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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1. 제목을 '현대 사회 속 한 외로운 영혼의 망설임'이라고 붙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정확히 그것이다. 그런데 저 표지를 보면 알겠지만, 표지는 완전히 어린 친구들(?)한테 팔아먹기 위한 술수이다. 문학 출판사 중 믿을 만한 창비가 얼굴이 화끈거릴만큼의 유치한 표지와 작은 제본으로 마치 무협지 대여소 한편에 꽂혀져 있는 순정소설과 같은 표지로 독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 표지의 사소한 실수도 마음에 안 든 것은 그것 때문이다. 뒷 표지에 '산드라와 유디트 중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나와있지만, '산드라'가 아니라 '잔드라'이다. 영어식으로 읽으면 '산드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문에 수십번 넘게 나오는 '잔드라'를 표지 뒷면에는 떡하니 '산드라'로 적어놓는 것은 표지의 유치한 디자인과 함께 짜증을 유발시켰다. 사실 나 같은 '아저씨'가 이 책을 공개된 장소에서 읽고 있기 민망하다. '두 여자 사랑하기' 라는 제목도 원제와는 다른데, 뒤에 역자인 이재영씨가 변론을 적어 놓기는 했지만, 'Die Liebesblodigkeit'는 '사랑의 미혹' 또는 '서툰 사랑' 등으로 번역하는게 옳지 않았을까. 결국 소설의 '주제'는 그것이니 말이다.
2. 이 책의 초반부는 표지에서 느낀 영향 때문인지, 짜증 '지대로' 였다. 표지를 보면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괜찮은 남자가 젊은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실상 들어가 보면, 50대 초반 남자가 40대 후반 뚱뚱한 여자와 50대 초반 삶에 지친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곧 자신이 섹스를 제대로 못하게 될 것임을 걱정하는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책 본문 중에 스스로 그렇게 표현한다) 남성으로서 종말론에 대한 강연으로 근근이 먹고 산다. 이 사람은 남의 재앙에는 전혀 무관심한 독일인(유럽인)으로 나타난다.
변기에 앉자마자 살짝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가까운 곳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소리가 날아든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체가 우그러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이어지고, 뒤이어 사고 직후에 언제나 끼여드는 터무니없는 정적이 찾아든다. 행인들 가운데 일부는 신속히 자리를 피하고, 일부는 사고 현장 가까이로 황급히 모여드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나느 혼자 변기 위에 앉아 모든 희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닥친 재앙뿐이다. 저녁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 잔드라냐 유디트냐 하는 것이 내게 아무 차이도 없는 일이 되어버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35)
스스로 고백하기를 특별히 남들보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어떠한 전쟁도 겪지 않은 세대인 '나'는 '정신적으로 예민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안정시켜주거나 본격적으로 불안감에 빠질 수' 있는 정당한 느낌을 주는 목적으로 종말론 강의를 행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 이러한 '종말론' 강의는 이 세상에 대한 (특히 독일에 대한) 파시즘적인 현실이 닥쳐오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종말'은 '나' 자신의 섹스 능력이 점점 감퇴되가는 데 대한 불안감으로 나타난다. 그는 두 여자와 계속 성관계를 맺지만, 이는 만족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행위를 더 이상 (잘) 하지 못하게 될까바 불안해 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 마치 '나'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감에 대해 정당한 이유을 얻기 위한 것처럼, '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감의 원인을 언제까지 섹스를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유디트와 잔드라라는 두 여인 중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비껴나가고 있다. 딱히 선택을 할 필요도 없으면서 꼭 굳이 선택을 해야만 하는 듯이 우왕좌왕 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의 전부이다. 마지막에 '나'는 자신을 버리는 체험 (자신의 물건을 넣은 가방을 공원에 놓아두는 체험)을 통해서, 불안감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근저에는 '종말' 즉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섹스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재생산의 단절이고 곧 죽음이니까 말이다.
이제 가방 실험을 더 할 필요는 없다. 죽음으로 완만하게 접근해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임에 따라 이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이 갈등은 재빨리 지난날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 갈등에서 멀어지면서 내 기분이 왠지 엄숙해진다. 나중에 잔드라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아니면 유디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생각해본다. 이 문제가 이토록 커다란 지상의 행복으로 느껴졌던 때가 없다. 차츰 혼돈은 걷히고, 나는 다시 정확한 문장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나는 결단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던 상황을 극복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78)
그렇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50대 초반의 외로운 남성, 즉 '보편적 남성'이 벌이는 갈등이다. 그리고 꽤나 설득력있게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에 별을 세개 밖에 줄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을 '포장'하는 출판사의, 그것도 '창비'의 수단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일부일처제도를 비판하는 소설들과 전혀 같은 궤에 놓일 수 없는 소설이지만, 어찌된 것인지 이 책의 '포장'은 이를 이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듯 하다. 슬플 뿐이다. 그래도 '창비' 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