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말라르메는 첫 단어, 첫 줄이 어디로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정확하게 모른 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거의 자동적으로 얽혀드는 단어와 시행들의 결정화로서, 서로 꼬리를 물고 나오면서 상호 변용시키는 환상과 연상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순수시'의 시학은 이러한 창작방법의 원리를 또 수용방법의 이론으로 바꾸어놓고, 시작품 전체를(...) 반드시 알지 못하더라도 시적 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 한 편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시의 합리적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없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며, 나아가서 시작품 자체가 민요의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명백한 '의미'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그것은 심미주의의 가장 순수한 비타협적 형태를 대변하며 일상적 실천적 합리적 현실에서 완전히 독립된 시적 세계가, 자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자율적 자족적인 심미적 소우주가 온전히 가능하다는 기본적인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237-239쪽

시에 접근하는 특징적인 정신적 태도가 합리적 오성이 아니라는 발견으로부터 말라르메는 모든 위대한 시의 근본적인 특징이란 파악될 수도 측정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생략적 표현방식의 예술적인 이득은 명백하다. 연상의 연쇄에서 어떤 고리를 생략하는 것은 효과가 느리게 진행될 때 잃어버리기 쉬운 속도와 긴장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 그의 시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관념의 압축과 이미지의 비약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결코 언제나 예술적 관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유희적인 언어의 취급방식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오직 난해성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이러한 야심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려는, 그리고 가능한 한 작은 동호인의 집단에 자기를 제한하려는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 대한 외관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며, (...) 문학에서의 극우파였다. 물론 개개 시인들의 정치적 신념이 다르고 시의 난해성이란 현대문화가 피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발저느이 결과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가 어렵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 말라르메의 시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역시 비교(秘敎)적이고 비민주적인 느낌을 주며 광범한 대중으로부터 고의적으로 자기를 은폐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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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4-0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기인 님 덕분에 하우저를 같이 있게 되는 느낌입니다.
자꾸 '프리 라이더'가 되는 것 같아 매일 돈벌어 가는 기분인걸요. ^^

기인 2007-04-0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표현수단으로서의 상징이 말라르메의 세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징적 예술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그들은 다만 상징과 알레고리의 차이를 발견했으며, 시적 스타일로서의 상징주의를 의식적인 노력의 목표로 삼았다. 비록 반드시 그렇게 내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알레고리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이미지의 형태로 옮겨놓은 데 불과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알레고리의 경우 관념은 여전히 비유적 표현에서 어느정도 독립되어 있으며, 다른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반면에 상징은 관념과 이미지에 불가분의 통일성을 가져오며 따라서 이미지의 변화는 동시에 관념의 변형을 뜻하게 된다. 요컨대 상징의 내용은 다른 형태로 번여고될 수 없으나 상징 그것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해석의 이러한 다양성, 사잊ㅇ의 이러한 얼핏 무수한 듯한 의미는 바로 그것의 본질적 특징이다.-234-235쪽

상징과 비교하면 알레고리는 항상 관념의 단순명백하고 어느정도는 쓸데없는 전사(轉寫)로서, 이 경우 관념이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다 해서 그 관념에 무엇이 보태지는 것은 아니다. 알레고리는 누구나 뻔히 풀 수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인 데 반하여, 상징은 해석할 수 있을 따름이지 풀 수는 엉ㅄ는 것이다. 알레고리가 사고의 정적 과정의 표현이라면 상징은 그 동적 과정의 표현이며, 전자는 연상의 목표와 한계를 설정하지만 후자는 연상작용을 발동시키고 발동상태로 지속시킨다. (...) 거의 모든 시대에서 알레고리적 예술과 상징적 예술은 서로 공존하며 때로는 동일한 예술가의 작품에서 그것들이 뒤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상징과 알레고리에 대해서 쉽고 명확하게 비교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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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창녀에 대한 동정은 데까당과 낭만파에 공통된 것으로서 이 경우에도 보들레르가 매개역을 맡는데, 억압되고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동일한 애정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 동정은 물론 무엇보다도 부르주와 사회 및 부르주와적 가정에 기초를 둔 도덕에의 저항의 표현이다. 창녀는 뿌리뽑힌 자요 사회에서 쫓겨난 자이며, 살ㅇ의 제도적 부르주와적 형태에 반항할 뿐 아니라 사랑의 '자연적'인 정신적 형태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반역아들이다. 이들은 감정의 도덕적 조직을 파괴할뿐더러 감정의 근거 자체를 파괴한다. 창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창녀에 대하여 보이는 데카당스 예술가들의 이해심은 감정과 운명의 이러한 공통성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몸을 팔고 어떻게 자기들의 가장 신성한 감정을 희생하며 또 얼마나 값싸게 자기들의 비밀을 팔아넘기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226-227쪽

박태원, 이성복이 떠오른다. '창녀'가 아니라 '성매매 여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관계를 폭로한다는 점에서 옳다. 성은 단지 파는 것이나 '노는 계집'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파는 것.
예술가는 성매매라는 것. 연애인도 성매매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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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은 상류계층을 다루면서도, 상류계층스럽지 않게 다룬다. 코미디가 특별히 여기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즉, 상류층의 풍자가 아니라는 것. 주지하듯, 코미디는 '우리'보다 '낮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상류층을(또는 특권계급)을 상류층으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그들을 다른 계층과, 다른 계급과 함께 재현하지 않고, 그들만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류'라는 상대적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재현된 텍스트 자체에서는, 그들의 '특권'은 가려진다. 시청자가 텍스트 외부와 관계맺으면서 해석할 때만이 이들이 '상류층'임이 드러난다.

이순재&박해미는 한의사인데, 그것도 엄청 잘 나가는 한방병원을 운영한다. 대통령을 만나고, ivy가 진료를 오고, (박해미의) 대기환자로 항상 만원이다. 그래 좋다.

이들은 외식때 115만원어치의 소고기를 4명이서 먹고, 항상 이준하(이순재의 아들이자 박해미의 남편)는 증권으로 몇천만원을 잃고, 또 얻기도 한다. 그래 좋다.

이 집의 막내아들인 이윤호는 반나절 라면을 먹고 cf를 찍어서 80만원을 받는다. 특별히 연애기획사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에서 '잘 나가는' 학생일 뿐인데... 그래 좋다.

이러한 특권층 주위에 있는 사람들 또한 돈에 별로 거침없다. 갖 부임한 (81년생으로 나오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인 서민정은 학생과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일인당 20만원짜리 코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한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말이다. (집이 부자인가? 알 수 없다)

이러한 군상들 틈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초반에는 고민했던 인물은 신지(이순재의 ex-며느리)인데, 그녀 또한 대책없이 살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경제적으로 아무런 고민도 없게 된다. 뮤지컬 배우이고, cm송도 불러서 이제 배부른가 보다.

신지가 유일하게 이순재 집단을 외부에서 '병원장'집안이라고, 특권층이라고 발화하던(언표가 되던, 아니면 신지라는 존재자체로서 그렇게 기능을 하던) 인물이었는데, 이 또한 점차 눈 녹듯 사라진다. 병원장 가족 내부에서는 이준하가 실업자이고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물이다. 물론 비생산적 노동이자,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증권회사'에 근무했었고, '경제학과'를 나왔고, 집에서 (추정키로) 몇억의 재산을 굴리고 있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이준하에게 밥벌이는 '밥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다. 항상 그의 지갑 속에는 돈이 많다. 따라서 이 시트콤은, 이순재 병원장 집단이라는 계층만이 현실의 전부로 재현된다.

이게 불만이라는 것인가? 어떠한 현실 재현도, 일정한 은폐 또는 억압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시트콤의 목적 자체 또한 현실 '재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현실 '재현'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닌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펴보자. (아래는 자명한 산책님 페이퍼에서 인용)

2007년 법정최저임금

시급 3,480원으로 결정됐다. 이 금액은 일급으로 환산할 경우 2만7,840원이고 월액으로 환산하면 주44시간 기준으로 78만6,480원이고 주40시간 기준으로 72만7,320원이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 소득을 올리는 차상위계층이 716만명 빈곤층 규모는 전체 인구의 15%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가 40만1천원, 2인가구 66만9천원, 3인가구 90만8천원, 

 4인가구 기준으로 월 113만6천원

 

남한 전체의 가구 평균소득

 3134만원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총인구(4882만명)를 총가구수(1553만가구)로 나누면 평균 가구원수는 3.1명이고, 1인당 개인소득은 1011만원


하지만 이는 세수통계의 근로자가구 평균소득보다 1100만원 정도 많다. (그렇다면

근로자 가구 평균소득은

 2000만원 가량, 대충 3으로 나누면 700만원이 안 된다.)

 

 

왜 드라마는, 특정한 계층의 현실만을 재현하는가? 삶이 안 그래도 꿀꿀한데, 꿀꿀한 삶을 구태여 시청할 이유가 어디있겠는가?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 삶이 꿀꿀해서 드라마를 보는 것인가?)

 

삶이 꿀꿀한데, 드라마는 어찌이리도 안 꿀꿀할 수(혹은 다르게 꿀꿀할수) 있을까? 왜 그들은 밥 먹고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까? 드라마가 배포하는 잘난 사람들만의 세계, 드라마가 재현하는 특권층의 삶, 그리고 이것이 일반 대중의 인식에 미치는 효과. 내 삶은, 우리의 삶은 왜 재현되지 않을까? 이의 지루함? 이의 평범함? 이의 불온함?

 

비정규직의 문제, 한미 FTA문제, 실업의 문제, 생존의 문제라는 우리의 삶을 매스미디어에서 다루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이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것을, 왜 거대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매스미디어에의해 매개되는 재현된 현실들은 입을 닫고 있는가?

 

누구나 제기하는 문제, 누구나 답을 알고 있는 문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잠시 잊기도 하는 문제.

 

Mass Culture가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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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4-0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 곰곰 생각해보니 '하이킥' 감이군요.
 
 전출처 : Ritournelle > * 스피노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 담론비평(2007. 4. 4)  / "상상적 관계가 인간의 사회적 삶의 기초다"

 

진태원 박사,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시도

 

리뷰팀 review@dambee.net

 

   
▲ 스피노자(네덜란드, 1632~1677). 그는 1673년 하에델베르크 철학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철학의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에티카'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 두 가지였다. 독일 관념론 이래로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아무런 부정성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실정적인 절대자이며, 역동성을 결여한 부정적이고 정태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들로 지칭되는 자연 안의 실체들은 독자적인 개체성이나 실재성을 결여한 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일자로서 실체에 포섭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에는 인간의 개체성이나 재유를 위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1960년대 이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는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주었다. 역량론적 해석이라 불리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근본적으로 역동적인 실재라고 주장했다. 곧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며, 자연은 실재들의 생산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역동적인 장이라고 파악했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투쟁) 개념이다.

   
▲ 코나투스 본능을 설명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친필.
이러한 존재론적인 역량은 개인들이 예속적인 실존 조건에서 벗어나 자유를 달성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마르샬 게루,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 피에르 마슈레 등과 같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작업에 기반을 둔 역량론적 관점은 스피노자 철학이 지닌 이론적 독창성을 잡아내고 이를 실천적 의의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론은 여전히 스피노자의 진면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관련 논문을 발표해온 진태원 서울대 강사가 최근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박사논문으로 완성해 발표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2006, 서울대학교)이 그것이다.

 

 

 

 

 

박사는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의 8가지 주제를 검토하면서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1. 스콜라철학에서 데카르트에 이르는 용법과 비교해볼 때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의 독창성은 이 개념을 탈신학화했다는 점에 있다. 곧 자기 원인 개념은 부동적인 절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으로 한정될 수도 없으며, 자연 전체를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닐 뿐 아니라,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어떤 통일적 기체(基體)도 아니다. 곧 그것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통해 구성되고 표현되는 무한한 인과연관의 동일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탈실체화된 실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체와 양태 관계는 인과관계로 일의적으로 표현된다.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의 독창성은 갈릴레이가 설립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과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이라는 개념을 결합했다는 점에 있다. 곧 타동적 인과성과 내재적 인과성은 두개의 상이한 인과관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변용의 연관을 가리킨다.

4. 스피노자의 개체는 분할 불가능한 원자가 아닐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성립하는 존재론적 기초 단위도 아니다. 그것은 개체 자신의 부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며, 따라서 항상 이미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간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 스피노자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상상적 관계다. 상상적 관계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의 삶의 자연적 기초이면서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루고 있다.

6. 스피노자에게는 인식론이라는 독립된 분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중심 쟁점은 인간의 인식과 삶을 구속하는 상상적, 예속적 관계를 어떻게 개조하여 적합한 인식을 얻고 자유를 획득하느냐에 있다. 이는 공통 통념들의 형성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7. 스피노자 인간학의 또다른 축은 정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정서 개념을 통해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재기한다. 스피노자의 독창성은 수동과 능동을 관계론적 개념으로 개조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8.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의 특징은 자유를 관계론적 범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곧 그에게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한 사람의 능동화는 다른 사람들의 능동화를 촉진한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진 박사는 이상의 8가지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을 좀더 명쾌하게 해석하고, 그 현재성을 평가하고 응용하기 위한 이론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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