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만을 무기로 삼은 문장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예순에 가까운 성공한 작가가 모든 것을 내걸고 이처럼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다는 것에 경이와 경의를 느낀다.

  당시에 졸라가 발표한 시론 13편 중 「Lettre à M. Brisson」과 「Lettre au Sénat」 두 편을 제외한 11편을 우리말로 옮겼다(13편 전부를 옮긴 책이 2014년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에밀 졸라: 전진하는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모두 '드레퓌스 사건'의 추악한 전개에 맞서 시시각각 정세적으로 개입한 글들이다.

  (원문을 넘겨볼 수 있는 링크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13523m/)

  드레퓌스파가 맞닥뜨려야 했던 근거 없는 중상모략과 국익론,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음험하게 진실을 늪에 빠뜨리려 하였는지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비록 당시에는 찜찜한 승리로 봉합된 측면이 있고, 졸라는 암살당하였지만, 시대를 증언하고 고발하였던 이들 덕분에 인류는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었다.

  과학주의가 어떻게 뜨겁고도 냉철한 인류애와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밀 졸라는 자꾸 관심이 가는 사례이다.


  지금 상황에 비추어 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구절들이 많다.


1897. 11. 25. 르 피가로에 실린 「쉐레르-케스트네르 씨 M. Scheurer-Kestner」(진실이 밝혀졌으니 당연히 정의에 입각한 해결이 쉽게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쓴 첫 글이다) 


  '사건'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여러 정황이 나로 하여금 사건을 탐구하게 하고 하나의 공식 의견을 가지게 했을지라도, 조사가 진행 중이고 재판이 열릴 테니 정직한 시민으로서 할 일은 가만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토록 분명하고 그토록 단순한 사건을 가증스러운 상호 비방으로 흐려놓는 것은 정말 금물이다(23쪽).

  정의를 위한 진실한 투쟁, 이것보다 더 영웅적인 투쟁은 이 세상에 없다(25쪽).

  앞서 말했듯 여기서 '사건' 자체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사건'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자에게는 더없이 간단하고, 더없이 명료하다.

  사법적 오판은 슬픈 일이지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법부가 틀릴 수도 있고, 군부가 틀릴 수도 있다. 여기서 군부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말이 왜 나오는가? 오판이 내려졌을 때 시급한 단 하나의 의무, 그것은 조속히 오판을 시정하는 것이다.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날, 바로 그날 진정한 과오가 시작되리라.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오판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판을 인정하는 데 괴로움과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할 결심을 하는 날, 바로 그날 만사가 형통하리라(28쪽).


1897. 12. 5. 르 피가로에 실린 「조서 Procès-verbal」


  이제 나는 가만히 군사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고자 한다. 이를테면 나의 역할은 끝났다. 나는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되어 더 이상 내가 투쟁할 필요가 없기를 간절히 소망한다(53쪽).


1897. 12. 14. 발간된 팜플렛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la jeunesse」


  청년,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함께 있으라. 그대들의 내면에서 정의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날, 그대들은 파멸하리라. 지금 나는 사회적 관계의 보장(la garantie des liens sociaux)에 지나지 않는 '법전'의 정의(la justice de nos codes)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존중해야 하리라. 그러나 좀더 숭고한 관념, 모름지기 인간의 판결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정의, 심판자들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기결수의 무죄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법을 향한 그대들의 불타는 열정을 자극하는 모험이 아닌가?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가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67쪽, 유기환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 번역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1898. 1. 6. 발간된 팜플렛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la France」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으리라. 사악한 무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전진이 한 걸음 한 걸음 적시에 이루어지리라. 진실은 그 자체로 온갖 장애물을 분쇄할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또 얼마간 진실을 땅속에 묻어두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에도 진실은 땅속에서 자라며, 땅속에서 엄청난 힘을 얻고, 어느 날 폭발의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을 날려버리리라. 앞으로 몇 달 더 거짓과 밀실 속에 진실을 가두어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재앙을 준비했음을 곧 알게 되리라(73쪽).


1898. 1. 13. 로로르에 실린, 바로 그 「나는 고발한다...! -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 J'Accuse...! - Lettre à M. Félix Faur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대통령 각하,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진실은 당신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단지 헌법과 측근의 수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역시 완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사건'이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각자의 입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 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 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했다는 것을(106쪽).


1898. 2. 22. 로로르에 발표된 「배심원들을 향한 최후 진술 Déclaration au jury」(어처구니 없게도,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재판받게 된다)


  청컨대 그 좌석에서 진정한 여론을 대표하십시오, 그리고 모두 지혜와 정의의 화신이 되십시오. 잠시 후 심의실에서 여러분이 표결할 때 저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노력이 국가의 이익에 다름 아닌 시민의 이익을 당연히 지켜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류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익과 만인의 이익을 혼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 여러분의 사업이 처해 있는 통탄할 만한 불경기에 대해 여러분이 느끼는 불안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도처에서 작금의 위기가 재앙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거래는 점점 더 위축되고, 매상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품고 계시는 생각, 여러분의 얼굴에 씌어 있는 생각은 너무나 읽기 쉽습니다. "그만하면 됐어, 이젠 제발 끝내자." 여러분은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죄 없는 한 인간이 악마도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한 인간의 이익 때문에 온 나라가 이 같은 혼란에 빠져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우리가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온갖 죄악에 대해 우리, 진실과 정의에 목마른 우리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를. 배심원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유죄 편결을 내린다면, 여러분의 평결에는 오직 하나의 이유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지키려는 욕망, 생업을 재개하려는 욕구, 저를 단죄함으로써 프랑스의 국익을 해치는 캠페인을 저지할 수 있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배심원 여러분,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건대, 저는 여기서 제 개인적 자유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단죄하는 것, 그것은 저를 더욱 더 대단한 인물로 캐워주는 일일 뿐입니다.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자는 결국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좋습니다. 저는 저를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거듭 말씀드리건대, 만일 저를 단죄하는 것이 불행한 우리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가 될 겁니다! 목하 우리나라를 죽이는 것이 그들이 몰고 온 단말마적 어둠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위정자들은 끝없이 과오에 과오를 거듭하고 있고,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고, 이후 그것을 감추기 위해 매일매일 건전한 양식과 공평한 정신에 대해 새로운 테러를 가해야 했습니다. 한 범죄자의 무죄 석방을 위해서는 한 죄 없는 인간에 대한 유죄 선고가 필요했던 겁니다. 바야흐로 오늘 그들은 여러분에게 저를 단죄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제가 진창에 빠져드는 조국을 보면서 고통의 절규를 내질렀기 때문입니다(116~119쪽).


1899. 9. 29. 로로르에 실린 「알프레드 드레퓌스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Madame Alfred Dreyfus」(드레퓌스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아니라 단지 감형을 받고 바로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풀려난다. 무죄판결과 완전한 복권만이 진실과 정의의 승리를 보장한다고 여겼던 드레퓌스파는 드레퓌스와 그 가족이 사면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부인, 이 사면은 정녕 가슴 아픈 사면입니다. 과연 그토록 가혹했던 육체적 고통 뒤에 이토록 가혹한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는 걸까요? 정의에 의해 의당 누려야 할 것을 자비에 의해 하사받았으니 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인지요!

  가장 나쁜 사실은 이런 최후의 불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것이 조율된 듯하다는 것입니다. 재판관들이 그것을 원했지요, 그들이 범죄자들을 구하기 위해 죄 없는 자를 다시 공격한 것이지요. 물론 자비라는 탈을 쓴 잔학한 위선 속에 몸을 숨길 작정을 하고서 말입니다. "그대는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대에게 자유만을 적선하려 하오. 그대의 법적 불명예만이 그대의 집행인들의 범죄를 가려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오." 지금까지 그들이 저지른 기나긴 죄악의 목록 가운데 이보다 더 가증스러운 반인간적 테러는 없었습니다. 살인자들이 계급장을 주렁주렁 단 채 백주에 대로를 활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성한 자비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다니요, 신성한 자비를 거짓의 도구로 만들다니요, 신성한 자비로 죄 없는 자를 모욕하다니요,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 결정적 평화는 오직 정의 속에 존재합니다. 일체의 비겁한 행동은 오직 새로운 열병의 원인이 될 뿐입니다(164~165쪽).



  『실험소설』에 관해 쓴 글(http://blog.aladin.co.kr/SilentPaul/10183497)에도 일부 언급하였지만, 다음 책들을 더 참고할 수 있겠다.




  그 밖에도,


  Alain Pagès,  Émile Zola, un intellectuel dans l'affaire Dreyfus (Paris: Librairie Séguier,1991)

  Jean Bedel, Zola Assassin? (Paris: flammarion, 2002)

  Les Intellectuels face a l'affaire reyfus alors et aujourd'hui (Paris: L'Harmattan, 1998) - '나는 고발한다!' 발표 백주년 기념 논문집

  Pierre Birnbaum, L'affaire Dreyfus (Paris: Gallimard, 1994)


  모두 알라딘에서는 검색되지 않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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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불과 몇 년 전에 이런 시대도 있었다.

  트위터가 아직은 사그라들지 않아 핫하던 시절, 名士의 일거수일투족, 생각 하나하나를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전파하던 그런 때였다.

  정권의 질식성에 대한 반정립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상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고, 또 잘 속는다.


  강준만 교수가 추린 '멘토'라는 사람들은, 시간의 놀라운 힘으로, 책이 나오고 겨우 6년이 지난 지금, 포르투나(fortuna)의 이런저런 시험에 직면해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저마다의 천성과 밑천, 비르투(virtu)를 드러내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글 쓰는 기계', 강준만 교수의 순발력과 부지런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포퓰리즘에 대한 반이분법주의 문제의식에도 공감하지만, 너무 재발랐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여하간 당시에는 비슷비슷한 필진 혹은 대담자들-'멘토들'-로 조합된 유사한 책들이 쏟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제목빨이 유난한 이 책은, 바로 뒤에 나온 『안철수의 힘』을 예비하는 책으로, 실은 안철수를 띄우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었던 책이다. 분량과 내용 면에서 제일 앞 안철수 꼭지가 가장 자세하기도 하지만, 당시엔 위 멘토들과 안철수의 관계가 정리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죽이기』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말았다(『강남좌파』는 차라리 여전히 유효한 독자적 기여가 있다고 본다).


  기계적 극중주의로, 의도와는 달리 뺄셈만 하다가 갈 길을 잃고 서글픈 신세가 된 안철수를 망치는 데, 강준만도 조금은 기여하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제를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이제는 상당수가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퇴장한, 인용 문헌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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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 국민작가, 메이브 빈치의 유작.


  저마다의 다채로운 삶 가운데도 보편적 진실이 있고, 그것을 깨닫게 하여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와 용기를 주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힘이자 가치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 세상 어디선가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누구라도,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징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일주일 '속에', 혹은 그 일주일을 '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응축되어 있어 지혜롭고 친근한 할머니의 넉넉한 여운과 깊이가 느껴진다. 시종일관 따뜻하면서도 간결한 격려와 위로에, 읽는 내내 미소 어린 눈물이 났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자주, 많이, 따뜻하게 울었다. 우리 삶의 연관을 떠올리며 이렇게 많이 감동하고, 운 책도 오랜만인 것 같다. 책을 권해주신 분이 흐뭇하게 생각나기도 했다.

  메이브 빈치께서 2012년 자연으로 돌아가셨을 때, 그 분 책에 울고 웃었던 얼마나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양 슬퍼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책장을 덮으며 참 좋은 사람들과, 전에 갖지 못하였던 편안한 휴식을 누렸다는 충족감이 들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독자도 드물 것이다. 메이브 빈치는 분명, 아일랜드에 큰 선물을 안기고 떠나셨다.


덧1) 우리말 번역본 책 표지는(특히 창 밖 풍경은) 책이 그린 아일랜드 풍경과는 살짝 어긋나 있다고 느껴진다. 2012년에 나온 영문본 표지와 같이 '겨울'바다를 조금 더 스산한 톤을 섞어 그렸어야 하지 않나 싶다. 지금의 표지는 계절을 오해하게 할 수 있다.


문학동네 등 출판업계 관계자 분들을 위한 덧2)

이 좋은 소설가의 작품 중 『그 겨울의 일주일』은 한국에 처음 소개된 책이다. 그것도 첫 작품 출간 후 40년이 다 되어가는 2018년이 되어서야... 부디 많이 읽혀 다른 책들도 번역되기를 바란다. 저 아래 목록은 출간일 순.


덧3)

위키피디아 "Maeve Binchy" https://en.wikipedia.org/wiki/Maeve_Binchy

메이브 빈치 부고

  (가디언)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2/jul/31/maeve-binchy

  (뉴욕타임즈) https://www.nytimes.com/2012/08/01/books/maeve-binchy-writer-who-evoked-ireland-dies-at-72.html 


메이브 작품 목록 참고자료

https://www.bookseriesinorder.com/maeve-binchy/

https://www.thriftbooks.com/a/maeve-binchy/19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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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생활에서 인간은 모두 서로를 실험하고 있을 뿐이다." 클로드 베르나르 Claude Bernard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1865)』에 감화된 에밀 졸라는, 실험적 방법이 육체적 삶을 해명할 수 있다면,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삶 또한 실험을 통하여 해명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화학에서 생리학으로, 생리학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으로 발전하는 경로에서,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입증의 정도일 뿐 본질은 같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 에밀 졸라가 말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실험으로서 '실험소설'이 위치한다. 인간 정신의 진화는 감정, 이성, 실험을 거쳤는데, 먼저 이성을 압도한 감정이 신학을 창시했고, 다음으로 이성 혹은 철학이 스콜라 철학을 낳았으며, 끝으로 실험, 즉 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가 감정이나 이성과는 분리된 외부 세계의 진리를 깨닫게 했다는 베르나르, 그리고 졸라의 말은 실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오귀스트 콩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 따를 때 진리 탐구는 언제나 감정, 이성, 실험으로 이루어진 부동의 삼각대에 의존한다. 먼저 감정이 언제나 첫 주도권을 쥐고 선험적 관념 혹은 직관을 낳고, 이어서 이성 내지는 추론이 선헌적 관념을 발전시키는 한편 그 논리적 결과를 연역하며, 끝으로 이성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하여 언제나 실험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법칙은 연속적인 3단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사고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처음은 신학의 단계로, 여기서는 어떠한 증거도 지니고 있지 못한 즉자적 허구들만이 공공연하게 지배한다. 다음은 형이상학의 단계로, 의인화된 추상이나 본질이라 하는 것들의 일반적 우위가 그 성격을 규정짓는다. 마지막 단계가 실증의 단계인데, 이는 항상 외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중략) 사실 모든 것은 신학적 발상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적인 논의 과정을 거쳐, 실증적 증명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일반법칙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 오귀스트 콩트, 『실증주의 서설』 중에서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는 에밀 졸라의 결정론은 숙명론과는 다르다. 숙명론이 그 조건과는 무관하게 어떤 현상이 필연적으로 출현한다고 가정하는 반면, 결정론은 그 출현이 강제적이지는 않은 현상을 낳게 되는 필연적 조건에 주목하고, 원인을 이루는 그 조건을 바꿔주면 결과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졸라의 문제의식만큼은 썰 경쟁이 되어가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에서도 그 이름에 걸맞기 위해 귀담아들을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뇌과학, 데이터과학 등의 발전으로 '과학 시대의 문학'이라는 졸라의 꿈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기질상 수긍되는 바가 아주 컸다.

  에밀 졸라가 풍부한 '사실(fait)'을 바탕으로 강인한 필력('명징한 논리'로서의 문체)에 담아 쓴 여타의 글들도, 프랑스사나 '에르나니 논쟁'과 같은 역사적, 문학사적 맥락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유기환 교수님의 꼼꼼한 주석 덕분에 그것이 상당하게 충족된다. 아직 2007년에 나온 초판이 소진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2018. 6. 30. 현재 342 정도다), 에밀 졸라의 주요 논문 여덟 편을 묶어 번역해 내시기로 한 것 자체가 어느 정도 결단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읽는 내내 양질의 번역과 주석에 사랑이 샘솟을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읽을 자료 중 앙리 미트랑, 김미연 번역, 『졸라와 자연주의』(탐구당, 1993)와 정명환, 『졸라와 자연주의』(민음사, 1982), 피에르 코니, 임채문 번역, 『자연주의』(탐구당, 1985)는 지금 구하기가 힘들어 보인다. 참고로 졸라의 자연주의는 루소류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자연'과학'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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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유기환 교수님의 해설글들을 참조하여 에밀 졸라의 소설론에 대하여 짤막하게 정리해 본 글. 주석은 맨 아래에)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1)


  1898113로로르(L’Aurore)지에 발표된 원고지 80매 분량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에밀 졸라(Émile Zola)양심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졸라는 재판 비용, 집필 시간 부족과 작품 판매 격감, 영국 망명 등으로 파산 상태로 내몰리고, 결국 1902년 석연치 않은 죽음까지 맞이하여야 했지만,2) 그 때문에 졸라의 문학적 지위와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졸라 앞에 놓인 도전은 위대한 사실주의자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에 대한 차별화와 극복이었다. 이를 위해 졸라는 극단적 이론주의를 추구했다. 바로 자연주의(naturalisme)였다. 자연주의의 본질은 문학에 대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에 있었다. 졸라는 유전론과 환경결정론을 씨줄과 날줄 삼아 20권에 이르는 루공-마카르 가의 사람들(Le Rougon-Macquart, 1871~1893)을 펴낸다. 부제로 붙은 2제정 시대 하에서 한 가족의 자연적사회적 역사’(Histoire naturelle et sociele d’une famille sous le Second Empire)에서 자연적 역사가 유전론을, ‘사회적 역사가 환경결정론을 암시한 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컨대,나나(Nana, 1880)의 주인공 나나는 선술집(L’Assommoir, 1877)의 주인공 베르베즈의 딸로, 관능과 나태라는 어머니의 일탈적 기질을 유전받고, 파리 빈민가의 타락한 환경에 영향 받아 창부로 전락한다.


  ‘루공-마카르라는 제목은 아델라이드 푸크 Adélaïde Fouque라는 여자를 정점으로 하는 한 가족에서 유래한다. 주인공 아델라이드는 루공이라는 농부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3년 후 남편이 죽자 마카르라는 주정뱅이 밀수업자와 관계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는데, 적통인 루공 측 가계는 정상적인 삶으로, 사생아 혈통인 마카르 가계는 아웃사이더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졸라의 ‘4대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선술집, 나나, 제르미날(Germinal, 1885), 인간 짐승(La Bête humaine, 1890) 등 모두 마카르 계열의 작품들이다. 졸라는 현실의 서기가 되어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온갖 풍속을 그려냈다. 그것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졸라는 역사학자의 자세로 쿠데타, 부동산 투기, 은행 증권 조작, 자본집중 등 지배계급의 타락상과 그에 따른 민중의 참상을 폭로함으로써 발자크적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다. 졸라는 선술집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진실을 다룬 작품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서민의 냄새를 풍기는, 서민에 대한 최초의 소설이다.” 발자크의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 1830~1848)이 귀족과 중산층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고, 플로베르도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1869)에서 민중을 충동적 존재로 그렸지만, 미셸 레몽(Michel Raimond)의 평처럼, 졸라는 노동자를 하나의 사회 계급으로 등장시킨 최초의 소설가였다.3)


  졸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험을 강조했다. 그의 소설 이론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 실험소설(Le roman expérimental, 1880)이다. 콩트의 실증주의, 텐의 결정론, 뤼카의 자연유전론, 르투르노 정념의 생리학,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등의 영향을 받아 졸라는, 실험적 방법이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문제는 감정 자체의 묘사가 아니라 감정 메커니즘의 형상화라는 것이다. 졸라에게 개인적 감정은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실험소설가는 그러한 개인적 감정에 그치지 않고 현상의 과학적 메커니즘을 인간과 자연을 통하여 보여주는 사람이다. 졸라는 실험적 방법이 인간의 육체적 삶을 해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성적지성적 삶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 점에서 실험소설이야말로 과학적 진화의 숙명이요, 실험과학의 종착점이어야 했다. 졸라는 자연주의 소설이 인간 심리를 대상으로 한 진정한 실험으로 이해되기를 바랐고, 사회를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파악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의 온갖 질병을 고치는 의사, ‘실험적 모랄리스트가 되고자 했다.4)


  “선과 악의 주인이 되는 것, 삶을 조절하는 것, 사회를 조절하는 것, 결국 사회주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 특히 실험에 의해 범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의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과업 중에서 가장 유용하고 가장 도덕적인 과업이 아닐까?”5)

 

  졸라에게 성공을 안겨준 문학의 엄격한 과학화는 시간이 갈수록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경직된 교리가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1887대지(La Terre)의 출판 후 비판은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다섯 명의 무명작가가 졸라를 외설 작가로 비난하며 르 피가로(Le Figaro)지에 ‘5인 선언’(Manifeste des Cinq)이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기에 이른다.6)


  자연주의의 원대한 꿈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사실주의와 선명하게 구분되는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소설에만 국한되고 연극, 시에서는 부진하여 문단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에밀 졸라라는 특정 작가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소설가에게 실험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차라리 바로 과학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비판, 유전론이 피상적으로만 적용되었다는 비판(예컨대, 제르미날의 주인공 에티엔은 어머니 제르베즈로부터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의 유전자 때문에 단 한 방울의 술에서도 살의를 느끼는데,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동자의 불행이 열악한 환경 탓으로 돌려지는 순간 스스로 환경을 바꿀 능력이 없는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부의 시혜에 기댈 수밖에 없어진다는 비판은 뼈아픈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졸라 문학의 현대성이 재조명 받고 있다. 졸라는 등장인물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기능(fonction)으로 간주한 선구적 소설가로 떠올랐다. 그가 그린 서구 문명의 이행기는 미국 문화학자들의 학제 연구를 촉발시켰고, 미셸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은 마카르 계열 작품들에 대한 신화적인류학적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롤랑 바르트의 평은 지금에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진정한 문학적 참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증언과 진단에 있으며, 그 점에서 프랑스 문학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가는 졸라이다.”7)




1) 에밀 졸라, 유기환 번역, 나는 고발한다(책세상, 2005), 106.

2) Jean Bedel, Zola Assassiné (Paris : flammarion, 2002) 등은 졸라의 돌연한 벽난로 가스 중독사에 대하여 암살설을 제기하였고, 그것은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3) Michel Raimond, Le Roman depuis la Révolution (Paris : Armand Colin, 1971), 110.

4) 에밀 졸라, 유기환 번역, 실험소설 외(책세상, 2007), 186-197.

5) 에밀 졸라, 유기환 번역, 실험소설 외(책세상, 2007), 40.

6) 친부 살해에 이름 올렸던 5명은 J. H. Rosny, P. Bonnetin, L. Descaves, P. Margueritte, G. Guiches였다. 후일 이들은 모두 졸라에게 사과하였지만, 이 사건은 자연주의의 위기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https://fr.wikipedia.org/wiki/Manifeste_des_cinq. 이후 자연주의가 퇴조하면서 상징주의가 새 시대의 화두가 된다. 현실과 이상의 양립이 불가능해진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서, 현실의 세계에 완전히 몸 던져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사실주의적 흐름이, 현실을 속악한 것으로 보아 인공낙원으로 도피하려는 상징주의로 옮겨간 것이다.

7) Roland Barthes, Maurice Nadeau, Sur la littérature (Paris : Presses universitaires de Grenoble, 1980),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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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성여대 심민화 교수의 멋들어진 발문과 몰리에르의 더 멋진 서문(카이사르 역을 맡은 몰리에르를 그린 니콜파 미냐르의 1658년 초상화는 더더 멋지다, 알라딘에도 위 초상화가 몰리에르의 프사로 내걸려 있다).


  (...) 그 위선자들은 조금도 농담을 받아넘기지 못했다. (...) 그래서 그들은 모두 격분하여 내 희극에 맞서 무장했다. 그들을 아프게 한 부분으로 공격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정치적이었고, 자신들 영혼의 밑바닥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도 처세에 밝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훌륭한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치장했다. (...)


  만약 희극의 역할이 인간들의 악덕을 교화하는 데 있다면, 어떤 이유로 그에 대해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에 한층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극이 교화를 위한 큰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진지한 도덕적 표현들은 대개 풍자적 표현들보다 그 효과가 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꾸짖는 데는 그들의 잘못을 묘사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그 잘못들을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도록 공개한다는 것은 악덕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다. 사람들은 질책은 쉽게 묵인한다. 하지만 조소는 좀체 묵인하지 않는다. 고약한 사람이 되는 건 원할 수 있어도,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는 법이다. (...)


  쫄깃하게 전개되던 『타르튀프』가 명민하신 국왕의 지혜로 해결을 맞는 것은 힘빠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통렬하고 유쾌하다. 『타르튀프』가 초연 후 5년 동안이나 상연이 금지되기는 했어도, 어쨌든 몰리에르는 루이 14세로부터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몰리에르가 과로사한 뒤 그의 극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하여 1680년 국왕의 명에 따라 Comédie-Française가 된다). 아무튼 그로부터 나폴레옹이 '이미 행동을 시작한 혁명'이라고 말했던 보마르셰의 18세기 희곡은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문학의 흐름에 관하여는 http://blog.aladin.co.kr/SilentPaul/10168968를 참조하고, 18세기의 프랑스 문학은 곧 정리할 예정이다.


  덕성여대 극예술비교연구회에서 상연을 염두에 두고 옮긴 책이다 보니, 비교적 자연스럽게 잘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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