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고슴도치 아가씨의 널뛰기
이번주 '문학과작가 사이'에 초대된 시인은 '허를 찌르는 솔직함'이 장기라는 김민정 시인이다(한데, 나는 그 '솔직함'이 가장된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은유로 분장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솔직함 말이다). 드문 경우이지만 한권 나온 시집을 예전에 통독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옮겨놓는 마음이 편안하다. 다만, 그때 몇 가지 감상을 적어놓지 않은 게 약간 후회스럽지만. 세칭 '미래파' 시인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놓으려고 했었다. 그 시인들을 아직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계속 미뤄지고 있지만. 하긴 그런 글이라면 나보다 더 잘 쓸 만한 비평가들이 여럿 되므로 굳이 수고를 무릅쓸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예컨대 평론가 신형철씨 같은.

경향신문(07. 04. 14) [작가와 문학사이](14)김민정-허를 찌르는 솔직함
예컨대 그녀는 “삐친 자지처럼”(‘거북 속의 내 거북이’)과 같은 비유를 쓰는 시인이다. 이 직유는 실로 허를 찌른다. ‘시(詩)’라는 제도와 남근주의의 허장성세를 동시에 밟아버린다. 천박하고 외설적인가? 아니, 짜릿하고 통쾌하다. 우리가 차마 못 한 말을 그녀는 한다. 이 솔직함은 포즈가 아니라 불가피한 전략이다. 위선적이지 않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
예컨대 그녀는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눈알나무, 라고 그냥 읽어버리지 말고,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가 휘청거리는 나무’를 나의 감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쓸쓸하고 오싹하다. 온 몸이 눈이 되어 세계를 경계해야 할 만큼 상처가 많은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쓸쓸하고, 그 수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심술궂게 나를 째려본다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 눈알들이 세상을 굴러다니면서 유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이 솔직한 발성과 역동적인 감각이 협업해서 그녀의 시를 굴려나간다. 김민정. 197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시인이 되었고 2005년에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냈다. 조화와 화합이 아니라 반목과 적대를 이야기하고, 거죽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살의 실재를 현시한다. 그녀의 시집을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시화(詩化)로 읽어도 좋다.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마침내 날아오르는 사연.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댄다 난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 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가지 꽉 물어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스물네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그 애인의 애인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나는야 폴짝’)
줄이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씬(scene)이 바뀐다.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여자의 연대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철없는 소녀가 스물여덟 처녀가 될 때까지 여자의 삶은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꼬마-소녀-사람은 늘 어른-남자-사람한테 시달리면서 자란다. 잠깐만 방심해도 줄에 발이 걸린다. 삶의 어떤 고비들을 그녀는 이렇게 ‘폴짝’ 넘어 왔을 것이다. 이 폴짝은 무겁고 또 가볍다. 이 이중성을 이해하는 일이 김민정 시의 외부와 내부를 함께 보는 첩경이다.
예컨대 ‘미친 년 널 뛰듯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 년’을 미치게 한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고슴도치 아가씨의 ‘폴짝’은 제도의 중력을 거스르는 무거운 도약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시 역시 한국 여성시의 어떤 계보를 잇는다. 문학사에는 돌연변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폴짝’에는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다. 그래서 힘이 센 변종이다. 씩씩한 아가씨가 널을 뛴다. 원한도 신파도 없이, 미친 년 널 뛰듯이.
젊은 시인들의 시는 다 요령부득이라는 식의 무지막지한 히스테리가 창궐하고 있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거북 속의 내 거북이’) 맞다. 그녀는 때로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고 왜 너는 염산을 타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렸느냐고 힐난할 것인가. ‘점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불구다. 너와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 온 몸에 새겨지는” 노래, 미련곰탱이 아저씨는 모르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들은 아는 그 노래. 자, 박수.(신형철/문학평론가)
07. 04. 15.

P.S. 캐리커처와 사진에서 알 수 있지만 시인은 정말로 눈이 큰다. 탤런트 김민정 뺨칠 만큼.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란 은유가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나는 시집을 이 '눈알공주'의 가족사로 읽었다). 여느 여성시인들과의 차이점이라면 히스테리적 상상력이 아닌 도착적 상상력을 펼쳐보인다는 것. 그건 어쩌면 시인도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불편' 동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지도 모르겠다('불편' 동인들의 인터뷰 기사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02/2007040200003.html 김민정 시인의 동영상 인터뷰도 짦게 포함돼 있다). 블편한 시? 하지만 해롭지는 않다(그게 치명적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