은 뭔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

수업을 들었으면 어떨까 아쉽기도 하지만, 수업을 안 들었기에 더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라고 자위해 본다.

조동일 선생은 주지하듯,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동아시아 문학에서 세계문학사로 나아갔고, 철학사라는 장도 건드리며, 계속 '헤겔'과의 투쟁을 하고 있다. 정확히 조동일 선생의 입장이나 관점을 명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대상'으로서의 조동일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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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하우저도 산업혁명 쯔음해서는 재미있어 진다 ^^;

나비80 2007-03-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우저는 1960년대 출신 비평가들에게는 어떤 룰 모델로 기능했던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66년 <창작과 비평>이 창간할 당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줄곧 하우저의 평문을 번역 소개했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창비>초반에 백낙청의 글보다 하우저의 글이 더 많이 실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도 '창비'에서 나왔네요. ^^ 그들은 한국 사회와 한국 문학이 지향해야 할 근대적 이론의 구상을 하면서 하우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조동일 선생도 그 당시 비슷한 인물군에 속했던 것을 감안하면 하우저의 충분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김윤식 선생은 누가 뭐래도 루카치 아닌가요.ㅋㅋㅋ

릴케 현상 2007-03-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군대 가기 전쯤에 우리학문의 길을 읽었는데^^ 그때는 꽤 고무되었던 것 같아요. 그걸로 끝이었지만-_- 기억나는 것 중에...조동일교수가 '서양근대철학의 정점인 헤겔을 조선의 근대철학의 정점인 최한기를 통해 마주 보기를 하는 식으로 헤겔을 봐야 한다'는 맥락의 글이 있어요.(94년도 일이라^^정확하지 않을지도) 얼마전에 철학 공부하는 학생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라고 웃더군요. 제가 전혀 엉뚱하게 기억한 건지 아니면 어떤 건지 문득 궁금하네요

기인 2007-03-2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 넵. 루카치를 표나게 많이 말씀하시고, 골드만을 내세우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 같은 역작도 있지요. 선생이 '말하는 것'과 선생이 '말한 것' 사이를 구분해서 김윤식을 연구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ㅎㅎ
자명한 산책님/ 네 ㅎ; 조동일 선생님의 연구들이 비판의 대상으로서 많은 연구자들을 밥먹고 살게 해주고 있습니다. 너무 큰 이야기를, 너무 큰 그물로 하니, 잡히는 것은 고래 밖에 없지요 ^^; 저는 오히려 조동일 선생님을 연구대상으로, 연구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릴케 현상 2007-03-28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동일교수님 주장을 제가 잘못 기억하거나 이해한 건 아니라는 건가요? 젊은 학자들이 원로비판을 통해 좀 더 세련된 이론을 제기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죠^^

기인 2007-03-29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ㅋ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철학 공부하는 학생'님 께서 그렇게 쉽게 웃어넘길 수는 없는 지적 배경이 물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적=주체적이라는 등식을 넘어서, '주체적'을 사유할 수 있고, 이 '주체적'을 조동일 선생님의 사유를 바탕으로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인 2007-03-3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맑스주의 문예이론 세미나의 '워밍업'으로 하는 거라서, 아무래도 세미나 구성원들이 근대와 근대이후에 관심 많아서, 안타깝께도 3, 4권만 하게 되었어요. 사실 1, 2권이 재미있는데 말이죠 ㅎ

기인 2007-03-3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저도 결국에는 문화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이게 업인데요 ㅎ
요즘은 문학=국가라는 유비로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재현체계로서의 문학과 국가 ㅎ

기인 2007-04-0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