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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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2001년?)에 나온 요상한 합본판이다. 원판에는 김훈이 임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데 여기에는 빠져있다.


본 텍스트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 텍스트도 재미있지만 본 텍스트를 읽고 난 후의 부록이 더 많은 상상과 이야기거리가 된다. 본 텍스트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이순신의 이야기이지만, 부록에는 이순신을 둘러싼 실존 역사 인물들이 짧게 평전식으로 나와있어서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본 텍스트의 힘을 얻어서이다.


김훈의 문체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다지 '압도'되는지는 모르겠다. 짧으면서도 서정성있는 문체이다.


언제나 군대라는 집단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증오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 달리 말하면 조선 해군은 그다지 싫지 않다. 패퇴하는 적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고 자신이 죽으면서 까지 몰살시킨 장군. 맥락을 무시하고 보았을 때, 내가 매우 좋아하지 않는 타입의 인물이지만 김훈은 맥락을 이순신화 하여 복원시킨다. 그가 내가 알고 있는 조선 최고의 전쟁영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와 비교해 볼때, 왜 먹물이 든 이들은 장르문학을 지금껏 경멸해왔는지 알 수 있다. 역사의식. 선인에 대한 존경심등..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을 그려냈을 뿐. 김훈은 그나마 쫌 다르다.

 

고등학교 초년때 읽었으면 세계관이 많이 변했을지도 모를 소설이다. 그렇다고 고등학생이나 대학초년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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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장어 스튜 -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지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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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충격적 비유와 상징들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삶이란 '스튜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 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 라는 것은 쁘띠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문득 '혹은 그것이 진정 소설의 기원이자 목적일지도 모른다. 쁘띠 부르주아적 세계관으로 지친 소시민들을 위무하고, 그래 이런게 삶 아니겠어... 라는 식으로'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사회변혁의 길은 그다지 투명하지 않다고 한다. 전망 부재의 시대라고도 한다. 모두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나로서 최선을 다 할 도리 밖에는 없다. 어쩌면 권지예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에 지친 소시민들을 위로하는 것, 삶이란 원래 그렇다고 말이다. 


삶이란 다 그런 것.. 이라고 상처를 덮고 스스로를 용서하며 사는 자세보다, 타자에 대한 시선과 사회에 대한 열의가 아직 나에게는 더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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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2003년 제2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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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늪에 빠져들어간, 아니 그 중심부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질척한 중국을 무대로 한 40대 여성의 이야기이다. 학생때는 중국혁명사를 공부했지만, 아이의 '세계인'이 되는 공부를 핑계로 남편과의 사실상 이혼을 담행하고 아이와 함께 둘이서 중국으로 간다.

그 곳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 40대 남성과 결혼하는 25살의 조선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범죄자의 공개총살을 목격하고 이를 목격한 한 쪽 눈은 장님이 되고 나머지 눈은 삶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래. 삶이란 바다를 건너는 나비와도 같다. 마침내 날개가 떨어지고 바다에 떨어져서 몸둥이만 남은채 힘없이 파도에 쓸려간다.
자본주의에 대다수의 약자들이 처하게 되는 현실이다. 2003현재 무수한 명퇴자들과 청년실업으로 지친 나비들. 날개를 잃었다.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의 모티프를 채용하여 뛰어난 작품을 창작해 냈다.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에서 나비를 자본주의라는 바다에 나아가는 순박한 청년들로 재해석해서 탄탄한 서사를 이끌어냈다. 전작의 권지예와 주제면에서 유사하지만, 권지예는 너무 빨리 세상에 해답을 내놓고 관조하려는 반면 김인숙은 고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좋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인숙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그럴수 없는 나비를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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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질투
타나 뒤커스 외 지음, 이용숙 옮김 / 열대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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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어이없는 계획의 일환으로 출간된 책 같다. <<그 남자의 질투>>와 함께 시리즈이다. 독일 '나름' 젊은 작가들의 단편들을 모았다. '질투'라는 주제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소설들로.

이 기획이 일군의 작가들에게 '질투'를 주제로 소설을 써주세요, 하고 묶었는지 아니면 편집자가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을 쭉 보다 보니 '질투'로 묶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전자인 것 같다.

재미있는 기획이기는 한데, 왜 하필 '질투'인가.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삼각관계'로부터 모든 이야기는 파생되었으니,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은 삼각관계의 조카뻘인 '사각, 오각' 등등으로 나아가고 조선근대문학의 선두에 있다는 이광수의 <<무정>> 또한 삼각관계 아니었겠는가.

또 그 유명한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도 말하듯이 나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따라서 '질투'는 인간의 본원적인 경쟁관계이며 투쟁인 것.

어쨌든 그래서 결과적으로 도출된 것이'그 여자의 질투 -여자들의 뜨겁거나 가증스런 혹은 무시무시한 질투 이야기'이다. 이 중 알리사 발저의 단편은 단편답게 나름의 반전과 잘 짜여진 구성, 가정법이라는 소설적 기교를 실험한다. 그러나 단지 여기서 그칠뿐. 무언가 부족하다.

'질투'란 무엇인가를 보다 중심으로 파고들어서 파헤치는 그런 수작, 질투의 끝까지 가보는 과감성 등이 필요하다. 오히려 한국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더 냉소적으로 질투의 중심에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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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시작시인선 47
박진성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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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는 시마다 다른 것일까. 박진성의 <<목숨>>을 읽는 내내, 그의 아픔이 내게 전해져 왔다. 박진성의 <<목숨>>을 읽는다는 것은, 시인을, 그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울과 발작을 말하고 (<발작 이후, 테오에게>, <나쁜 피>, <반 고흐와 놀다> 등) 시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발작 후 입원한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거나, 죽은 친지들의 기억이다. 이러한 발작을 시로 쓸 수 있는 원동력은 자신을 광기의 예술가 고흐와 동일시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반 고흐와 놀다>) 의사는 시인의 발작을 ‘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 가능성’이라고 진단하지만, 시인은 이를 유희의 계기로 삼아 반 고흐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 나선다. ‘최면치료 안락의자’는 ‘남프랑스 밀밭’이 되고, ‘노란 알약’은 ‘아를의 노란집’이 되는 것. 이렇게 ‘반 고흐-되기’를 통해 그는 고흐의 동생이자 평생 고흐를 후원해주었던, 고흐를 이해했던 유일한 당대인 테오를 호명한다.(<발작 이후, 테오에게>, <크리스틴을 그리며, 테오에게>) 자신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에게, 자신의 발작을, 우울을, 슬픔을, 외로움을 이해하는 그를.


그렇다면 바꾸어 말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박진성의 <<목숨>>과 같이 자신의 아픔, 슬픔, 고통을 토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즉, 단독자인 개인의 내면의 토로는, 그것도 그의 아픔, 슬픔, 고통과 같은 내밀한 내면의 고백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슬프고 우울할 때, 그러한 시들을 읽으면 어느새 위로 받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내 슬픔이, 내 외로움이, 내 우울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 어딘가에, 언젠가, 그도, 그들도 많이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우울해했다는 것. 우리는 단독자로 홀로 삶에 맞설 수밖에 없지만, 혼자인 것이, 혼자는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테오’를 찾아나선다는 것이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되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시 속에서 박진성이 ‘고흐-되기’를 통해 자신만의 아픔, 슬픔, 고통을 이해하는 ‘테오’에게 말을 거는 것. 시를 읽으며 ‘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을 통해서 우리 또한 ‘시인-되기’를 통해 우리만의 ‘테오’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간신히 버텨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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