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품절


세미나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캉은 고전 비극에서 코러스가 맡은 역할에 대해 말한다. 수많은 일상의 문제들로 고민에 빠져 극장에 온 관객들은 연극이 다루는 문제들에 속 편히 몰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연극이 요구하는 공포와 연민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전혀 없다. 우리 대신 슬픔과 연민을 느껴주는 코러스가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코러스를 매개로 해서 연극이 요구하는 감정들을 느낀다. "그렇게 당신은 모든 근심을 덜게 된다.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코러스가 당신 대신에 그렇게 해줄 것이다" (라캉, 1986, p. 295).-71~72쪽

객관적으로는 공연을 졸면서 보고 있더라도 우리는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원시사회의 '곡하는 사람'이라는 형태 속에서, 즉 우리 대신 울기 위해 고용된 여자들에게서 이와 똑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이 덕분에 우리는 타인을 매개로 애도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예를 들어 고인의 상속물을 나누는 문제로 언쟁을 한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외부로 돌리고 전이시키는 것이 단순히 소위 원시적인 발달단계의 특징은 아니다. 대중적인 텔레비전 쇼나 시리즈물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기술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미리 녹음되어 있던 웃음을 틀어주는 것 말이다. 재미있고 재치가 넘친다고 추측된 대사 다음엔 그 쇼 자체의 사운드 트랙에 포함되어 있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고전 비극에 나오는 코러스와 꼭 닮은 대응물이며, '살아 있는 골동품'이 발견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웃음이 필요한가? 이에 대해 가능한 첫번째 대답은 그것이 우리에게 언제 웃을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는 웃음이란 게 어떤 즉각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라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대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웃지 않기 때문에 이 대답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따라서 유일한 해답은 바로 텔레비전에서 구현된 큰 타자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덜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큰 타자가 우리 대신 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힘들었던 하루의 지루한 업무 때문에 지치고 피곤해도 매일 저녁마다 졸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타인의 중개 덕분에 우리는 그 후에 객관적으로 정말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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