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불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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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분은 처음 이틀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날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동료 한 명에게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바토 무슈를 타고 여행을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토 무슈요? 그게 뭐죠?"

제솝은 미소를 지었다.

"센 강을 따라 운행하는 작은 배입니다."

(중략)

"베터튼 씨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떤 국경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의 여권을 갖고 통과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남편 분이 또 다른 여권을,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중략)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톰은 기밀을 팔아넘기거나 누설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평생 깨끗하게 살아왔어요."

(중략)

"그렇습니다. 베터튼 씨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는 어떤 제안을, 말하자면 이 나라를 떠나 다른 어딘가로 가라는 중요한 제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1장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셜록 홈즈의 한 에피소드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 기밀을 다루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사건으로, 정황상 외국에 매수되었다고 보여지나, 약혼녀는 그가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라며 그럴리가 없다고 하는 내용.

 

1954년에 나온 이 책에는 어떤 탐정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분위기가 다른 크리스티의 소설들과 사뭇 다르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저는 그가 어떤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보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소 기이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비밀리에 추진하는 그런 일 있잖습니까, 왜."

"이것 보세요, 선생님......."

제솝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베터튼은 과학자 압니다. 외교관이나 첩보원이 아니에요."

"제 말이 못마땅하신 거군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니까요. 제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토머스 베터튼과 저는 인척 관계입니다."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과학자, 6개월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두번째 결혼의 아내, 사별한 첫번째 아내의 사촌의 등장, 실종 전 만난 의문의 여성.

 

"그렇지 않아요. 흥미로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예요. 사랑했던 남편은 저를 버리고 떠났고, 하나뿐인 아이는 수막염으로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가까운 친구나 친척도 없어요. 직업도 없고, 좋아하는 취미나 예술 따위도 없어요."

 

베터튼 부인과 외국에서 온 의문의 남성을 연이어 조사한 제솝은 베터튼 부인이 영국을 떠나 카사블랑카로 향한 것에 의심을 품는다. 마침 부인이 탔던 비행기는 추락했고, 원래 그 비행기에 타기로 했던 힐러리는 비행기 연착으로 그 비행기를 타지 못해 목숨을 건진다. 그 비행기를 타서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수면제를 삼키려하던 힐러리를 제솝이 제지하며,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자신들의 일을 도와달라며 병원에서 위독한 상태에 있는 베터튼 부인의 역할을 대신 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를 가나 똑같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언제나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잔혹함과 자비죠! 둘 중 하나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둘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그는 태도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카사블랑카에서 끔찍한 비행기 사고를 당하셨다면서요?"

"예, 그랬어요."

"부럽습니다."

아리스티데스 씨는 뜻밖의 말을 했다.

힐러리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죽음에 가가이 다가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으셨다니....... 그 이후로 뭔가 자신이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부인?"

"더 불행해진걸요. 뇌진탕을 입어서 심한 두통이 생긴데다 기억도 흐릿해졌어요."

"그런 것들은 그저 단순한 불편함일 뿐이지요."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연이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던 힐러리는, 자신을 베터튼 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비행기를 타게 된다.

 

"신문 헤드라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겠군요."

베이커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말이에요. 불운이 줄줄 따라다녔다고 하겠어요. 처음엔 카사블랑카에서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가 이제 더 비참하게 죽었으니 말이에요."

힐러리는 그들이 세운 계획의 교묘함과 용의주도함에 몸을 떨었다.

"이 사람들은요......?"

힐러리가 낮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가 맞나요?"

"아, 배런 박사는 세균학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에릭슨은 유명한 물리학자고 피터스는 화학 연구원이죠. 물론 니드하임 양도 수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내분비학자죠. 그리고 나는 연락 장교일 뿐 과학자들 그룹에 속하진 않아요."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헤더링턴 양은 운이 없었어요."

"헤더링턴 양은...... 그 여자는......"

베이커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다면 말해 줄게요. 그 여자는 당신을 미행하고 있었어요. 카사블랑카에서 당신 뒤를 쫓는 사람쯤은 벌써 파악했어요."

 

제솝은 힐러리에게 힐러리도 모르게 사람을 붙였으나, 이 주도면밀한 조직들은 그마저 따돌리고 힐러리를 비행기에 태운다. 비행기는 불시착하고, 마치 추락한 것으로 꾸며지며, 그들은 차로 갈아타며 사막 한가운데의 요새로 향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만 속마음은 제각기 다른 것 같아요."

피터스는 생각에 잠겨 신중하게 말했다.

"글쎄요. 부인께서 뭔가 제대로 짚으신 것 같군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부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배런 박사는 결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자기의 실험과 연구를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죠. 헬가 니드하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파시스트처럼 보여요. 그리고 에릭슨은......."

"에릭슨은요?"

"나는 그가 두려워요. 그는 위험한 외골수예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과학자 같아요!"

"그리고 나는 인류 동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이지요. 그리고 캘빈 베이커 부인은.......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요?"

"모르겠어요. 가장 알 수 없는 사람 같아요."

"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야말로 가장 뻔한 사람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죠?"

"캘빈 베이커 부인이 줄곧 따라다닌 것은 돈입니다. 그녀는 짭짤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큰 톱니바퀴의 한 부품일 뿐입니다."

 

동상이몽. 각자 다른 생각을 한 이들은 요새에 도착한다. 엄청난 자산가에 의해 설립된 사막 한 가운데의 그곳은 이른바 유토피아.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며 의식주에 모자람이 없으며,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에 몰두한다. 과연 이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의 조직에서, 힐러리가 빠져나오는 과정은 다소 용두사미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하다는 느낌. 물론 1927년의 <빅 포> 처럼, 푸아로의 원맨쇼와 함께 끝은 조직의 일망타진으로 이어지는, 그 소설과는 시작만 비슷하고 결말은 다르다. 이 책에서 이 미치광이 거부는 결국 사소한 소동만 있을 뿐,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며, 힐러리와 함께 정체를 감추고 있던 한 남자만이 그곳을 빠져나온다. 아마도 다른 과학자들을 자발적으로 남았으리라. 이걸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결말에 가서 생각지도 못했던 살인 사건에 대한 해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 결말은 붙이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는 내용이다. 갑자기 크리스티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왜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크리스티가 소설을 쓴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 같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새 동지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는 새로 온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몇 마디씩 짧은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이 단지의 목적과 신념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을 듣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힐러리는 그 내용이나 표현을 정확하게 다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내용이 너무 진부하고 평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잇는 동안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힐러리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에 살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그 미치광이 히틀러'의 연설을 한 번 들어 보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도 지당하고 감동적으로 들렸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평범하기 짝에 없는 말들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지금 힐러리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힐러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국장은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주로 젊은이들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청년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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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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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 때 재북 작가라는 이유로 언급조차 되지 않던 시인이 9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널리 읽히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2000년대에는 수능에 출제되면서 이제 김소월이나 윤동주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아마도 내 세대는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접했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이 시를 접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능을 위해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던 그 시기에도, 이상하게 백석의 시는 설명할 수 없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에 '응앙응앙' 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뗼 수 없었던 기억이 있고, '고향'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이나 동화를 읽은 것처럼 아릿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느낌에 설렜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백석이라는 시인의 삶을 신화처럼 만든 것은 그의 삶일 것이다. 자야와의 사랑, 대원각이었던 절 길상사,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전재산을 내놓으며 이 모든 것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쓰겠다는 말, 이 모든 것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한 때 왜 백석의 삶이 아직 영화화가 되지 않았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미국이나 영국, 유럽에서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삶도 영화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비커밍 제인>이나 <셰익스피어 인 러브>, <실비아>, <토탈 이클립스>, <일 포스티노>는 유명 작가의 사생활을 다룬 이야기이다. 예술가들은 그 삶 또한 평범하지 않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데, 백석의 삶이야말로 그의 시 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의 선망과, 연민을 동시에 자극하니까.

 

한 때는 평생에 저런 사랑을 하고 백년이 지나도록 내 이름이 남을 작품을 쓸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 삶이 내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랬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격정적이지 않아도, 평범한 지금의 내 삶이 얼마나 감사한 지 새삼 깨달을 때가 많다. 후배인 안도현 시인의 노작이며, 한정된 자료에서 최대치를 뽑아낸 역작이다. 아마 나보다 좀 더 어린 친구가 읽거나, 혹은 나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분이 읽는다면 더 감동이 배가 될 것이다. 지금 내 나이는 과거를 되돌아보기에는 너무 젊고, 예술가적 삶을 막연히 동경하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머리로 책을 판단하는 시기가 있고, 가슴으로 느끼는 때가 있는데, 지금은 나라는 사람의 인생에서 감정에 푹 빠지는 시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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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청산가리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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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대령은 생각에 잠긴 채 담배 파이프를 뻑뻑 빨며 조기 바턴을 응시했다.

레이스는 조지 바턴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바턴의 숙부가 레이스 가의 옛 이웃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스무 살 이상이나 났다. 예순이 넘은 레이스 대령은 키가 크고 항상 등을 꼿꼿이 펴고 다니는 군인 타입으로, 얼굴은 햇볕에 짙게 그을었고 철회색 머리는 짧게 깎은 스타일이었으며 눈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특별히 가깝게 지낸 적은 없었지만, 바턴은 지금까지도 레이스에게 '어린 조지'로 남아 있었다. 먼 과거로부터 근근이 이어져 온 희미한 인연 중 하나였다.

레이스 대령은 지금, 이 '어린 조지'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조지가 성인이 된 후 몇 년간 두 사람은 간간이 만났지만,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었다. 레이스는 바깥 활동을 주로 하는 사람, 말하자면 세력 확보에 주력하는 '건국자' 타입이며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지는 단연 전형적인 '도시 신사'였다. 둘은 겹치는 관심 분야도 없었으며, 만나면 겨우 '옛날이 좋았지!' 식의 미적지근한 회상만 하다가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이스 대령은 일 업이 수다를 떠는 타입이 아니었고, 한마디로 구세대 소설가들이 좋아했을 법한 강하고 말 없는 사나이였다.

지금도 레이스는 말없이, '어린 조지'가 왜 그렇게 꼭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레이스 대령이 보기에 조지는 일 년 전 봤을 떄에 비해 어딘지 미묘하기 달라져 있엇다. 조지 바턴은 언제나 답답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실질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

그런제 저 친구 오늘은 뭔가 이상해 보여. 대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토끼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단 말이야. 벌써 시가에 세 번째로 불을 다시 붙이고 있었는데, 그건 전혀 조지 바턴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1945년에 나온 작품이자 레이스 대령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레이스 대령은 이 소설의 중간쯤 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사건을 진두지휘하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다소 방관자적인 위치를 취하다가 사건의 물꼬를 트는, 그 역할을 여기서도 유지한다.

 

로즈메리라는 여성이 사망한다. 사인은 청산가리 복용.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하던 중이었다. 그날 디너파티에 참가했던 사람은 로즈메리의 남편 조지와 동생 아이리스, 조지의 비서 루스와 패러데이 부부, 그리고 앤터니라는 청년이다. 원래는 레이스 대령까지 초대되어 남녀의 수가 정확히 맞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는 일정이 잡히면서 불참하였다. 우울증 때문에 직접 샴페인에 청산가리를 넣어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사건 6개월 후 익명의 편지로 인해 남편은 아내가 타인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그 테이블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의자는 좁혀지며, 와인을 담당한 수석 웨이터는 레이스 대령도 인정한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함께 만찬을 즐겼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볼 때, 동기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로즈메리는 스티븐 패러데이와 불륜관계였으며 그 사실을 그의 아내도 알고 있었고, 아이리스는 언니의 죽음으로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되며, 루스는 조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앤터니는 감옥에 있던 과거를 로즈메리에게 들키고 만다.

 

"경찰에는 의뢰하지 않을 겁니다. 대령님을 뵙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살인범을 잡을 함정을 놓고 싶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들어 보세요, 대령님. 룩셈부르크에서 파티를 열 계획입니다. 대령님도 와 주세요. 똑같은 멤버예요. 패러데이 부부와 앤터니 브라운, 루스, 아이리스, 그리고 저까지요. 이미 계획은 다 세워 놨습니다."

"어쩔 셈인가?"

조지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비밀입니다. 미리 말해 버리면 재미없죠....... 대령님께도 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오셔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찰해 주세요."

레이스는 상체를 앞으로 바싹 기울이고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짓은 마음에 안 들어, 조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극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아. 경찰에 가게....... 다들 뛰어난 수사관들이야.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가장 잘 알고 있어. 전문가들이지. 아마추어가 수사관 흉내 내는 건 말리고 싶네."

"그래서 대령님을 초대한 겁니다. 아마추어가 아니시잖아요."

"이 친구야. 단지 내가 M15에서 잠시 일했다고 해서? 그러면서 온전히 다 털어놓지도 않는군."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거절하겠어. 자네의 계획이란 게 마음에 안 들어. 동참하고 싶지 않아. 그만둬, 조지. 믿고 맡겨도 될 사람이 있다니까."

 

결국 그 날의 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파티가 벌어지고, 레이스 대령은 불참한다. 장소, 시간, 좌석 배치까지 같지만 결국 무사히 마무리 되는 것 같다가, 샴페인을 마신 사람이 또 쓰러진다. 이번에 숨을 거둔 사람은 조지였다. 

 

레이스 대령은 런던 경찰청으로 들어갔다. 대령은 경관이 가져온 용지를 작성해서 내고 몇 분 후에는 켐프 경감의 사무실에서 경감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켐프는 런던 경찰청의 터줏대감인 배틀 총경과 여러 면에서 스타일이 비슷했다. 실제로 배틀 총경의 지휘 하에 몇 년간 일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선배의 매너리즘을 답습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나무를 깎아 놓은 것 같은 생김새마저 비슷했다. 그러나 배틀이 티크나무나 오크나무를 깎은 것 같다면, 켐프 경감은 좀 더 보기에 그럴싸한 나무, 예를 들면 마호가니나 아니면 오래된 자단 재목을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령님."

켐프가 말했다.

"이번 사건은 외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푸아로였다면 기꺼이 이 계획에 동참했을 것이고,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조지가 샴페인을 입에 대는 순간 저지시켜 살려냈을 것이며, 범인이 누군지도 밝혀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스 대령은 처음부터 이 계획을 반대했고, 결국 초대에 응하지 않았으며, 대신 룩셈부르크로 가서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이들을 감시하다 결국 두 번째 살인을 목격하게 되며 누가 범인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책의 1부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이 나뉘어진다. 각각 아이리스 말리, 루스 레싱, 앤터니 브라운, 스티븐 패러데이, 조지 바턴으로 나누어지며, 각자의 인물의 시점에서 사건에 대해 회상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이 시점을 계속 바꾸어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는 데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 이런 형식은 우리 나라 소설 중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몇 년 전에 읽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소설이 특징적인 것은 여기까지. 인물 하나 하나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사건이 풀려나가는 부분은 의외로 쉬운 데다가, 레이스 대령은 마지막까지 틀렸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세세한 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남는다. 즉, 첫번째 살인의 이유가 질투인지, 사랑인지 명확하지 않은 데다가, 만약 돈 때문이라면 연달아 두 명을 죽일 계획이 너무 광대하고, 그 광대함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부족하다. 한 남자에 대한 연정을 품었다가 쉽게 다른 이에게 옮겨 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어서 빈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이라면 용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범인으로 확정된 사람을 통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없어서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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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
데이비드 랜들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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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널리스트이자 대학교수인 저자가, 실제로 수면 장애의 하나인 몽유병으로 고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쓴 '잠'에 대한 책이다. 원제는 'Dreamland'인데, 이 책에서 '꿈'에 대한 내용은 짤막하게 나오기는 하다.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 특히 과학 분야에 대해서 잘 쓰기란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책 중 이런 쪽으로 가장 좋은 예는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다. 이 책을 '과학교양서'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 같지만, 그냥 교양서라고 한다고 해도 굉장히 내용이 빈약하다. 역설적으로 빌 브라이슨이 얼마나 성실하고 재치있는 글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며, 나뿐만 아니라 수면 장애로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상당수가 인터넷 포털에 메인 기사로 종종 등장하는 내용들이며, 무엇보다 깊이가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딱 자기가 먹을 만한 물만 그릇에 담아온 느낌이다.

 

1 나는 어젯밤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8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의 전체 시간 중 약 3분의 1을 잠자면서 보내지만, 잠이 우리 몸과 뇌에 어떤 일을 하는지느느 잘 모른다. 연구 결과들이 내놓은 답도 놀랍도록 적다. 잠은 알려지길 원치 않는 과학의 비밀 중 하나이다. 신경과 의사가 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한 말은 농담이 아니다. 왜 우리는 나머지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잠을 자야 하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조차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 사라진 두 번째 잠 …… 30

여러분은 현대인의 수면 습관이 자연적인 설계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가 정말로 놀라운 연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웨르의 연구가 의학 학술지에 발표되고 나서 20여년이 지났지만, 많은 수면 연구자들-평범한 의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은 그 연구를 들어본 적조차 없다. 매일 밤 자다가 비슷한 시간에 꺤다는 환자의 호소를 들으면, 많은 의사들은 아무 생각 없이 수면제를 처방한다. 수천 년 동안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돼온 상태에 대해 쓸데없이 약을 처방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한편, 환자는 밤중에 잠이 깨는 것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잠은 자연적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3 침대를 따로 쓰는 게 좋을까? …… 56

영국의 수면 과학자인 스탠리는 침대를 함께 쓰는 것이 좋은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로젠블랫에게 파트너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 섹스 말고는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앗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었다. 만약 실제로 조사해보면, 혼자서 자는 남성이 파트너와 함께 자는 남성보다 실제로 섹스를 덜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복도를 건너 다른 방으로 옮겨간 뒤에 일어나는 섹스 생활의 변화는 아주 큰 것이어서, 그의 연구에 참여한 남성들 사이에서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일부 남성은 실제로 침대를 함께 쓰지 않은 뒤부터 성적 접근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불평했어요. 하지만 여성 중에서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침대를 함께 쓰는 것에 대한 수수께끼가 드디어 풀렸다.

 

4 아기와 부모가 모두 편하게 잠을 자려면 …… 78

"우리는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이런 차이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 전혀 몰라요.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 아기들이 잠을 덜 자는데, 그것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너무 늦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한민국 아기들은 실제로 어떤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그냥 잠이 덜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가설도 아주 많아요. 그것을 제대로 밝혀내려면 모든 경력을 다 바쳐야 할 거예요."

 

5 꿈의 의미 …… 98

돔호프는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감정과 잘 접촉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프로이트의 꿈 해석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예라고 했다. 21세기에 꿈 이론은 상징이 아니라 불안을 드러내는 데 치중한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꿈이 본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거나 억압된 충동을 나타내는지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에, 꿈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던 참전 용사가 귀국한 뒤에 그 후유증에 대처하는 방법처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6 잠은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 …… 128

얼핏 보기에는 이런 아이디어들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각각의 꿈은 그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과 분명한 연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형태로 나타나는 복잡하고 창조적인 생각은 일상적으로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케쿨레는 몇 달 동안 벤젠의 분자 구조를 찾으려고 애썼다. 매카트니는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2인조 작곡가 중 한 명이었고, 역사적인 히트곡들을 계속 작곡하던 중이었지만, 비틀스의 다음 번 앨범을 완성하려면 또 다른 노래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스테페니 마이어는 독자들을 확 끌어들일 만큼 실제적인 등장 인물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몇 년 동안 소설을 쓰기 위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포기하길 반복했다.

 

7 ‘Z’ 무기 …… 154

잠의 이득을 똑같이 모방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약이나 절차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펜타곤에서 연구와 개발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로, 인터넷과 스텔스 폭격기 개발에 핵심 역할을 했다)은 2007년에 많은 시도 끝에 같은 결론을 얻었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은 병사가 100시간 동안 계속 잠을 자지 않고도 일반적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군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시험하느라 수백만 달러를 쏘당부었다. 예컨대, 인간의 뇌 중 절반만 잠을 자게 할 수 있는지, 즉 사실상 사람이 돌고래처럼 잠을 잘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도 했다. 하지만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면 부족에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나중에 잠은 더 많이 자는 것밖에 없었다.

 

8 잠결에 저지른 살인 …… 186

데노의 체계에서는 몽유병이 폭력적으로 변한 사건들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을 것이다. 데노는 당사자가 자신의 상태를 억제하기 위한 조처-나이 많은 렘 수면 행동 장애 남성에게 도움을 주는 근육 이완제 클로나제팜을 복용한다든가 하는-를 취하지 않는다면, 잠자는 동안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체계에서는 몽유병자는 장전된 무기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신을 책임 있게 다루지 않는 사람은 태만죄로 처벌 받을 수 있다. 데노는 이러한 변화는 몽유병 사건을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취급하던 데에서 정상적인 사건으로 취급하는 길로 나아가고, 공정하고 믿을 만한 기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몽유병자가 저지르는 폭력 사건들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 연구자들에게 수면 범죄 세계에서 간절히 필요한 것, 즉 데이터를 제공할 것이다.

 

9 승패를 좌우하는 것 …… 222

생물학의 잔인한 농담이랄까, 십대 청소년의 신체는 사춘기를 겪을 때 갑자기 일주기 리듬이 사실상 세 시간 뒤쳐진다. 갑자기 밤 9시나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단지 하기 싫은 일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진다. 전 세계의 십대 청소년을 조사한 결과, 청소년의 뇌는 밤 11시가 될 때까지 멜라토닌 분비를 시작하지 않는 반면, 해가 뜬 이후에도 멜라토닌을 계속 분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어른은 깨어났을 때 체내에 멜라토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십대 청소년은 혈액 속에 멜라토닌이 여전히 돌아다니기 때문에 아침 8시 이전에 억지로 일어나더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며, 신체의 요구에 못 이겨 도로 잠들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일주기 리듬의 변화 때문에 십대 청소년에게 이른 아침에 교실에서 공부에 집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대륙 건너편으로 날아가 즉각 새로운 시간대에 적응하라고(그리고 매일 밤 같은 일을 몇 년 동안 반복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만약 프로 미식축구 선수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을 때, 한 경기라도 이긴다면 행운일 것이다.

 

10 잠자다가 숨이 막힐 때 …… 258

"유전학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저칼로리, 저지방 식사에 맞춰 설계돼 있어요. 우리 몸은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최적화되어 왔지요. 거기다 햄버거를 던져주면 우리 몸은 그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요. 그 결과 중 하나가 수면 장애 호흡을 경험하는 비율이 치솟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11 불면증의 역설 …… 280

1903년, 독일 의사 요제프 폰 메링과 독일 화학자 헤르만 에밀 피셔가 최초의 현대적인 수면제를 개발했다. 폰 메링과 피셔는 자신들이 개발한 수면제의 상표명을 베로날로 정했는데, 평화롭고 조용한 이탈리아 도시 베로나의 이미지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셔였다. 이 신약은 바르비투르산염이라는 의약품 집단으로 분류되는데, 바르비투르산염은 소량 섭취할 경우 도취된 기분이 들 수 있다. 가장 큰 부작용은 환자에게 약에 대한 내성이 금방 생겨, 같은 효과를 얻으려면 갈수록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할리우드의 유명인들이 죽은 뒤에 수면제의 인기는 곤두박질 쳤는데, 의사와 환자 모두 욕실에 있는 약이 아주 쉽게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벤조디아제핀 계통의 진정제가 인기를 끌었는데, 이전에 나온 약보다 더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발륨(디아제팜)과 로히프놀(플루니트라제팜) 같은 변형 약품까지 포함하는 이 계통의 약은 사람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뇌의 수용기들에 들러붙어 효과를 나타내는데, 기본적으로 그 사람을 잠에서 깨어나기 더 힘들게 만든다. 이 약들은 과량 투여 위험을 크게 낮췄다는 점에서 바르비투르산염에 비해 상당히 개선된 것이긴 했지만, 복용했을 때 일부 환자가 느끼는 황홀감 때문에 남용의 위험을 높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에 할시온(트리아졸람)이란 상표명으로 알려진 벤조디아제핀을 복용한 환자들에게서 기억 상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할시온의 가장 큰 부작용은 '여행자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국제 여행을 하는 동안에 자주 일어났다. 여행자 기억상실증은 야간 항공편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 시차 적응에 도움을 얻기 위해 할시온을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잠이 깼을 때, 그들의 기억은 백지 상태가 되었다. 환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왜 자신이 거기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영국은 1990년대 초에 이 약을 금지했지만, 여러 나라는 그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했다(미국에서 이 약은 아직도 합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3년에 사노피라는 프랑스 회사가 앰비엔(졸피뎀이라는 일반명으로 더 알려진)이란 신약을 개발하면서 수면제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앰비엔은 사실상 벤조디아제핀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만, 부작용이 훨씬 작다. 앰비엔은 금방 수면제 시장을 지배하면서 연간 매출액이 10억달러를 넘어섰다. 진정한 경쟁 제품이 나타난 것은 2005년이 되어서였다. 매사추세츠 주 말버러에 있던 작은 생명공학 회사인 세프라코어가 루네스타(에스조피클론)를 시장에 내놓았다. 루네스타는 앰비엔과 같은 계통의 약이긴 하지만, 더 나은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FDA가 이 약의 장기 복용을 승인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환자들은 앰비엔을 사용할 때터럼 2~3일에 한 번씩 복용을 중단하라는 권고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많은 연구에서 앰비엔과 루네스타 같은 수면제는 수면의 질 자체에 의미 있는 향상을 가져오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양적 측면에서도 아주 약간의 증가만 가져올 뿐이다. 모랭은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약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실제적인 수면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인지 행동 요법]이 바로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12 온전한 잠에 이르는 길 …… 304

흥미롭게도, 실제로는 다른 실험 참여자들보다 운동을 적게 하는데도 자신의 건강이 좋다고 생각하는 실험 참여자들은 잠을 잘 잤다. 이들은 실제로 운동에 쓴 시간이 얼마든지 간에, 건강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심리적 문턱을 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자신의 운동 상태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되는 한 가지 요소를 제거해주었다. 이들은 자신의 몸이 적정 수준을 유지한다고 믿었고, 그에 따른 행동을 했다. 스위스 연구팀을 이끈 연구자는 <뉴욕 타임스>에 "사람의 생각이 행동보다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13 편안한 밤이 되길! …… 322

나는 몇 달 동안 받은 모든 충고를 따르기 시작했다. 내 몸이 밤낮의 사이클과 동조하도록 돕기 위해 매일 아침 햇빛이 가장 잘 비치는 구석에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가 강습에 꼬박꼬박 출석했다. 잠자기 30분 전에는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껐다. 매일 밤 나는 제오 헤드밴드를 머리에 붙이고 자면서 결과를 추적했다. ZQ 점수는 꾸준히 올라갔는데, 68점에서 74점으로, 그 다음에는 곧장 88점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94점에서 정점을 찍었다. 스스로 부여한 목표 점수인 100점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수면의 질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내가 전문가들과 대화하면서 배운 가장 귀한 교훈은 잠을 잘 자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강, 섹스, 대인 관계, 창조성, 기억-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은 매일 밤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 달려 있다. 모든 동물에게 필요한 것을 무시한다면,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약에의존하고,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건강 문제로 고생하고, 자녀를 수면 부족 상태의 삶으로 몰아넣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청소년기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잠을 망각하고, 간과하고, 뒤로 미룬다. 잠의 중요성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운동이나 요법, 혹은 단순히 이것과 같은 책을 읽는 것 등 어떤 것이건), 필연적으로 우리르 더 개선되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감사의 말 …… 330
참고 문헌 …… 334
찾아보기 ……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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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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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의 9개 단편이 실려 있다. 모든 단편이 다 빼어나다고 생각되지만, 책 전체를 반복해서 다시 읽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작품,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문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이 무작정 좋아할 수 밖에 없던 작품이다. 아니, 굳이 설명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인간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 연민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하면서도 침착한 문장들.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머리로 분석할 틈도 주지 않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렇게까지 온전하게 좋아할 수 있는 소설도 흔치 않다. 무엇보다도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결말을 마무리짓는 부분은 울컥하게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작가의 부모의 이야기라고 추측된다. 줌파 라히리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가에게는 인도계라는 정체성이 소설 전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모든 등장 인물이 인도계 미국인이며, 타인과의 소통, 낯선 것과의 교류가 핵심 소재로 사용된다. 이런 것 때문에 소설을 처음 읽어나가면서는 신선했지만, 계속 읽으면서 또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작가 개인의 역량도 물론 뛰어났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민을 온 가정에서 자랐다는, 독특한 성장 배경의 덕을 톡톡히 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마지막 소설을 보면서 왜 이 작가가 첫번째 책, 그것도 이례적으로 단편집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할 수 있었는지 알았다. 번역도 정말 훌륭하지만, 원서를 구입해서 읽을 계획이다. 작가가 쓴 원문의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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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완벽한 숙녀야!"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웃었으므로 크로프트 부인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말라는 내 웃음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크로프트 부인의 응접실에서 경험한 그 순간이 말라와 내 사이가 좁혀지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아직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이 허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다른 벵골인들을 만났다. 그때 만난 벵골인 가운데 몇몇은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우리는 빌이라는 남자가 프로스펙트가에서 싱싱한 생선을 팔고,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카둘로라는 가게에서는 월꼐수 잎과 정향을 판다는 것을 알아냈다. 저녁에는 찰스 강까지 걸어가서 강물 위를 떠다니는 돛단배를 구경하거나 하버드 야드에서 아이스크림콘을 먹었다. 우리는 인스터매틱 카메라를 사서 우리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나는 말라가 그녀의 부모에게 사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녀에게 프루덴셜 빌딩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여 사진을 찍었다. 밤이면 우리는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수줍어했으나 이내 대담해졌고, 서로의 품 안에서 쾌락과 위안을 발견했다. 나는 그녀에게 SS로마호에서의 항해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핀스베리 파크와 YMCA에 대해서도, 크로프트 부인과 벤치에 함께 앉아 있었던 저녁 시간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저녁에 <보스턴 글로브>를 읽다가 우연히 크로프트 부인의 사망 기사를 발견했을 때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은 말라였다. 나는 그전 몇 달 동안 부인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그 여름의 여섯 주는 나의 과거에 끼어든 오래전의 막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신문을 무릎에 내려놓은 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벽을 쳐다보았다. 말라가 뜨개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로프트 부인의 죽음은 내가 미국에서 애도한 첫번째 죽음이었는데, 그녀의 삶은 내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경했던 삶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다. 오래오래 혼자 살다가 영원히 떠난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보스턴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말라와 나는 보스턴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다. 크로프트 부인이 살던 곳과 비슷하게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동네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마당이 있어서 여름이면 토마토 값을 아낄 수 있으며 손님방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미국 시민이어서 때가 되면 사회보장 연금도 탈 수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캘커타를 방문하며 돌아오는 길에 끈으로 졸라매는 파자마와 다르질링 차를 챙겨오지만, 여기서 늙어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조그만 대학의 도서관에서 일한다. 우리에겐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한 명 있다. 이제 말라는 사리의 끝단을 머리에 두르지 않으며 밤에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는 일도 없다. 대신 아들 생각에 눈물을 짓곤 한다. 우리는 아들을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가거나 집에 데려와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집에 오면 아들은 우리와 함께 손으로 밥을 먹고 벵골어로 말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아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며 때떄로 걱정을 한다.

차를 몰고 그곳에 갈 때면 나는 교통 상황이 어떻든 반드시 매사추세츠가를 지나서 간다. 이제는 그곳의 건물을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그러나 갈 때마다 나는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그해 여름의 여섯 주로 되돌아간다. 차의 속도를 줄이고는 크로프트 부인이 살던 거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처음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라고. 그 집에서 백세 살 먹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기억나요?" 말라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우리가 낯설고 서먹서먹한 사이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에 서로 놀라곤 한다. 아들은 크로프트 부인의 나이가 아니라 내가 방세로 낸 돈이 그토록 적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놀라움을 표한다. 아들에게는 그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인 것이다. 달에 깃발을 꽂았다는 게 1866년에 태어난 여자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들의 눈에서 나를 처음으로 드넓은 세상 속으로 내던졌던 야망을 본다. 몇 년 지나면 아들은 졸업을 하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고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갈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강한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곤 한다. 아들이 좌절할 떄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제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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