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경직된 프레임을 갖게 되었을까.
정치를 하다보니 주위 세력에 영합하여 선명해질 필요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포획되어 간 것일까.
알라딘에서 거의 팔리지도 않았고, 아마 국내에서 읽은 사람 자체가 많지 않을(기백 명이나 될까) 이 책은, 결국 박세일(교수)의 조중동 칼럼 모음집이다(그래도 그를 교수로 기억하고 싶다). 헌책으로 2,000원에 샀는데(지금 보니 1,000원짜리 매물도 있다), 그래도 전 소유자는 상당히 꼼꼼히 읽었는지 주요 단어가 형광펜으로 강조되어 있고, 총 71개 글 중 5개 정도를 갈무리해 두었다. 전 소유자의 단어/글 선택에는 꽤 수긍이 갔다.
"통일은 반드시 온다. 통일은 갑자기 온다. 통일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 63쪽, 2010. 9. 23. 자 조선일보 칼럼 "대한민국 선진통일추진위원회" 중에서
어쨌든 남북관계가 변화의 길목에 들어섰고, 우파로서는 그가 선도적으로 통일의 비전을 제시했던 만큼, 또 학자이자 교수로서는 나름대로 '슈퍼스타'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이니만큼 취할 만한 생각이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학자 DNA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실망스럽기도 했다.
책은 이를 펴낸 한반도선진화재단이 그 이념을 부각시킬 수 있도록 주제별로 묶은 편제를 취하고 있지만, 시기별로 읽으면 그의 논조 변화가 읽힐 것도 같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1991년의 칼럼, 2004년 3월 한나라당 입당 전까지, 아마도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인 2001~2003년에 쓴 칼럼 중에는 볼 만한 것들이 있다. 2003. 8. 19. 자 동아일보에 김형찬 기자가 쓴 "지성의 나무, 박세일 론(論)"도 읽을 만하다(찾아보니, 동아일보의 '지성의 나무' 시리즈는 20회로 마무리되었는데, 정운찬, 이인호, 신영복, 장회익, 박상륭, 김병익, 김우창, 유종호, 김종철, 승효상, 이문열, 신인령, 홍창기, 이강숙, 이만열, 김정욱, 황병기, 박세일, 신용하, 윤사순을 다뤘다. 참여정부 출범의 분위기를 탄 것인지, 라인업이 다소 놀랍다. http://news.donga.com/Series/70070000000494).
특히 자신의 전공인 노동경제학 분야에서는 편견 없는 통찰이 느껴지기도 한다. 2001. 10. 12. 중앙일보 칼럼의 제목은 "노동 존중의 사고"이고, 발전노조 파업에 대하여 2002. 3. 27. 동아일보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싣기도 하였다[검색해 보니 이 글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지금까지도 게시되어 있는데, 2018. 7. 28. 현재 총 2,079회 조회된 것으로 나타난다. 학생운동사의 망각된 페이지이지만, 당시 발전노조는 서울대, 건국대, 부산대에 집결했고(가스노조, 사회보험노조도 서울대에 모였다), 학생들은 이에 연대했다(최근 서술되는 미시사, 거시사는 이를 기록하지 않고 자의적 도식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런 대단위 노학연대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학내 청소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흐름이 있었다). 헬기가 서울대 상공에 떠서 발전사 사장들의 공동 명의로 작성된 '현업 복귀 호소' 전단을 살포했고, 경찰병력이 학교 정문과 후문을 에워싸고 신분증과 소지품을 검사했다. 졸업식을 전후하여 밤중 혹은 새벽에 공권력이 투입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노동부'는 지금 어디 있나
(전략) 도대체 우리나라 공기업 노사관계는 왜 안 풀리는 것인가.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너무 과격해서인가, 아니면 노조지도부가 특별히 불법파업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 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과격해서도 아니고 특별히 불법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 노동운동이든 노동운동에는 ‘과격한 요소’와 ‘온건한 요소’가 함께 존재한다. 어느 요소가 더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는 노동운동을 그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고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노사 간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상호존중의 의식과 관행이 정착되면 과격요소는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온건합리노선이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나라든 노사간 진실한 대화와 상호존중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한마디로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노력을 해야 노사협력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번 공기업 민영화 관련 파업 문제를 보면 정부는 무성의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년 전부터 예상되어 온 일이다.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지난해 여름 공기업노조에 새 집행부가 등장해 노사협상을 요구했어도 7개월 동안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 동안 정부는 어디에 있었는가.
(중략)
이렇게 노조를 잠재적 범죄집단시하면서 어떻게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고 노사협력이 가능하겠는가. 시대는 21세기인데 박정희시대의 권위주의적 노동정책관에서 한 발짝도 진전된 것이 없는 셈이다.
(중략)
노동운동의 과격성은 분명 사회적 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병의 증상이지 병의 원인이 아니다. 시급히 문제의 근본을 고쳐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하늘을 감동시킬’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나라 공공부문의 노동문제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후일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그가 되는 사람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글이다. 어쨌든 그런데,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고, 2006년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창립한 이후부터는 입장이 완전히 돌아서버린 느낌이다. 그는 정치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를 여럿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2001. 11. 2. 자 중앙일보 칼럼 "정책세력을 키우자", 2002. 9. 11. 자 동아일보 칼럼 "4,600명 대 82명" 등), 여전히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비정파적 민간싱크탱크"를 표방한 한반도선진화재단이 과연 그 명색에 부합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맨날, 독판으로 나라걱정만 하는 듯 살았지만 정치에는 별 소질이 없었던 그가, 차라리 계속 학자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러운 빈 자리를 아직은 마주할 수 없어서, 부서진 마음을 안고 전혀 다른 인물에로 관심을 돌려본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