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생때는 일본소설들을 매우 좋아했다. 히라노 게이치로, 하루키, 류 등.
대학교 1학년때는 루쉰소설이나 루쉰의 수필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원어로 읽을 실력은 없으니 번역문으로 읽었는데. 루쉰의 번역에서 나타나는 루쉰의 문체에 빠져들었다.

민중의 페르소나, 중국 민중의 페르소나, 그것을 바라보는 루쉰의 시선과 아픔.

위화를 읽으면서 이를 새삼 느꼈다.

이 소설은 '허삼관'이라는 사내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는 피를 팔아서 인생의 위기들을 넘긴 중국의 '민중'이다. 루쉰의 <아Q정전> 속의 Q가 조금 덜 풍자적으로 그려지고, 조금 더 건강한 Q라고 할까. 그리고 그의 곁에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족이 생겼다고...

허삼관은 피를 팔면서도, 혈액형을 구분못한다, 단지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인 것만을 안다. '동그라미' 이니까 쉽잖아 하고 웃는다. 마치 Q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Q로 서명할 때처럼.

위화는 치과의사였지만, 평생 남의 벌린 입만 바라보며 살기도 싫고, 출근 안해도 되는 작가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이러한 위화의 전기적 사실은 루쉰을 떠올린다.
교수형 당한 시체를 둘러싸고 웃고 있던 동포의 모습을 보고 의술이 아닌 문학으로 중국을 고치겠다던...

루쉰의 문학에서 유쾌함과 유머와 낙관적인 전망을 합치면, 위화의 '허삼관매혈기'가 도출하는 것이 아닐까!

유쾌하면서도 따뜻하다... 다만, 과연 중국의 민중들의 삶이 이처럼 따뜻하고 유쾌할지는 미지수인 듯.

바야흐로 떠오르는 중국의 신지식인층, 그들의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유쾌함과 낙관적 전망을 잃지 않기를, 이것이 행동으로 표출되기를 바란다.

중국 유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가장 크게 충격을 받는 것이, 30대전후의 젊은 그들은 이제 마우쩌뚱의 저작을 읽지 않고 <<자본론>>에는 학을 뗐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나 공산당에 대한 불만 들. 이는 구러시아권의 유학생들도 마찬가지. 영화 <굳빠이 레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여기서 '맑스주의'가 진보일때, 저기서 자본주의가 진보였던 것...

최근 한겨레에서 진행하고 있는 중국의 맑스주의에 대한 특집기사들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다시금 든다. 중국에는 다시금 루쉰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중국의 치부를 예리하고 비판하는 지성이.

그리고 이는 위화의 따뜻함 속에 빛나는 예리한 비판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젊은 루쉰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ps. 읽으면서, 참 맛깔나다 했던 부분들.
아내가 울구불구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삼관
"자네 삶은 돼지가 끓는 물을 무서워하는 거 봤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명예는 훼손될 것도 없다는 이야기.
자신의 셋째 아들보다도 어린 청년에게 모욕을 당한 허삼관. 아내가 그런 놈의 자식하고 욕을 하자
근엄하게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ps. 2. 余華라는 것. '위화'로 되어있지만 해석해보자면 '내가 바로 중화다' 라는 듯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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