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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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방방곡곡, 여러 해외 거점에서 그토록 오래 지속된 울림이, 단순히 일시에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든 평면적 사건이었을 리 없다.

구체제를 남김없이 애도하면서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아예 선포까지 해버린 이 무매개적 대중봉기는 세계사적, 보편주의적 맥락에서 다시 독해되어야 한다. 18, 9세기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처럼, ‘있어야 할 세계‘를 둘러싼 20세기의 사상과 윤리가, 가장 순도 높게, 전 인류, 전 지구적 규모로 토론되었다는 차원에서...

권보드래 교수께서 귀한 작업을 해주셨다. 어느덧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역량과 거리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이제 3단계를 함께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 각국 연구자들이 한국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한국 학자들과 경쟁하며 교류하는 단계이다(김두얼, ˝연구의 선진화˝, 매일경제신문, 2019. 6. 8. 자 http://m.mk.co.kr/news/opinion/2019/394933 참조). 이 책도 영어로 번역되면 좋겠다.

책이 워낙 훌륭하고 감동적이지만, 아래 첫 번째 인용 문단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작년 5월 재정학회 월례세미나에서 명지대 경제학과 김두얼 교수께서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철도‘가 크게 기여하였다는 통계 분석 연구를 발표하신 바 있다. 아직 논문으로 출간되지는 않은 듯하나, 식민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건설한 철도가, 저항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면서는, 논리의 빈틈을 상상력과 유려한 글발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에서 숫자로 채워보려는 노력과 분위기가 조금 늘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여전히 성리학자인 한국의 인문주의자들은, 통계는 기본적으로 조작이요, 거짓말이라는 내심 혹은 무의식적 저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시행착오는 곧 인민의 고통으로 귀결되는 정책결정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빈틈은 보통, 진영에 터 잡은 선명성이 채우곤 한다... 이도 결국은 성리학주의의 연장 아닐지... 진정성이라는 수사는 가려들어야 하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모두가 똑같은 도둑놈에 사기꾼이라 여기는 항간의 시각에 비하면 묵묵히 최선 다하는 담백한 진국이 꽤나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대중에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분 중에도 재선 등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언제라도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을 숱하게 보았다. 대의를 위한 여우의 간계라 정당화하면서... 명분을 강하게 논거 삼을수록 그 명분을 위해 반대증거를 억압하고픈 유혹에도 쉽게 빠진다. 반대진영뿐 아니라 나도 이미지에 속고 있을 수 있고, 내 편이라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있고 늘 선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익숙함과 사이다에 중독되어 사고를 중지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3·1 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 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 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 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 P11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것이 개별-특수-보편, 나-가족-민족(국가)-인류라는 매개의 변증법이었다면, 3·1 운동은 그 안과 밖을 가로지른 사건이다. 3·1 운동의 그들은 민족(국가)과 탈민족(국가)을 동시에 꿈꾸었고, 대표-의회정치와 자치적 질서를 동시에 지향했으며, 역사-진보와 유토피아적 파국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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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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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고 아름답다...

Magnifi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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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꽃이 피었습니다 - 영화보다 재미있는 현실 인권 이야기
김예원 지음, 버닝피치 그림 / 이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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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마음에 금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작작 그은 금들의 이편저편으로 내몰고 내몰리며 좁아진 마음들이 스스로를 할퀴고 있습니다.

읽읍시다. 다짜고짜 안기 전에 먼저 인식합시다. 아쉽다면 다시 읽읍시다.

그리고 저마다 자리에서 도전하고 함께 싸웁시다.

인식하고 도전할 때, 금들은 소통의 만남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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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봐서는 미국 정치 지형을 두루, 고루 다루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New Deal Liberalism에 대한 대항으로부터 시작된, 극우적 개신교 보수파 운동의 흐름을 선전하는 책이다.


  미국 붕괴를 꾀하는 유대인, 진보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연방정부(민주당과 번갈아 연방정부를 장악하는 공화당까지도 때로는 공격대상)와 연방준비위원회(FRB), 로마 교황청, 그리고 음모세력의 소굴인 국제연합(UN)에 맞서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둥 너무 극단적이고, 인종주의적 내용이 많아서, 이성을 차린 사회에서라면 어지간해서는 진지하게 소개하는 것조차 꺼려졌을 극우파 운동의 꼭지들, 예컨대 Posse Comitatus Act와 같은 지방 급진주의(유대인, 가톨릭, 아프리카계 미국인, 법원, 은행, 국세청을 민중의 적이라 부르며 자동화기와 수류탄으로 무장 훈련을 받고, '헌법에 어긋나는 법령에 대한 불복종'을 천명), 헌법근본주의(Constitutional Fundamentalism, 성서근본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건국 당시 헌법에서 이후에 추가된 수정헌법은 헌법으로 인정하지 아니함), 기독교 정체(Christian Identity) 신학과 Michigan / Montana 민병대 등을 들여다 본다는 의미 정도는 있겠다. 하도 아스트랄한 내용이 많아서 '창조과학' 같은 건 애교로 보일 정도다. 자제하여 소개하고는 있지만 글쓴이의 심정적 동조가 느껴진다.

  그리고는 대뜸 "앞으로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국력과 국가적 위신을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는 애국심과 종교를 강조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얼마나 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듯하다."(90쪽)고 용맹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아;;;


  다만, 다음 대목은 다른 의미에서 눈길을 끌었다(57~58쪽, 의미가 더 잘 드러나도록 일부 토씨를 수정하였다). 인민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절대선, 성역으로 치부되는 것들의 양면성을 냉철하게 보고, 경계해야 한다.


  "헌법근본주의 사상은 배심원 지상주의(Jury Empowerment Doctrine), 즉 '배심원에 의한, 판결의 무효화' 운동으로도 표현되었다. 그것은 재판에서 판사의 권한을 무시하고 그 대신 배심원의 평결만을 받아들이려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진보적인 판사들이 범죄자들, 유색인종들, 환경운동가들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데 대해 극우파들이 분개한 데서 나온 운동이었다. 따라서 극우파는 재판에 있어서 최종 판결의 권한이 지역 주민 가운데서 선정된 배심원들의 평결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는 단체들은 아주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충분한 정보를 가진 배심원제 협회'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판결의 최종적 권한은 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민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에게 있었다. 애리조나에서 발행된 어느 배심원의 소개 책자에서 극우파는 '배심원은 대통령, 의회 및 판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 인용 문단에서 '충분한 정보를 가진 배심원제 협회'란 'Fully Informed Jury Association'(https://fija.org/)을 가리킨다.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Fully_Informed_Jury_Association


  흔히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우익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내세워지지만, 우파의 논리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위 결론에서 '애국심', '종교'가 강조된 것에서 보듯) 사실은 모종의 집단주의, 공동체주의를 강하게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파가 말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에서 개인과 자유는 구체적 개인의 자유로운 역량이 아닌 것이다. 미국에도 미국인들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환빠스틱한 세력이 있고(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몇 개 부족이 몰래 영국 땅으로 흘러 들어가 숨어 살다가, 그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 왔다는 식), 이는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단주의, 공동체주의가 강한 동네에서 지내 보니, 두 칸 주차를 하지 않는 것, 술 마시고 피해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공중윤리는 공동체의식을 더 함양하는 방향보다는 오히려 개인주의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깔끔하고 단정해야 할 질서가 여러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대화되고 무력화된다. 사람을 믿다가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어먹히는 데도 정말 좋은 게 좋은 걸까. 이따금 '슈퍼맨이 돌아왔다'만 봐도, 다른 문화권에서 가정교육의 강조점이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느낄 때가 있다.


  하여간 저 책은 꾸준히 소비해 주는 그룹이 있는지 이미 여러 쇄를 찍었다. 이제 보니 살림지식총서의 무려 첫째 권이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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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레슨 - 명확하고 아름다운 영어 글쓰기
조셉 윌리엄스 지음, 라성일 외 옮김 / 크레센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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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가졌던 느낌을 밝고 시원한 본보기로 정리하여 준다. 우리말 글쓰기도 돌아보게 된다. 참 이로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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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4-16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죠. 이렇게만 되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도 함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