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조선인 > 하드디스크 공간 늘리기

하드디스크는 창고와 같이 많은 프로그램과 데이터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이 하드디스크의 공간이 부족하면 컴퓨터 속도도 떨어지는등 컴퓨터 사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맨 처음 컴퓨터를 구입했을 경우는 하드디스크에 많은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사용기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그 많던 하드디스크 공간은 만원버스마냥 꽉 차 버리는 경우가 있죠.

용량이 큰 하드디스크로 교체하면 되지만 추가 비용이 들어가므로 필요 없는 파일들을 삭제하여 약간이나마 하드디스크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도 있다.

삭제해도 되는 파일들의 확장자

  • old ▶ 윈도우를 여러번 설치할 경우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이전 버전의 파일들
  • chk ▶ 하드 디스크 검사후 발생한 오류를 저장한 파일
  • tmp ▶ 잘 아시다시피 임시파일입니다.
  • hlp ▶ 도움말 파일
  • gid ▶ 도움말 파일인 *.hlp 파일을 열면 생기는 인덱스 파일
  • --- ▶ 윈도우 재설치 생기는 백업(back up)파일
  • bak ▶ 알다시피 back up 파일(위의 백업파일과는 약간 다르죠)
  • fts/ftg ▶ 도움말 파일(*.hlp)과 관련된 파일로 도움말에 내장된 색인 파일


위에 나열된 파일들은 삭제를 해도 무관한 파일들입니다.
삭제 방법은 '
F3' 키나 '윈도우 키'+'F' 키를 누르면 '찾기'창이 나온다.
(또는
'시작'→'찾기'→'파일 또는 폴더'를 클릭)

거기에서 '이름'에다가 삭제하고픈 파일들의 확장자를 적고 '지금찾기'를 클릭 한다.
예를 들어 확장자가 .hlp 파일을 삭제할려면 이름란에다가
*.hlp 라고 적으시고 찾으시면 확장자가 .hlp 인 파일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럼 삭제!

위의 *.hlp라는 말은 확장자가 .hlp인 파일을 말합니다.
확장자가 .bak파일을 삭제할려면 *.bak 라고 적으시면 되겠죠

특히 tmp 파일은 c:\windows\temp에 많이 쌓이는데 탐색기에서 직접 이동하여 전체 삭제하여도 된다. 혹 실행중인 파일일 경우 안 지워지므로 실행중인 프로그램을 모두 종료하고 삭제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엘리펀트맨
크리스틴 스팍스 지음, 성귀수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에 대해 비유적으로 평가하자면, 4번타자 이승엽이 직구를 정확히 그리고 강하게 때려서 이승엽과 투수를 포함해서 관중들도, 아 이제 넘어가겠구나 하고 저 멀리를 바라보는데, 공이 바로 앞에서 떨어지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쉽게 말해서; 소재와 주제는 훌륭하고 정말 잘 쓰여질 수 있는데 (즉 홈런을 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데) 막상 서술이 너무 딸려서 나온 결과물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같은 소설이랄까. 좀 더 흥미롭게, 좀 더 독자들이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을, 좀 더 내밀하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만을 잽싸게 훑는 듯한. 할리우드 영화나 디즈니 만화같은 꺼림칙한 분위기.

이 소설의 '소재'는 엘리펀트 맨으로서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에 프로테우스증후군'을 함께 앓아서 '괴물'과 같은 외모를 지니게 된 한 남자와 그를 처음에는 연구대상으로만 보다가 마침내 그와 '친구'가 되는 젊은 의사의 이야기이다. 이 스토리-라인 자체도 쫌 디즈니 만화나 할리우드 영화 같은 인공적 솜사탕 같은 분위기가 있지만, 이러한 설정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은 실화에서 전해주지는 못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그 박사의 '회고록'. 물론 이는 일방적인 정보다.)

그랬을때 정말 독자가 알고 싶은 것, 혹은 이 책이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외모지상주의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증명해낸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는 표피적인 서술과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급박한 스토리-라인 속에 묻혀지고 만다.

이 소설을 쓴 이 또한 소설가이며 동시에 시나리오작가라서 그런지, 소설보다는 '감동적인' 할리우드 영화 대본을 보는 듯 하다.

정말, 엘리펀트맨의 내면을, 그의 과거를, 그의 꿈과, 그의 콤플렉스와, 그에 대항하는 그 주위의 '일반인'들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를 통해 우리의 '외모지상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을 수는 없었을까? 소설 중간중간에 엘리펀트맨을 향한 뭍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내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보는듯 화끈거리는 장면은 몇개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이러한 반성은 곧 스토리만을 급박하게 좇아가는 서술로 인해 방해되고 말았다.

주인공 의사와 병원 운영위원회는 어찌 그리 착하고, 영국 공주와 여왕은 왜이리 천사 같은가? '설정된' 티가 뻔히 나는 전형적인 악당은 왜 그렇게 흠집 하나 없이 악하고,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지독하면서도 또한 몸이 불편한 엘리펀트맨이 달아날 수 있을 만큼 어리숙한가?

그렇다. 동화이니깐 가능하다. 요즘 전태일 평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읽으며 분노하고 눈물도 흘리고, 슬퍼하다가도 희망을 찾는다. 이는 '사실'에 입각한 평전의 성격과 더불어, 조영래 변화의 뜨거움 가슴과 냉철하게 현상의 이면을 뚫으려는 서술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엘리펀트 맨은, 그러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전형적인 인물들의 설정, 뻔한 스토리 라인. 요즘은 이제 디즈니도 이렇게는 안 쓸텐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꾸로 읽는 세계사 - 거꾸로읽는책 3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스스로를 '얼치기 역사학자'로 규정하고 있는 유시민의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초판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규정하고 이를 매우 싫어했던 평범한(?) 학생이었고, 짜증을 내면서 읽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다시 이 책을 집어든 것은, 고등학생에게 읽히려고 하면서 다시 나도 읽어야 되겠어서이다. 3판이 되어 내용과 문장이 많이 바뀌었고, 사진이 늘어났으며 읽기 편하게 편집도 잘 되어 있다.

그리고 '얼치기 역사학자'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도 나름 사실(史實)과 해석이 잘 섞여 있고, 판단에 동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유시민 스스로도 이 책이 중판을 내고 개정판이 나오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지만, 나도 어리둥절하다.

유시민은 경제를 전공한 사람이고 지금은 정치인이다. 물론 예전에 그가 이 책 초판을 낼 때의 상황에서 이 책의 의의와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데, 지금 정치인이 된 유시민 역사학, 세계사와 전혀 상관없는 그의 이 세계사 관련 책이 이렇게 잘 팔리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이는 분명 2차 사료를 바탕으로, 아니 3차 사료(국내외의 역사교양서)를 바탕으로 만든 책에 불과하다. 이 땅의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이 분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보다 정확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잘 팔리는 책을 쓰기는 힘든 건가?

이렇게 내가 까칠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치인' 유시민에 대한 내 까칠한 반응과 연결되어 있고, 유시민의 진보적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이 책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정치인이 된 후의 그의 말, 행적을 보라.

어쨌든 이 책에 내용은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정치인 유시민에게는 동의할 수 없다. 그가 이 책을 다시금 살펴보고 '저자'로서, 같은 역사관과 동일한 실천 강령으로 살 수 있다면...

그래도 눈에 밟히는 표현들은, 홍군이 얼마나 힘든 투쟁을 하며 '대장정'을 감행했나하면서 '호전적인 미개부족이 사는 티벳 삼림지대(167)'를 지나서 등의 표현이다. 이는 '중화주의'적 마인드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미개부족이라니! 왠지, 민노당 찍으면 사표라고 했던 그의 언행이 떠오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AYLA 2006-12-0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주였던가..이 시리즈.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신화 편이 유시민 여동생분이 지은거더라구요 신기했어요 무척.

기인 2006-12-0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요? ㅎㅎ :)
 
노인과 바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50여년전 쓰여진 이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다시'라고 하지만 아마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것이라서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아는 결말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다시 읽으니, 까뮈나 사르트르와 많이 비교된다. 특히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와.

불굴의 의지, 행위 자체의 무의미성.

그럼에도 핵심적으로 다른 것은, 인간의 '본질' 자체를 투쟁으로서 선규정하고 출발하는 듯한 인식이 곳곳에 보이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실존'과 저주받은 자유에서 출발해서 '앙가주망'에 도달해서 투쟁으로 귀결되었다면,

헤밍웨이는 삶이란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은 투쟁이라는 본질을 표나게 강조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빵보다 인문학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요즘 기사들이야 온라인에 다 뜨지만 좀 '구식'인지라 아직도 '신문지'를 선호하는 편이다(e-book에 별로 취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지성 섹션에 읽을 만한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에 관한 리뷰를 일단 옮겨오기로 했다. 그건 이 책에 관한 자료들을 좀 찾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제는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인데, 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희망의 인문학'이라고 붙여진 것은 최근의 '인문학 위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대안을 모색해본다는 의미도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겨레(06. 12. 01) 가난한 자에 필요한 건 '빵' 아닌 '장미'

가난한 사람 구제는 쌀을 나눠주는 것보다 쌀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게 당연히 낫다. 실직자에게 당장 돈 몇 푼 나눠주는 것보다는 취직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키는 게 더 나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켄 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2002)를 막바로 떠올리게 한다).

국가가 가난이나 실업구제 방편으로 동원하는 노동연계복지정책은 대부분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이매진)는 이를 호되게 비판한다. 그런 식은 우선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 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존재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토대를 둔 복지정책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키면서” 그들을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게” 해준다.

좀더 나가 보자.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공평하게 힘을 나누어 가질 만한 경제력도, 지적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인문학을 부자와 중산층이 독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놓은 채 그저 훈련만 시킴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순응적인 사람들로 묶어놓을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위한 정규대학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 창립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원제는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富)-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쯤 되겠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 빈곤층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부’란 결국 인문학이다.

왜 인문학인가? 쇼리스는 뉴욕 인근 중범죄자 수용 교도소의 가정폭력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재소자를 만난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는 질문에 그 재소자는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화가 인문학자로서의 쇼리스 삶을 바꿔놨다.

해결의 실마리는 아이적부터 약자들의 사고 자체를 옭아매고 그들을 성장기까지 지속적으로 빈곤상태로 묶어놓는 매커니즘, 곧 무력(force)의 포위망을 깨뜨려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적 세계(페리클레스가 말하는 정치적인 삶)로 이끌어가도록 교육하는 것이며 거기엔 ‘성찰적 사고능력’이 필수적이다. 비니스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 바로 그것이고 그게 다름아닌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물고기 낚시기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왜 필요한지, 그 역사와 사회적 파장은 어떤 것인지 등 더 깊고 폭넓은 사유로 이끄는 것이 인문학인 셈이다. 저자는 대학을 비롯한 많은 학교들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직업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국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번성”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경고한다.

클레멘트 코스란 명칭은 저자가 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구상하고 의논한 상대 제이미 인클란 예일대 법학부장이 설립한 상담소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서 따온 것이다. 뉴욕 남동부에서 ‘사회복지금 수급자, 노숙자, 재소자, 전과자들’까지 포함된 “가난하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고 특별한 기술도 없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95년부터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4개 대륙 6개 나라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고 아프리카 가나에서도 코스 개설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책 역자들은 모두 광명시의 평생학습원을 수탁운영하고 있는 성공회대 교수들이며, 이들은 평생학습 분야의 새로운 접근방식과 실천사례의 모범으로 이 책을 선택했고 저자도 초청한 바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6. 12. 01.

P.S. 물론 함정은 있다. '빵 대신 장미', '빵보다 인문학'이란 발상이 동일한 시혜적 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부'를 가진자의 양심의 문제로 환원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러한 '말'이 아닌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인지라 예단은 유보한다. 참고로,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영문 소개이다.

Earl Shorris's book, Riches for the Poor, takes up the story of 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the eight-month course in poetry, logic, art history, U.S. history and moral philosophy that Shorris first described in his book on poverty in the United States, New American Blues (1997). Blues argued in compellingly lyrical prose that poor people tended to stay poor because of a "surround of force" that was made up of tough social facts (police brutality, bad landlords) and relative intangibles (the gloomy fatalism that attends poverty). Only exceptionally talented people could rise out of the "surround," which otherwise binds the poor inside a tight knot of fear and anxiety, hems them into purely private concerns with immediate safety, food and shelter. Studying Plato and Aristotle, Shakespeare and Conrad, Michelangelo and Cezanne, the poor could become "public" beings, and begin, as Shorris wrote, "the journey from poverty to democracy."

The course worked so well that even after Shorris stepped down from directing it in 1996 it flourished. As he notes in the first chapter of Riches, "by the autumn of 1999 more than 400 students were attending the Clemente Course," and there were some 17 Courses in the U.S.. Remarkably, the course remains the same seminar in foundational humanities in Seattle and Anchorage, Tampa and Mount Holyoke that it started out as on the lower east side of New York. "The Clemente Course originated in a single idea," Shorris recalls in the forward to the book. "Force and power are not synonymous in a democratic society."

As the Clemente Course grows nationally Shorris remains its best ambassador. Some of the biggest plans are on the horizon. In a recent interview he said, "The biggest projects are just getting underway. One is more Clemente Courses with Alaska Natives and Indians — we'll have six this year. The other is potentially just as exciting. Martín Gómez, Executive Director of the Brooklyn Public Library, and his staff and I are working on a way to start Clemente Courses in libraries. You asked how many Clemente Courses? There are a lot of libraries." Riches closes with a startling paragraph about the consequences of learning. In summing up his book, Shorris writes about the kinds of questions that the humanities encourages students to ask — how shall we live? what is the best route to the happy life? — and suggests that what the humanities offer is, in essence, a revolution in consciousness — that is, ultimately, what Shorris means by "politics." "In one way or other," he writes in his last paragraph, "politics will make dangerous persons of the poor. The certainty of that has worried the elites of this earth since politics was invented. But Plato was wrong about politics then and his fundamentalist followers are wrong now. The happiness of others is a goal worth pursuing, and the method for achieving it, democracy, is a risk worth taking."

P.S.2. 급하게 페이퍼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왔는데, 분리수거중에 떠오른 생각은 '빵과 장미'의 문제가 비단 자본주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시아 작가 블라지미르 두진체프(1918-1998)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1955; 집문당, 1989)가 문제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생존)과 장미(행복)와 인문학(사유)이다. 이것을 순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 현실사회주의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산업화'와 '선진화'를 우상으로 섬기는 뉴라이트의 오류이기도 한 것 아닐까? 그러한 순차성이 요구되는 상태는 '절대빈곤'에 한정되는바,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유의 절대빈곤인 듯싶다. 인간은 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동시에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건 위엄의 문제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6-12-0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빵과 장미를 보니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네요. 노동자 중심주의에 대해서 근래에 급속도로 회의하고 있었는데, 다시금 전태일 평전을 읽으니 그 통찰력과 행동력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공익이 이제는 공부방 같은 데에 투입되는 것으로 제도가 변화할 것이라는 데, 기대도 됩니다. 제가 사는 관악구에는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학생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
* 신문기사는 간략히 검토중이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결국 공익은 공부방 청소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거겠지요 -_-;;; 그럼 학부 친구들이 와서 동네 학생친구들이랑 함께 공부하면 저는 옆에서 청소를 하고 문 잠그고 해야 되는셈? ㅡ.ㅡ;;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