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시작시인선 47
박진성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는 시마다 다른 것일까. 박진성의 <<목숨>>을 읽는 내내, 그의 아픔이 내게 전해져 왔다. 박진성의 <<목숨>>을 읽는다는 것은, 시인을, 그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울과 발작을 말하고 (<발작 이후, 테오에게>, <나쁜 피>, <반 고흐와 놀다> 등) 시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발작 후 입원한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거나, 죽은 친지들의 기억이다. 이러한 발작을 시로 쓸 수 있는 원동력은 자신을 광기의 예술가 고흐와 동일시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반 고흐와 놀다>) 의사는 시인의 발작을 ‘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 가능성’이라고 진단하지만, 시인은 이를 유희의 계기로 삼아 반 고흐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 나선다. ‘최면치료 안락의자’는 ‘남프랑스 밀밭’이 되고, ‘노란 알약’은 ‘아를의 노란집’이 되는 것. 이렇게 ‘반 고흐-되기’를 통해 그는 고흐의 동생이자 평생 고흐를 후원해주었던, 고흐를 이해했던 유일한 당대인 테오를 호명한다.(<발작 이후, 테오에게>, <크리스틴을 그리며, 테오에게>) 자신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에게, 자신의 발작을, 우울을, 슬픔을, 외로움을 이해하는 그를.


그렇다면 바꾸어 말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박진성의 <<목숨>>과 같이 자신의 아픔, 슬픔, 고통을 토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즉, 단독자인 개인의 내면의 토로는, 그것도 그의 아픔, 슬픔, 고통과 같은 내밀한 내면의 고백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슬프고 우울할 때, 그러한 시들을 읽으면 어느새 위로 받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내 슬픔이, 내 외로움이, 내 우울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 어딘가에, 언젠가, 그도, 그들도 많이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우울해했다는 것. 우리는 단독자로 홀로 삶에 맞설 수밖에 없지만, 혼자인 것이, 혼자는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테오’를 찾아나선다는 것이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되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시 속에서 박진성이 ‘고흐-되기’를 통해 자신만의 아픔, 슬픔, 고통을 이해하는 ‘테오’에게 말을 거는 것. 시를 읽으며 ‘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을 통해서 우리 또한 ‘시인-되기’를 통해 우리만의 ‘테오’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간신히 버텨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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