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게으르기 때문에 독후 짧은 메모로 대체한다.

젊고 배부른(?) 쿤데라 같은 느낌. 회의적이지만, 희망은 보인다.

연애. 인간관계... 읽으면서 보통과 나의 차이를 발견한다. 나는 굳건한 '자아'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많은 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영국의 (스위스 출생, 영국 캠브리지에서 철학 공부) 작가 내지 철학가는, 굳건한 자아를 토대로 사랑에 대해서 쓰고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6-1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씨에 입문하셨군요. :)
근데 평점이... -_ㅜ

기인 2007-06-1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그렇게 좋지는 않았는데요. 보통이 20대에 쓴거라 그런지 쫌 유치하기도 하고.. ㅎ 그래도 별 세개에요 ^^;

드팀전 2007-06-1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이어서 그럴꺼에요...^^ 저도 보통 한번도 안 읽었는데...기인님의 이 말씀중게 '굳건한 자아'에 대한 회의는 공감합니다.굳건한 '자아'라는 건 망상적인 고집이거나 유아적인 환상일 때가 많아보입니다...'내가 나'라고 믿는 것도 아마 근대가 심어 놓은 환상은 아닐까 ^^ (아님 말구..)
오늘은 바쁜 날..빨리 일해야지...

기인 2007-06-1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보통이 아쉬운 점은, 그 자아의 형성이나 관계맺음의 배후에 작동하는 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자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쫌 유치하기도 하고, 자기위안 같기도 하고.. 그래서 쫌 별로 였어요 ㅎㅎ
 
 전출처 : 로쟈 > 종교사회주의자 폴 틸리히

일요일에 한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폴 틸리히(1886-1965)를 전공하신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저명한 신학자 정도로 알고 있는 내게 덕분에 '지적 거인'이란 이미지 하나가 더 보태졌다. 마침 레디앙에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를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참고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레디앙(07. 06. 09)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체제만 종교를 인정한다? 어떤 자리에서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는 것이 그 나라의 ‘바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도 아니기에 나랑 서너 번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예외 없이 말한다.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목사님인데...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또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 나라에서 펼치는 각종 정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특히 ‘속세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 격차를 좁히려는 정책들은 ‘사회주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입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그들은 다시 말한다.

“어떻든 사회주의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수건 달고 다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이없는 말이려니와 자본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한다는 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체제’가 종교를 인정하나?

주지하는 대로, 이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일 수는 없을 터, 그네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은 친미적이어야 하는지(그게 꼭 미국이래서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특정한 나라를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단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나라에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럽에 있는 ‘신앙인’들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땅을 이끄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Charles Kingsley), 모리스(F.D.Maurice), 루드로(J.N.Ludlow)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에 ‘기독교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일본 등으로 번진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며 교회의 신앙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곧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종교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의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사회주의의 발흥

자본주의가 전성하던 시대에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목도한 요한 블룸하르트(John Blumhart)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종교사회주의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t)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역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사회주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생각했다.(세계의 사회주의자 28-"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 요(Joh), 뮬러(Mueller), 로츠키(Lhotzky), 쿠터(Kutter), 라가츠(Ragaz),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틸리히(Tillich), 하이만(Heimann), 멘니케(Mennicke), 덴(Dehn) 등이 뒤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라가츠나 쿠터는 사회민주당이 사회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기성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가차 없는 채찍질”이라고 했다. 특히 라가츠는 사회주의를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빛”이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만 했다. 나중 모습도 모두 같진 않았는데, 라가츠의 경우, 1차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사회주의를 종교적 의미로만 국한했다. 칼 바르트도 후에 “하느님의 의지를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면서 종교사회주의를 떠났다.



종교사회주의자 틸리히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1918년 독일혁명 이후, 여러 교수들을 규합하여 ‘종교사회주의신문’을 발간하면서 종교사회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틸리히가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첫째,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이 있다. 1차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지배계급과 결탁하였다. 틸리히는 기성 교회가 무산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였다.

둘째,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혼돈과 전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부르주아 시대는 가고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초월적 메시지와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종교사회주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2의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현시가 역사 안으로 임하는데, 바로 이런 성숙한 시간을 신약에서 ‘시간의 성취’ 곧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카이로스는 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라는 개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진가를 평가하려 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래적인 사명을 자각시키며 인간소외를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주의가 외적 혁명만 아니라 부르주아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 더 구체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반목될 수 없으며 적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소외에 대한 해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겐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계급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지나치게 적의를 발산할 때, 종교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도덕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며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실존이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으로 누릴 자유가 없는 사물이나 다름없다고 봤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틸리히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도구인 노동력마저 위협받게 되며 상시적으로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고독’하다고 봤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동력의 사유화를 반대하며 생산이 공유되는 사회의 확립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둘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소련에서 시도한 공산세계 건설도 인간을 소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틸리히는 공산주의를 자율에 반하는 타율적 체제로 규정하였고, 그 타율이 절대화되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 넣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그러나 그 날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면 조만간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면서 소외되고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이 꽤 중요한 교과서가 될 듯하다.(서민식/ 목사,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07.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Ritournelle > * 영미문학학회 학술대회 특집 리뷰 #2- 홍준기 박사

* 담론비평(2007. 6. 10) / 알튀세르가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뒤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윤리적 독해의 시도

 

홍준기 한국정신분석상담연구소 master@dambee.net

 

▲ 알튀세르는 잠에서 깨어 맑스로 되돌아가는 귀향길에서 정신분석과 헤겔이라는 우회로를 거쳤다. 둘이 어딘가 닮은 듯하다.

만족과 결여의 변증법을 보지 못하고 만족만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정신분열증, 망상증, 도착증, 신경증 등 인간 주체가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존 방식 중에서 ‘오직’ 정신분열증만을 특권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실 라깡 정신분석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은 주체와 타자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결여 없는 만족’만이 존재하는 주체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라깡의 견해는 사실 들뢰즈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들뢰즈는 이러한 병리적 정신분열증 상태를 ‘특권화’할 수 있었는가? 이제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는 자신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란 임상적 의미에서의 정신분열증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열증자가 누리는 결여 없는 만족이란 사실 ‘치명적인 향유’이며, 따라서 들뢰즈가 이렇듯 파멸과 죽음의 불안을 체험하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델’로 간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말하는 해방된 분열증자는 임상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분열증자이다. 바로 이러한 들뢰즈의 논의는 난점에 부딪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한편으로는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를 소외로부터 벗어난 해방된 주체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인은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반오이디푸스』에서 슈레버를 정신분열증자로 해석하면서 그를 자신의 영웅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슈레버는 사실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 아닌가? 왜 한때의 영웅이 다시 소외된 인물로 폄하되어야 하는가?

사실 들뢰즈가 말하는 ‘비임상적’ 분열증자는 라깡이 철저히 탐구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의 너머에 도달한 사람, 즉 소외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 즉 분석의 끝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들뢰즈는 이러한 라깡적 결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라깡의 견해에 동조할 수도 있을 들뢰즈 이론이 외관상으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 정치적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특권화한 것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특정한 철학적 존재론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독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동지를 ‘주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그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할 때에만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과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알튀세르가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맑스로 되돌아가는 설레이는 귀향길(Heimweg)에서, 정신분석과 헤겔을 경유하는 우회로(Umweg)을 거치며 다시 발견한 자신의 ‘새로운 맑시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위의 글은 홍준기 박사가 영미연 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윤리적 독해의 시도: 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의 결론 부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글샘 > 나는 김진숙에게 하염없이 부끄럽다...
-



왜, 왜 이 책은 첫머리에서부터 내 상처를 헤집기 시작하는 것인지...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인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잊고 살아왔던 상처였는데...

생일 선물로 아들 녀석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했다.
아들은 무슨 책인줄도 모르면서 사다 주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나중에 아들 녀석도 노동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이 책을 다시 읽혀 주리라.
아니, 대학생 정도 나이가 되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하는 열일고여덟의 청춘을 김진숙에게선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파리하게 마른 여자애가 늘 잠에 쫓기고 일에 짓눌려 직장을 전전하는...
멋도 모르고 대기업에 취직한 것만 좋아하던 기숙사 생활과,
치욕스러움이 일상이던 버스 안내양 생활.(돈을 만지는 일이었기에 온갖 치욕스런 일들이 뉴스거리였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그 험하던 일과 해고 이후의 투쟁으로 일관한 삶.

아, 이제 오십줄을 바라보는 김진숙, 그의 이야기를 어찌 눈물 없이 읽을 수 있으랴...

작년 가을, 홍세화 강연을 들으러 가던 길에 부산일보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자그마한 키에 후질근한 색을 하나 메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 책의 페이지마다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흘린 땀이 바래서 소금꽃이 되어버린 그 삶들이 펼쳐져있다.

군사 독재 정권은 노동자들을 짓밟아 재벌을 키웠고, 재벌과 정권은 개미와 진딧물처럼 서로를 키워왔다.

하느님도 썩은 디를 포크레인으로 파다파다 못 파서 도로 덮어 버린 데가 우리 나라...라는 농섞인 노동자의 목소리는 노동 현장의 모습을 지옥으로 그린다.

87년 쌍팔년... 생각을 하면서, 그 때만 혀도 우리 힘이 너무 많응께 나 같은 건 으디 낄 자리도 읎었지라. 참말로 그 때가 봄날이제. 그때 겨울을 준비혔어야 되는 거인다. 사시사철 봄만 있을지 알았제. 요로크롬 찬바람 씽씽 부는 겨울이 올지 누가 알았간디... 하는 이야기는 삶을 너무 많이 살아버린 사람들의 달관도 느껴진다. 사실, 89년 전교조 탄압을 필두로 공안 정국이 계속되지 않았던가...

아직도 학교에선 교사가 노동자냐?하는 배부른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교사는 전문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지금 당장 교육부에선 예체능 교과를 성적에서 제외하겠다고 하는 판국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한줄로 평가를 하겠다는 건지, 그 의도는 분명하다.
경쟁을 붙이면 결국 노조의 힘은 극도로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교사는 국가공무원의 신분을 잃고, 지방직화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과 대동소이한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지방직화 된 공무원의 신분은 곧 비정규직에 다름아니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점점 줄고 있는데, 올해가 무슨 황금돼지핸지 뭔지 떠벌여서 잠시 출산율이 높아지곤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회적 불임>은 시대적 대세요, 국가적 패인이 될 것이다.

이 나라가 굴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교회라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고 국가보안법은 탄탄하게 유지될 것 같고,
붉은 줄 좍좍 긋는 뉴스들은 시도때도 없이 줄을 타며,
이 땅덩어리의 훌륭한 인물들이 예전엔 모조리 군인이었는데(우리 초, 중딩때 교과서엔 무슨 장군과 애매한 독립운동가들이 수두룩했다. 김구도 왜곡된 인물 중 하나이지 않은가.),
이제 이 땅의 위인들은 스포츠 선수들 뿐이다. 이승엽과 박세리, 박찬호와 김연아, 그리고 박지성과 박태환, 이영표, .... 아, 스포츠 참 싫어하는 나도 이렇게 많은 운동 선수를 외우다니...

이 나라 국민들은 월드컵때 축구 안 보면 마치 '신자 아닌 사람'을 보는 교회 사람들 같다.
자기들끼리 똘똘뭉쳐 무슨무슨 모임에 정말 부지런한...

김진숙의 글들을 읽으며 오래 오래 부끄러웠고, 많이많이 반성한다.
하종강의 노동 운동이 거시적이고 원론적인 것이라면,
김진숙의 노동 운동은 온몸으로 때운 그것일 것이다.
그것이 인텔리와 노동자의 출신 차이에서 온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권영길이 87년 6월에 에펠탑 앞에서 특파원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래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는 말도 하지만, 이젠 이 땅에서도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그런 찬란한 하늘 말고,
'노동자'도 '사람'인...
그래서 '공고'에 자식을 보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겠다.

내일부터 가난하고, 부모가 못 배우고, 관심이 없어서,
또는 아이들이 머리가 나쁘고, 성질이 게을러서 '공고'에 오게 된 내 아이들에게,
'처지가 공고생'이지만 '인종이 공고생'인 것은 아니라고 또 한동안 핏대 올려 떠들어 보겠지.
우리 아이들의 부모들은 뻔뻔스럽게도 수학여행비 19만원 중 10만원을 넣어 보내며, 나머지는 담임이 알아서 하라는 둥, 1년에 밥값이 천 만원 이상 미납이 되는 현실은 어떻게도 바뀔 수 없는데도...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노동자는 자랑스런 것'이라든지,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할 용기가 내겐 별로 남아있지 않다.
'노동자는 투쟁만이 살 길'이고 '단결만이 그 긍지를 지켜낼 수 있다'는 원칙을 이야기하기에는 내 주변에는 너무도 비정규직이 많아져 버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인지...

그래. 한국엔 없는 '근로기준법'이지만, 그 속에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이 있다.
평화시장 앞에서 온 몸을 횃불로 밝힌 청년 노동자가 죽은 지 37년이 지났지만, 이 어두운 땅엔 아직도 근로기준법이 없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사장(요즘엔 씨이오라더만, 빌어먹을 씨이오)도 없고, 근로기준법에 맞춰 재판하는 법관도 없다.

오로지 노동자의 힘은 똑같이 못난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데, 이놈의 빌어먹을 나라는 IMF가 걱정할 정도로 비정규직화가 급격히 이행되고 있어, 노동자들 사이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고, 서로 낯을 바라보기가 어색하게만 변해가는 시절을 읽는 일은 눈물겨운 일이고, 서글픔만 가득한 일이다.

어제는 밤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김진숙 때문이었다.
오늘도 곱게 잠자긴 글렀다. 6월에 길바닥에서 썸머타임때문에 길어진 해를 원망하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던 그 날이 20년이 지났는데,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갈수록 나빠만 지는 현실을 원망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대학 시절로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아마 스스로를 포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대는 다시 그 시절로 거꾸로가는 열차를 탄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섬증이 든다.
박공주가 설치고 다니고, 개발 독재를 꿈꾸며 운하를 판다는 삽질맨도 목청을 돋운다.
그들의 본색은 '빨갱이 적출'과 '노동자 탄압'을 모토로 한 '경제 개발'을 표방하는 재벌 살찌우기인데 말이다.

아, 정말 내가 빨갱이가 아니며, 노동자를 돕지도 않고, 나는 노동자도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교조를 탈퇴하고 교회라도(산업 선교회 같은 무서운 빨갱이 교회 아닌) 독실하게 다녀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 걸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대학 물먹은 표'내는 '학번' 운운하는 일은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늘빵 > 병역거부 ‘양심’을 위한 진지한 변명(김두식 인터뷰)

2007. 6. 9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783.html

병역거부 ‘양심’을 위한 진지한 변명
‘양심’에 대한 정의 분석으로
“군대 가면 비양심이냐”는 질문에 대답
치밀한 자료 토대로 일반인 알기 쉽게
“지원병제가 문제 해결 열쇠”
한겨레 한승동 기자  탁기형 기자
» <평화의 얼굴>
인터뷰 / ‘평화의 얼굴’ 펴낸 김두식 교수

“군에 가지 않는 게 양심적이라면 군에 복무한 우리는 비양심적이란 얘기냐?” “만약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6년 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도입 문제가 격렬한 논전을 거쳐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된 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병역거부자들을 몰아붙일 때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해온 질문들이다. 지난 70여년 동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이 땅에서는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과자가 됐고 지금도 늘 9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때 보수 주류 기독교단은 특정 종파 중심의 그들을 이단으로 몰며 ‘절대 불가’ 쪽에 앞장섰다. 그때 ‘그게 아니다’며 보수 교단 논리를 정연하게 비판한 〈칼을 쳐서 보습을〉이란 책으로 기성관념에 충격을 준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도 김두식(40) 경북대(그때는 한동대 재직) 교수다.

“처벌만 놓고 본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혹하게,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둬온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하는 그가 이번에 다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 〈평화의 얼굴〉(교양인)을 냈다.

〈칼을 쳐서 보습을〉이 “운동가를 위한 팸플릿에 가까운” 책이어서 한번 제대로 써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5년 만에 뜻을 이뤘다. 그 사이에 “괴물로 변하기 쉬운 국가와 그 국가를 통제해야 하는 법의 사명을 설명한” 〈헌법의 풍경〉도 썼다.

“한국 상황, 일제 시대 얘기 들을 넣는 등 많이 보완했다. 거의 새로 쓴다고 생각하고 작업했다. 5년 전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이번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재미있게 쓰려고 애썼다.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칼을 쳐서 보습을〉의 완성판인 셈이다. 치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논리를 한층 더 탄탄하게 가다듬어 새로운 내용이 절반 이상 추가됐다.

〈평화의 얼굴〉에서 김 교수는 위의 두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았나? 첫 번째 질문은 먼저 그럴 경우의 ‘양심적’이란 게 뭔지부터 따져 봐야 한다. 헌법학자들이 정의하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다. 이건 우리가 흔히 “그 사람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라든가 “그 사람 정말 비양심적이야” 할 때의 ‘양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러니까 누구는 양심에 따라 군에 못 가겠다고 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양심에 따라 군에 가겠다고 할 수 있다. 그 둘은 모순관계가 아니다. “군에 가는 게 비양심적이냐?”는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두 번째 질문에 김 교수가 내놓은 답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 하나는 “전쟁은 당신이 물어보는 그런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는 것이다.

» 김두식 교수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할 때 꼭 그렇게 주장했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강도)이 우리 국가와 국민(여동생)을 유린할 터이니 우리가 살기 위해선 부득이 조선을 식민화하고 중국과 동남아를 쳐서 대항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미국을 공격해올 조짐이 보이는 상대를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도 꼭 같은 논리다. 그건 전형적인 제국주의 범죄논리다. 전쟁과 개인의 윤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병역거부는 이단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예수님이 병역거부라도 했다는 건가?” “전쟁 중에 어떻게 병역거부냐?” 〈평화의 얼굴〉은 이런 무서운 항변들에 대해서도, 왜 흥분할 일이 아닌지 구체적인 국내외 사례들을 들이대며 편지글투의 경어체로 조근조근 대답한다.

주류 기독교가 이단으로 모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 병역거부 문제도 깊이 다뤘다. 김 교수는 “사실은 그들이 굉장히 고맙다”고 했다. 이 부분은 ‘자신부터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의 자세, 자신이 직접 겪고 느끼지 않은 것은 결코 말하지 않는 정직함’이라는, 그가 지닌 미덕과도 관련이 깊다.

“국가와 교회, 그리고 평화는 청년 시절부터 나를 붙잡은 고통스런 화두였다”는 그는 원래 인문학 쪽 책벌레였으나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5년 2월부터 군 사령부 검찰관 보직을 맡았고 그때 국선변호인 자격으로 집총 거부로 재판에 회부된 여호와의 증인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과 만남은 “국가권력의 이름 아래 수백만, 수천만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나?” 고민하면서도 안락한 연구실과 가정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그 한계를 돌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 김두식 교수
〈평화의 얼굴〉은 “일종의 신앙적 결단”이자 그가 꿈꾸는 “평화교회”에 관한 사유다. 자신을 “군대를 가는 평화주의자” 쪽에 자리매김하는 김 교수는 지원병제를 문제 해결의 열쇠로 본다. “지원병제로 가는 과도 조처로 민간 대체복무뿐만 아니라 비전투 복무에도 논의의 초점을 맞추자”고 촉구한다.

큰일 했다는 공치사에 “법학 제대로 공부했다면 누구나 도달하는 곳이고 그걸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한 것뿐”이라며 손을 내젓고는 심각한 불이익을 감수한 병역거부자들과 이를 알리고 그들을 도운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책이 나오자 “보수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정말 잘 썼다, 도움이 됐다”고 했다.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도 기뻐하셨는데, 다만 “혹시 자식이 다칠라” 걱정했다. 장애인 문제를 전공한 아내는 처음부터 ‘내 편’이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6-11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6-1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 우선 그날로 잡으세요 저도 조정해보도록 할께요. 세미나가 토 아니면 일에 있는데, 그 주는 사람들이 어떤 요일로 정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