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세미나 첫번째: 서론~1.1장

                                             

서문

이 책이 쓰인 시대적 배경은 걸프전 직후(1991.3)에서 코소보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1998.3)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교환의 전지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교환의 전지구화로 인해 경제 관계들이 정치적 통제로부터 더 자율적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주권이 쇠퇴해 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정치 세력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강요해 온 제한과 왜곡으로부터 자본주의 경제를 해방시킨다고 칭송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노동자와 시민이 자본주의적 이윤의 냉엄한 논리에 영향을 끼치거나 항의할 수 있는 제도적 채널들을 폐쇄한다고 한탄한다. (15~16)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에 대한 국가의 권력이 제한됨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일들에 대한 하나의 주류적 지적과, 이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의 차이.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 책은 ‘주권이 단일한 지배 논리하에 통합된 일련의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로서의 ‘전지구적 주권 형태’를 ‘제국Empire'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제국 안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위한 일반적인 이론적 틀과 개념들의 도구 상자‘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국’에 대한 개념정의만 본다면, 이는 현 세계질서 또는 자본의 작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하고, 이 개념을 설명함으로서 자본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즉, 추상화라는 것. 당연한 소리지만, ‘제국’이라는 것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국’이라는 개념이 현행 자본의 전지구적 작동방식과 얼마나 부합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문제 삼아야 할 첫 번째 지점이다. 그렇다면 보다 ‘제국’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경계가 없다/정복에 의해 생겨난 역사적 체제로서가 아니라 역사를 효과적으로 중지시키고 그럼으로써 사태의 현 상태를 영원히 고정하는 질서로서 나타난다/제국의 지배는 사회 세계의 깊숙한 곳까지 확장하는 사회 질서의 모든 등록기[작동 영역] 위에서 작용한다/제국의 행태는 계속 피로 물들고 있지만, 제국 개념은 항상 평화-역사를 벗어난 영원하고 보편적인 평화-에 집착한다(19~20)

이것 또한 귀납적인 개념 규정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전지구적인 세계질서 또는 자본의 작동방식, 다른 말로 ‘제국’이 얼마나 타당하게 현상을 설명하는가이다. 또 이 책의 목적 자체가 이러한 ‘제국’에 대한 이론화와 이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위한 일반적인 이론적 틀과 개념들의 도구 상자임으로, 이 ‘제국’이라는 ‘이론화’ 다시 말해 ‘개념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동의할 수 있는지가 이 책이 우리에게 성공하였는지, 또는 실패하였는지를 판가름하게 한다.


서문에 이미 이러한 ‘제국’에 대한 낙관론을 펼쳐놓은 부분도 주목을 요한다.


제국을 떠받치는 대중multitude(=다중/이하 mass와 혼동이 됨으로 ‘다중’으로 옮김)의 창조적 힘은 또한 대항 제국을, 즉 전지구적인 흐름과 교환에 대한 대안적인 정치 조직을 자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20)

생산의 영역은 사회적 불평등이 분명히 드러난 곳이며, 더욱이 제국의 권력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과 대안이 생겨나는 곳이다. (22)

이 부분도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환상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두 번째 문제이다. 즉 ‘다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실제 ‘사람들’의 어떠한 면모를 부각시킨 것인지, 현실성이 있는지의 여부 등. 또 ‘생산의 영역’에서 ‘제국’에 대한 저항과 대안은 무엇이고, 이는 타당성이 있는지의 문제.


1 현재의 정치적 구성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the Present

1.1 세계질서 World Order

제국이라는 문제 설정은 맨 먼저 세계 질서world order가 있다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질서는 사법적 구성체juridical formation로 표현된다. 따라서 우리의 최초의 과제는 오늘날 형성되고 있는 질서의 구성constitution을 파악하는 것이다.(27)

이러한 ‘세계 질서’가 있는지에 대한 동의여부가 문제시된다. 그리고 이것이 사법적 구성체로 표현된다고 하니까 문제는 두 가지이다. 이 사법적 구성체가 정말로 세계 질서가 존재하는지, 즉 제국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둘째, 앞으로 저자들이 묘사할 사법적 구성체라는 것이 정말로 타당한가(타당하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개념으로 적절한가, 정말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


1.1.1 United Nations

유엔은 국제적인 사법적 구조에서 전지구적인 사법적 구조로 이어지는 계보학에서 하나의 돌쩌귀로서 기능한다. 한편으로 유엔의 전체 개념적 구조는 개별 국가의 주권의 인정과 정당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협약과 조약에 의해 규정된 낡은 국제적 권리의 틀 안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정당화 과정은 주권적 권리를 현실적인 초국적supranation 중심으로 이전하는 한에서만 효과적이다. (29)

국제적 사법적 구조-> 유엔 -> 전지국적인 사법적 구조. 일종의 이행기적 현상. 개별 국가의 주권의 인정과 정당화에 근거하고 있지만, 유연의 정당화 과정은 촉구적인 중심으로 이전하는 것이 된다.


유엔은 국민 국가의 상위에 있는 권리의 타당성에 관한 초월적 도식에 효율적인 현실적 기반을 제시하였다. 권리의 타당성과 효율성은 이제 최고의(supreme) 사법적 근원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고, 이러한 조건에서 근본적 규범에 관한 켈젠의 관념은 결국 실현될 수 있다.

(켈젠은) “개별 국가들이 법률적으로 평등한 대열의 실체들로 여겨질 수 있고” 그래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국가”가 “개별 국가들보다 우월한 보편적 공동체로서 개별 국가들을 모두 자신 안에 전개하는” 것으로 형성되고 조직될 수 있도록, 국제 관계상의 힘의 논리를 넘어서기를 바랐다. (30)

논리적, 혹은 체계적으로는 그러하지만, 물질적으로 유엔은 결코 최고(supreme) 사법적 근원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켈젠은 체계의 형식적 구축 및 체계의 타당성을, 체계를 조직하는 물질적 구조와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실제로 그 구조는 어느 정도 물질적으로 실존하고 조직되어야만 했다. 체계는 어떻게 실제적으로 구축될 수 있는가? 이곳이 켈전의 사유가 우리에게 전혀 유용하지 않게 되는 지점이다. 즉, 켈젠의 사유는 단지 환상적인 유토피아로 남아 있다.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이행은 바로 사법적 과정의 타당성을 초국적 근원에 두는 형식적 관념과 이 관념의 물질적 실현 사이의 이러한 간격에 있다.(30~31)

켈젠의 개념이 엄밀한 형식주의적 관점에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의 개념만이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경제적ㆍ사회적 관계의 전지구화에 적합한, 어떤 정치권력이 이미 실존하고 있을지 아니면 창조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어떤 사법적 근원, 어떤 근본 규범, 어떤 명령이 새로운 질서를 지지할 수 있으며 전지구적 무질서로의 급박한 추락을 피할 수 있을까? (33~34)

결국 계속 순환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의하던지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문제에 되돌아오게 된다. ‘전지구적인 새로운 질서’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해야 하는가의 문제. 경제적ㆍ사회적 관계의 전지구화는 인정할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이에 부합하는 ‘사법적 근원, 근본 규범, 명령’인 ‘제국’이라는 것이 실존하는가의 문제. 이 책이 결국 독자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문제이다.


1.1.2 제국의 구성 The Constitution of Empire

자본주의 발전이 지닌 애초의 보편적이거나 보편화하는 차원에 적절하게 주의를 집중한다고 해서,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전지구적 권력 관게에서의 단절이나 전환을 인식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전한이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결합하려는, 달리 말해서 적절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실현하려는 자본주의적 기획을 오늘날 완전히 분명하고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입헌적인 면에서 전지구화 과정은 이제 하나의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단일한 초국적 형상을 기획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법적 定義의 근원이기도 하다. (34)

마지막 부분 번역이 명확하지 않아서, 원문을 가져온다.


Certainly, it is important to emphasize both capitalism's continuous foundational relationship to (or at least a tendency toward) the world market and capitalism's expanding cycles of development; but proper attention to the ab origine universal or universalizing dimensions of capitalist development should not blind us to the rupture or shift in contemporary capitalist production and global relations of power. We believe that this shift makes perfectly clear and possible today the capitalist project to bring together economic power and political power, to realize, in other words, a properly capitalist order. In constitutional terms, the processes of globalization are no longer merely a fact but also a source of juridical definitions that tends to project a single supranational figure of political power. (8~9)

뉘앙스도 다르고, 한국어 번역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전지구화는 초국적이고 단일한 초국적 정치 권력의 형상figure로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적 기획이라는 것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경쟁이었던 것이, 그들 모두를 과잉 결정하고, 그들을 통합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그리고 그들을 결정적으로 탈식민지적이고 탈제국주의적인 하나의 공통적인 권리 관념하에서 다루는 단일한 권력이라는 이념에 의해 대체되어 왔다 (35)


답답한 것은, 정말 그러한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 하기는 하다. 이제 문제는 국민국가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지구적 ‘자본’의 사법적 근원이자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 권력을 ‘제국’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지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날 목격하고 있는, 계약과 협약에 의해 규정된 전통적인 국제법에서부터 새로운 주권적, 초국적 세계 권력의 규정 및 구성으로의(따라서 제국적 권리 관념으로의) 이행은, 불완전하기는 해도 우리에게 제국의 총체화하는 사회적 과정을 읽는 틀을 제시해 준다. (35)


정당한 전쟁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활동이 된다. 두 가지 구분되는 요소들이 이러한 정당한 전쟁 개념에 결합되어 있다. 첫째는 윤리적으로 근거 지어져 있는 한에서의 군사적 장치의 정당성이고, 둘째는 바라는 질서와 평화를 얻기 위한 군사 행동의 효과성이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의 종합은 정말로 제국의 토대와 새로운 전통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일 것이다. 오늘날 적은, 바로 전쟁 그 자체처럼, 진부화되고(일상적인 정치적 탄압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동시에(악마로서, 즉 윤리적 질서에 대한 절대적 위협으로서) 절대화된다. 우리에게 이러한 제국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의 최초의 매우 정교화된 실례를 제공한 것은 아마도 걸프전이었을 것이다. 정당한 전쟁 개념의 부활은 단지 제국 등장의 하나의 징후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도발적이고 강력한 징후인가! (39~40)


이 또한 번역만 보면 무슨 소리인지 헷갈린다. 원문을 가져온다.


It(just war) has become rather an activity that is justified in itself. Two distinct elements are combined in this concept of just war: first, the legitimacy of the military apparatus insofar as it is ethically grounded, and second, the effectiveness of military action to achieve the desired order and peace. The synthesis of these two elements may indeed be a key factor determining the foundation and the new tradition of Empire. Today the enemy, just like the war itself, comes to be at once banalized (reduced to an object of routine police repression) and absolutized (as the Enemy, an absolute threat to the ethical order). The Gulf War gave us perhaps the first fully articulated example of this new epistemology of the concept. The resurrection of the concept of just war may be only a symptom of the emergence of Empire, but what a suggestive and powerful one! (13)


결국 걸프만 전쟁을 제국의 징후로서 볼 수 있는 것은 ‘제국’이 적들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다. 동등한 두 단체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제국’ 내부의 탄압 대상이며 내부의 질병이다.


1.1.3 제국적 권위 모델 The Model of Imperial Authority

The new paradigm is both system and hierarchy, centralized construction of norms and far-reaching production of legitimacy, spread out over world space. It is configured ab initio as a dynamic and flexible systemic structure that is articulated horizontally. We conceive the structure in a kind of intellectual shorthand as a hybrid of Niklas Luhmann1)'s systems theory and John Rawls's theory of justice. Some call this situation "governance without government" to indicate the structural logic, at times imperceptible but always and increasingly effective, that sweeps all actors within the order of the whole. The systemic totality has a dominant position in the global order, breaking resolutely with every previous dialectic and developing an integration of actors that seems linear and spontaneous.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effectiveness of the consensus under a supreme authority of the ordering appears ever more clearly. All conflicts, all crises, and all dissensions effectively push forward the process of integration and by the same measure call for more central authority. Peace, equilibrium, and the cessation of conflict are the values toward which everything is directed. The development of the global system (and of imperial right in the first place) seems to be the development of a machine that imposes procedures of continual contractualization that lead to systemic equilibria--a machine that creates a continuous call for authority. The machine seems to predetermine the exercise of authority and action across the entire social space. Every movement is fixed and can seek its own designated place only within the system itself, in the hierarchial relationship accorded to it. This preconstituted movement defines the reality of the process of the imperial constitutionalization of world order-the new paradigm. (13~14)


이것이 저자들이 말하는 ‘세계 질서’의 제국적 구성과정이다. 몽상하는 듯 하고 시적이다.


패러다임 전환은 적어도 처음에는, 주권적인 국민 국가들과 관련하여 과잉 결정되고 주권적인 국민 국가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기존 권력만이,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해 효과적인 규제를 행하고 필요하다면 강제를 행하면서 그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인식에 의해 정의된다. (42)


1.1.4 보편적 가치 Universal Values

이제 개별적인 주권 국가나 초국적(유엔) 권력은, 낡은 국제 질서화 아래에서처럼, 자발적으로 맺은 국제 조약들의 적용을 확실하게 하거나 강요하는 데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의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초국적 주체들이 모든 형태의 비상 사태나 보다 상위의 윤리적 원리의 이름으로 개입한다. 이러한 개입의 배후에 있는 것은 단지 영구적인 비상 사태와 예외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정의의 본질적 가치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되는 영구적인 비상 사태와 예외의 상태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경찰권이 보편적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46)


발전하고 있는 제국적 권력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비상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의 수행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의 경찰학으로서 규정하는 것은 아마도 정확하기는 해도 여전히 불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보아 온 대로,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의 현상학적 결정들은 위기와 전쟁으로 정확하게 특징지어질 수도 있는, 심하게 동요하는 상황 속에 실존한다. 우리는 예방과 경찰 제도를 통한 이러한 질서의 정당화를 위기와 전쟁 자체가 이러한 정의 개념의 그 의문스러운 발생과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이미 지적한 대로, 이러한 테크닉들과 그것들과 유사한 다른 것들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지구적 질서의 구체적 헌법, 그 행정 기계의 공고화, 그리고 전지구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명령 위계들의 생산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누가 총체성의 구성 과정 속에서 이러한 총체성의 광활한 공간을 가로질러 정의(justice)와 질서에 대한 규정을 결정하는가? 누가 평화 개념을 규정할 수 있는가? 누가 역사를 중지시키는 과정을 통합하고 이러한 중지를 정당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둘러싸고 제국이란 문제 설정은 완전히 열려 있지 닫혀 있지는 않다. (47)


제국은 태어났고 스스로를 위기로서 드러낸다. (49)



보충. Niklas Luhmann의 체계 이론에 관하여

(http://en.wikipedia.org/wiki/Niklas_Luhmann)

The core element of Luhmann's theory is communication. Social systems are systems of communication, and society is the most encompassing social system. Being the social system that comprises all (and only) communication, today's society is a world society. A system is defined by a boundary between itself and its environment, dividing it from an infinitely complex, or (colloquially) chaotic, exterior. The interior of the system is thus a zone of reduced complexity: Communication within a system operates by selecting only a limited amount of all information available outside. This process is also called reduction of complexity. The criterion according to which information is selected and processed is meaning (Sinn); both social systems and psychical or personal systems (see below for an explanation of this distinction) operate by processing meaning.


Further, each system has a distinctive identity that is constantly reproduced in its communication and depends on what is considered meaningful and what is not; if a system fails to maintain that identity, it ceases to exist as a system and dissolves back into the environment it emerged from. Luhmann called this process of reproduction from elements previously filtered from an over-complex environment autopoiesis (literally: self-creation), using a term coined in cognitive biology by Humberto Maturana and Francisco Varela. Social systems are autopoietically closed in that they use and rely on resources from their environment; yet those resources do not become part of the systems' operation. Both thought and digestion are important preconditions for communication, but neither appears in communication as such.


Luhmann likens the operation of autopoiesis (the filtering and processing of information from the environment) to a program, making a series of logical distinctions (Unterscheidungen). Here, Luhmann refers to the British mathematician G. Spencer-Brown's logic of distinctions that Maturana and Varela had earlier identified as a model for the functioning of any cognitive process. The supreme criterion guiding the "self-creation" of any given system is a defining binary code.


The influence of Spencer-Brown on Luhmann cannot be overestimated. Spencer-Brown's book "Laws of Form" pretends to do away with logic as it had been known until then altogether. Accordingly, Spencer-Brown praises himself in the preface of this book as the author of the "most intelligent book in the universe". Yet, Maturana applies pre-Spencer-Brown logic. Therefore, Luhmann's claim to truth rests entirely on Spencer-Brown being what he pretends to be. Maturana cannot be reconciled with Spencer-Brown in the issue of autopoiesis, as Maturana has explicitly refused to be cited by Luhmann as a supporting theorist.


Although Luhmann first developed his understanding of social systems theory under Parsons' influence, he soon moved away from the Parsonian concept. The most important difference is that Parsons used systems as a merely analytic tool to understand certain processes going on in society; Luhmann, in contrast, treats his vision of systems ontologically, saying that "systems exist". Another difference is that Parsons asks how certain subsystems contribute to the functioning of overall society; Luhmann starts with the differentiation of the systems themselves out of a nondescript environment. He does observe how certain systems fulfil functions that contribute to "society" as a whole, but this is happening more or less by chance, without an overarching vision of society. Finally, the systems' autopoietic closure is another fundamental difference from Parsons' concept. Each system works strictly according to its very own code and has no understanding at all for the way other systems perceive their environment. E.g., the economy is all about money; morals etc. have no independent role here.


One seemingly peculiar, but within the overall framework strictly logical, axiom of Luhmann's theory is the human being's position outside any social system. Consisting of "pure communication", any social system requires human consciousnesses (personal or psychical systems) as an obviously necessary, but nevertheless environmental resource. In Luhmann's terms, human beings are neither part of society nor of any specific systems; just like they are not part of a conversation. Luhmann himself once said concisely he was "not interested in people".


Luhmann was devoted to the ideal of non-normative science introduced to sociology in the early 20th century by Max Weber and later re-defined and defended against its critics by Karl Popper. However, in an academic environment that never strictly separated descriptive and normative theories of society, Luhmann's "anti-humanistic" sociology has widely attracted criticism from "emancipatory" scientists, including, most famously, Jürgen Haber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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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를 할 때 어깨가 이상해서, 당분간 운동을 쉬고 있다. 다음주에 시간이 나면 ^^; 정형외과에 가볼 예정. 근육통은 아닌데, 주위 사람들 말로는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고 한다.

운동을 하다가 안 하면, 마음이 안 좋다. 애인이 운동 간다고 해서 따라가서 1시간 동안 걷기만 했다. 몸무게를 측정하니 76.4 kg. 어깨가 별 무리 없어서, 운동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

어제는 문학모임 사람들과 3시까지 술을 마셨다. 오늘은 애인과 <<제국>> 세미나를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세미나를 하려고 하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녀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도 학부때 니체 세미나를 하면서였고, 그 전 애인과는 <역사란 무엇인가> 세미나를 하면서 친해졌다;;; 역시 범생 커플 -_-a

<<제국>>을 읽는 나의 모드는,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데 어떠한 도움이 줄 것인가 하는 것. 그러니, 제발 <<제국>>보고 나를 설득시켜줘 하면서 읽고 있는데, 귀납적 증거들이 불충분한듯 싶어서 아쉽다. 계속 꾸준히 열심히 읽어나가야지.

원래 오늘 발제는 1장 끝까지인데, 시간이 없고 꼼꼼히 발제를 하다보니 1.1장까지 밖에 못했다. -_-; 1.2장까지는 읽고 1.3장은 다 읽지도 못함. 애인에게 미안했다;; 번역이 그렇게 문제삼을 만큼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가독성이 조금은 떨어져서, 한국어로 읽다가 영어로 읽다가 번갈아가면서 했다. 영어가 명료하기는 했지만, 비판적으로 보기가 힘들다; 영어를 읽는 모드는 '독해'라서 그런지, 그저 뜻만 해석하고 넘어가게 되기 일쑤이다. 방학 때는 헤겔을 보기로 했는데 (나는 영어로, 독어하는 사람들은 독어로) 그래서 걱정이다.

날이 갈수록 '번역'이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겠다. 번역을 통해 걸려진 언어들은 무언가 '불투명함' 때문에 찝찝하다. 번역가라는 사람을 매개로 '원의'를 만나는 것 같은, 이데아에서 한 걸음 더 떨어진 것 같은 답답함.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번역 문학 작품들을 읽기 곤란해진다. 답답해서. 원 언어의 맛을 알고 싶어서. 등. 그러나 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는 있고, 빨리 읽어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으니 원... 쩝.

'번역학'이라는 것에 새삼 흥미가 돋는다. '번역은 반역이다'와 같은 유명한 명제도 있지만, 제3자와 함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아직 애인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즐겁다. 아직 애인이 신선해서 그런것일 수도 ^^; 내공이 쌓이면 '번역'이라는 제3자의 즐거움을 누리는 법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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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6-0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자면요, 저 역시 번역이 뭔지가 혼란스러워요. 영어 같으면 of 를 연달아 쓸 수도 있잖아요. really almost같이 부사의 연속이 가능하죠. 근데 우리말은 안그렇잖아요. 갠적으론 의역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알아서 걸러주는...근데 번역서를 보면 대개가 영어식 표현이 안걸러지고 쓰여 있더이다..

기인 2006-06-0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막상 직접 번역을 해 보니까, 정말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일본 쪽은 번역이 정말 잘 되어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한번 걸러졌다는 의식 때문에 번역서는 읽을 때 불편한 것 같아요.
 
 전출처 : waits > [펌/레디앙] "민주노동당다움을 찾아라"

 

"민주노동당다움을 찾아라"
민주노동당 지방선거 결과 전문가 평가

패배다. 전문가들은 민주노동당의 이번 지방선거를 이렇게 결산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민주노동당다움'을 잃은 것을 패인으로 들었다. '운동권'도 아닌 전문가들이 내놓은 이런 진단은 원칙과 대중성을 상극으로 놓는 '상식'적 사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바라 본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의 패인, 향후 개선 방향을 요약했다.

선거 결과는? 패배다

민주노동당의 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패배’였다고 정리했다. 임영일 경남대 교수는 “목표의 1/3에 미치지 못한 것을 보면 실패일 것이고 2002년 45명 당선에서 이번에 81명으로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2004년 총선의 약진을 생각하면 분명 실패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정영태 인하대 교수도 “민주노동당의 패배이고, 더 안 뺏긴 것도 다행”이라면서 “그나마 중선거구제로 2위 이하도 당선되는 제도의 ‘득’을 본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김지연 미디어리서치 본부장은 “민주노동당의 이번 선거 결과가 형편없는 패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진보세력이 20~25%에 불과하고 그 중 핵심적인 개혁진보층은 10~15% 선이라는 것. 게다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젊은 층의 투표 참여율이 낮았던 점을 감안하면 12% 득표는 “큰 실패는 아니다”는 주장이다.

왜? 원칙 없이 표 얻는 데만 몰두하다 지지층 이탈 유발

임영일 교수는 “민주노동당 계급 투표 지역인 창원, 울산 등에서 지지양상이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들 지역에서 핵심 지지층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이다. 임 교수는 “이들 지역의 정당지지도에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수치보다도 지지강도가 약화됐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민주노동당 지지층이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긴 찍지만 표정들이 좋지 않다”면서 “이는 주위에 민주노동당 지지를 설득해내는 동인, 에너지가 훨씬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임 교수는 “일부 지역에서 한나라당과 같은 개발 논리를 내세우는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있었다”면서 “민주노동당 후보라면 민주노동당 정책을 준수해야 하는데 당에 의해 전체가 통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의 핵심 원칙, 목표가 공유되지 않은 채 최대한 나가서 최대한 표를 얻는 것에만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실제 선거운동기간 민주노동당 게시판에는 지역의 민주노동당 후보들의 이력이나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왜? 열린우리당과 차별성 부각 실패

더불어 임 교수는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도는 열린우리당 지지도와 동조현상을 보였다”면서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손혁재 성공회대 교수는 이 부분에 주목했다. 손 교수는 “과거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비슷한 색깔로 비쳐진다”면서 “열린우리당의 ‘무능’ 이미지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 전체의 ‘무능’으로 인식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같은 현상은 민주노동당에도 일정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후 열린우리당과 차별성을 어필했어야 했는데 이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정영태 교수는 민주노동당이 이번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중도좌파가 민주노동당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기대한 것 같다”면서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중도좌파들은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문제에서 동조할 뿐 사회경제 정책에서 민주노동당의 내용에 찬성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기권’을 선택했다는 주장이다. 민주노동당의 진보개혁 대표주자 교체론이 열린우리당 지지층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란

손혁재 교수는 “특히 지난 10.26 보궐선거에 이어 울산에서 또 진 것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서 “민주노동당의 울산 패배는 울산 지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정영태 교수 역시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의 집권을 지켜본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 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 처리에서 더 실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반응이 울산지역에서는 물론 전체 민주노동당 호감층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본부장은 “일반 대중들은 민주노동당이 총선 승리 이후 원내진출해서 보여준 모습이 대기업 노조 중심인데 반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는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정체성 확립, 무원칙한 타협 배제, 패러다임 전환

지방선거 이후 대선까지 정국의 격변이 예상된다. 민주노동당이 향후 정국 변화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전문가들은 민주노동당이 ‘정체성’부터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임영일 교수는 “지방선거 패배로 오히려 ‘대중성’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을지 걱정”이라면서 “핵심적 지지기반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 확립 없이 외연적 확대만 하면 당이 어디로 갈 지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김지연 본부장은 “정치는 예측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내년 대선으로 가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의 한 분파와 민주노동당이 타협할 경우, 오히려 더 큰 패배를 초래할 가능성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가치 지향의 정당은 타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면서 “하나 얻으려다 셋을 잃는다”고 경고했다.

손혁재 교수는 “원외정당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원내정당으로 원내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데 의원들이 구체적인 성과 얻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민주노동당 내부에 노선 투쟁의 분파가 너무 많다는 점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영태 교수는 개개의 경제나 복지 정책보다 큰 틀에서 우리 사회 기업지배구조 방식을 선택하고 복지의 재원 마련에 공감할 수 있는 국민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는 토대 마련이 민주노동당의 선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민주노동당이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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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03일 (토) 16:05:10 김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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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번에 그 여자에 대한 글을 꼬옥 써서 국문과 학우들과 그 밖의 이 게시판에 오셔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제 체력이 문제이거나, 혹은 제 글쓰기 방식이 기본적으로 뻗어나가기 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하이퍼 텍스트틱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_-a


뭐. 어쨌든. 그 여자는 수수하고 조금은 귀엽게 생기고 회사원 틱한 옷을 입은 여자였습니다. 회사에 가는 중이었다면 출근을 조금 늦게 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교대에서 2호선을 갈아타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제가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항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분명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추론하는 여러 근거들이 밝혀지겠지만) 종합운동장역에서 지하철을 탄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다가 말이지요. 그리고 목적지는 신도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리의 근거들은 글이 전개되면서 나타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와 제 옆의 그 신사가 그녀를 그렇게 멍하게 주목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그다지 부차적이지도 않은 이유로, 그녀의 가방과 그녀가 그 가방을 이용하는 방식의 의외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루이 뷔통 커다란 옆에 끼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 쪽에 세워두고 앉아있었습니다. 지하철 의자의 맨 오른쪽 가에 앉았기 때문에, 일종의 철봉 비슷한 칸막이와 그녀 사이에 그녀의 가방을 끼워서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잠깐, 여기서 제가 예전에 가방에 대해 고찰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상기해 보았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인간을 설명해 줄 수 있고, 나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방의 의식 혹은 표면적 욕구는 무엇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제 가장 친한 가방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했다' 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조금 오래되서 본래의 색 보다 칙칙해진 life guard 배낭용 가방이었는데.


"이봐. 당연히 우리들은 무언가를 항상 '담고' 싶어해. 이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예전부터. 나는 항상 무언가를 '담고' 싶어했지. 왜 그랬는지는 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는 있겠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건 후의 합리화일 뿐이지. 그저 그래. 담고 싶어."


이러한 가방의 '담고자 하는 욕구' 에 대해 어떤 이는 이것이 존재의 허무감을 만족시키려는 본질적 의지라고 설명하기도 하였고, 누구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무언가 '담는다' 라는 것은 곧 무언가를 '소비한다'와 연관 시켜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사회에 의해 세뇌된 의식일 뿐이다. 그저 가방 자체로 존재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저러한 논의들에 대해서 가방에게 묻자, 가방은 어의없다는 듯이 위의 발언을 했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수록, 가방의 표면적 의식을 살며시 드러내서 그 무의식적 욕구를 살펴보면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가방이 무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 입니다. 가방의 보다 본질적인- 그러나 가방군은 이를 회피하는 듯이 보였던- 욕구는 바로 무언가를 '꺼내려는' 욕구입니다.


즉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에 만큼, 2차적인 욕구입니다. 그럼에도 가방군은 '담고자' 하는 욕구가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임을 주장했고, 무언가를 '꺼낸다' 라는 말은 마치 신성 부정의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데,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와 일견 보기에 정반대의 욕구로 보입니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과 갈등이 가방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신성하게 하고 이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한데. 이분들의 IQ를 모두 곱할수록 0에 수렴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를 사람의 '먹는 욕구'와 '싸는 욕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가방의 본질적 욕구를 그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의 모순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알아차렸겠지만 말입니다. 즉 '의식적-담고자하는 욕구'와 '무의식적-꺼내고자 하는 욕구'의 종합은 무언가를 필요할 때 까지 A에서 B로 운반하기 위한 욕구입니다. 즉 A에서 담은 다음에 B에서 꺼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일종의 운반체라는 것이 가방 존재이고 또한 본질입니다. 샤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듯이, 이는 모둔 존재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일종의 운반체 입니다. 무엇을 운반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 운반에 대해서 고찰을 해야 합니다.


다시 가방군의 상징으로 돌아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정말 오래된 유래를 가진 것이고, 여러 상징들과 신화에 되풀이 되며 쓰여집니다. 그 중 대표적이면서 신비주의 집단에서 오랫동안 집착해 온 '바보의 상징'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존재가 무엇을 담지해야 되는가는 일견 명백해 보입니다.


바보라는 것은 신비주의 상징에 있어 '입문자'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입문이란 신비에로의 입문이고 그럼으로 즉 진리에로의 입문이며, 빛, 선, 천국, 그리고 나아가 신으로의 입문입니다. 신으로의 입문. 이것이 모든 존재의 움직이는 방향이고 모든 존재의 운동성은 이리로 향합니다. 이를 구체적 상징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보의 상징은 한 바보가 괴나리 봇짐을 지고 광대복을 입고 개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고도의 상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우선적으로 광대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광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왕을 웃겨야 살고, 왕을 화내게 하면 죽습니다. 왕을 웃기는 것은 왕 그 자신의 희화화로써 합니다. 유머와 웃음의 매커니즘은 긴장의 해소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자기 비하와 그의 극복에서 제일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왕의 광대는 왕을 끊임없이 희화화합니다. 이것이 도가 지나치면 광대는 죽는 것이요, 미진하다면 왕은 웃지 않게 되어 또한 광대는 죽는 것입니다. 즉 중용이 중요합니다.


중용 자체의 의미도 물론 -여러 동양의 스승들이 강조하셨지만- 중요합니다. 진리로 신으로 향하는 자들은 당연히 중용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상징은 왕과 광대 자신과의 관계 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세속을 상징하고, 뭍 대중들의 욕망을 집결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입문자는 세속에서 너무 멀어지거나 욕망을 회피하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거기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진리는 세상 밖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 안의 인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는 그 절묘한 경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대의 상징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에게 물어뜯기는 것도 이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개라는 것은 짐승이요, 무엇보다도 인간의 짐승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게 물어뜯기면서 광대는 길을 재촉하고 있음은 아까의 광대의 상징과 유사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개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물어뜯게 놓아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상징인 괴나리 봇짐 상징이 남았습니다. 물론 이는 '길'을 떠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인류적 차원의 상징으로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길이라기보다는 인생 과정 특히 진리로 향한 빛으로 향한 신으로 향한 길을 의미합니다.


괴나리 봇짐은 기다란 나무 막대 한쪽에 보따리를 동여맨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막대기는 -> 1 보따리는 -> 0 을 의미합니다. 유한과 무한. 진리와 거짓.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되풀이 되지만. 1이라는 막대기에 0이라는 보따리가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나 빛이나 신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보에게 필요한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보따리이고, 막대기는 보따리를 보다 잘 동여매기 위해서. 즉 보따리에 더 잘 접근하고 이를 간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위 세 차원의 상징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진리와 신으로 향하는 길은 세상과 거짓이 아무리 추악하고 입문자를 괴롭히더라도 (개의 상징이 물어뜯고 있지요) 그곳으로 부터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세상에 물자체로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이것에 떠나서 진리나 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을 육에 유배된 것으로 파악하더라도 육이라는 것은 감옥이오 속죄의 장소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으음....... 그래요. 그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루이 뷔통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제가 그 여자가 그 가방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 했습니까? 안 했다고요?


오오... 이제 부터가 본론인데.. 역시 힘들군요.. 저번에 쓴다고 했던 리쾨르 서평도 쓰지 않았고 말입니다.... 힘듭니다. 그럼 또 다음에 이어 쓰면 되지요. 그 여자. 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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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라는 것은 참 웃기는 것입니다. 현재는 절대로 볼 수가 없지요. 현재가 바로 '지금' 이라고 할 때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의 아름답고 존경하는 그 친구를 바라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친구가 누구냐 하는 것은 묻지 마세요 -_-;)


그럼 그 친구에게 반사된 광자가 제 눈에 들어오고 그 눈에 들어온 광자가 시신경을 타고 제 뇌까지 들어가서 그것을 해석할 때 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요. 즉시 볼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과거만 볼 수 있지요. 물론 '본다' 라는 것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듣는다' 거나 '느낀다' 등등의 세상과 접하는 모든 활동은 역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시간이 있어야 되고, 결국 과거는 나에게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에 살고 있다' 는 것은 일부 나이 지극하신 분들에 국한된 게 아닌 것이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니 쪼금은 '죽음'이나 '생명'에 대해 다시금 넉넉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에코님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식을 낳는 일과, 책을 쓰는 일' 이라고 했을 때 약간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샤르트르와 하이데거의 견해가 참으로 참고할 만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넘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났을 때면 그들이 한 말들을 되씹으면서 명상을 하고는 합니다.


으음... 이제 죽음을 극복했으니, 무서운 괴물이나 귀신이 나와서 날 잡아먹을라고 해도, 난 무섭지 않을꺼야 라고 하고 말이지요. ^^;


뭐. 어쨌든 이게 본론이 아니고, 지하철에 본 한 여자에 대해서 여러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아 글이 길어질 것 같지요? ㅡ.ㅡ;)


으음.. 제가 그 여자를 본 것은.. 엊그제 인 것 같습니다. 라틴어 세미나를 하려고 가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없네요 -_-; 라틴어 세미나가 오전 10시에 있었고. 제가 그 여자를 본 것은 지하철 2호선에서였으니까. 아마 9시 30분 전후가 될 것입니다.


원래 모든 평일의 오전 9시 30분 전후에는 지하철 2호선 열차에는 앉은 자리가 있고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인지, 혹은 그 날 그 때 그 지하철만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아마 이는 귀납적 방법으로 증명이 가능한 명제일 것이고, 그렇다면 유한한 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그리고 과거를 모름으로 증명할 수 없겠지요.. ㅡ.ㅡ;)


지하철의 긴 녹색 의자에 저는 어떤 신사분 한분과 앉아 있었고, 제 맞은편에 그녀가! 3명쯤 되는 아줌마들과 앉아 있었습니다. 두 쪽 다 빈 여백의 공간이 많았지요.


저와 제 옆의 신사는 둘 다 멍하게, 거의 입을 벌린 채로, 그녀만을 바라보았답니다.


자아... 이 쯤되면 궁금하신가요? 왜 그녀를 우리가 그렇게 '멍'하게 바라보았는지 말입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금발에 레이스가 보이는 옷을 입은데다가, 붉은 립스틱은 그녀의 붉은 매니큐어와 붉은 구두와 매우 잘 어울리는 그런 타입의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조금은 귀여웠나? 하는 얼굴의 회사원 틱한 옷을 입고 있었지요.


그녀는 조이스의 <<율리우스>>를 낭독하면서 그 지적인 눈썹을 방긋거리면서 제게 미소를 보내는, 혹은 지하철 바닥 한 가운데 책상을 펼쳐 놓고 논어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한숨을 쉬는 그런 타입의 여자도 아니었고.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여주면서 신을 믿으라고 하지도, 혓바닥이 푸르고 이빨이 붉고 조그만한 날개가 달려있어서 아! 그녀가 나는 것을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지도.


뭐. 이런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저 앞에서도 말했지만, 약간 귀엽나 싶은 외모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보통 몸매에. 수수하고 평범한 회사원 같은 옷.


그렇다면 제가 왜 이리 장광설을 늘어 놓는 것일까요.


그녀의 저런 평범성이야 말로 저의 성적인 욕구를 자극시키고, 저는 인간관계, 특히 성관계에 있어서 사디스틱한 면모를 들어냄으로 그녀를 향해 어쩔 수 없이 다가가서 키스를 하면서 혀를 물어서 빼내 트렸다... 라는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서일까요?


저는 이부분에 대해서 정말 해명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제 예전의 끄적임들을 어캐 보고서인지 02들 중 일부는 제 파괴적인 성격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 데 말입니다.


정말, 명백히. 제가 기억하고 있는 한에서. 저는 누구에게 폭력을 가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 물론 벌레는 몇 마리 죽였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벌레도 죽이기 싫어하고, 안 죽이기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모기가 귀찮게 하더라도 어떻게든 내몰도록 노력하지, 죽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산길을 가다가나 길을 가다가 실수로 벌레를 밟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혹시, 제가 벌레들에게 있어서는 희대의 살인마.. 아니 희대의 살충마로 불리우고 지명수배까지 당해서, 매일 여름밤이 되면 모기 특공대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 쪽 분들과의 교제는 제가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쨌든. 해명이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아. 어쨌든 그 여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와 제 옆의 신사는 입을 헤.. 하고 벌린 채로 그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말입니다........


아아... 글을 쓰기도 힘이 드는군요. 쩌업.


음음..


생각해 보면. 얼른 가서 리쾨르 서평 쓸 것도 있고 말입니다. 레비도 조금 더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이렇게 글을 길게 쓰고 나면 조금 힘들어서. 아무래도 쪼금 쉬었다가 이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6시에는 문학모임도 있고 말입니다.


참. 정말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 여자를 왜 바라보았는지 말입니다. 아! 나중에 여러분이 혹시 그 여자 분을 지하철에서 뵙게 되면, 인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뭐. 그런 것이지요.

저는 이만.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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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6-0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뭡니까. 그래서 그 여자를 본 이유가.
(불쑥 댓글을 달아 죄송합니다. 즐찾한지는 좀 되는데 인사드린 적은 없는 듯.)

기인 2006-06-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힌트는 다음편에 ^^; ㅎㅎ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