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웃음 - 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통해본 4.19 혁명의 가을
천정환.김건우.이정숙 지음 / 앨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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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한다, 그리고 '민주화된다'는 것은 헌법에 정한 대로 국민의 대표를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고, 행정 사법 입법으로 분립된 국가권력이 '법대로' 굴러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인간화됨을 의미한다. 그 인간화의 핵심은 평등이다. 내 자유와 행복의 기초가, 다른 인간에 대한 차별과 학대 위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평등. 곧, 민주화는 인간됨의 평균수준이 사회 전체적으로 함께 진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현행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공자님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국민국가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적 '자연 상태'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불평등과 야만적 경쟁이지, 평등과 사랑이 아니다. 평등과 사랑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전 사회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자연 상태를 제어해야 한다. 아니면 노인 어린이 여성 장애인 환자 빈貧자는 설 땅이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추상적 정치 원리일 뿐 아니라, 삶의 근본적 태도이자 매너이기도 하다. 인권을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으며, 폭력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 이는 삶의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사는 것이다.-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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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리즌 브레이크를 잼나게 보고 있다. 항상 주변 사람들보다 tv에 관해서는 느릴수 밖에 없는지라, 지금에서야 시즌 1, ep8을 본 상황. 동생이 호주 떠나기 전 강추한 시리즈이지만, ep1을 보고는 별루-_- 라고 생각해서 안 보고 있다가 훈련소를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감옥.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훈련소에 갔다와서 감옥을 다녀온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니, 나름 국가의 훈육의 정도를 도식화해볼 수 있겠다.

감옥 > 군대 > 학교 =회사 순으로. 대충 기본적인 마인드는 비슷하다. 어쨌든 '새사람'을 만드는 것. 그 '새사람'이라는 것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은, 시간을 지키고, 정해진 시간동안 일을 하고, '감시와 처벌'을 내면화하는 것.

결국 '감옥'이라는 것은 사법제도의 결과물이자, 그 외부이자 잔여를 의미하는 것. 그리고 이 사법제도라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계약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우리'가 만들고 또 스스로 구속하도록 동의한 것. 그러니까 스스로 규정을 만들고, 스스로 처벌당하고 있는 셈.

그럼에도 '탈옥'이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엄청난 처벌이 기다리는 일탈을 보는 즐거움, 또 우리가 살아가는 또다른 감옥인 일상생활인 회사, 학교에 대한 저항 반발심 때문.

결국 사회계약은 개뿔. '그들'이 만든 법제도이고, '민주주의'는 개뿔. 동의를 한 적도 없는데 끌려드러와서 죽치고 있는셈.

주인공 또한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은행에서 허공에 총을 몇발 발사하고 일부러 잡혀드러간 것.

아으 감옥 무서워라. 군대가 무서운 만큼. 나는 동의한 적도 없다고요. 비록 공익이지만. 학부1학년때 징집제 반대운동하겠다고 설쳤던 것이 생각난다. 그 이후 한창 오태양 선배나 국문과 철학학회 선배 징집제 반대 운동으로 감옥도 가고 했는데. 군대 거부 =감옥 이라니. 깝깝하다 깝깝해.

그렇게 깝깝해 하면서도. 묵묵히 '공익' 출근을 하고 있는 나. 깝깝해. 서로 역할놀이를 하면서 간수를 하고 죄수가 되고. 간수 또한 출근 도장을 찍고 간수의 간수인 간수장의 눈치를 보고. 집에는 '벌어먹여'야 할 가족들이 있고. 간수장은 또 주지사의 눈치를 보고. 부통령도 나오고. 그녀도 언론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민주주의 별거냐. 서로 간수짓하면서, 서로 죄수짓 하는 것. 물론 감옥에서도 그렇지만, 항상 돈 많은 이들은 예외. 저 멀리서 담배 피우고 있다.

세상은 감옥. 여기서 어떻게 탈옥혀? 요즘은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중. 그래도, 예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파이돈의 구절들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엄청난 궤변(?)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소크라테스씨가 나와서 항상 문제를 해결하고는 했던. 소크라테스 아저씨에 따르면 어짜피 죽을 것 -그도 육신은 감옥이라고 한다. 육신은 감옥이라. 사회도 감옥이라. 영혼만이 순수고 본질이라. 양파껍질처럼 모두 감옥은 아니고? 허공과 무를 가두고 있는 감옥?- 자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는데. 다시 그 교묘한 궤변을 듣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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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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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선배. 또는 여울이 누나. 학번차가 6년 되고, 또 학부는 선배가 독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내가 석사과정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선배다. 석박사 공통 비교문학 수업을 하나 같이 들었고, 그 때 누나의 강렬한 파토스가 실린 발표문에 놀랐었다. 아, 저 누나는 대학원 제도가, 글쓰기 방식이 글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글을 쓰는 구나 하는 부러움. 물론 그 수업이 비교문학과 수업이었고, 선배-선생님 ^^;이 하시는 수업이었기도 했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일상에서 퍼올린 누나의 고민과 글은 강렬한 감정과 함께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연은 그정도 까지였다. 6학번차고 전공도 다르니 자주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 때의 수업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과, 선배가 씨네21을 비롯한 학문스럽지 않은(^^) 곳에 쓰는 글들, 그리고 수유 연구실에서 낸 책들을 통해 심상치(?) 않은 선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뿐.

그런데, 훈련소 입소 전에 선배의 (계속 선배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못 읽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계속 선배가 부러웠고, 또 더 옆에서 알짱거리면서(?) 친해져 놓을걸 하는 후회가 든다. 안 그래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몇년만에, 아마도 난생 처음 선배한테 문자도 보내봤다. ㅋㅋ

선배는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있다. 드라마, 시트콤, 영화를 통해, 희망을 보는 것. 언제나 유념하고 있던 것이지만, 실천하기는 힘들었던 일. 방에 tv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tv볼 시간이라는 것 자체도 '시간낭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공교육의 힘이 어디갈까! 이제 우리의 길은 그 곳으로 밖에 통하지 않는다라고 몇년전에도 스스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그들'이 '문, 사, 철'이라는 경계를 지워놓은 곳에서만 알짱되고 있었다. 열정은 계속 식어가면서.

가끔 tv 드라마를 힐끔 보게되면, 그 상투성을 욕했고, tv는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거대 자본과 결탁된 방송사, 광고과 드라마제작 등등을 떠올리기만 했다. 미디어로 중개되지 않는 세상이란 없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전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배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고, 그 결과물이 이렇게 유쾌하게 산출되었으니 어찌 아니 부러울소냐.

그러나 읽으면서 이것이 정말 미디어의 '외부'일까는 아직 설득이 잘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더 부러울 수 밖에. 선배는 정녕 미디어의 외부를 보았단 말일까. 나는 안만해도 안 보인다. ㅜㅠ 사실 이게 내 최고의 문제랄 수 밖에. 희망도 없고, 길도 아직 깜깜해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길이 어렴풋하게라도 보일때의 치열함과는 질적으로 다를정도로 치열해야 하는데, 정말 힘들다.

정말 우리의 삶을 한 발짝씩 변혁시키는 것은 큰 일이고, 그것을 통해 균열이 일어날까. Prison Break에서 나오는 후커의 법칙처럼, 단단한 벽에 정확한 구멍을 내면 그 단단함은 사라진다는 것처럼. 확신이 없다. 무기력한 나.

아, 나도 희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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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품절


마치 내 몸속에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근육(수의근)보다 도저히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근육(불수의근)이 더 많은 것처럼. 우리의 심장과 소화기관은 백만 분의 일초도 쉬지 못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 근육들의 움직임과 피로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301쪽

'나'라고 하지만, 내가 이해 못하는 것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의 움직임과 피로와 슬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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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마이뉴스의 해외리포트란에 흥미로운 기사가 떠서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곧 공쿠르상의 시상식에 작가가 불참했다는 것. 그것이 '수상거부'를 뜻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주최측에 낭패감을 떠안긴 것만은 분명하다. 전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문학상을 주고받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될 만큼 '문학상'이 넘쳐나는 우리의 처지에서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식이다(믈론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은 예외적이며 아주 드문 일이지만). 작성자는 박영신 기자이다.

오마이뉴스(06. 11. 10) "최고 문학상?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은 수상자

공쿠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그 해 출판된 산문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오로지 소설 부문에만 수여해 왔다. 수상과 함께 작가에게 명성과 대중적 성공을 보장하는 공쿠르 문학상의 상금은 달랑 10유로.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상작이 발표되면 프랑스인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 해의 작품을 보기 위해. 때문에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은 통상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반면 공쿠르 문학상은 한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수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공쿠르를 거머쥔 작가 로맹 가리는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두 번째 공쿠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때 이름은 에밀 아자르였다. 결국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동일인물'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하기 직전까지 세상은 철저히 속았던 것.

지난 6일 올해의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미국인 작가 조너선 리텔(39)의 소설 <호의적인 사람들>(Les bienveillantes)이 그 주인공. 나치 친위대(SS)의 회고 형식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호의적인 사람들>은 지난 8월 불어로 출간된 이후 2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다. 지난달 리텔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리텔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가족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있다. 그러나 올해의 공쿠르가 발표된 지난 6일 주인공 리텔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리텔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리텔의 대리인은 <프랑스 2 텔레비전> 저녁뉴스를 통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으나 이것은 분명 '대수로운' 일이었다. 심사위원단은 애써 태연하려 했어도 시상식 현장은 '당혹' 그 자체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때도 불참한 경력이 있는 리텔은.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 TV를 병적으로 혐오하는 리텔은 이때 라디오 <유럽 1>과 인터뷰를 가진 일이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의 수상자 후보 명단이 발표된 시점이었다. 여기서 리텔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작품만큼 뛰어난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문학상이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해 프랑스의 여성정보 웹사이트인 <마드모아젤 닷 컴>은 문학상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일 현재 총 332명의 누리꾼이 참가한 가운데 절반이 넘는 52.1%가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상은) 작가들이 자기 친구에게 표를 던지는 바보들의 잔치."


'문학의 질을 평가하는 바른 지침'이라거나 '떠도는 작가들을 위한 귀중한 원조'라는 대답은 각각 30.1%, 17.8%에 불과했다. 시인 조르주 페로스의 냉소와 만나는 지점이다.

"문학상은 심사위원에 우월감을, 수상자에 열등감을 준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 리텔의 '반항'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의 '사건'을 환기시킨다. 리텔과 페로스의 '불평'을 넘어 혁명에 가까운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기념비적인 인물 장-폴 사르트르. 사후 26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살아숨쉬는 사르트르는 전세계에서 노벨상을 거부한 유일한 작가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노벨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장-폴 사르트르

기실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영예를 꾸준히 거절해왔다. 이를테면 전후인 1945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정부에 내 친구들이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거부한 바 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교육기관인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수차례 강의할 것을 요청 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같은 이유였다, '인맥'을 등에 업지 않겠다는. 그러나 굳이 '인맥'이 아니었어도 사르트르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964년이거나 그 후거나 나는 (노벨상 수상의) 영광에 응할 수 없고 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노벨상을 심사하는 왕립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국장에게 위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열어볼 틈도 없이 1964년 10월 22일 투표는 진행됐으며 아카데미 심사위원단은 공식적으로 사르트르의 수상을 발표하고 만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수상 거부를 알리는 편지를 쓰게 된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

"(…) 내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화전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동서양의 문화가 평화적으로 공존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록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내 호감은 두 말할 필요없이 사회주의와 동구권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나는 '최고'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입니다. 최고 기관에서 수여하는 어떤 영예에도 내가 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나 누군가 내게 레닌상을 제안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레닌상을 제안받은 일은 없습니다.

(…) 알제리 전쟁 중 ‘121인의 선언’에 우리가 서명했을 당시 상이 주어졌다면 나는 기꺼이 수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 싸운 '자유'도 함께 평가되는 의미가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은 없었습니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그러나 투사가 아닌 작가로서 사르트르의 소망은 이뤄졌다. 세상과의 '투쟁'을 끝내고 사르트르가 땅에 묻힌 1980년 4월 19일 5만여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일생을 통틀어 프랑스 국민이 선사한 감사의 인사인 동시에 그가 허락했을 유일한 상이었다. 프랑스인의 가슴에 새겨진 이날의 기억은 '귀여운' 일화로 남아 상징이 됐다. 어린 소년 하나가 후다닥 집으로 들어서며 외쳤던 것이다.

"아빠, 사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하는 시위에 갔다 왔어요!"


06. 11. 10.

P.S. 마지막 소녀의 멘트가 귀엽고 천진하다.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다룬 바 있지만, 내가 알기에 사르트르는 상금마저 거부하지는 않았다(그 점을 나는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번 수상작인 <호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이미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에 작가로선 거들먹거리는(?)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문학상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신인문학상' 정도로 족한 게 아닌가 싶다. 대신에 상금은 '10유로' 정도.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학상의 권위와 함께 대중과의 교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제들이 빠질 경우에 모든 걸 '상금'으로 카바할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에 거액이 상금이 걸려있는 게 예외이긴 하지만...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얼른 검색되는 몇 권의 책이다(물론 더 많은 수상작들이 번역/소개돼 있다). 이 중 파스칼 로즈의 <제로전투기>(열린책들, 1999)는 바로 책상맡에 있는 책이고 150여쪽밖에 안되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다(나도 어지간하다). 시간을 좀 내야겠다. 그나저나 <호의적인 사람들>도 아마 국내에 발빠르게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900쪽이 넘는 분량이라고 하니 역자(들)의 진을 뺄 만하다. 내년 하반기쯤에나 구경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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