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 현대소설작품강독 수업이었는데, 하루 특별 강의를 했다. '굿빠이 이상'을 읽고 거의 까무라치기 직전까지 같던 나로서는, 마냥 좋았다. 질문도 했던 것 같은데, 질문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했던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문장'에 대한 그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이 노력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단편집의 첫번째 소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드러난다. 이 소설의 첫번째 문단을 보자.

나무 한그루.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그루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오름차순으로, 혹은 내림차순으로 바뀌는 디지털 숫자들을 바라보며. 아니면 새벽 공원길을 달려가다가 길 옆 벤치에 발을 올리고 풀린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땅거미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 저녁의 조각구름들이 초승달을 스쳐지나가듯. 문득 문득.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슬맺힌 교복 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이며 국군서울지구병원 담벼락 밑에서 각자 누런 봉투 안에든 자신의 엑스레이 필름을 반쯤 꺼내어 햇살에 비춰보던 사병들의 찌푸린 주름, 혹은 서울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27호 윤보선 고택 돌죽담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녀를 바라보며 "방 보러 온다던 새댁이유?"라며 환하게 반기던 어느 할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꽃무늬 같은 것들에 대해.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제 손톱을 가지런히 세우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듯. 문득 문득.

총 11개의 분절된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 문단은 단 한번만 '~다'로 끝난다. 이 문단을 처음 읽었을 때, 내용이 쉽게 머리 속에 드러오지 않았다. 두어번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에 계속 집중을 할 때에만 의미가 머리 속에 드러온다. 이러한 집중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의 문장들은 오묘하게 두세번 읽어야만 뜻을 독해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만연체 때문일까. 독자의 빠른 독서를 방해하며 문장을 읽으며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문장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까닥거리는 그녀의 오른쪽 옆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언젠가 함께 변산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올라탄 밤의 고속버스 독서등 불빛이 떠올랐다. (11)

금요일 저녁, 눈이 휘둥그레진 쌜러리맨들에게 손을 흔들며 하늘을 날거나 가슴이 뻥 뚫린 사내와 느낌없는 키스를 나누는 꿈을 꾸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11~12)

두 번째 문장 같은 경우, 갑작스럽게 돌출된 의미들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 문장으로 쉽게 건너가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주의깊은 독서를 유도하는 문장들과 함께,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과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더욱 그의 소설을 낯설게 한다.

자리에 앉아서 한참 졸다가 종로3가역에서 갑자기 눈을 떴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맞은편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국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3)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인데, 소설의 환상적 효과에 거리를 두게 하는 위와 같은 문장들이 존재한다. '정말 거짓말처럼 맞은편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라고 쓰고는 '정말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말이다'라고 하여 자신이 쓴 '말'자체에 대해서 논평을 한다. 즉 이 때는 '1인칭 주인공'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다고 가정된 이' 층위의 말이 갑작스럽게 돌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지점은 이 소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진열대에 놓인 한반도 입체지도나 한라산 등반지도 따위를 훑어봤다. 이윽고 남자가 지도를 건네면서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 때, 끝나는 법이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는 웃으며 "방금 장마가 언제 끝날까라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옆구리에 낀 채,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왔다. (15)

여기서 '나'는 혼잣말을 가끔 하는 사람이라고 그 전에 밝혀져 있어서 여기서 '나'가 혼잣말을 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보는 누락되어 있고 '나' 또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남자'에 의해 환기된다. 여기서 '나'는 일인칭 주인공이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사람이지만, 소설 속의 현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는 못한 셈이 된다. 그런데 앞서는 '1인칭 주인공'='글을 쓰고 있다고 가정된 이'로 도출이 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 쓰여진 문장들의 성격에 대해서 의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소설적 환상은 '소설적 과거'로 쓰여짐에도 독자가 읽으면서 마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문장들을 읽는데에서 도출된다. 그런데 앞서 '글을 쓰고 있다고 가정된 이'가 돌출되면서 그 환상은 깨어진다. 그런데 바로 위의 문장들은 '글쓰는 층위'가 사라지고 다시 소설적 환상이 확립되어 마치 주인공이 보고 있는 '현재'를 그 순간 묘사하는 듯한 환상이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들을 바탕으로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은 과연 우연의 연속인가 아니면 필연적 인과법칙에 따르는 것인가. 역사는 어떠한가. '나'가 전처와 함께 걸었던 행적의 중심에 있던 '나무'는 박지원, 갑신정변 등의 우연과 필연이 엇갈린 현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 작가가 마지막에 제시해 놓은 나무의 모습이 은유적인 답이 될 것이다.

등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돼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27-28)

삶이란,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두 가지 처럼 이어져서 서로를 가까스로 버티면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 어느 지점부터 '우연'이라 '필연'이라 일컫지만, 그 또한 서로에게 지탱되면서 이어져나가는 것이고 결국 뿌리는 '우연'도 '필연'도 아닌 그저 '삶' 또는 '역사'라는 '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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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구판절판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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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문학.판 시 7
김민정 지음 / 열림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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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시집의 첫번째 시를 읽고 충격이 있었다. 잠들기 직전에 읽고, 시집을 덮었다. 그 다음날에야 시집을 다시 집어들었는데, 결국 나는 첫번째 시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이 시집의 첫 시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이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시를 보자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

 

'그린'과 '기린'의 관계는 '그림'과 '기림'의 관계와 같다. 'ㅡ'가 'ㅣ'로 바뀐 것. 이 제목을 발음하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끼게 된다. '그린'과 '그림'의 관계는 '기린'과 '기림'의 관계와 같다. 'ㄴ'이 'ㅁ'이 되었을 뿐. 이러한 관계는 거울을 떠오르게 한다. 이는 '안 닦이는 창문', '얼룩진 겹겹의 거울'이라는 시구로도 확인된다. 시인의 언어적 감수성과 재치!

식민지 시대의 詩人 이상이 말한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처럼 소통할 수 없음은 '계란이 터졌는데 아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로 변주된다. 거울 안의 너를 닦아도 거울 밖에 터진 계란을 묻은 나는 닦이지 않는다. 이러한 터진 계란은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변주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이 시인이 계속 되풀이하는 성적인 코드를 보여준다. 이는 다시 '은총의 고문'으로 변주되어 性적인 것과 聖스러운 것의 등가성이라는 말장난스럽고, 어찌보면 '古代的' 인 상상력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 어울리는 것은, '발랄한 폭력성'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거북 속의 내 거북이) '욕창으로 썩어가는 눈알'(다시 무정란 속으로) '이발 쑤시듯 식칼로 배꼽 후비길' (댁의 엄마는 안녕하십니까?)등등의 신체적, 성적 폭력이 발랄한 어조로 반복된다.

다시 첫시로 돌아가자면 마지막 연에 가서 터진 계란, '팬티의 녹물'은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로서 판가름된다.

이러한 혼란스럽고, 性과 聖이 혼용되고, 언어유희적인 시를 얼굴로 삼고 있는 이 시집은 일관적이게 자신의 얼굴을 되풀이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 시를 '얼굴'로 삼은 이유의 전부일까. 아니, 이 시 자체가 이 시집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기린 그림'을 기리는 이 시에서 '기린 그림'이란 무엇인가? 바로 언어라는, 시라는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속의 '빌어먹을 나'가 바로 그것이다. '기린'을 그렸지만, 이는 기실 '나'라는 것. 이 '나'는 겹겹의 거울 속에 시라는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 즉,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시'라는 '은총의 고문' 속에서 변형된 시인 김민정.

이는 시라는 장르자체의 한계이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보여준다. 시란 본질적으로 1인칭 독백체이며, 시인의 내면을 드러나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시'라는 언어를 통과하며 그 내면은 묘하게 뒤틀리고 변형될 수 밖에 없다. 시인은 '언어'라는 주어진 '상징계'를 활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징계'를 교묘하게 비틀고 전유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기타 일반인들의 '고백'과 시인의 '시'가 다른 결정적 지점. 결과적으로 이 시인은 자신의 시를 보고 그 뒤틀려진, '겹겹의 거울' 속에서 '은총의 고문'을 받은 기괴한 쌍둥이를 목격하고 이를 시화 한것을 이 시집의 첫머리에 붙인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이라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시론이라 할법하고, 식민지시기 李箱을 우중충하게 보이게끔 하는 권두시. 권두시의 역할대로, 이 시집을 드러가게 해주는 훌륭한 대문 역할을 해주고 있다.

겹겹한 거울 속의 발랄한 폭력성!

젊고 발랄한 시집과 시인의 등장.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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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문학.판 시 7
김민정 지음 / 열림원 / 2005년 5월
구판절판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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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매스컴과 현대사회'라는 수업을 들었다. 속칭 '매현사'라고 하는 수업이었는데, 꽤나 인기 수업이어서 100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들었다. 이 수업과, 이 수업에 추천한 책들을 읽어나감으로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필터로서의 '매스미디어'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된다는 '사실'은 '사실'로서 신문과 뉴스를 접해왔던 나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는 큰 자본이 투하되는 일종의 '사업'이다. 때문에 이윤을 발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문, TV의 주된 이윤은 어디서 올까? 독자들의 구독료, 시청자들의 시청료? 물론 아니다. 매일 열장이 넘는 신문들이 한 달에 2만원도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몸값 비싼 연예인들이 하루 온종일 나오는 TV는 시청료를 내본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업'은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

물론 광고료이다. 때문에 신문이나 TV는 자신의 주수입원인 대기업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의 '자매사'인 중앙일보는 말할 것도 없고, 메인 주간지들은 대기업이라는 '주인'을 비판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공중파는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국가가 상당한 양의 주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TV광고주들의 대부분이 또 대기업이다. 이렇게 우리는, 국가와 대기업들의 입김이 상당정도 삼투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문의 독자나 TV의 시청자는 제한되고 가공된 정보들 속에서 서서히 그들의 입맛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고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인 매체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에서의 '알 자지라'방송 같은 매체, 또는 적은 자본으로 중요 일간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정론들을 피력하는 '말'지나, 인터넷의 '오마이뉴스', '딴지일보'와 같은 통로는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최근 개봉된 조지 클루니 감독의 'Good Night, and Good Luck'은 이러한 대중매체의 외부적 압력과 이에 맞서는 언론인들의 고투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빨갱이 열풍'의 '매카시' 상원의원과 대결하여 마침내는 그의 악질적인 마녀사냥 수법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심정은, 자본주의나 정치권력과 언론의 유착에 대한 폭로보다는 결국은 미국의 장점과 그 이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지 않았나 하는 심정 때문이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라는 명저는 미국인들의 이상을 '미국 혁명'이라는 원초적인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미국의 선거를 보면서 계속 골때리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각 주마다 상원의원 2명과 인구수 비례 하원의원을 뽑는 상원-하원 제도, 각 주마다 투표를 해서 몰아주기를 통해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 각 주마다 법체계가 달라서 살인범이 주 경계를 벗어나 사형제도가 없는 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 등등, 도저히 3천리 국토의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이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상충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미국의 주들에서 총기가 허용되는 이유는 이러한 '개인'의 자기방어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라는 것이다.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에서도 이러한 점이 표나게 강조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침해될 수 없는 권리를 부인하는 이가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200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언론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국의 이상을 강조하고 있으니 갑갑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청년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아름답게 묘사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당시 프랑스 구권력을 비판 견제하며,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이상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2005년 시점에서 조지 클루니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라크 침공의 온갓 거짓들과 고문들을 은폐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부쉬 행정부를 꼬집은 것이 의도였다면, 이 영화는 언론인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들의 투쟁과 외부의 압력에 더 초점을 맞춰야 되지 않았을까?

또 개봉된, 조지 클루니가 출연한 영화 '시리아나'를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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