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고 허세욱 씨에 관한 두 개의 글
허세욱 동지의 염원이다. 한미FTA 폐기하라! 노무현정권 퇴진하라!
지난 4월 1일, 한미 FTA 장관급 협상이 열리는 서울 하얏트 호텔 앞에서 "한미 FTA 폐기하라!", "노무현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셨던 허세욱동지가 4월 15일 오전 11시경 끝내 운명하셨다. 파국적인 결말을 가져올 한미FTA에 맞서 온 몸으로 저항했던 동지의 영전 앞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분명하게도 故 허세욱 동지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것은 민중의 삶을 파탄낼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다. 동지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요구했던 ‘FTA 협상 중단’의 외침은 노무현 정권의 협상 자축의 기만적인 선전 속에서 묵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땅의 민중들이 목숨까지 내던져가면서 그토록 반대하는 협상을 노무현은 무슨 권한으로 강행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노무현정권은 故 허세욱 동지의 죽음 앞에 백배 사죄하고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는 FTA 협상을 당장 중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의 정당한 외침을 묵과한다면 노무현 정권은 피할 수 없는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애초부터 한미 FTA를 통해서 민중들이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짜여진 수순에 따라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 속에서 민중들의 삶과 권리는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미 IMF 10년 이후의 시간 속에서 드러난 민중들의 죽음과 피와 눈물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故 허세욱 동지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땅 민중들의 삶과 권리를 삼켜버리려고 하는 반민중적인 노무현 정권에게 이제는 노동자 민중의 광범위한 투쟁의 분노를 보여줄 때이다. 동지가 온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절절이 외쳤던 이 땅 전민중들의 염원을 되새기며, 더욱더 강고한 투쟁으로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를 끝장내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2007. 4. 16 사회진보연대

고(故) 허세욱 씨의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 천막이 있다. 허세욱 씨 장례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흰 종이 상자가 하나 있다. 상자를 열면 온갖 신문 조각들이 가득하다.
빨간 밑줄이 쳐진 신문 스크랩, 메모가 가득한 강연 자료
지난달 중순께 허 씨가 민주노동당을 찾아와 "그동안 모은 FTA 관련 자료"라며 넘겨준 것이다. 물론 당시 이 상자를 받아든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그것이 허 씨가 죽음을 결심하고 남긴 유품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허 씨가 남긴 상자 안에서 나온 신문 조각들은 온통 빨간 사인펜으로 밑줄이 쳐져 있다. 신문 조각만 있는 게 아니다.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등 한미FTA 반대 논객들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자료도 있다. 역시 빨간색 밑줄, 그리고 강연을 들으며 남긴 메모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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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심 있는 내용에 밑줄을 치며 공부한 흔적(왼쪽), 허세욱 씨가 남긴 신문 스크랩. 허 씨의 집에는 이런 신문 조각이 수천 장이 있다(오른쪽). ⓒ프레시안 |
허 씨의 유품에 대해 이해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허세욱 씨는 언론인들이 작성한 기사를 스크랩하며 한미 FTA 협상에 대해 공부했다"며 "언론인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분신 이후, 언론을 접했다면 허 씨는 무엇을 느꼈을까? 지난 15일 허 씨가 사망한 뒤, '제2의 전태일'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왔다. 단지 분신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허 씨와 전태일은 닮은 점이 참 많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노동자로 살아간 이력이 닮았다. 또 전태일이 차비를 아껴 비슷한 처지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주곤 했던 것처럼 허 씨도 120만 원에 못 미치는 월급을 헐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왔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닮았다.
그런데 허 씨가 남긴 흰 상자는 전태일과 닮은 면모 하나를 더 일깨워준다. 전태일은 죽기 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하고 말했었다. 혼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느낀 답답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한 근로기준법은 전태일을 더욱 절망하게 했다. 전태일의 현실과 법전의 내용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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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FTA 반대 논객인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의 강연 자료. 강연 내용을 받아적은 메모가 빼곡하다. ⓒ프레시안 |
물론 허 씨의 주위에는 대학을 나온 동료가 많았다. 그래서 혼자 신문을 스크랩하며 한미 FTA의 내용에 대해 공부할 때, 물어볼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한미 FTA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신문을 펼칠 때마다 허 씨는 무엇을 느꼈을까. 허 씨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일 허 씨가 분신한 뒤, 만약 그가 언론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류 언론은 한미 FTA가 가져올 미래를 장밋빛으로 칠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허 씨는 분신 직전 동료에게 남긴 유서에 "4대 선결조건, 투자자-정부 제소건, 비위반 제소 합의해주고, 의제에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말라"고 적었다. (☞ 관련 기사 :
"미국기업에 한국정부 제소권 보장",
'쌀은 지킨다'는 건 한미FTA 전략이 아니다 )
하지만 허 씨가 분신한 뒤에도 주류 언론은 이런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소위 개혁언론을 자처하는 매체들도 대부분 이미 나온 기사들을 서로 짜깁기 하는 수준에 그쳤다. 한미 FTA에 관한 기사라면 모조리 스크랩하던 허 씨가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27년 전에는 근로기준법을 불살랐는데…기자라는 게 부끄럽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자신의 몸만 불사른 게 아니다. 정말 태워버리려 한 것은 '근로기준법'이었다. 분신 당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다.
2007년 4월, 역시 자신을 불사른 허세욱 씨는 무엇을 함께 태우고 싶었을까. 정부 발표를 분칠하기에 급급한 언론, 중학교도 못 마친 노동자의 궁금증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언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기자라는 직업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