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완전판) - 서재의 시체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선영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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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특정한 종류의 소설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판에 박힌 표현들이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머리가 벗겨진 사악한 준남작'이 그렇고, 추리 소설에는 '서재의 시체'가 그렇다. 나는 몇 년 동안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를 줄 가능성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조건을 설정했다. 우선 문제의 그 서재는 매우 흔하고 틀에 박힌 것이어야 한다. 반면 시체는 전혀 있을 법 하지 않은 대단히 기상천외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문제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연습장에 몇 줄 끼적거려 놓은 채 그대로 두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여름에 해변의 멋진 호텔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식당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가족을 보았다. 불구의 노인 한 명이 휠체어에 타고 있엇고, 젊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가족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다음 날 호텔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에도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쓸 때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시나요?"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알고 있거나, 얘기를 해본 적이 있거나, 심지어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이유에선지 완전히 죽은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가공의 인물'을 택해서 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성격과 상상의 산물을 부여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불구의 노인이 이야기의 중심축이 도었다. 마플 양의 오랜 친구들인 밴트리 대령과 그 부인은 얘기에 딱 어울리는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요리하듯이 테니스 코치, 젊은 댄서, 영화배우, 소녀 단원, 직업 댄서 등과 같은 재료를 넣는다. 그리고 마플 양 식의 식탁을 차려내면 되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을 읽기 좋아한다. 프롤로그든, 에필로그든, 옮긴이의 말이든, 주석이든, 본문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글들에 왠지 작가의 민낯이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어떤 사람은 작가의 말을 짧으면 짧을 수록 좋으며, 아예 없는 게 가장 좋다는 이도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한 글에서 이미 이야기를 다 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작가의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몇몇 편에만 따로 서문을 남겼다면 특별히 그 작품을 아끼거나, 혹은 반대로 그 작품의 어떤 면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서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이유는 작가가 평소에 어떻게 영감을 얻고, 어떻게 사건을 구상하며, 어떻게 인물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라고 직접 작가가 언급했다는 것은, 이 소설의 특정 부분이 좋든 싫든 작가의 의식에 깊이 박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작가가 직접 언급한 바로 그 부분이 어떻게 등장할까 기대하면서.

 

 마플 양은 그제야 죽은 여자가 현실 속의 사람 같지 않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서재는 집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크고 낡고 어수선한 서재엿다. 서재에는 크고 망가진 팔걸이의자가 몇 개 있었고, 담뱃대, 책, 그리고 지역 신문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래되고 멋진 가족 초상화 한두 점이 벽에 걸려 있었고, 형편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수채화 몇 점과 익살맞은 사냥 장면들도 있었다. 구석에는 데이지 꽃이 담긴 큰 화병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고, 부드러우면서 격의 없는 분위기였다. 그 방은 오랫동안 편안하게 이용된 전통 있는 장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엇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 놓인 오래된 곰가죽 양탄자 위에는 생소하고 어설프며 감상적인 무언가가 드러누워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소녀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머리는 세심하게 매만진 모양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은 장식이 달리고 등이 패인 하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에 감싸여 있었다. 짙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흰 분가루는 퍼렇게 부풀어 오른 살갗에서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고, 속눈썹에 바른 마스카라는 일그러진 볼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새빨간 입술은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보였다. 손톱에는 진한 핏빛 매니큐어를 칠했고, 싸구려 은색 샌들을 신은 발톱에도 같은 색깔을 바르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천박하고 싸구려 티가 나는 그 모습은 밴트리 대령의 서재가 주는 고지식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편안함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작정하고 보여주는 듯한 꼼꼼한 묘사다. 묘사는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책 전반에 흐르는데, 당시 사회상을 잘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예를 들면, 죽은 여자의 드레스를 이야기하면서

 

"네, 싸구려 새틴 드레스였죠. 옷감도 안 좋았고요."

밴트리 부인이 말했다.

"맞아요. 모든 물건을 1기니에 파는 허름한 1기니 하우스에서 샀겠죠."

 

라는 대화를 통해 마치 요즘의 천원샵과 같은 상점이 당시 영국에도 존재했구나, 하는 사실에 신기했고,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아홉 살 소년 피터 카모디의 말 중

 

"추리소설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해요. 추리소설이라면 전부 읽었고요. 도로시 세이어스, 애거서 크리스티, 딕슨 카랑 H. C. 베일리한테 사인도 받았는걸요."

 

라는 대목에서는 잠시 내가 글자를 잘못 봤나,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소설에 당당하게 집어넣는 저 자신감! 아마도 이 소설이 발표될 때쯤에 크리스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영국에서는 없었나보다. 혹시 저 크리스티의 이름을 빼면 전부 가상의 인물일까? 하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더니 전부 당대의 추리작가들이라고. 하지만 불멸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 뿐이다. 생전에 그녀는, 이 소설을 쓸 때의 그녀는, 이 대목을 쓰면서 자신이 역대 최고의 추리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이 소설에는 마플 양 시리즈에 나오는 그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밴트리 대령 부부의 서재가 바로 시체가 발견된 그 서재이며, 래드퍼드셔의 경찰서장인 멜쳇 대령, 슬랙 경감, 피살자가 근무한 호텔이 위치한 글렌셔 경찰서의 하퍼 총경에 은퇴한 런던 경시청장인 헨리 클리서링 경까지 합세한다. 헨리 경은 살해된 젊은 여자를 입양하려고 했던 거부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로, 둘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아마도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한 단편의 이야기인 것 같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익사>라는 사건의 이야기이다.

 

"내가 멜쳇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마을에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어. 어느 소녀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었지. 경찰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제대로 의심하고 있었지. 그들은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마플 양은 안절부절 못하고 당황해 하면서 나를 찾아왔더군. 그녀가 말하길, 경찰이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거야.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었지만, 그녀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지. 놀랍게도 제퍼슨, 그녀가 옳았어!"

 

크리스티의 세계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목사관의 살인>에서 젊고 발랄했던 목사 부인이 이 책에서는 기어다니는 아들을 둔 어머니로 잠깐 등장하는데 크리스티 팬이라면 이런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기쁜 일이다. 순서 상으로 이 책은 아마도 40년대 이전에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변화하는 영국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 토지는 우리 집안에서 한 300년 정도? 네, 틀림없이 그 정도 살다가 팔아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일가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던 거죠. 형은 뉴욕으로 갔어요. 출판업을 하고 있죠.......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사람드롣 여기저리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요즘은 사립 중학교를 나온 거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직장을 얻기가 힘든 것 같아요. (중략)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댄스와 테니스 밖에 없었습니다. (중략) 주로 하늘이 무너져도 테니스를 칠 수 없을 뚱뚱한 여자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파트너가 없는 부자 관객들의 따님들과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일도 하죠."

 

몰락한 가문의 청년의 신세한탄이다. 갑자기 우디 앨런 영화의 <매치포인트>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도 부잣집 자제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다 결국 그 집의 사위까지 되지 않았나? 영국의 세태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사실 가진 것이라고는 외모와 테니스 실력 밖에 없는 젊은이가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을 보면 그런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았나보다. 물론 그 영화 속 마이어스는 데뷔하지 못한 테니스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야 시대가 다르니까. 사실 더 놀라운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다.

 

"이 집은 베이즐 블레이크 씨의 별장이죠?"

"네, 그리고 저는 다이나 리예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마을에서는 처녀 때 이름을 계속 쓰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다이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플 양은 진지하게 말했다.

"머지않아 아가씨는 동정과 호의가 무척이나 많이 필요한 처지가 될지도 몰라요. 남편 분도 이웃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보수적인 시골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두 분 모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인 척하면서 재미있어 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아가씨가 '구닥다리 할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지레 접근하지 않을 테니 방해받는 일도 없었겠죠. 하지만 구닥다리 할망구들도 다 필요한 때가 있답니다."

다이나가 물었다.

"우리가 결혼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플 양은 얕보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허, 이것 참."

 

분명히 크리스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수적이었는데, 논란이 있든 없든 당대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 당시 영국이 급변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호기심이 붙었다. 이 시대가 언제일까, 궁금했는데 본문 중에 답이 나왔다. 영화에 관심이 많던 소녀를 꾀어내기 위해 악당들이 했던 말, 비비안 리가 어떻게 순식간에 런던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일약 유명 여배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고. 영국 국적의 비비안 리가 오디션을 통해 따낸 할리우드 데뷔작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 영화는 1939년작이고 이 책은 1942년에 발표되었다. 당시의 비비안 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영화에 매혹되었을 것이고. 영국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를 때가 아니었을까.

 

소설 속 살인 사건에만 집중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느낄 수 있는 여러 단어와 문장, 단락을 보다 보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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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니스의 비밀 (완전판) - 침니스의 비밀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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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터니는 이제 자기 일에 제법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가 맡은 일에는 여행 일정을 책임지는 일 말고도, 체면이 구겨진 노신사들의 언짢은 기분을 달래주고 나이 지긋한 부인들에게 그림엽서 살 시간을 넉넉히 주는 일도 포함되었다. 물론 40대 부인들의 넉넉함에 기대어 온갖 말장난을 섞어가며 시시덕거리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앤커니는 그중에서 마지막 일이 가장 쉬웠다.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던지면 수많은 여자들이 혹시 그 안에 무슨 은밀한 의도라도 숨어 있지 않나 하고 귀를 쫑긋거리기 때문이었다.

 

발칸제국의 위대한 노 영웅.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교수형을 모면한 거물급 악당. 그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어떤 신문을 구독하느냐에 달려 있지. 하지만 제임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스틸프티치 백작이란 사람은 너나 내가 먼지와 재로 변한 뒤에도 오래 오래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을 인물이라는 점이야.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 <0시를 향하여>의 바로 그 사람. 소설 속에서 마플 양이 등장한다는 뜻은 한적한 시골 마을인 세인트 메리 미드의 주민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 유산 상속 등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할리 퀸이 등장한다면 남녀상열지사가 어떻게든 끼어 있을 확률이 높다. 파커 파인이 등장한다면 살인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고, 푸아로의 경우에는 영국의 촌구석으로부터 전세계에 이르기까지 무대는 자유자재이지만, 확률적으로 엮여 있는 사람들이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하려면 상당한 보수가 필요할 테니까.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는 것은 푸아로와 같은 사립 탐정이 종종 맡곤 하는 은밀한 영역의 사건이 절대 아니라는 것. 대대적인 탐문, 공개적인 수사 과정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슬랙 경감이나 멜쳇 경찰 서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더 강력한 공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가 사건을 지휘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기밀, 외교 극비 사항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만약, 그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면, 아마도 친분 관계에서 부탁을 받았거나 우연한 기회로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0시를 향하여>는 후자에 속할 것이고 <침니스의 비밀>은 명백히 전자다.

 

이야기가 다소 튄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수록 그런 느낌이 강했다. 결말이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지나치게 꼬여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앤터니의 다소 의문스런 초반의 행동들이 후반에 가서 확실하게 해결은 되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작품의 구성 자체가 좀 아쉽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름 때문에 반전을 눈치 채기가 좀 쉬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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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ㅣ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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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알란 칼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사상도 거부하는 사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도 걱정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인생에서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단지 누워 잘 수 있는 침대, 세끼 밥,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는 술 한 잔만 있으면 그 무엇이라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믿기 힘들 정도의 무사태평한 성격인 그는 1905년 5월 2일 스웨덴에서 출생한 이후로 100년동안 살면서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에 끼어들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읽는 느낌이랄까.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물고, 주인공은 어떤 환경에서든 불사신처럼 생존하며, 수십, 수백만명이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그 시대를 묘사하는 톤은 심각하지 않고 경쾌해서 종종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극중 인물들이 총이나 칼을 통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실수로 냉동실 전원을 끄지 않았든 코끼리로 깔아뭉겠든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모습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질 정도로 절묘하다. 요컨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그 구조는 꽤 탄탄하며, 이렇게 즐겨도 되나 하는 자책이 들면서도 저절로 새어나오는 폭소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책의 맨 뒤를 보니 44쇄. 국내에서만 대체 몇 부가 팔린 것이고 전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독자자들이 이 책을 즐겼단 말인가? 그럴만한 가치가 이 책은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작품성이 아주 뛰어난 소설은 아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작가가 계속 이 소설 이후에 히트작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한국, 미국, 일본, 영국, 간혹가다 프랑스와 독일, 그보다 더 간혹가다 중국 등으로 편중되어 있던 독서 생활에 이 책은 분명히 환기가 되었다.

 

영국하면, 안개와 비오는 날씨, 여왕, 피시 앤 칩스, 딱딱한 발음, 축구 등등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프랑스라면 에펠탑과 몽마르트, 카페와 빵집, 세느 강과 노래하는 듯한 불어가 생각나리라. 실재로 거기에 살지도 않으면서, 며칠 간의 체류, TV 여행 프로그램의 화면, 사춘기 시절부터 이어진 독서로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들.

 

스웨덴 작가의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신선한 단어와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3750만 크로나, 아니 5000만 크로나, 말코손바닥 사슴고기, 감자로 만든 독한 증류주인 슈납스, 볼보, 불가리아인과 터키인의 피가 섞인 가게 주인, 핀란드 작가 파실린나, 여가수 소냐 헤덴브라트, 스물아홉가지 약초와 향료를 석 달 동안 화주에 담가 만든다는 감멜단스크.

 

익숙해서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그 풍경이 아니라, 색다른 지역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즐길 만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거세와 정신 병원 강제 입원,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변화 등 1900년대 전반의 스웨덴 역사도 흥미로웠고.

 

 

복습해 보는 알란의 100년 연보 (마지막 장 참조)

 

1905~1929 0~24세 5월 2일 스웨덴 플렌 시의 소읍 윅스훌트에서 알란 엠마누엘 칼손 출생. 열 살의 나이에 폭약 회사에 취직.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다섯 살에 자신의 회사 <칼손-다이너마이트>사를 창립. 폭약 실험을 하다가 정신 병원에 수용됨.

1914~1918 제 1차 세계 대전.

1917 러시아 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의 공산 정권 수립.

1918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처형.

 

1929~1939 24~34세 고향 윅스훌트를 떠나 헬레포르스네스 주물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 그곳에서 스페인 사회주의자 에스테반을 만나 스페인으로 떠남.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폭약이 설치된 다리를 건너려던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함.

1936~1939 스페인 내전. 프랑코 장군이 인민전선 내각에 맞서 반란을 일으킴.

1039 1월 프랑코군 바르셀로나 점령. 3월 마드리드 입성.

 

1939~1945 34~40세 미국으로 건너가 핵폭탄 개발이 한창이던 로스 앨러모스의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함. 부통령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됨.

1943~1945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핵폭탄 연구 진행.

1945 7월 미국, 세계 최초로 핵 실험에 성공. 4월 1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해리 트루먼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1945~1947 40~42세 쑹메이링의 국민당을 돕기 위해 중국으로 떠남. 이빈 시에서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구함.

1946~1949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내전. 공산당 승리 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7~1948 42~43세 이란 테헤란의 비밀경찰 감옥에 갖혀 퍼거슨 신부를 만남.

1945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영국 총선 패배.

 

1948~1953 43~48세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따라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남. 반동으로 몰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노역을 가게 됨.

1949 8월 소련 핵 실험 성공.

 

1953 48세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 탈출. 김일성, 김정일을 만남. 마오 쩌둥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남.

1950~1953 한국 전쟁.

 

1953~1968 48~63세 발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냄. 친구 아인슈타인의 부인 아만다는 정치인이 됨.

1963 3월 발리 아궁 화산 폭발로 2천여 명 사망.

1968 3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선출.

 

1968 63세 파리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함. 존슨 대통령을 만나 미국 스파이로 일하게 됨.

1968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도한 사회 변혁 운동인 68혁명 발발.

 

1968~1982 63~77세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미국 첩자로 포섭. 모스크바에서 스파이 활동.

1945~199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 고착. 1990년 독일 통일, 1992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종식.

 

1982~2005 77~100세 고향으로 돌아옴. 2005년 5월 2일 백 회 생일 파티를 앞두고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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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크래커 2015-04-2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코손바닥 사슴고기??? 이따금 들르는 서점에서 특이한 제목 땜에 두어번 시선이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화주˝란 말도 궁금하군요.

마고할미 2015-04-29 03:16   좋아요 0 | URL
화주란 불이 붙을 만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라고 합니다. 소주나 위스키, 브랜디가 화주에 속한다는군요. 추운 지방일수록 아무래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자주 마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코손바닥 사슴고기`는 제가 띄어쓰기를 틀렸군요. `말코손바닥사슴의 고기`입니다. 말코손바닥사슴은 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 그러니까 이른바 북유럽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북부 지역, 시베리아, 캐나다, 알래스카 등지에 분포한다고 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엘크, 혹은 무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저도 말코손바닥사슴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처음 봤는데 엘크나 무스라는 단어는 다른 책에서 본 적 있어요. 사슴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 크기가 커서 원주민들은 말처럼 타고 다닌다고 하는군요. 한때 멸종 위기에 있어서 적극적인 보호정책이 있었고, 최근에는 그 수가 다시 늘어났다고 합니다.

치즈크래커 2015-04-29 07:11   좋아요 0 | URL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마고할미 2015-04-29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특이하지만, 표지도 예쁜 책입니다.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순간들을 다루고 있지만 따로 역사책을 봐야 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전혀 아니고, 중간 중간 유머 요소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치즈크래커 2015-04-29 07:12   좋아요 0 | URL
넵. 꼭 한번 읽어 봐야겠네요.~^^
 
빅 포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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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창옌은 빅 포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창옌은 전체를 통제하고 움직이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는 리창옌을 1인자라고 지칭했다. 2인자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두 선이 있는 S 모양, 즉 달러를 나타내는 모양이다. 또 두 줄과 별 하나도 그를 상징한다. 따라서 2인자는 미국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3인자가 여성이고 프랑스인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류층 요부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도 있으나, 어떤 것도 분명치는 않다. 4인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멈췄다. 푸아로가 앞으로 몸을 숙여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 4인자가 뭐라고?"

푸아로의 눈은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압도적인 공포가 남자를 지배한 듯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다.

"파괴자."

 

이 책을 읽기 전에 평점이 너무 낮아서 놀랬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한 박한 평가는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실망스럽다는 것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읽으면서 빅 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평들의 요지는 대부분 이 책의 설정에 대한 아쉬움이었으니까.

 

이 책은 영화로 치자면 첩보물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 가장 영화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책의 분량이 300쪽이 채 되지 않는 데다가, 속도감 있는 전개 때문에 읽는 내내 스릴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줄거리의 스케일은 엄청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남미까지. 직접적으로 등장하든 간접적으로 묘사되든 이 소설은 전지구적인데, 의외로 요모조모 귀여운 구석도 있다. <커튼>에서 붉은 색 머리에게 이끌리는 헤이스팅스를 놀리며, 예전에 그것 떄문에 큰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푸아로가 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여기에서의 한 일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푸아로의 쌍둥이 이야기도. 베라 로샤코프 백작 부인은 다른 작품에서 푸아로와 만났던 것 같은데 나중에 읽게 될 미지의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러한 구성이 용두사미 같을 수도 있겠지만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냥 꼭두각시일 뿐이고 뒤에서 모든 행동을 조종하는 수뇌가 있다'거나 '마담 올리비에는 천재야. 퀴리 부부는 올리비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라는 대목에서는 작가의 포부(?)가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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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지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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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플 양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

 

크리스티 자신도 마플 양이 수십 년을 걸쳐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대단히 연극적으로 보이는 푸아로에 비해서 마플 양의 생김새는 수수한 편에 가깝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은 시골 할머니의 느낌이지만, 이 책에서의 마플 양은 마냥 푸근한 모습은 아니다.

 

"나는 마플 양이 좋던데. 적어도 유머 감각은 있거든."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고약한 여자예요. 일어나는 일마다 사사건건 다 알려고 들고. 게다가 늘 최악의 결론만 내리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젤다는 나보다 훨씬 어리다. 나 정도 살아 본 사람들은 모두 진실은 대개 최악이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구절도 있다.

 

마플 양은 상냥하고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진 백발의 노처녀였다. 반면 위더비 양은 심술궂고 야단스러운 여자였다. 하지만 둘 중 더 위험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플 양이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습관은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떄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갑자기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플 양, 지금 우리 모두가 혀를 지나치게 함부로 놀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을 익히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심술궂은 뒷공론으로 그 어리석은 혀를 함부로 휘둘러 수많은 해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목사님."

마플양이 말했다.

"목사님은 정말이지 속세의 떄가 묻지 않은 순수한 분이세요. 저처럼 사람들의 품성에 대해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감히 말씀 드리는데 객쩍은 수다와 잡담이 매우 고약하고 잘못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종종 그 속에 진실이 있는 법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마플 양의 마지막 공격은 나의 급소를 찔렀다.

 

특히나 이 소설에서 마플 양의 집요함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고집스런 행동은 마플 양만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이 마을에서는, 마플 양 뿐 만 아니라 그 나이대의 모든 여자들이 온갖 소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웨더비 양이 막 전화를 걸어왔어요. 레스트랭 부인이 8시 15분에 밖으로 나갔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녀가 어디에 갔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그걸 누가 알아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헤이독 의사 선생님께도 가지 않았단 말이에요. 웨더비 양이 그건 확실하대요. 헤이독 의사 선생님 집 바로 옆에 사는 하트넬 양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는데 레스트랭 부인을 못 봤다고 분명히 말했다는군요."

"정말이지 대단한 미스테리로군."

내가 말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을 위한 영양분을 얻는지가 미스테리란 말이야. 누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지 놓치지 않고 다 살펴봐야 하니 식사도 창가에 서서 해야 할 거 아닌가."

 

화자인 목사가 드물게 이성을 상실할 때가 바로 마플 양을 비롯한 마을 여자들의 이 일사분란하면서도 끈질긴 행위들을 접할 떄이다.

 

"그 쭈글쭈글한 노파는 자기가 이 세상의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평생 동안 이 마을 밖으로는 나가 보지도 못했으면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일이야. 저런 여자가 인생에 대해 뭘 알겠나?"

 

경찰서장인 멜쳇 대령의 평가이다. 멜쳇이라는 이름은 꽤 익숙한데, 아마 마플 양이 등장하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서 본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멜쳇은 마플 양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실에 도달하는 매우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사람들이 통찰력이라 부르며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 대는 것이죠. 하지만 사실 통찰력은 단어의 철자를 일일이 다 외우지 않고도 단어를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일이에요. 어린 아이들은 할 수 없는 거죠.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른들이라면 전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알 수 있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목사님은 아시죠?"

"알 것 같군요. 그러니까 어떤 것을 보고 다른 것이 연상된다는 말씀이시죠.그러니까 아마도 비슷한 종류의 일이 떠오른다는 거죠."

 

통찰력. 바로 이것이다. 마플 양 추리의 핵심. 사건에 접할 때마다 그녀가 이전에 겪었던 다른 사건을 통해 유추해내는 힘.

 

"아시겠지만 저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취미가 필요한 법이랍니다. 물론 취미를 갖는 건 어렵지 않죠. 털실 자수며 바느질, 복지사업, 그림 그리기 등등 많이 있어요. 하지만 제 취미는...... 아주 옛날부터 그랬는데요...... 바로 인간의 품성에 대해 연구하는 거랍니다. 인간의 품성이란 너무나 다양하거든요. 그래서 매우 매력적이랍니다. 물론 기분 전환할 거리 하나 없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도 연구에 필요한 훈련을 할 기회가 충분하답니다. 일단 사람들을 구분하는 거예요. 마치 새나 꽃을 분류하듯이 종, 속, 목 등으로 명확히 나누는 거예요. 물론 사람이다 보니 실수로 잘못 구분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수가 줄어들어요. 그러고 나서 실험도 해보죠. 작은 과제를 정해 보는 거예요. (중략) 하지만 언젠가 정말로 큰 미스테리가 발생하면, 그떄도 이런 일들처럼 똑같이 해결할 수 있을까 늘 궁금하답니다. 미스테리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든 실용 모형 어뢰는 아무리 작아도 진짜 어뢰와 똑같이 작동하는 법이니까요."

 

이 책이 참 흥미로운게, 마플 양의 첫 등장이니만큼 그녀 자체에 대한 묘사와, 그녀의 추리 방식에 대한 설명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매 소설마다 반복했으면 결국 중언부언이 될 테니까.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책에서야 가장 범인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범인인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 규칙이 적용된 적이 없더라고요. 종종 아주 뻔한 것이 그대로 진실이랍니다. 제가 프로더로 부인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녀가 레딩의 손아귀에 놀아나서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요. 레딩 씨는 돈 한 푼 없는 여자와 야반 도주를 할 그런 젊은이가 아니에요. 그로서는 프로더로 대령을 없애야만 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를 없앤 거죠. 젊고 매력적인 남자지만 도덕관념이란 게 없는 사람이죠."

 

실제에서는 가장 범인일 것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범인이라는 결론. 어쩌면 크리스티의 문학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교묘한 장치들로 독자의 뒤통수를 치기란, 어쩌면 글쟁이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반전. 하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에 매번 감탄하고야 마는 것은, 범인이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복잡함과 더불어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졌을 때, 왜 그가 범인이어야 했는지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크리스티의 인간에 대한 통찰 떄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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