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비80 > 혁명. 토착주의. 초지역적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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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 -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
아리프 딜릭 지음, 황동연 옮김 / 창비 / 2005년 10월
평점 :
무엇이든 간에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때 ‘과거’는 매우 중요한 기제임이 분명하다. 한 인간의 존재 조건이나 거대한 사회 변화의 모습을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추동된 총체적인 운동 양상을 통해서만 적확하게 파헤칠 수 있다. 개인의 삶과 동떨어진 거대한 사회 구조만을 말하는 데 목청을 돋우는 것은 치명적인 폭력일 수 있으며 사회의 변혁과 유리된 개인의 삶을 읊조리는 것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지엽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대문자 역사적(History)일 수 있으며 ‘사회’ 역시 소문자 역사(history)와 끊임없이 교접하며 연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각종 ‘포스트’ 주의자들은 ‘역사(History)’의 결정론 ․ 목적론적 시각을 배척하며 사회적 ․ 정치적 조건들을 소홀하게 대접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거대한 역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얼마나 위험하며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러한 논의를 진행하며 자신들이 가장 급진적인 것처럼 가장(假裝)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지우는 방식으로 귀결될 뿐이다. ‘혁명’을 이야기하던 과거의 온갖 거대한 시각들을 비판하며 혁명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오히려 현재에 순응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혁명은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며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들 주장의 전제 자체가 잘못된 지점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포스트’주의자들이야 말로 과거의 잘못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올바른 비판을 통해 새로움을 창출하지 못했고 반대로 과거의 낡은 것에 얽매였다. 또한 그들은 현재의 다양한 존재 가치들을 스스로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서구중심주의)에 스스로 투항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현재의 역사를 탈역사화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그 구조 자체를 논의 선상에서 빼 버리는 것은 오히려 순응과 퇴보를 의미할 뿐이다.
아리프 딜릭은 이 책에서 중국사학자 답게 문화대혁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혁명의 역사성을 논하고 20세기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아리프 딜릭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른 근대’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한 까닭으로 보인다. 물론 중국 문화혁명의 오류와 패착에 대한 비판도 수용하면서 어떤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쟁점은 역시 역사의 쇠퇴가 아니다. 진정한 쟁점은 구미 근대성의 논리에 따라 과거를 배치했던 역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적으로 구미 근대성을 역사의 끝으로 간주하고 공간적으로는 민족을 역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매개체로 삼아온 그런 역사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이 이제 복수의 역사들(histories)을 인식해야 한다. 복수의 역사들은 민족의 목적론이나 하나의 근대성이란 목적론에 의해 정의되고 강제되는 하나의 역사(History)에 대항하며, 계급 ․ 인종 ․ 성에 관한 뿌리 깊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목적론이나 그 목적론을 형성하는 전제들이 이데올로기적 성질을 폭로하는데 역사의 실천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화 작업은 급진적 전망을 통해 비판적 학문들(각종 ‘포스트’ 주의)을 고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비판적 학문들이 교묘한 지적 사기나 허무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최악의 경우 비판적 학문들이 보수적 행보를 위해 전유되는 것을 막으려면 제대로 된 역사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리프 딜릭은 여전히 변함없이 혁명과 토착주의, 초지역적 연합이 서구중심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혁명은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이는 기존의 질서를 긍정하거나 심지어는 과거의 불평등과 부정으로의 후퇴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지금까지 혁명을 정당화 하고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적 서사는 유럽중심주의와 기막히게 결부되어 있었다. 아리프 딜릭은 그 연결고리를 파헤치고 올바른 역사의 전진을 담보하는 새로운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또 역사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무시하면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유럽중심주의를 뒷문으로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구미적 근대성과 자본주의 간의 모든 구별을 뒤섞음으로써 구미가 남긴 역사적 유산들을 탈역사화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토착주의 역시 급진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이는데 겉보기에 전근대주의로 보이는 이것이야 말로 근대적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식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초지역적 연합과 연결되는 구상인데 지역에 새겨진 불평등을 들춰내려면 외적 동인이 필요하다는 사시, 전지구적 자본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일종의 공동 방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일본의 오키나와 점령, 제주 4.3 사건 간의 긴밀한 공통점을 찾아보는 방식이다. 각각의 토착 역사가 전세계적인 거대 질서의 맥락으로 보자면 근대 국가의 폭력성의 측면에서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그 해결로는 어떤 연대의 전략이 필요한지에 대한 해명이다.
분명히 아리프 딜릭은 허위와 가상의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그 가능성을 통해 근대의 문제들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혁명(문화혁명)과 토착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낡아 보이긴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오히려 새로운 것들이 더 순응적이고 보수 반동적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