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마니아와 포비아
박은희 엮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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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 ‘교과서’들 중 상당수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을 연구하여 풀어놓은 것들이 있는데,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상당수가 그러하다. 결국 우리가 사회에 대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경험적 연구로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영주의 「디지털 세상의 이방인, 노인」은 디지털 시대에 대부분의 노인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작 노인들이 구미디어에 의존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가 정작 탐구거리이지 않는가. 이 글의 문제의식은 현 세상에 있어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삶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 있고, 대부분의 노인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서 디지털 정보, 문화로부터 배제되고 있고, 이러한 배제는 정치 사회적인 소외, 문화적인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회복지와 더불어 디지털 복지가 고민되어야 하고, 그 방법은 노인 생활의 많은 시간을 디지털적인 문화의 양식으로 바꾸어야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허한 주장이고 문제의 분석도 단순하다. 노인이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지털 세상에서 디지털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논리이다.

안정임의 「디지털 빈곤」이라는 그래도 보다 폭넓은 주제를 좀 더 탐구할만한 개념들로 소개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보인다. 디지털 빈곤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디지털에 접근, 이용이 힘든 집단은 디지털 세상에서 일상적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며 이는 디지털로 제공되는 사회적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디지털 ‘접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만족할만한 접근’인가 아닌가이고, 이 기준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터넷 보급자와 이용자 비율이 높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이용하는 수준이나 만족도가 같을 수 없다. 정보사회에서 소득, 지역, 연령, 교육 수준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정보 격차 및 정보 빈곤층의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소유 여부가 평등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디지털 사용능력이 평등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걸 어떤 수준에서 ‘교정-재분배’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기는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이 디지털 시대에 빈곤을 이야기하면 공허할 뿐이다.


또 이 글은 2003년도 BSA(British Social Attitude)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다수(51%)는 ‘관심이 없어서’이고 28%는 ‘기술이 서툴러서’, 29%는 ‘컴퓨터나 인터넷 구매 비용이 없어서’사용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조사가 디지털 격차의 발생 원인이 단지 외부적 환경 여건이 아니라 내면적 태도 및 인식과 관련있음을 시사해준다고 결론 내린다.


   매우 단순하게 외부-내면을 나누는 것인데, 예를 들어 대다수 저학력 노인층이 펀드나 주식구입을 하지 않고, 부동산 투자할 돈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은 우려하지 않는다. 이 주식이라는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가 우습게 얻어지고 또 잃고,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일반 소비자에게 피해가 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식포비아’- ‘재테크포비아’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이런 지식과 디지털 지식의 차이는, 삶에 유용한 정보/기술의 습득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디지털 지식/기술’의 포비아에는 더 우려하는 것일까. 디지털 세상에 이것이 근본적인 세상에 접속할 수 있는 지식/기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고, 사실은 다른 (예를 들어 주식/재테크 기술) 기술/지식도 마찬가지의 불평등을 낳는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그래서 디지털 빈곤은 미디어와 정보 확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디지털 정보와 미디어가 개인의 일상생활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 표현이나 사회적 참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라는 것을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정보와 원하는 서비스를 얼마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가라는 점이고, 이를 위해 기본적인 미디어 접근과 이용능력, 리터러시가 요구되는 것이지, 모든 계층이 디지털 격차의 상위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글의 결론을 인용해본다.

각 집단은 자신의 환경과 경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다를 수 있고 사회는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들이 상이한 목적에 따라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디지털 빈곤’은 디지털 소외, 디지털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보다는 ‘디지털 차이’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281)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나이브한 본질주의로 불러야할지, 글의 목적 자체가 교과서이기 때문에 훈장님 소리로 끝맺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꽤 흥미로운 지적들을 한 것들이 전혀 쓸데없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런 사회과학 ‘교과서’는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한 개별 주체/집단이 디지털 이용을 만족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따지면서, 이 개별 주체/집단과 구조 속에서 발생한 필요를 ‘그들’의 목적으로 상정하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각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 있고 ‘사회’는 이를 인식하고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라는 것이다. ‘사회’라는 게 뭔지, 알 수 없는 추상적 집단인 것 같은데, 정치사회인 국가 시스템 + 시민사회적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고 넘어가자. 우선 자신이 원하는 디지털 활용의 목적이라는 것도 애매하고 사실 각 집단이 원하는 것이 충돌할 수 있다. (계급이라는 개념이 왜 나왔을까) 그것을 ‘사회’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있는가. 이것을 ‘차이’라는 중립적 개념으로 현상을 호도해서, 노인들이 디지털 기술을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그들의 ‘주체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게 소외나 배제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사회’가 ‘적절하고 창의적인 디지털 이용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면 말이다. 결론을 곱씹을수록 어이없다.

이 책을 읽으면 좋을 사람: '디지털 세상'에 관심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새내기들.

ps. 이 책의 목적과 다르게 너무 신랄하게 비꼬았다면 죄송. 그러나 내가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서 비판한 것뿐이니 그것도 고려해야되지 않겠소. 또한 편저이기 때문에 간간히 꽤 읽을만한 글도 있었다는 사실. 단, 내가 맡은 부분이 이 두 글이었으니 어찌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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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9-0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리뷰네요. 노인들이 디지털에 관심이 없는 건 둘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먹고 살 만하므로 아날로그적으로 살더라도 그 비용에 불편이 없거나,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디지털에 관심돌릴 여유도 없거나.

기인 2007-09-0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생각해보면 또 그러네요~ 결국 그 사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쫌 공허한 내용이라서 실망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