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롤랑 바르트의 'to write' is an intransitive verb'('쓰다'는 자동사이다) 라는 글에 대한 대답으로서 제출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한국에서의 '쓰다'는 타동사라고 나와있습니다.


예)

너 요즘 뭐해?

응? 나 글 써.


사실 '글쓰기'라는 조합(글+쓰기)자체가 한국어에서 '쓰다'가 타동사임을 보여줍니다. ‘쓰다’의 명사형은 ‘쓰기’인데 ‘쓰기’가 단독적으로 쓰이지는 못합니다. '글'은 쓰다라는 동사가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 나타나는 결과물 일반을 지칭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글 써’ 나 ‘글쓰기’라고 말합니다. 즉 ‘쓰다’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쓰기’라는 형태로 명사화됩니다.


너 요즘 뭐해?

*응? 나 써.


이것은 한국인 화자에게 전혀 말이 되지 않지요.


영어 wirte와 비교해보면 흥미롭네요.

What do you do for living?

Oh, I write.. (바르트 식의 설명으로 하면 이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위의 한국어 상황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네요.)

Oh, I write novels (그러나 이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write는 자동사와 타동사적 용법 둘 다 있네요.


외국 이론서들을 보면, 이렇게 나쁘게 말하자면 '말로 장난치기' 혹은 '어원가지고 마구 우기기' 등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의 언어로 '사유' 하면서 '언어'가 도구 이상으로 사유의 본질에 가깝다는 전제 아래에 이러한 사유들을 전개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에서 '쓰다'가 타동사인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바르트 식으로 혹은 푸코처럼 '사유' 해 봅시다. 우리가 좀 더 역사적으로 탐구해본다면 고대부터 '쓰다'가 타동사였는지 예전에는 자동사였는지를 탐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분명 '쓰다'라는 행위는 일부 특권층에게만 허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의 '쓰다'는 '타동사'로서의 '쓰다' 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쓸 생각을 했지, 그냥 '쓰다'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요. 중요한 공문서나 상소문 같은 것이나 '쓸' 생각을 했겠지요.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 전체에 있어 '쓰다'는 고대에는 '타동사' 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쓰다'가 자동사로도 사용되기 시작하는 조짐은 분명 문자를 사용하는 일부 특권층에서 일어난 미묘한 일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문학사에 '최초의 서정시' (문학사에서 '최초'라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고 약간은 우스꽝스럽기도 한 것이지만.. 또 <황조가>가 서정시가 아니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여하튼 '최초의 서정시'라 가정된 x를 '황조가'라고 부른다고 해도 좋습니다.)라 불리는 '황조가'와 같은 것. 즉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다'라는 행위를 시작한 것 말입니다. 물론 이 차원도 벗어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겠다는 자각도 없는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동사'로서의 글쓰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서정시는 일정부분은 이러한 자각도 없는 글쓰기에 근접합니다.


고대 서구는 어떠했을까요. 이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대 서구'하면 찬란했던 페리클레스 이후의 그리스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마찬가지로 '쓰다'는 타동사로서만 기능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수입한다고 해도, 이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고 일부 특권계급의 매우 중요한 업무를 위해서만이 '쓰다'라는 동사가 기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쓰다'라는 동사가 언중에게 '자동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우선 종이의 가격이 매우 하락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중 중 일정 수 이상이 보통교육을 받고,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그들이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될 것임으로 분명 '쓰다'라는 것이 '자동사'로 받아들여지고 사용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이러한 설명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즉 소위 우리 문학사에 있어 ‘근대’라고 하는 시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언중 중 일정 수 이상이 보통교육을 받고, 여가시간의 증대(이재선 선생님에 따르자면 등유값 하락 등)로 ‘근대문학’의 수용자 층이 늘어났다고 파악됩니다. 같은 원리로 본격적인 전문적 작가가 아니더라도 ‘습작’을 해보는 사람들도 늘어났을 것입니다. 굳이 ‘습작’이 아니더라도 낙서나 ‘끄적임’이 이때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언중에게 ‘쓰다’라는 것이 ‘자동사’로서 인식되고 사용될 수 있는 물적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즉, ‘근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동사’로서의 글쓰기가 성립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확보된 것입니다. 그저 ‘끄적여’ 보는 것으로서의 ‘글쓰기’의 탄생. 자동사로서의 ‘쓰다’의 탄생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아도, 한국인 화자로서는 아무래도 ‘자동사’로서의 ‘쓰다’라는 것은 어색합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새는 울고, 사람은 쓴다’라는 식의 말이 어색한 것입니다. 영어로 바꾸어보면 “Birds fly, Men write"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장으로 바꾸자면 "Birds fly, Humans write" 정도)정도 이지요.


그래서인지 바르트식의 단어 가지고 하는 사유는 한국어로 번역되고 한국어만으로 사유하는 한국인 화자에게는 어색합니다. 어쩌면 이는 ‘어색’의 차원이 아니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르트는 ‘write'의 자동사적 용법을 가지고 그 자체로 목적하는 ’쓰기‘라는 개념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 화자도 그렇게 사유할 수 있지만, 바르트처럼 매끄럽게 사유할 수는 없습니다. 바르트의 사유는 매우 매끄럽지요. ’write'가 자동사라면 자동사인 이상 당연히 이는 목적어가 필요 없고 주어 자체만의 움직임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야말로 "Birds fly, Men write“ 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앞의 “새는 울고, 사람은 쓴다”라는 말을 아포리즘적으로는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물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도대체 뭘 쓰냐고?’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도출됩니다. 우리가 앞서 사유해본바, 모든 ‘쓰다’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타동사’였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인류 역사의 신화적인 ‘시작’때를 상정하고 이를 상상하는 것은 제외하고)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야지 언중들이 ‘쓰다’를 ‘자동사’적인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됩니다. (물론 고대나 중세시대에 일부 엘리트층들이 ‘쓰다’를 자동사적인 용법으로 사용하고 이들 사이에서는 이 단어가 자동사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쓰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현대 한국어에서 ‘쓰다’는 ‘타동사’로 확고하게 굳어졌고, 영어나 프랑스어에서 이는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요. 엄청난 질문이라서, 또 우리의 관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어학상의 질문이라서 대답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문학의 ‘정론성’의 일부는 이러한 ‘쓰다’의 ‘타동사’적인 성격에 아주 일부는 기인한다는 것은 너무 나아간 해석일까요? 만일 바르트가 오버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러하겠지요.


바르트가 ‘write'의 ’자동사‘ 적인 용법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글쓰기‘론을 전개해나갔듯이, 우리는 태연하게 한국어의 ’쓰다‘는 결코 ’자동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글쓰기‘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쓸 수밖에 없노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때문에 우리는 계속 ’무엇‘을 쓰느냐 ’무엇‘을 써야만 하느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얼리즘‘ 끝난지가 언젠데, 한국은 아직도 그 소리 하고 있느냐, 라고 했을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유일한 분단국가‘ 운운 말고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쓰다’는 ‘타동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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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문학동네 시집 35
서동욱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품절


사라진 길 -책에 대해서

송도의 서경덕이 죽었을 때
그의 서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죽음은 마침표 박힌 기념비를 세우고 --화담집(花潭集)
늙은 혈관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던 링겔 줄 따라가면
그 먼 끝에 서 있는 저자(著者)의 비밀 도서관

수없는 가을 오후마다 바스라질 듯한 햇살이
넘기는 책장들 사이에 스며들었고 화담의 쌓여가는
나이와 추억들이 서가 속에 정성 들여 미로를 그렸다
배회하던 송도의 거리,
기생들과 술래잡기하던 날의
어지러운 발자국들, 우매한 삶의 이 모든 페이지마다
엿보며 키들거리던 이웃의 종년들

그는 사라졌고
그가 다니던 서가 속의 길들은 찾을 길 없네
죽음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미궁의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종이 속의 끝없는
길들은 얽힌 실타래 한 뭉치의 배회하는 문서에 불과한 것

상여가 나가고 뭇 선비들 틈에서 막
태어나는 어린 화담집은 알 길이 없지
시(詩)가 안 되던 날
자기 자신이 어떤 미로를 헤맸고 그 길목마다
일몰은 담벼락에 어떤 모습으로 몸을 기댔고
소란스런 악사(樂士)들과 박연 폭포와
늙은 몸 위에 기마형으로 올라타던 기생들이
목숨을 끊고 싶도록 지루한 가을과 봄을
어떻게 견디도록 해주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많은 서책 속의 길과
서책 밖의 길들 뒤에 도달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우연한 종착점인지를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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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연구
이용호 지음 / 동광문화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주요한 문학에 대한 연구는 81년 김윤식 선생과 89년 박수환에 의해 <<독립신문>>의 필명 '송아지', '요', '목신' 등이 주요한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주로 '불노리'를 비롯한 초기시들과 민요시운동의 일환으로만 다루어졌다. 그 이후 90년에 위 책은 이용호에 의해 명지대학교 박사논문으로 제출된 것을 공간(公刊)한 것이다. 사실 90년에 공간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이 논문은, 그 후 12년이 지난 2002년에 공간되어 논문의 현재성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과 이 책을 대조해 본 결과, 차이점이 없다. 그런데 왜 박사논문이 책으로 바뀌는데 12년이나 걸렸을까. 알 수 없다.

이 책은 제목처럼 '주요한 연구'이다. 절반이 주요한에 대한 전기적 고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1992년 나온 심원섭 교수의 학위논문처럼 당대 사상적 배경과 주요한의 내면에 대한 정치한 고찰이 아니라, 전기적 사실의 나열에 그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주요한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이고 또 대일협력 시기는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논문은 물론 1990년 당시에는 의미가 있는 논문이었다. 일반인은 물론, 현대시 전공자들 또한 주요한은 '불노리'의 시인으로서만 기억되었고 아니면 '국민문학파'의 일원으로서 일제말기에는 친일에 앞장선 사람정도로만 그를 기억하였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산 안창호 계열로서 해방후에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을 지냈다는 것 정도. 그가 <<독립신문>>에 일제와 투쟁하는 시들을 써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를 처음으로 학위논문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분명 의의 있는 일이다. 이로써 이 '책/학위논문'은 주요한이라는 문제적 인물(왜 문제적인지는 조금 후 서술하겠다)의 초기 유학시기부터 친일로 빠지기 전까지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학위논문이 된다.

이 논문 이후에 이렇게 주요한의 전시기를 다루려고 노력한 학위논문은 찾기 힘들다. (국문과 논문의 경우이고 교육학과의 논문은 3~4개 석사논문들이 있다. 그러나 교육학과는 국문과와 접근방식도 다르고, 본격적인 국문학적 성과로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는 왜 그럴까.

주요한은 우리 근대문학사는 물론이고 근대사에 있어서 정말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호의 위 연구 이후 주요한은 연구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신시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는 일본문단에 16살에 데뷔하게 되어 중앙문단에까지 진출한 조숙한 천재였다. 공부도 잘해서 동경제일고등학교(동경제국대학 예과) 불법과에 입학 허가까지 난 상태. 1919년 주요한은 김동인과 함께 <<창조>>를 창간하고 '불노리'등의 시를 쓴 이후, 3.1운동에 귀국한다. 이어 상해로 건너가서 <<독립신문>>에 일제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는 시를 쓰면서 동시에 '민요'를 계승할 것을 주장하는 '민중시/민요시'운동에 나선다. 귀국 후에는 수양동우회(도산 안창호 계열) 운동과 신간회에 참여,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 발기인으로 구속,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이후 37년 일명 '동우회'사건으로 4년동안 공판을 계속하면서 40년 이후 주요한은 친일로 나아간다.

이러한 주요한의 행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조선적 근대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모색. 일본에서 등단한 시인이자 수재였던 주요한은 예민한 감각으로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프랑스의 시들을 수용한다. 그는 자신이 이를 한국어로 써 본 것이 '불노리'라고 고백하지만, 문제는 보다 복잡하다. '불노리' 속에 서도 잡가의 뚜렷한 영향이 있기 때문. 그리고 계속 그는 '민요'를 계승할 것을 주장하고, '시조' 창작으로 나아간다. 즉, '조선적 근대문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느냐라는 고민.

둘째, 민족국가가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문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색. 그는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편집하며 일제에 투쟁을 선동하는 시들을 쓴다. 그는 30년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문학이란 독립을 위한 선전 문학일 수 밖에 없다고 자신의 문학관을 밝힌다.

셋째, 이러한 그가 친일로 빠지게 되는 내적 논리랄까 필연성이란 무엇인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노라며 당당히 외쳤던 이광수. 주요한 또한 다르지 않았던 것. 이렇게 친일로 나아가게 되는 필연성이랄까, 내적논리는 무엇일까...

위 연구는 1990년에 의미있는 학위논문이었지만, 2002년에 출간되면서 '문제성'이 사라졌다. 이 책은 주요한의 문학과 삶이 제기하는 문제적 지점에 대한 답을 내려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미에 첨부된 주요한의 작품 발표 목록도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궁금해지는 것이, 왜 이리 늦게 공간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12년 동안 주요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들도 많이 나와서, 그의 작품 목록이 일신된 것은 물론이요. 최근 친일문학에 대한 관심과 시각의 다양화, 일제 강점기 시대에 대한 사적 고찰의 누적등은 주요한에 대한 연구지평에 있어서 지난 12년을 큰 시간적 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있는 시간은 의미있었던 학위논문이 의미를 찾기 힘든 책으로 바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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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랙 시리즈는 정말 놀랍다. 특히 일제 식민지를 겪은 한국의 입장에서 Deep Space 9 시리즈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해방정국의 한국과 너무도 흡사한 상황이다. 특히 Ep19는 전쟁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문제, 민족주의-제국주의의 문제,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연방의 도움하에 자리를 자리잡아 가고 있는 베이조 공화국. 예전 독립투사였던 키라 소령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 불타는 여장부로서 연방과 베이조 공화국을 매개할 수 있도록 우주기지에 부사령관으로 복무중이다.

 그런데 어느날 연방의 통제 하에 있는 우주기지에, 카다시안 전범이 질병 치료 문제로 들리게 된다. 이 남자는 베이조의 특수한 광산에서만 걸릴 수 있는 병에 걸려있었고, 때문에 그는 베이조의 노동자들을 유린하고 착취했던 사람에 분명했다. 남편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고, 노인을 생매장하는 등의 '활동'을 했던 그들. 키라는 그를 전범재판으로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카다시안인은 탄광에서 단순한 '서기'에 불과했다. 조사가 진행되자 그는 탄광 책임자이자 베이조인들을 살육한 인물로 밝혀진다. 그러나 더 조사가 진행되자, 그는 베이조인들을 살육한 총책임자를 자칭한 '서기'에 불과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뻔히 사형 당할 것을 알면서도, 왜 그는 자신이 탄광의 총책임자라고 밝혔을까? 그는 '카다시안 제국'을 위해서 그러한다.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믿으며, 자신이 재판에 회부됨을 통해서 카다시안 제국에도 일말의 반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다시아인들이 베이조인들에게 저질렀던 천인공노할 범죄들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됨으로서, 카다시아인들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또, 탄광 시절 베이조인들의 비명과 카다시아인들의 살육을 목도했지만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던 일개 '서기'로서의 책임 또한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전쟁 책임자로 자청한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정국의 한국의 상화과, 지금의 '한-일'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한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어언 60년이 지났지만, 식민지의 잔혹한 일제의 기억들은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민족주의적 주체로 호명하게 한다.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은 우리가 공통으로 기억하고, 또 망각하는 것을 공유함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어떠한 스포츠든 '한-일'전에 열광하며, 최근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인터넷 사이트등에서 욕설 가득한 네티즌들의 모습들.. '우리'는 식민지를 기억하며, 동시에 우리는 '지금'의 한-일 관계를 망각한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수출입 관게 5위안에 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일본의 '한류' 열풍과, 한국에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청년들. 일본을 여행하고, 일본문화를 좋아하면서도 '한-일'전과 독도문제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감을 표출하는 '우리'.

스포츠 한-일 경기의 카타르시스는 '식민지 경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 경험은 '우리'에게 열등감, 증오, 수치심, 과 일말의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열등감, 증오, 수치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정직한' '룰'에 의해서 규정되는 스포츠 공간 안에서의 경쟁이다. 국가간 대항 스포츠는 일종의 대리 전쟁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상상적으로 일본과 재전쟁을 벌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식민지 시기 일본을 대표했던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과 관련한 '신드롬' 또한 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 식민지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본의 공식적인 전쟁 책임이 일본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는 '천황'에게 물어지지 않았던 것과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공식적으로 전쟁과 식민지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더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증오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안에 있던 '친일파'들에 대한 분노로도 연결된다. 천황이 미국 신탁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승만 정권 초기 반민족특위 또한 친일파들이 정치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흩어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친일'과 '비친일'의 경계는 무엇인가. 일제 헌병대원이었다면 무조건 '친일'인가. 아니면 낮은 계급이면 '면제' 될 것인가. 면서기는 어떠한가. 변호사는? 의사는? 지식인들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고 또는 농업에 종사하며 일정부분의 소득을 총독부에 '세금'으로 낸 사람들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의 '회색지대'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느정도 양보해 둔다고 하자. '우리'는 고통과 착취를 당했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우리'는 일제에 죄를 물고, 죄값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일제 또한 의열단이나 애국청년단과 같은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 와중에 '그냥' 일본인들도 죽었다. '우리'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웠다면, '그들' 또한 '그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죄값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하지 않다. '죄'를 저지른 '법적 주체'에게 우리는 죄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체'만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라는 것은 '구조'의 효과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때, 하나의 행동은 그 전의 상황에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 또한 시냅스의 연결 등에 의한 물질적 화학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 인간은 사회구조 속에서 행위하고, 그 행위는 사회구조에 의해 '이미' 제약되어졌을 뿐이다. 기존 가정교육, 학교교육과 같은 ISA는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접하게 되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한 정보들, 사회제도 등등...

주체는 텅 비어 있을 뿐, 실체가 없는 효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쟁책임'을 한 개인에게,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칸트, 그리고 이를 구체적인 일본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는 가라타니 고진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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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터 노현정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상상플러스 올드 & 뉴'를 보기 시작하여, 이제는 매우 열심히 시청하고 있다. 오락성과 공공성을 함께 가져가려는 KBS가 성공한 프로 중 하나이다. 요즘은 이휘재의 손가락 욕이나, 노현정 아나운서의 안티들 때문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래도 꽤나 재미있으면서도 배우는 것도 많은 프로그램이다. 또, 노현정 아나운서도 무척 이쁘고 말이다.

프로그램 상에서 비속어나 외래어 대신에 '우리말'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조금 거부감도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상파 tv라는 영향력 큰 매체에서 많은 고유어들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프로그램 제목은 '상상plus Old & New'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닉 하지만.

꼭 '우리말'만을 사용하자는 것은 언어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국어 반 한국어 반으로 대화하는 몇몇 '인테리'들도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화자본과도 연결될 것이고 일종의 '구별짓기'로 작용하는 것 같다.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법전과 의학용어들. 일본식 한자어로 무장(?)한 법전과 영어와 라틴어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의학용어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또 최근에 이르러서는 작은 성과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세대간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미제'라는 단어 때문에 최근에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세대'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J군은 20대 중후반의 청년이고,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J군의 아버지는 50대 중반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자이다.



이런 J군이 오랜만에 집에 갔다. 딴에는 효도를 하겠다고 아버지와 같이 장도 보고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꿀 미제야"

J군은 순간 당황했다. '미제(米帝)'라는 용어를 아버지가 쓰시다니. 50대중반 한나라당 지지자요, 삼성맨이며 ROTC 장교 출신의 아버지가 '미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쓰다니. 이 용어에 대한 추억은 한 96학번 선배가 커피는 미제꺼니 마시지도 말아야한다는 말을 80년대 학번 선배에게 들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새내기 시절의 나에게로 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순간 놀랐던 마음, 이후 쇼핑이 끝나고, 이틀 집에서 묵고 다시 자취하는 방으로 돌아가서 곰곰히 따져본 이후에야, '미제'라는 것이 '美製'인 줄을 알았다.

아. 우리 세대에게 있어 '미제'라는 말은 美製가 아니라 米帝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자로 인식되었던 것.

이렇게 쓰는 단어에서부터 아버지와 J군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갭이 있다. 어찌보면 가장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는 부자관계. 언젠가 J군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가 전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단정하시면 화를 내기까지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심연을, 우리는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이제 조금 있으면 5.31 서울시장 선거.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美製인가, 米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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