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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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수아는 홀로 길을 가고 있다. 그녀는 도도하고 대중을 경멸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모순된 존재, 그래서 그녀는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145면)


배수아가 추구하는 것은 음악이다. 혹은 그 'M'이다.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그 무엇. 어떤 잉여이자, 존재. 순수하게 즉자적 존재. 그러나 배수아는 글을 쓴다. 글쓰기 행위 자체는 분명 대자적 존재로서의 배수아를 설정한다. 음악을 추구하지만, 해석되지 않는 표현을 추구하지만, 즉자적인 비상을 추구하지만, 글을 쓰고, 해석되어지는 표현을 만들어내고, 대자적인 존재에서 비롯하는 고통이 나타난다.


홀로 울리고 의미라는 틀에 갖히지 않고 떨림으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환희.

사실 이는 배수아적인 대중에 대한 경멸로는 얻을 수 없다.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매커니즘을 경멸하고 제도를 부정해 보았자, 이 또한 의미로 남을 뿐이다. 울림이 퍼져나가기 위해서 이는 함께 진동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소리는 공기를 매질로 하여 전달된다. 같이 진동하는 공기가 없다면,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수아의 안쓰러움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녀는 홀로 진동하려 하지만, 홀로 진동할 수 없다. 그녀는 대중을, 시스템을 경멸하지만, 그 대중 속에 시스템 안에 있다. 그녀가 진동하기 위해서는(적어도 글로서),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과 시스템과 같이 진동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가지 상반되는 욕구가 꿈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일이란 다름아닌 고립된 삶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사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벽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더이상 나를 자극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고립이다. (146면)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음으로 글을 쓴다. 고립된 삶이라 하지만,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무엇보다도 글을 쓴다. 이는 전혀 고립이 아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할 때의 상처가 두렵다. 상투적이고 소아병적인 나르시즘적 사춘기 고백을 도도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출판시장에 글을 토해놓고 나름의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는 배수아의 글은 '고립'이라 하기 힘들다. 왠만한 '대중'은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배수아는 나름의 문화 권력을 획득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립이라 한다. 고립이라고 하는 표정 자체가 안쓰럽다.


나는 군중의 한 명으로 앉아, 예전에는 나에게 어떠한 무리도 없이 스며들어 나를 통과하고 그대로 흔적 없이 사라져주었던 모든 것들이 마치 거리의 낯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던지는 오물처럼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게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지루할 만하면 적당히 튀어나오는 재치 있는 대사나 유머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감독이 비장의 카드로 만들어놓은 마지막의 반전에도 아무런 자극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불쾌감을 넘어 마침내 극도로 불행해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과 오락과 일상이 나에게는 심각한 불의(不義), 그 자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태양 아래서 일어나는 온갖 불의를 응시한다.....'(149면)


그녀는 '불행'해졌다. 군중과 다름에 불행하다. '기꺼이 받아들인' 고립이 아니다. 그녀는 절규하고 있다. 글을 쓰고 있다. 소통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소통은 열린 소통이 아니다. 고백이다. 그러나 진실한 고백을 위한 고백이 아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즉, 광대의 고백이다. 그 광대는 슬프고 고독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붉고 하얀 옷을 입고 새빨간 공을 굴리고 있다. 군중들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군중들을 바라본다. 외롭다.

나는 그들과 달라, 그녀는 외친다. 외치는 순간, 그녀는 고독을 느낀다. 고립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라고 '글'을 쓰는 순간,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폭로한다.


안쓰럽고 쓸쓸하다. 그러나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고독한 개인의 나르시슴적 자기 독백. 인간이 음악이 되는 길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울리는 것 외에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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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세계 체계론의 시각, 과천연구실 세미나 9 공감이론신서 7
조반니 아리기 외 지음, 이미경 외 옮김 / 공감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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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1938-1950년에 속해 있던 범주와 1975-1983이 속해있는 세계 국가들의 범주 중 한국과 대만만이 주변에서 반주변으로 이행했고 일본과 이탈리아만이 반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러한 아리기의 분석은 비록 그것이 1990년도의 것이기는 하지만, 2004년 오늘날에 와서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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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세계 62호 - 2004.가을
세계사 편집부 엮음 / 세계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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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 선생의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서영은 선생의 <먼 그대>는 참 감명깊게 봤다. 오히려 마지막 부분의 전쟁이야기가 없었더라면, 하기는 했다. 읽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허무감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이러한 거대한 주제를 파고드는 것이 훌륭했다. 그것이 후반에 전쟁체험과 연결되면서, 조금 축소되는 감이 있었다. 물론 이는 내가 전쟁세대와는 한참 떨어진, 아버지마저도 전쟁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흥길의 <장마>와 같은 소설과는 다르게 서영은의 소설은 '전쟁'이 포인트가 아니다. 그러한 존재론적 고독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당신의 자서전적인 내용이 첨가된 듯 하여, 더욱 흥미롭게 기우뚱 거리면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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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2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서영은의 단편집 <황금깃털>과 <먼 그대>를 아주 아주 잘 읽은 기억이 나요. 작품이 많지 않은 게 좀 아쉽죠. 괜히 반가워서 몇 자 적었어요.^^
 

임화, <폴테쓰파의 선언>

임화의 1926년도 글. 흥미롭다. 맑시스트 이전의 임화. 사회 진화론은 이미 이 시기에도 뿌리박혀 있었던 듯.


'우리 빈약한 여명기에 잇는 조선예단' '일본에도 잇셧스나 복잡과 몽매한 극에 잇다' '고-간'의 그림이 모양화라고 단번에 말한다면 대단한 광언갓치 생각되나' 등. 서구-일본-조선 이라는 위상이 작동되고 있다.

'녯날 고시대엔 권위잇는 상류사회의 귀부인들이 기라를 걸고 호기잇게 왕래하든 곳이엿스나 근대엔 보기에도 지져분한 하층 라전인종에 재굴로 재굴에 모번지' 라는 말에는 '귀부인-빈자'의 위상이 나타난다. 맑시스트 임화여, 너는 젊은 시절 글들을 불태웠는가?

언제나 고등학교 중퇴 임화의 폭넓은 지식에 감탄을 했는데,
프랑스 고대의 동굴 벽화를 '그림이 아마도 동굴에 장식 목적으로 벽화갓치 쓰여저 잇는 것'이라는 데는, 임화의 무식이 드러난다. 물론, 그 무식은 특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임화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것.

결국 이 글의 핵심은 '폴테쓰파'의 미술인 것. 그 미술에 임화가 매료된 이유는? 아마도 이것.

인간에 전정력의 발현을 가지고 곳 예술에 생명으로 하랴고 했다. 즉 석기시대에 '더-동'동에 벽 갓흔 훌융한 조각이 엉긴 것을 생각해 보면 고대인류에 대정력은 야수와 영지를 쟁탈하는 데 발현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고 이 대정력이 야수를 정복하고 우마 갓흔 것을 가축으로 잡아온 대승리에 광영에 취해 잇슬 때에 제작임으로 도저히 근대에 것과는 상상조차 밋치지 못할 생명잇슨 예술이 생긴 것이라고 그리엿다. 또한 '폴테쓰'파에 주장에 대체를 드러보면 풍요한 토지에 주민은 수직적 에술을 짓고 빈약한 토지의 주민은 수평적인 예술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즉 풍요한 토지 이집트 갓흔 나라에 사는 민족은 만족한 토지에 집착하고 그 토지를 직히는 데 전정력을 쓰고 잇슴으로 이집트인에 폴테쓰는 그 십자탑이나 '오레리슥크'와 갓흔 수직적 예술을 산출한 것이다. 여기서 폴테쓰파의 선언에 제일조가 된 '조각의 정력은 첨형의 산이다'란 의의는 이 수직적이란 것을 의미함이다.


사회와 예술에 대한 성찰. 너무 광범한 구분이나, 매력적이다.
최남선, 정지용이 '바다-> 산'으로 나아간 것은 무엇? 친일로의 행적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기존에는 근대 문물이 밀려오는 '바다'에서 전통의 '산'이라고 했지만, 최남선, 정지용은 결국 '민족->친일'의 구도(이러한 구도설정이 거칠게 나마 가능하다면)로 갔던 것.
어쩌면 '빈약 -> 풍요'의 도식이 가능? 그저 한 번, 들이대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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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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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때는 일본소설들을 매우 좋아했다. 히라노 게이치로, 하루키, 류 등.
대학교 1학년때는 루쉰소설이나 루쉰의 수필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원어로 읽을 실력은 없으니 번역문으로 읽었는데. 루쉰의 번역에서 나타나는 루쉰의 문체에 빠져들었다.

민중의 페르소나, 중국 민중의 페르소나, 그것을 바라보는 루쉰의 시선과 아픔.

위화를 읽으면서 이를 새삼 느꼈다.

이 소설은 '허삼관'이라는 사내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는 피를 팔아서 인생의 위기들을 넘긴 중국의 '민중'이다. 루쉰의 <아Q정전> 속의 Q가 조금 덜 풍자적으로 그려지고, 조금 더 건강한 Q라고 할까. 그리고 그의 곁에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족이 생겼다고...

허삼관은 피를 팔면서도, 혈액형을 구분못한다, 단지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인 것만을 안다. '동그라미' 이니까 쉽잖아 하고 웃는다. 마치 Q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Q로 서명할 때처럼.

위화는 치과의사였지만, 평생 남의 벌린 입만 바라보며 살기도 싫고, 출근 안해도 되는 작가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이러한 위화의 전기적 사실은 루쉰을 떠올린다.
교수형 당한 시체를 둘러싸고 웃고 있던 동포의 모습을 보고 의술이 아닌 문학으로 중국을 고치겠다던...

루쉰의 문학에서 유쾌함과 유머와 낙관적인 전망을 합치면, 위화의 '허삼관매혈기'가 도출하는 것이 아닐까!

유쾌하면서도 따뜻하다... 다만, 과연 중국의 민중들의 삶이 이처럼 따뜻하고 유쾌할지는 미지수인 듯.

바야흐로 떠오르는 중국의 신지식인층, 그들의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유쾌함과 낙관적 전망을 잃지 않기를, 이것이 행동으로 표출되기를 바란다.

중국 유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가장 크게 충격을 받는 것이, 30대전후의 젊은 그들은 이제 마우쩌뚱의 저작을 읽지 않고 <<자본론>>에는 학을 뗐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나 공산당에 대한 불만 들. 이는 구러시아권의 유학생들도 마찬가지. 영화 <굳빠이 레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여기서 '맑스주의'가 진보일때, 저기서 자본주의가 진보였던 것...

최근 한겨레에서 진행하고 있는 중국의 맑스주의에 대한 특집기사들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다시금 든다. 중국에는 다시금 루쉰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중국의 치부를 예리하고 비판하는 지성이.

그리고 이는 위화의 따뜻함 속에 빛나는 예리한 비판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젊은 루쉰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ps. 읽으면서, 참 맛깔나다 했던 부분들.
아내가 울구불구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삼관
"자네 삶은 돼지가 끓는 물을 무서워하는 거 봤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명예는 훼손될 것도 없다는 이야기.
자신의 셋째 아들보다도 어린 청년에게 모욕을 당한 허삼관. 아내가 그런 놈의 자식하고 욕을 하자
근엄하게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ps. 2. 余華라는 것. '위화'로 되어있지만 해석해보자면 '내가 바로 중화다' 라는 듯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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