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학생운동 혁신을 위한

전/국/학/생/연/대/회/의/(解)


★ ★ ★



해소 결의문

전국학생연대회의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와 학생운동 혁신’이라는 기치로 97년 출범하여 2005년 연대회의를 마지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6년 지금, 우리가 걸어왔던 궤적을 회상하고 왜 해소하는가를 다시 곱씹으며 전국학생연대회의의 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Ⅰ. 전국학생연대회의가 걸어온 길


전국학생연대회의는 96년 학생운동에 대한 지배계급의 비상식적 탄압에 맞서 이를 전체 학생운동 전체의 위기임을 인식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생운동의 위기와 임계를 넘어 전환을 선도하기 위한 계획으로써 제출되었다. 이로부터 97년 학생운동 사수-혁신과 대선투쟁으로 위치 지워졌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좌파학생운동의 아래로부터의 합력 창출의 거점으로서 1기 전국학생연대회의는 공안당국의 침탈위협과 폭력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극적으로 출범한다.

2기 전국학생연대회의는 IMF와 함께 몰아치던 남한사회 위로부터의 반동적 재편과 신자유주의로의 적극 편입으로 인한 노동자 민중에 대한 대대적 공격과 폭력에 맞서 선도적인 실천을 벌여 왔다. 또한 학원사회에 대한 지배계급의 재편전략에 맞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경향의 창출, 반신자유주의 대중운동을 통한 학원사회의 정치적 발언의 극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다른 한편으로 1기의 평가지점들을 공유하면서, 극복할 지점과 계승할 지점을 명확히 하며 출범하였다. 1기 전국학생연대회의가 통합적 대중운동연대체로서 자기규정했던 지점을 평가하면서 2기 전국학생연대회의는 '대중운동 협의체' 로서의 자기위상을 명확히 하였다.

99년부터 가속화된 좌익적 학생연대운동의 위기 속에서 3기 전국학생연대회의는 ‘단일 연합체 구성을 위한 초동주체’로서의 자기규정을 명확히 하면서 ‘통합적 대중운동 실현’을 위한 학생대중운동의 역량을 축적시켜나가고 기층 학생회 단위를 튼실하게 구축하는 것, 그리고 제 좌파학생운동 간의 활발한 교류와 연대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을 자기임무로 부여하였다. 또한 ’학생운동 중흥의 역사를 다시 재현하기 위한 실천적 연대의 전진기지’ 로서의 자기 위치를 자임하게 되었다.

00년 좌파연대체로서의 의미가 해체된 이후, 전국학생연대회의는 스스로를 ‘좌파 활동가 블록’으로서 명명하며, 반신자유주의 전선 형성에 복무하는 학생운동 세력군으로서 자기임무를 부여받아왔다. 03년 전학투련(준)은 바로 그러한 노력과 과정의 일환이었으며, 좌파라는 선험적 정체성(좌파선결집론)에 반대, 정세적 진리효과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계획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의 노선과 하나의 조직을 절대화 하지 않고, 정세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해왔던 과정. 전선형성에 복무하는 학생운동의 임무를 수행해왔던 시간.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를, 자기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비판하고자 했던 역사. 진심의 단결과 연대의 결의결사로 무장하고 결코 후회하지 않을 길고 긴 시간의 길.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동지들과 함께 걸어왔던 길. 지난날의 추억이 아닌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으로, 그래서 더더욱 잊혀 질 수 없는 민중의 피로 기억될 그 과정, 그 시간, 그 역사, 그 길을 전국학생연대회의가 걸어왔다. 진정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다만 대중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실행하지 못한 것이리라.


Ⅱ. 전국학생연대회의의 자기소멸의 근거


1997년 전국학생연대회의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학생운동 혁신’이라는 기치가 웅변하듯이, ①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른바 보수야당 추종주의)에 대한 단호한 비판으로서 정세적 진리효과를 획득했던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②1997년 한총련 운동의 위기에 따른 학생운동의 당파적 강화 및 한총련 개혁을 통한 학생운동 혁신, 이 두 가지를 결집의 근거로 삼는 좌파연대운동이라는 외연을 통해 형성된 질서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결집의 근거는 98년 한총련 운동의 역사적 표상의 붕괴와 함께 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리고 2000년 전국학생연대회의는 좌파연대체로서의 의미가 해체되면서, 한총련 개혁이라는 정세적 진리효과의 시효만료를 사후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전국학생연대회의는 현존하는 모든 불완전한 자기 완결적 질서에 대한 비판과 만료된 자기운동의 시효를 적극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자기정정과 자기전망을 모색해 왔으며, 2003년 전학투련(준)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실험 속에서 시효만료를 넘어서 새로운 결집의 근거를 창출해내고자 했으나, 몇 가지 오류와 한계 속에 이를 실물화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 전국학생연대회의는 해소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아직까지도 전국학생연대회의는 해소하지 않았던가?’라는 질문으로 전위되어야 옳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전국학생연대회의 운동이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큰 교훈이자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학생운동 위기의 역사다.


Ⅲ. 전국학생연대회의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


1> 학생회로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대중운동단위에 착목하자!

우리는 97년 전국학생연대회의 운동의 목표였던 것 중 하나로써 학생회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을 벗어나자는 점에 대해서도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97년 당시의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운영원리 및 의결-집행 체계가 최근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학생회운동의 유의미성을 사고하면서도, 동시에 학생회에 대한 과도한 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학생회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무수한 대중운동단위들과 개인들에 주목하고 이들의 지속적인 반신자유주의 대중운동 창출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2>대안적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운동을 재개하자!

전국학생연대회의 소멸 이후 운동의 과제로서 대학사회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양식에 맞선 ‘대안적 삶의 양식’을 창출하기 위해 ‘문화운동’과 ‘예술운동’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보편적 주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특수한 사회적 세계로 접근한다는 점과 대중이 자기욕구를 실현하는 실천들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유력한 경로다. 즉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양식에 대한 거부와 함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자기해방을 위한 자기운동으로서 문화와 예술이라는 경로를 통해 학생운동을 재개하는 것이며 대학인의 새로운 저항-주체와 양식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3>여성주의를 전면화하자!

기간 전국학생연대회의 운동에 대한 처절한 반성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유력한 경로로서 ‘학생사회의 여성주의적 재구조화’를 이후 우리의 주요 과제로 제시하는 바이다. 이는 지난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전체의 반여성성을 지양해나가고자 함이며, 새로운 저항-주체화 경로를 모색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의 저항주체화와 여성적 저항주체화라는 두 가지 경로를 동시적으로 구축하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과 실험을 감행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운동을 전면화하자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실천적으로 ‘인민중의 인민’―여성의 얼굴과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의다.


Ⅳ. 전국학생연대회의의 해소를 결의한다!


전국학생연대회의에 부여될 마지막이자 역사적 임무로서 전국학생연대회의 해소투쟁을 결의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멸하듯 전국학생연대회의는 소멸한다. 이미 그 생(生)을 다하였다. 그러나 소멸에는 방식이 있다. 비록 지금 우리는 해소라는 이름으로 소멸하지만 때로는 결집하고 때로는 논쟁하기위해 대중 속으로 산개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택하는 소멸의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멸은 그저 불살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임계를 넘어서기 위한 다른 방식으로의 전화다. 하기에 오늘날 역사적 자본주의가 배태하는 구조적 폭력에 맞서, 착취의 모순에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하는 그 날 까지, 우리의 운동, 우리의 투쟁, 우리의 실험은 중단 없이 계속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세적 진리효과와 자기결집의 근거를 상실한 전국학생연대회의를 포함한 모든 현존하는 질서를 해체하고, 평등-자유-연대의 원리로 반신자유주의에 전선형성의 한 길로 달려 나갈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좌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동지들의 사명이자 시대적 요구이다.


동지여! 대중운동의 너른 바다에서 다시 만나자! 鬪爭!!





학생운동 혁신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전국학생연대회의 해소를 결의한다 !


야만과 폭력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평등-자유-연대의 원리로

중단 없는 투쟁과 새로운 실험을 단행하자 !


단결을 아는가 그대 청년학생이여

길었던 침묵의 어둠을 갈라 버릴 수 있는 단결의 노래를


연대를 아는가 그대 해방 불꽃이여

마침내 쟁취할 민중의 새 세상을 부르는 연대의 투쟁을


거리에 울려 퍼지는 연대의 함성과

노동의 싸움은 자본의 태양을 녹여 내는 힘찬 불꽃이라


혁신하라 관성의 낡은 굴레 모두 벗어 던지고

건설하라 민중의 새 세상 전국학생연대회의여 !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와 학생운동 혁신을 위한

전국학생연대회의(解)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6-06-12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학생운동 위기의 역사...
 

 

나: 그림자군. 자네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그: 무엇을 말인가?


나: 그것 말이네. 그것.


그: 무엇. 무엇. 도대체 무엇!


나: 말이 통하지를 않는군. 답답하네. 답답해.


그: 자네도 어쩔 수 없군


나: ...


그: 이런 가을밤.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줄 아나?


나: 슬픈 것? 가장 슬픈 것? 그런 것을 도대체 왜 알아야 하나. 가장 슬픈 것을 알면. 이제 나머지 슬픔들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왜. 왜. '가장'이라는 빌어먹을 형용사를 여기저기 끌어다 쓰는 것이지? 강조하고 싶어서인가? 모든 것을 강조해 버리면, 모든 진한색으로 그림을 그려버리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이야!


그: 가을밤에 옷을 주어입는 여인의 뒷모습. 그 옷이 살갗에 스치는 소리. 그 등의 곡선. 그림자가 등뼈 주위로 흐르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나는 항상 슬퍼. 옷을 입는 뒷모습.


나: 뭐. 여인! 뒷모습? 무엇이란 말인가. 자네. 옷 따위는 찢어버리라지. 그림자따위가 옷에도 신경을 쓰는가. 하기는. 벗은 여인의 그림자는 보기 힘든 것이기는 하네. 그러나. 이는. 이따위는 중요한게 아니야. 사람은.. 사람은 말이야... 사람은..


그: 그림자는 한가지 색이 아니야. 석양과 같은 붉은 그림자도 있지. 붉으면서도 또 붉은게 아니야. 스러지는 거지.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 아릅답지 않나..


나: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이란.. 사람이란 말이야... 젠장. 나는 처음부터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뭐야. 그 표정은? 난 그런 것이 너무 싫어. 아니 자네 표현대로. '가장' 싫어. 진짜로. 무엇이야.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아. 아니. 정말로. 나는 그래.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제발 말이야. 사람이란.. 그래. 사람이란 말이야..


그: 사람? 사람? 인간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 투명한 비늘들이지. 자네의 눈에서 무엇인가 흘러. 물고기처럼 헐떡이면서. 그것의 이름이 무얼까. 어머니와 같은 맛이 나지. 첫사랑과 같은 향이고. 점점 흐르다가 흐르다가, 인간 안에서 무언가가 모두 빠져나가면 다시 인간은 살 수 있는 거지. 스스로를 죽이는 자는 분명 충분히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서일꺼야. 자살방지를 위해서는 코메디 대신, 진짜 비극을 보여줘야 한다고.


나; 자네. 정말 원하는게 무언가. 무엇이. 무엇을. 그렇게 원하기에 내 뒤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거지. 제발 이제 그만 해줘. 나는... 나는 말이야. 정말 지친다고. 정말이야. 이제. 그만해줘.. 부탁이야.


그; 나는 태어날때 부터. 아니. 바꿔 말하자면. 의식할 때 부터. 저 둥그런 태양으르 가지고 싶었어. 저것을 손에 쥐고. 으스러져라 쥐는 거지. 그래. 그냥 그거야. 태양을 그 물컹하고도 미끌미끌한 것을. 터지도록. 쥐고 싶었던 말이야. 그게. 그래. 그거야. 그것만이야.


나: 그런데. 도대체 왜 나야? 도대체 왜 나냐고? 태양을 원하면. 저 위로 가라고. 태양을 잡아 찢던 이를 터뜨려서 즙을 마시던. 나는 정말 상관하지 않아. 그리고 상관도 없고 말이야. 왜 언제나 내 발 밑에서. 그리고 눈을 감을때도 언제나 내 주위에 그렇게 있는거지? 제발..


그; 그때였어. 그래. 그때였을꺼야. 네가 눈을 찡그렸을 때.


나: 제발 가. 나는 도마뱀처럼 너를 잘라버릴꺼야. 네가 언제나 붙어있는 내 발뒤꿈치를 자르면 되나. 칼을 찾아야지. 칼을 찾아야 겠어. 너를 잘라내버릴꺼야. 너는 시들겠지. 너는 말라붙을꺼야. 너를 잘라내고 너를 찢어버릴꺼라고.


그: 시드는것은 누구일까. 네 발뒤꿈치에 왜 내가 항상 맴도는 줄 아나? 아킬레스도. 저 위대한 아킬레스도 말이야.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서 죽고 말았다고. 그런데 네가. 너. 그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냐고.


 

:

이것도 학부 2학년때 쓴 것. 대사라는 것을 실험해보고 싶어했다. 소설들에서의 대사는 미묘하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화라는 것은 어쩌면, 둘이 마주보며 끊임없이 비껴나가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는 꽤 부끄러운 고백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 없게 할 일이 없는 사람이고, 친구도 없고, 그런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부끄럽게도 나는 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고 이를 밝힐만큼 뻔뻔하니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사실, '내'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할수도 있다.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 '내' 그림자의 소유를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누구에게서 선물받거나 구입한 기억이 없다. 사실 이를 누가 가져간다고 해도 별 상관을 안 쓸 수도 있을 터이다. 내 그림자를 누가 밟아도, 내 신발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그림자가 못 생겼다고 해도, 누가 내 귀가 보기 흉하게 길쭉하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터이다. 어쨌든, 그러나 나를 가끔 밝을 때나 빛이 있을 때면 졸졸 딸아다니고는 해서 편의상 '내' 그림자라고 붙인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림자와 내가 열띤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술할 작정이다.

각설하고 이제 대화와 그 당시 상황을 적어 본다. 그 당시 나는 녹음기를 들고 이를 녹음하지 않았음으로 지금 순전히 내 기억에 의해서 재구성된 것이고 하니 조금 착오가 있을 수도 있겠다. 혹시 내 그림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나 이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서 일부러 바꾼 것은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사실 나는 조금 비참한 상태였다. 일요일 오후, 누구도 집에 없었다. 전화를 걸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배는 고프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랬다. 심심했다. 그런데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실실 웃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림자의 표정을 잘 감별하지 못하지만, 이는 나중에 그림자가 내 모습이 우스워서 웃고 있었다고 말했음으로 알았다.) 나는 심심한 마음에 저 놈에게 말이나 걸어보자 라고 생각했다.

"이봐. 거기 안색이 어두운 양반. 자네도 심심한가?"

"어이. 안색이 어둡다고? 내 안색은 내 이빨만큼 하얗다고. 지금 어디서 시비를 거는 것이야?"

거의 즉각적으로 그가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봐. 당신 이빨도 검고 당신 안색도 검다, 이 말이야 나는."

그림자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었다. 나는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봐, 혹시 당신 그 여자 좋아하나?"

"누구 말이야?"

"시치미 때지 말라고. 어제 편지 쓸까 말까 고민하던 그 여자 말이야. 날씬하고 잘 웃는 여자."

"아니. 그림자면 그림자 답게, 그 여자 그림자나 신경쓸 것이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실로 나는 관심이 없어. 그 여자 뻔하지 뭐. 키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바라면서 살고 있을 구시대적 인간형임에 분명해. 이쁜 여자들은 다 그렇거든."

"아니. 왜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 당신은 그 여자 그림자에 관심 가진 적 없어? 없다고? 참 무심한 양반이네 그려. 나는 좀 내 세계가 넓을 뿐이라고. 관심을 갖는 것도 죄인가?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야 뭐야. 난 그냥 그림자들이 알고 있는 비법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는 솔깃했지만,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면 안된다는 것은 내가 13살때 내 첫사랑에 대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던 때의 아픈 기억으로 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녀와 사귀어 버렸다. 물론 비밀은 절대 지켰지만 말이다. 설마 내 그림자가 내가 짝사랑하는 그녀를 빼앗을 지는, 그럴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아마 안 될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배신당한 이야기는 고전이지만 자신의 그림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본 듯 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실상 내가 믿을 것은 묵묵히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내 그림자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도 그에게 그 '비법'을 바로 물어본다는 것은 조금 쑥쓰러웠고 나는 말을 돌려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척 했다. 아니 실상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림자라는 것은 나에게 조금 생소한 대화 상대이니까 말이다.

"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나인가?"

"아니.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있나? 내가 당신이라고? 그럼 당신은 나인가? 그럼 지금 우리는 미친 쇼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만약 자네가 혹은 내가 미쳤다고 해 보세. 그래도 결국은 두 명이 있지 않는가. 그 사람 머리속이라 해도. 만약 내가 자네이고 자네는 자네이면 자네를 지칭하는 것은 두 개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A는 B다. C도 B다. 그러나 A는 C가 아니다. 이런거 아닌가? 아닌가? 무엇 이상한가? 내가 말을 너무 빨리하는건가? 오해하지 말게. 내 친한 친구도 그의 그림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너무 화를 냈었네. 뭐라고? 잘못 말한거 아니냐고? 이런 사람아! 자네 역지사지를 해보게. 내 입장에서 자네를 '그림자' 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겠나? 자네는 눈과 잎술과 이빨이 다른 색이라서 '그림자'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은 왜 당신네 '그림자들'이 정하는 것이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그림자' 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아니 실상은 말일세. 자네들은 태양이 어디있던 간에 상관없이 똑같은 형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림자' 라고 말하는 것이야. 도대체 태양이나 광원에게 따르지 않은 존재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우리는 언제나 태양이나 광원을 생각하면서 우리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지 생각하네. 숭고한 임무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를 지켜야만 하고 말고. 자네 '그림자'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지만 말일세."

내 그림자는 흥분한 듯 보였다. 실상 모든 이에게 콤플렉스는 있는 법이지, 하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흥분한 이들에게는 진중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고의 무기인 법이다. 이 법은 언제나 들어맡기에, 그는 사과를 했다. 우리는 잠시 교통사고를 내서 고래고래 서로 욕을 하면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자기의 사돈인 이들처럼, 묵묵히 침을 삼키고 딴청을 피웠다.

(보편자, 실존자 논쟁. 그림자의 하소연. 등등으로 이끌어 나감.)



학부 2학년때 씀. 돌이켜보면, 가장 무엇이가를 쓰고 싶어했을 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구판절판


틀림없이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밀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재잘댔을 것이고, 세세한 정황이 시장 전체에 퍼져 있을 것이다. 남자의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그가 하는 섹스를 더 그로테스크하게 생각한다. 그걸 죽어가는 동물의 경련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쇠로 만든 인간이나 성자 같은 홀아비 역할을 할수는 없다. 낄낄대는 비웃음 소리와 농담, 의미심장한 눈길은 내가 별수 없이 치러야 하는 값이다.-58쪽

나는 그녀의 몸에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의 욕망은 그걸 향한 게 아니었다.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그곳에 나 같은 늙은이의 페니스를 집어넣는 행위는 우유 속의 산, 꿀 속의 재, 빵 속의 분필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과 나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 내가 옛날에 하때, 인간의 몸을 허리의 핵에서 발산돼 나오는 꽃이라고 상상한 적이 있다는 걸 믿기 힘들다.-60쪽

노인의 섹스. "죽어도 좋아"가 그 발가벗겨진 솔직함으로 충격적이라면, 이 책의 구절들은 고개가 끄덕여지며, 씁쓸하면서도 풍부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품절


세미나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캉은 고전 비극에서 코러스가 맡은 역할에 대해 말한다. 수많은 일상의 문제들로 고민에 빠져 극장에 온 관객들은 연극이 다루는 문제들에 속 편히 몰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연극이 요구하는 공포와 연민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전혀 없다. 우리 대신 슬픔과 연민을 느껴주는 코러스가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코러스를 매개로 해서 연극이 요구하는 감정들을 느낀다. "그렇게 당신은 모든 근심을 덜게 된다.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코러스가 당신 대신에 그렇게 해줄 것이다" (라캉, 1986, p. 295).-71~72쪽

객관적으로는 공연을 졸면서 보고 있더라도 우리는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원시사회의 '곡하는 사람'이라는 형태 속에서, 즉 우리 대신 울기 위해 고용된 여자들에게서 이와 똑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이 덕분에 우리는 타인을 매개로 애도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예를 들어 고인의 상속물을 나누는 문제로 언쟁을 한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외부로 돌리고 전이시키는 것이 단순히 소위 원시적인 발달단계의 특징은 아니다. 대중적인 텔레비전 쇼나 시리즈물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기술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미리 녹음되어 있던 웃음을 틀어주는 것 말이다. 재미있고 재치가 넘친다고 추측된 대사 다음엔 그 쇼 자체의 사운드 트랙에 포함되어 있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고전 비극에 나오는 코러스와 꼭 닮은 대응물이며, '살아 있는 골동품'이 발견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웃음이 필요한가? 이에 대해 가능한 첫번째 대답은 그것이 우리에게 언제 웃을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는 웃음이란 게 어떤 즉각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라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대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웃지 않기 때문에 이 대답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따라서 유일한 해답은 바로 텔레비전에서 구현된 큰 타자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덜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큰 타자가 우리 대신 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힘들었던 하루의 지루한 업무 때문에 지치고 피곤해도 매일 저녁마다 졸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타인의 중개 덕분에 우리는 그 후에 객관적으로 정말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