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머리들처럼    -나희덕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탐스럽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자,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다.

아--- 에--- 이--- 오--- 우---
그러나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숨죽여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가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양질의 시들을 꾸준하게 쓰고 있는 나희덕.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에서.
참 좋은 시다라는 감탄보다는, 처연하게 지쳐가는 나희덕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녀의 시력도 이제 근20년이 되어간다. 그녀가 90년대 초중반 썼던 시들을 기억한다.
세상에 지친, 외로운, 쓸쓸한 이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다가도 따스하게 감싸던 시선.
어쩌면 그 시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외부 존재에게 전가시키고 오히려 자신은 편한 마음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기실, 그녀도 지치고, 외롭고, 쓸쓸하다. 예전 그녀는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외적 존재로 인하여, 그들을 그리면서 그 지침,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고 이겨냈다고 한다면, 이제 그것도 포기한다. 실상 지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은 자신이었음을. 출근길 백미러 속에서 발견한, 40대 시인...

그녀의 93년 창비 여름에 실린 시를 다시 본다.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 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던 20대 후반의 시인, 자신의 마음을 사물과 함께 공감하는 40대 초반의 시인. 시인이 건너온 삶들과 함께, 흐르는 시를 읽는다.

(원래 somun.info 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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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10-1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고맙습니다~ 알라딘 들리고는 있었는데 글은 못 올렸네요 ㅎㅎ 종종 이제 글도 올리려고요 :)
 

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혼자였고, 성인이 된 후에 '길을 잃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이리저리 발이 닿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 기분 좋아보이는 취객들의 비틀거림, 젊은이들의 말소리, 한편에 공사중인 우중충한 철근 콘크리트, 낡은 공중전화박스. 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그 도시의 밤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어지러웠다. 하늘에 걸린 달이 유독 커보였다. 비틀대며 걸었다. 도시의 낯선 면모들, 수많은 형형색색의 가면들. 황홀했다. 길을 다시 찾으려는,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도시에 취했다.

나희덕의 아래 시를 읽으며, 다시 밤도시의 낯선 풍경, 그 매혹에 취해본다.

 

 

 




육교 위의 허공    -나희덕

좁고 가파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빛나는 마천루가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신호등이나 건널목이 없이도
그 길을 따라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지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때로 어두운 허공 위에서 놀란 듯 만났지
새로운 지평선이 펼쳐지고
6차선 도로가 오선지처럼 출렁거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 속으로
차들은 피톨처럼 점점이 빛을 뿌리며 흘러갔지
그러나 경적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
두 손에 든 허공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다만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심해의 물고기처럼,
시냇가의 반딧불이처럼, 거기가
도심의 누추한 육교라는 것도 잊은 채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공중그네를 타고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어두운 허공 위에 또하나의 길을 내고 있었지



서울에는 야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값비싼 식당(아니 '레스토랑')이 몇군데 존재한다. 와인이나 샴페인을 기울이며, 높다란 '스카이라운지'에서 야경을 즐길수도 있겠다. 유리로 가로막혀 밤의 찬공기와는 무관하게 적정하게 관리된 온도와 습기에 둘러쌓여서, 풍경을 타자화하는 높이와 편안한 의자와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어두운 야경에 유리창은 밝은 레스토랑 안을 반쯤은 투과하고, 반쯤은 밖이 보일터이다.

철저히 격리되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적당한 거리로 인해 낭만적이지만, 때문에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어지럽고 환상적이지는 않다. 나희덕은 육교 위에서 바라본다. 높이, 소음, 추위... 모두 야경 속에 있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과 단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그 곳에서 시인은 취한다.

'신호등이나 건널목'없이도 '다른 세계'로 가게 하는 다리. '밤길을 건너는 밤길/허공을 건너는 허공'
그 곳에서의 '새로운 지평성', 그 아래로 지나는 '6차선 도로'는 '오선지'처럼 출렁이고, 나를 향해 다가오다가 멀어지는 차들은 '피톨처럼 빛을 뿌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으로 사라진다.
시인은 심해의 물고기, 시냇가의 반딧불이 되어 '공중그네'를 타는 기분으로 육교 위에 서 있다. 도시에 취해, 시인도 빛을 내며.

밤이란 검다. 검기 때문에 작은 빛들이 환하다. 밤에 도시는 심해의 물고기떼, 시냇가의 반딧불 무리들로 살아난다. 차들은 빛을 내며 사라진다. 공중그네를 타는 것 같다. 어지럽다. 기분 좋은 나른한 어지러움. 취한다.

육교.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마주 잡은 두 손, 허공 위의 길, 여기서 밤에, 도시에, 밤 도시에, 낯선 밤 도시에 취한다.

(somun.info에 원래 올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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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1.5평 청춘기
다카노 히데유키 지음, 오유리 옮김 / 책이좋은사람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일본소설이 왜 20~30대 독자들, 특히 여성독자들에게 매력적일까 가끔 생각해보고는 한다. 예전 고급독자들 386과 그 이전 독자들의 '취향'에 한국소설들은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 상식적인 대답.

그렇다면, 요즘 여성독자들의 취향은 왜 일본소설에 끌릴까. 진지한 문제를 가볍게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전에는 이것이 사회/개인, 계급/연애라는 쌍으로 생각해봤는데, 인기를 널리 끄는 일본소설들을 읽어보면, 꼭 후자에만 소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상 개인을 파고들면, 사회가 나오고, 어른들의 연애 문제는 현실적으로 계급을 괄호속에 넣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독자들이 한국작품을 외면하는 현상은 일차적으로 작가들, 그리고 신진 작가들을 뽑는 제도에 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최근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두 작품은 진지한 문제를 가볍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기존 한국소설들보다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일본소설들을 많이 닮았다. 2007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 "달의 바다"와 2007 올해의 작가상 수상작인 "걸프렌즈"가 그렇다. 라이트노벨과 순문학의 경계가 너무 뚜렷한 것이 우리 문학계의 현실이라는 지적을, 문학상이라는 보수적 제도가 날려버린 셈.

서두가 길었는데, 이 '와세다 1.5평 청춘기'도 '진지한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일본의 알바족(취직을 하지 않고 알바로 먹고 사는 사람)의 피터팬 콤플렉스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풀어낸다. 이를 사회 전체에 대한 해석이나 접근으로 나아가지 않고, 알바족의 각성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실제로, 개인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일까. 그리고 작가 자신은 미지의 지역, 생물, 마약들을 탐험하는 와세다 대학 탐험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특수성도 있다. 명문대생이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진입장벽도 상대적으로 낮고, '탐험'을 추구한다는 것 때문에 알바족의 '현실도피'를 사회 전체주의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도 있다.

문학이라는 것이 특수를 통해 보편을 지양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특수가 지닌 차이 또한 드러냄에 의미가 있다고 할 때, 또 문학-담론 또한 수용자에게 도달해야지만 가치가 있다고 할 때, 우리 문학이 나아가야할 길 중 하나는 분명 이미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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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10-1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어냄--->드러냄
오랫만이에요. 좀 자주 뵈요^^

기인 2007-10-17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감사^^ 네ㅎㅎ 제가 정신 좀 차려야 할터인데;;;
 
디지털 마니아와 포비아
박은희 엮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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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 ‘교과서’들 중 상당수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을 연구하여 풀어놓은 것들이 있는데,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상당수가 그러하다. 결국 우리가 사회에 대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경험적 연구로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영주의 「디지털 세상의 이방인, 노인」은 디지털 시대에 대부분의 노인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작 노인들이 구미디어에 의존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가 정작 탐구거리이지 않는가. 이 글의 문제의식은 현 세상에 있어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삶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 있고, 대부분의 노인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서 디지털 정보, 문화로부터 배제되고 있고, 이러한 배제는 정치 사회적인 소외, 문화적인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회복지와 더불어 디지털 복지가 고민되어야 하고, 그 방법은 노인 생활의 많은 시간을 디지털적인 문화의 양식으로 바꾸어야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허한 주장이고 문제의 분석도 단순하다. 노인이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지털 세상에서 디지털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논리이다.

안정임의 「디지털 빈곤」이라는 그래도 보다 폭넓은 주제를 좀 더 탐구할만한 개념들로 소개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보인다. 디지털 빈곤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디지털에 접근, 이용이 힘든 집단은 디지털 세상에서 일상적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며 이는 디지털로 제공되는 사회적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디지털 ‘접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만족할만한 접근’인가 아닌가이고, 이 기준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터넷 보급자와 이용자 비율이 높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이용하는 수준이나 만족도가 같을 수 없다. 정보사회에서 소득, 지역, 연령, 교육 수준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정보 격차 및 정보 빈곤층의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소유 여부가 평등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디지털 사용능력이 평등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걸 어떤 수준에서 ‘교정-재분배’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기는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이 디지털 시대에 빈곤을 이야기하면 공허할 뿐이다.


또 이 글은 2003년도 BSA(British Social Attitude)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다수(51%)는 ‘관심이 없어서’이고 28%는 ‘기술이 서툴러서’, 29%는 ‘컴퓨터나 인터넷 구매 비용이 없어서’사용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조사가 디지털 격차의 발생 원인이 단지 외부적 환경 여건이 아니라 내면적 태도 및 인식과 관련있음을 시사해준다고 결론 내린다.


   매우 단순하게 외부-내면을 나누는 것인데, 예를 들어 대다수 저학력 노인층이 펀드나 주식구입을 하지 않고, 부동산 투자할 돈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은 우려하지 않는다. 이 주식이라는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가 우습게 얻어지고 또 잃고,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일반 소비자에게 피해가 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식포비아’- ‘재테크포비아’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이런 지식과 디지털 지식의 차이는, 삶에 유용한 정보/기술의 습득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디지털 지식/기술’의 포비아에는 더 우려하는 것일까. 디지털 세상에 이것이 근본적인 세상에 접속할 수 있는 지식/기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고, 사실은 다른 (예를 들어 주식/재테크 기술) 기술/지식도 마찬가지의 불평등을 낳는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그래서 디지털 빈곤은 미디어와 정보 확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디지털 정보와 미디어가 개인의 일상생활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 표현이나 사회적 참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라는 것을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정보와 원하는 서비스를 얼마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가라는 점이고, 이를 위해 기본적인 미디어 접근과 이용능력, 리터러시가 요구되는 것이지, 모든 계층이 디지털 격차의 상위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글의 결론을 인용해본다.

각 집단은 자신의 환경과 경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다를 수 있고 사회는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들이 상이한 목적에 따라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디지털 빈곤’은 디지털 소외, 디지털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보다는 ‘디지털 차이’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281)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나이브한 본질주의로 불러야할지, 글의 목적 자체가 교과서이기 때문에 훈장님 소리로 끝맺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꽤 흥미로운 지적들을 한 것들이 전혀 쓸데없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런 사회과학 ‘교과서’는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한 개별 주체/집단이 디지털 이용을 만족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따지면서, 이 개별 주체/집단과 구조 속에서 발생한 필요를 ‘그들’의 목적으로 상정하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각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있고 ‘사회’는 이를 인식하고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라는 것이다. ‘사회’라는 게 뭔지, 알 수 없는 추상적 집단인 것 같은데, 정치사회인 국가 시스템 + 시민사회적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고 넘어가자. 우선 자신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라는 것도 애매하고 사실 각 집단이 원하는 것이 충돌할 수 있다. (계급이라는 개념이 왜 나왔을까) 그것을 ‘사회’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있는가. 이것을 ‘차이’라는 중립적 개념으로 현상을 호도해서, 노인들이 디지털 기술을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그들의 ‘주체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게 소외나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사회’가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면 말이다. 결론을 곱씹을수록 어이없다.

이 책을 읽으면 좋을 사람: '디지털 세상'에 관심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새내기들.

ps. 이 책의 목적과 다르게 너무 신랄하게 비꼬았다면 죄송. 그러나 내가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서 비판한 것뿐이니 그것도 고려해야되지 않겠소. 또한 편저이기 때문에 간간히 꽤 읽을만한 글도 있었다는 사실. 단, 내가 맡은 부분이 이 두 글이었으니 어찌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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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9-0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리뷰네요. 노인들이 디지털에 관심이 없는 건 둘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먹고 살 만하므로 아날로그적으로 살더라도 그 비용에 불편이 없거나,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디지털에 관심돌릴 여유도 없거나.

기인 2007-09-0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생각해보면 또 그러네요~ 결국 그 사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쫌 공허한 내용이라서 실망했어요 ^^;
 
악마의 위트 사전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예원 옮김 / 함께(바소책)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스스로 유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애인이 내가 사실은 별로 안 웃기다고 해서 최근에 놀랐다. 그녀는 나랑 있을 때 표정은 항상 웃는 표정이었기 때문. 그냥 그녀가 착한 거였다. -_-;; 흐음..

여튼, 쫌 웃긴 이야기 없을까 해서 이 '악마의 위트 사전'을 집어들었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부 악마의 위트는 전혀 웃기지 않지만, 2부 신 이솝우화나 3부 신 낡은 톱에 새 톱날 -우리 시대에 유용한 옛 우화들는 꽤나 웃기다. 패러디의 묘미로 이솝우화의 '지혜'를 유머로 바꾼다.

예를 들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거북이는 단지 토끼를 열라게 뛰게 하기 위해서 내기를 해서 엉금엉금 기었는데, 어느 지점에 가보니 토끼가 자고 있어서 열나게 기어서 결승점에 도착하니, 결승점에서 심판을 보고 있는 다람쥐 왈, 토끼는 벌써 통과했고 너 뛰게 하기 위해서 다시 그곳에 돌아가서 자는 척 한거야. 라는 식.

상황을 떠올려보면 웃기고, 원래의 이야기의 '지혜'를 비꼬는 '삶의 지혜'또한 일면 통쾌하다. 그러나 이 책의 70%인 1부가 안 웃긴 것이 참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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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기인님 그냥 봐도 별로 안웃길거 같은데 =333

기인 2007-08-2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ㅎㅎ

마늘빵 2007-08-29 21:44   좋아요 0 | URL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