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 파티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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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인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어요."

조이스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 조이스."

교사인 휘태커 양이 말했다.

"정말 봤어요."

조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 봤다고? 누군가 살인하는 광경을 진짜 봤단 말이야?"

캐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조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조이스."

드레이크 부인이 말했다.

사다리 위에 서 있던 열일곱 살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떤 살인이었는데?"

"난 못 믿겠어."

비어트리스가 말했다.

"물론이지. 저 애는 이야기를 꾸며 내고 있어."

캐시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에요. 전 분명히 봤어요."

"그럼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니?"

캐시가 물었다.

"그때는 그게 살인인 줄 몰랐으니까. 나중에야 그게 살인이었다는 걸 알았어. 한두 달 전에 누가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거든. 내가 본 건 살인이 분명해."

"이봐, 다 지어낸 이야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앤이 말했다.

"언제 있었던 일인데?"

비어트리스가 물었다.

"몇 년 전에요. 그때 난 정말 어린아이였어요."

조이스가 대답했다.

"누가 누굴 죽였는데?"

비어트리스가 물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모두 너무해요."

조이스가 말했다.

 

이 대화 이후 정말 조이스는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살해당했으니까. 당시 핼러윈 파티에 참석했던 아리아드네 올리버는 푸아로를 찾아와 이 사건에 대해 의논하고, 푸아로는 <맥긴티 부인의 죽음>에서 만났던 스펜스 총경이 퇴직 후 이 아이가 살았던 지역에서 현재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움을 청한다.

 

"우들레이 커먼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나요?"

"제 기억으로는 없어요."

드레이크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범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푸아로가 말했다.

"음, 화물차 운전사가 친구를 죽인 사건이 있었고, 여기서 24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자갈 채취장에서 작은 여자 아이의 시체가 매장된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지만 오래전 일이에요. 둘 다 야비하지만 시시한 범죄였죠. 아마 술김에 저지른 사고였을 거예요."

"열두세 살짜리 여자 아이가 목격할 만한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그리고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푸아로 씨, 조이스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유명 작가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리는 거예요."

드레이크 부인은 조금 차가운 눈길로 올리버 부인을 쳐다보았다.

"사실 제가 그 파티에 간 게 잘못이었죠."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부인.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올리버 부인과 함께 그 집을 나오면서 푸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살인 사건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집이군요. 아무런 정황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낌새도, 살인자로 의심할 만한 인물도 없어요. 그냥 어쩌다 드레이크 부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있을 것 같지만."

 

언뜻 보기에 살인 사건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지역. 대체 이 아이는 무엇을 본 것일까? 단서가 너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도, 심지어 죽은 아이의 언니나 남동생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아이는 거짓말쟁이였어요."

매케이 부인이 말했다.

"그 아이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뜻입니까?"

엘스페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믿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잘도 꾸며 냈죠. 저는 그 아이 말을 믿은 적이 없어요."

(중략)

"그렇다면 부인은 조이스 레이놀즈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럴 거예요."

매케이 부인이 대답했다.

"네 생각이 틀린 걸지도 몰라."

스펜스가 말했다.

"그래요. 누구든 틀릴 수 있어요. 그건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과 비슷해요. 그 말을 너무 자주 써먹으면 정말 늑대가 나타나도 아무도 소년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결국 늑대가 소년을 잡아먹어 버리죠."

(중략)

"그 애 말대로 누군가 살해되는 광경을 본 걸까요?"

푸아로는 오빠에게서 여동생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매케이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지난 3년 동안 이 마을에서 누군가 죽었어야 해요."

(중략)

"희생자 명단인가요?"

"그것만큼 힘들었습니다.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두죠."

푸아로가 소리 내어 읽었다.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 샬럿 벤필드, 재닛 화이트, 레슬리 페리어."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이 죽고 나서 모든 재산이 오페어 걸에게 넘어갔다. 열여섯 살 샬럿 벤필드의 경우 두 명의 남자 친구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레슬리 페리어는 등을 찔려 죽었는데, 집주인 해리 그리핀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고 했다. 그가 근무하던 법률 사무소는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을 담당했다. 목이 졸려 죽은 재닛 화이트는 1년 전 헤어진 남자가 가끔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룸메이트 교사에게 한 적이 있으나, 그 남자의 이름이나 사는 곳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드레이크 부인으로, 바로 그녀의 집에서 열린 핼러윈 파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살인자는 우선 그곳에 있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소? 그허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범인은 손님이나 도와주는 사람들 중 한 명이거나 아니면 악의를 품고 계획적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이 분명하오. 그 집 잠금잠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겠지. 그곳에 미리 와서 둘러봤을 수도 있소. 아는 사람이나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드문 일은 아니지요. 메드체스터에서 그런 일이 있었소. 6년이나 7년쯤 지나서야 밝혀졌는데, 범인은 열세 살짜리 소년이었소.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그 소년은 아홉 살짜리 아이를 죽인 뒤 훔친 차를 몰고 12킬로미터쯤 떨어진 관목 숲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시체를 태우고 달아났소. 그러고는 스물 한두 살이 될 때까지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았다고 하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그건 그 사람 말이고 계속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아마 그랬을 거요. 그는 살인을 즐겼으니 말이오. 그렇다고 그가 사람을 여럿 죽였거나 전에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다만 때때로 그런 충동을 느꼈다는 거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 살인을 저질렀을 거요. 나는 지금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려는 거요. 어쨌든 그런 유의 사건이니까. 다행히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오. 친구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오.그중에는 지각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되레 정신감정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소. 조이스를 죽인 범인은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품행이 정상적이며 외모도 멀쩡한 사람일 거요. 어느 누구도 그가 문제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요. 붉고 탐스러운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는데 사과 속 바로 옆에서 보기에도 역겨운 벌레가 튀어나와 눈앞에서 머리를 흔들어 댄 경험이 있소? 많은 인간들이 그와 비슷하오. 예전보다 지금 더 많아졌지요."

 

죽은 아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말이다. 미치광이에 의한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반응이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것 같기도 하다.

 

"만나서 반가워요, 푸아로 씨. 푸아로 씨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매우 친절하시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제 죽마고우이자 메도우뱅크의 교장인 불스트로드 선생(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8권, 『비둘기 속의 고양이』에 등장-옮긴이)에게 들었습니다. 불스트로드 양을 기억하시겠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분이시죠."

"맞아요. 지금의 메도우뱅크를 만든 사람이지요."

에믈린 양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 소설은 1969년에 나온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앞서 나왔던 크리스티의 소설들과 계속해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는 1959년에 나온 작품으로, 정확히 이 책보다 10년 전의 일이다.

 

그제서야 푸아로는 비탈 너머에서 황금빛 도는 붉은 잎에 둘러싸여 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요즘은 젊은 남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통 젊은 남자에 대해서는 성적 매력이나 열정적인 매력을 말하게 되고, 그렇게 칭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 윤기 흐르는 헝클어진 머리칼, 평범한 외모와는 거리가 먼 그런 남자 말이다. 젊은 남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마치 오래전에 사라진 어떤 특징을 칭찬하는 것처럼 미안해하는 투로 말해야 한다. 매력적인 아가씨들은 류트를 뜯는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쉰 목소리에 강렬한 눈빛, 파격적인 머리 모양을 연출한 대중가수를 원한다.

 

이 시기에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보면, 젊은이들의 패션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 많다. 푸아로나 마플 양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데, 아마도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당시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한 생각이겠지.

 

"당신은 이곳을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소. 아름다움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산업에만 쫓겨 파헤쳐진 돌이라는 거친 재료에 미래의 전망과 계획을 덧입혔소. 마음의 눈으로 그려 본 것을 덧입혔고 그것을 실현할 돈도 마련했소. 축하할 일이오. 경의를 표하는 바요. 자신이 하던 일을 접을 때가 가까워 온 한 노인이 보내는 찬사이자 경의를 표하는 거요."

 

푸아로는 이 청년이 외모 뿐 아니라 열정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찬사를 보내는 경우는, 그것도 상대가 남자일 경우는, 이 소설에서 처음 본 것 같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뭐든 잘 봅니다.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게 아이들이죠."

푸아로가 말했다.

"하지만 집에 가서 자기가 본 걸 말하겠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본 게 어떤 건지 확실하게 모를 때가 있거든요. 특히 어떤 일을 보고 어렴풋하게나마 무섭게 느껴졌을 때 더욱 그렇죠.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사고나 예기치 않은 폭력 사건을 보고 집에 가서 그것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비밀을 정말 잘 지키거든요. 비밀로 해두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때로는 혼자만의 비밀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을 좋아하죠."

"그래도 엄마한테는 말하겠지요."

풀러턴이 말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아이들이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 일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한 때 아이었던 우리들도 어린 시절, 가장 가까운 어른이었던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간직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뚜렷이 모르면서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보면 아이들이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자기도 모르는 채 위험해질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새 위협적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겪은 일이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잊어버린 일들. 작가들은 예외없이 이런 부분에 대해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이 소설 속 사건 또한 바로 그러한 아이의 특성 때문에 비롯된 사건이다. 만약, 주인공이 어른이었다면 바로 경찰에 알렸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안타까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희생자는 한 명 더 생겼다.

 

"네. 누가 전화로 알려 줬어요. 조이스의 동생이라고요. 그 애는 어떻게 하다가 이 이에 연루된 거죠?"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얻어 냈죠. 그러다 적당한 때에 냇가에서 죽임을 당했고요."

푸아로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굳이 변한 게 있다면 어조가 더욱 강경해졌다는 것이었다.

"동정심으로 가득 찬 어떤 사람이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까지 동정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죽은그 아이는 어리기는 했지만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그의 행동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 아이는 돈을 원했고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자신이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돈을 원했습니다. 그 아이는 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삼십대나 오십대, 혹은 구십대라고 해도 원인과 결과는 같습니다. 그런 경우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아마 동정심보다는 정의가 중요하다는 거겠죠."

에믈린 양이 말했다.

"제가 볼 때 동정심은 리어폴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에믈린 양도 저와 같은 생각인 듯하니 우리가 정의를 실현한다 해도 그 정의 역시 리어폴드를 구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리어폴드를 구할 수는 있을 겁니다. 곧바로 정의를 실현한다면 다른 아이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살인을 한 번 이상 저지른 범인, 살인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린 사람은 결코 안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저는 런던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논의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사건만큼은 그들이 저의 확신을 따라야 하니 말입니다."

 

첫번째 살인과 두번째 살인. 둘 다 아이가 죽었지만 푸아로는 사건의 성격을 다르게 본다. 결국 희생자가 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나서, 밝혀진 사건의 전말을 놀랍다. 보통 희생자의 성격을 묘사하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뒤에 가서 어떤 이유로든 뒤집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결국 주변인들이 본 게 사실이었다. 크리스티의 상당수의 소설에서, 범인이 아니라 '희생자의 심리'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이야말로 정확히 피해자의 심리가 사건의 전말과 딱 맞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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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럼 호텔에서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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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 주십시오, 험프리스 씨,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겁니까?"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험프리스는 자못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지요. 하지만......."

험프리스가 말을 멈췄다.

"하지만 당신이 특별한 가격으로 묵게 해준다, 그겁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특별한 가격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게 된다 하더라도 오랜 단골이라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단골이라서 할인해 준 것만은 아니란 건가요?"

"러스컴 대령님, 저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돈을 벌어야겠지요."

"하지만 그런 게 무슨 돈이 되겠습니까?"

"분위기 때문이지요....... 이 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특히 미국인들 말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영구겡 대해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수시로 대서양을 넘나드는 비즈니스계의 부유한 거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보통 사보이나 도체스터에 머물죠.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미국식 식사,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원하니까요. 하지만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온 분들, 이 나라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뭐 디킨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겠지만 크랜퍼드와 헨리 제임스를 읽은 분들은 이 나라가 고국과 뭔가 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이렇게 말하겠죠. '런던에 아주 근사한 곳이 있어. 버트럼 호텔이라고. 마치 1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니까. 정말 옛날 영국 모습 그대로야!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하며! 다른 곳에서는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나이 많은 공작 부인은 얼마나 멋진지 몰라. 영국의 전통 음식에 아주 근사한 옛날식 비프스테이크 푸딩까지! 다른 데서는 절대 맛볼 수 없을 거야. 맛있는 소 등심이며 양고기 등살, 영국 전통 차에 환상적인 영국식 아침 식사 등이 모두 가능하다고. 그리고 물론 다른 것들도 다 근사하지. 게다가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지. 장작을 쓰는 벽난로도 있어.'"

험프리스는 흉내 내기를 멈추고 씩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러스컴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 사람들, 그러니까 쇠락한 귀족이자 스러진 옛 지방 명문가 사람들이 전부 무대장치였군요?"

 

버트럼 호텔은 에드워드 왕조 시대의 건축물과 같이 오래된 느낌이 나면서 동시에 현대적이고 쾌적한 설비를 갖춘 장소이다. 타깃은 고풍스러운 광경을 느끼고 싶은 외국인이나, 20세기 초의 분위기를 추억할 수 있는 노부인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렇다! 마플 양이다. 잘나가는 소설가인 조카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가 보내 준 곳이다. 20세기 초가 추억의 시대가 되는, 이 소설의 시대는 1965년이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레이먼드와 연인 사이였던 젊은 화가 조앤은 이제 쉰이 다 되었다. 1928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1932년에 출판되었던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조앤의 작품은 마플 양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현대적이었지만, 이 소설에서는 젊고 야심 찬 예술가들로부터 완전히 구세대 취급을 받고 있다. 늘 제인 마플을 좋아했던 이 부부는 이 책의 바로 전해인 1964년에 나온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도 기꺼이 그들의 고모를 위해 여행비를 대 준다.

 

이 호텔은 열네 살 때 마플 양이 묵었던 적이 있는 곳이다. 호텔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올랐다. 물론 둘 사이에는 전혀 상관이 없고, 어떤 유사성도 없다. 다만, 유서 깊은 신비스러운 호텔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영화를 통해 구축된 덕분에 소설에 몰입하기가 한결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엄청난 사건이 펼쳐진다. 전쟁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직접 독일인을 사살하고 여러 번의 결혼을 한 여성, 21살이 되면 엄청난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상속녀, 갑자기 사라진 성직자, 전직 배우인 지배인... 이 버트럼 호텔을 지난 몇 년 간 악명을 떨친 최고이자 최대 범죄 조직의 본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은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나타난다.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국제적인 범죄, 첩보물 등이 또 나오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맥거핀에 불과했고, 더 놀라운 사실이 뒤에 있었다. 이 소설에서만큼은 마플 양은 방관자적인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전과는 달리 먼저 경찰을 찾아가는 적극성을 보이거나, 범죄자를 잡기 위한 연극을 하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묻기 전에는 대답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그저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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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여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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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어떤 아가씨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죠. 누구나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며 당장 나를 만나고 싶다지 뭡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 다 있네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모른다니 말이에요."

"내 말이 그겁니다. 세 이누이(정말 이상한 일이었어요)! 너무 이상해서 조지에게 그 여자를 들여보내라고 했죠! 잠시 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앉지도 않고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서 있더군요.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나름대로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몇 마디 건넸는데, 갑자기 그녀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다음에 뭐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글쎄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겁니다......."

 

이 책은 1966년에 나온 소설로,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이상하게 올리버 부인이 등장하면 소설의 톤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창백한 말>을 제외하면 늘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와 등장하는데, 1936년에 나온 <테이블 위의 카드>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에 등장한다. 처음에 등장한 것은 크리스티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 같고, 계속해서 등장한 것은 변화한 시대상에 맞추어 기존의 탐정이 아니라 새로운 해결사를 등장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푸아로나 마플 양, 배틀 총경과 레이스 대령 같은, 초기부터 등장했던 크리스티의 다른 주인공들과 올리버 부인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것은, 올리버 부인이 경찰이나 탐정처럼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가라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 번째 여자예요."

"외동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적어도 내 생각에는요."

"그럼 세 번째 여자란 말은 무슨 뜻이지요?"

"세상에! 세 번째 여자란 말도 몰라요? 《타임스》도 안 읽나보군요."

"출생, 사망, 결혼 기사는 나도 읽어요. 그 밖의 관심 있는 기사 몇 개하고요."

"그게 아니라 제1면 광고 페이지 말이에요. 요즘은 제1면에 실리지 않지만. 그래서 다른 신문을 볼까 생각 중이에요. 어쨌든 당신에게 보여 줄게요."

그녀는 사이드테이블에 가서《타임스》를 집어 들어 몇 장을 넘기더니 푸아로 앞에 내밀었다.

"자, 여기 봐요. '안락한 아파트 2층을 함께 쓸 세 번째 여성분 구함. 독방. 중앙난방. 얼스 코트.''아파트를 함께 쓸 세 번째 여성 분 구함. 주당 5기니. 독방을 쓸 수 있음.''네 번째 여성 분 구함. 리젠트 파크. 독방.' 이게 요즘 여자 애들의 생활 방식이에요. 하숙이나 호스텔보다 나으니까요. 첫 번째 여자가 가구가 딸린 아파트를 얻은 다음 세를 내는 거예요. 두 번째 여자는 보통 친구인 경우가 많아요. 그다음에 다른 친구가 없으면 광고를 내서 세 번째 여자를 찾아요. 그리고 아까 봣던 것처럼 네 번째 여자를 억지로 끼워 넣기도 하죠. 첫 번째 여자가 가장 좋은 방을 쓰고, 두 번째 여자가 세를 좀 덜 내고 그다음 방을, 세 번째 여자는 세를 그보다 조금 더 덜 내는 대신 손바닥만한 방을 써요. 주중 하루 누가 아파트를 독차지할 건지 날을 정하기도 한대요. 꽤 잘 돌아가고 있지요."

 

<세번째 여자>. 이 책 제목의 의미가 나오는 부분이다. 당연히 제목만 보고는 치정 사건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전쟁 이후 여권은 급속도로 신장하였고, 예전과는 달리 젊은 여자들이 직장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직장 근처에 집을 얻고, 다른 룸메이트를 구하여 사는, 요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그런 삶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나보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쉽게 몰입이 되었던 이유는, 소설의 구성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이면 당연히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마치 몇 년 전 한참 유행했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칙 릿' 소설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시대에 일흔이 넘었던 크리스티에게 20대 젊은이들의 삶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소함 그 자체였을 것이기 때문에, 소설 전체에서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하는지에 대해 내내 나오기 때문에, 마치 내가 유행의 최첨단의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리스티의 눈높이에서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노마의 두 남자도, 크리스티의 이전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르다. 생김새도 태도도,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지금과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푸아로에게 그다지 낯선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런던 거리나 파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는 검정 코트에 정교한 벨벳 조끼,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풍성한 밤색 고수머리를 어깨 위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국적이면서도 약간은 아름다운 외모였는데, 성별을 확실히 구분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노마의 남자친구인 데이비드는 비트족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비트족은 1950년대 전후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화된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이다. 즉,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지만 노마의 집안 어른들은 좋아할 수 없는, 그런 청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영화 <위아영>의 아담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옷차림이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보는 이에게 하여금 경계심이 들게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끌리게 되는, 불안불안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렸다.

 

붉은 머리에 잘생기진 않았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는, 우락부락하면서도 재미있는 인상을 가진 서른 살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한 태도로 노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그러니까 당신은 자살하려고 했군요, 맞죠? 뭐가 문제입니까? 나한테 말해 보세요. 남자 친구? 그것도 사람 기분 엉망으로 만들 순 있겠죠. 자살하면 남자 친구가 미안해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만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일을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까요. 남자 친구들은 다들 이렇게 말할걸요. '항상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왔어. 결국 잘된 일이야.' 다음번에 또 재규어에 돌진하고 싶을 때는 이것만 기억해요. 재규어도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요. 그나저나 정말 이유가 그거였어요? 남자 친구한테 버림받아서?"

(중략)

"네. 여기는 진찰실이 맞고 나는 의사입니다. 내 이름은 스틸링플릿이에요."

"오, 의사는 싫어요! 의사하고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고요! 나는 정말......."

"진정해요, 진정해. 당신은 이미 10분간 의사와 얘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의사가 뭐가 어떻다는 거죠?"

(중략)

"이런, 이런! 당신은 의사들에 대해서 아주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가두겠습니까? 차 한 잔 하겠어요?"

그는 곧바로 덧붙여 물었다.

"아니면 환각제나 진정제가 필요한가요? 당신 또래 젊은이들은 그런 걸 좋아하잖아요. 당신도 먹어 봤겠죠, 그렇죠?"

노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어요."

"못 믿겠는데요. 어쨌든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의기소침해하는 거죠? 정신병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이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네요. 의사들은 사람 가두는 취미 같은 건 없답니다. 정신병원도 이미 환자들로 넘쳐 나고 있어서 더는 입원시킬 수도 없어요. 사실 요즘에는 꽤 많은 사람을 내보내고 있지요. 그것도 필사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까지 말이에요. 요즘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로 넘쳐 나지요."

잠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음, 뭐로 하겠어요? 약장에 있는 걸로? 아니면 구닥다리 영국식 차?"

"음...... 차가 좋겠네요."

노마가 대답했다.

"인도산? 아니면 중국산? 이렇게 물어봐야 되는 거죠, 맞죠? 미안하지만 중국산은 없을지도 몰라요."

"인도산이 좋겠네요."

"잘됐네요."

(중략)

"주소는 없어요. 집이 없거든요."

"그거 재미있군요."

스틸링플릿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찰들이 말하는 '주거 부정'이로군요. 그럼 매일 엠뱅크먼트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나요?"

노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 꼭 그래야 하는 의무는 없지요. 그보다 딴 생각에 빠져 왼쪽을 살피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고 했다는 쪽을 택하겠어요."

"내가 생각했던 의사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노마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이 나라에서 의사 노릇을 하는 데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어요. 사실 이곳 병원을 접고 2주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려고 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뭐든 말해도 돼요. 벽에서 분홍색 코끼리가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서 당신 목을 조르는 것 같다거나, 사람들 눈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게 보인다거나, 그 밖의 기분 좋은 환상 같은 게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봐요. 무슨 얘기를 해도 가만 있을 테니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제정신으로 보이거든요."

 

또 다른 젊은이는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다.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대부분 의사가 등장하는데, 보통 평생 한 지역을 떠난 적 없는, 지긋한 나이에 이른 노인이거나, 돈이나 학문적 성취와 같은 야망에 물타는 젊은이인 경우가 많다.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대체로 강한 인상이 없이 흘러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 스틸링플릿이라는 의사는 데이비드와는 전혀 비슷한 부류가 아니지만, 이전 세대의 의사들과도 또 다른 모습이다. 이 당시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매우 다르며, 또 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사는 형태가 천차만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크리스티의 초기 소설에서 인물을 묘사할 때 개인의 특성보다는 그가 소속된 곳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좀 심하게 말하면 이름만 바꿔 달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전형성이 많이 깨진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흥미있는 부분들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굳건했던 아가씨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한 장 정도 되는 분량에서 급속도로 마음의 변화를 겪는 부분도 그렇지만, 마치 복잡한 심리극인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담한 사기꾼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던 사건의 전모도 다소 실망스럽다. 그리고 의문의 오 페어 걸 소냐의 결말도.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저 명석한 여성이었다는 설정은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 앞에서 깔아놓은 이야기에 대한 해명은 늘 있어왔는데 여기서는 그 부분이 빠져 있다. 식물원, 그리고 책으로 연결된 한 남자, 그 남자는 소설 밖 사건으로 인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노출했으면, 최소한 거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지.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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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행 승객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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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작가는 아이디어와 등장인물을 생산해 냈다. 이제 세 번째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한다. 바로, 배경이다. 앞서 두 가지 요소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오지만, 세 번째 요소는 외부에서 도출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 실재하는 것이다.

작가가 나일 강 유람 여행을 해 보았고 그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치자. 작가가 지금 쓰고자 하는 이야기에 딱 맞는 설정이다. 첼시 카페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옆에서 마침 여자 둘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움을 하고 있다. 다음 책의 도입부로 써먹기에 딱 좋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 지금 구상 중인 책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넣으면 얼마나 흥미롭겠는가. 친구를 만나러 찻집에 나갔는데, 도착하는 순간 친구의 오빠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고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쁘진 않은데. 근데 도대체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은 걸까?"

그럼 곧 작업에 들어갈 책의 제목은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권-옮긴이)'로 즉석에서 정해진다.

에번스가 누군지는 작가도 아직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때가 되면 떠오를 테니까. 중요한 건 제목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작가 서문의 일부이다. 크리스티는 서문을 잘 쓰지 않는다. 굳이 그녀가 서문을 썼다는 것은, 단단히 마음 먹고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품에 대한 부연 설명이나 안내일 때가 많은데, 그 경우에도 길이는 길지 않다. 이 책의 서문은 6쪽이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닌데, 의외다. 더구나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고, 등장인물을 생산해 내며, 배경을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즉, 일종의 '영업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왜일까? 서문은 계속 이어진다.

 

조간신문 1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라.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요즘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할까? 신문 한 부가 1970년 영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신문 1면을 훑고, 메모를 하고, 그것을 깊이 곱씹고 분류하라.

매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여자 아이가 교살당한다.

힘없는 할머니가 강도를 당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뺴앗긴다.

젊은 청년과 어린 소년들이 폭행을 하거나 폭행을 당한다.

건물과 공중전화 부스는 허구한 날 부서지고 유리창이 박살난다.

마약 밀수.

약탈과 폭행.

실종되는 아이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시체.

이것이 영국의 실상인가? 이것이 진정 영국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세상이.......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두려움이 인다.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벌어지게 하는 원인을 떠올렸을 때 드는 두려움이다. 그 원인은, 명확히 드러난 것들도 있지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게다가 영국에서만 이런 혀상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문의 다른 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들을 샅샅이 훓어보라. 유럽 소식도 있고 아시아 소식, 아메리카 대륙 소식도 있다. 전 세계 뉴스가 신문 한 부에 다 실려 있다.

비행기 공중 납치.

유괴.

폭력.

폭동.

증오.

무정부주의.

모든 것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파괴에 대한 찬양, 잔악함이 주는 쾌락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을 의미할까?

 

이 소설은 1970년에 쓰여졌다. 출판사 측의 설명에 따르면, 크리스티의 마지막 스파이 소설이며,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출판되었다고 한다. 1890년에 태어났으니, 이 소설 출판 당시 80세가 맞다. 80세 노인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 영국은, 세계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함이 존재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친절과 정을 베풀고, 동정심을 보이고, 이웃을 돕고, 소년 소녀들은 노인을 부축해 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걸까?

서기 1970년인 현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현재의 배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배경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해도 이야기는 그 배경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공상 문학,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배경 설정이 일상의 공상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그럴듯한 공상적 대의를 구상해 낼 수 있을까?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비밀 조직 운동은 어떨까? 한 사람의 광적인 파괴 욕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설정은 가능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무나 공상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 세상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불가능이란 없다고, 이미 과학이 여러 차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공상에 불과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건들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공상적 성격을 띠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단위 시간 당 가장 변화가 컸던 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성인이 되어 두 번의 2차 대전을 겪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까지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로 '빅토리아 시대'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 이 책은 물론이고, 크리스티의 다른 책에서도 종종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야 말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즉, 대영 제국의 전성기와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종전 후 영국의 상황까지를 전생애에 걸쳐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변화는 그녀가 평생 썼던 80여편의 소설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영원할 것 같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나고, 노년까지 혼란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그녀가 말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는 아주 조금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박완서 작가도, 생전에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보았고, 한 번 본 것 두 번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난 일화다.

 

"학생 운동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근데 사실 걱정해야 할 건 학생 운동이 아니야. 그들은,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청년들부터 건드리거든. 모든 국가의 청년층부터 건드리는 거야. 살살 구슬리기. 일단 구호부터 외치게 하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구호들. 정작 외치는 젊은이들은 그 구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텐데. 혁명을 일으키는 게 그렇게 쉽단다. 젊은이들의 본성이거든. 옛날 옛적부터 젊은이들은 항상 반항을 해 왔어. 반역을 일으키고, 뒤집어엎고, 세상을 바꾸려고 들지. 하지만 젊은이들은 눈이 멀었어. 눈을 가리고 현실을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자기들이 어디로 휩쓸려 가고 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눈앞의 현실이 어떤지, 자기들을 부추기는 배후의 세력이 무엇인지. 무서운 게 바로 그거야. 앞에서 한 사람이 당근으로 유혹하고 뒤에서 다른 사람이 채찍질로 재촉하면 당나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끌려 간단다.(중략) 히틀러와 히틀러 소년단. 그런데 그 경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었지. 2차 대전은 아주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이었어. 히틀러 소년단은 유전적으로 우월한 초인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돕기 위해 각국에 심은, 일종의 제 5열(전시에 후방 교란이나 간첩 행위 등으로 적국의 진격을 돕는 집단-옮긴이)이었어. 그렇게 해서 세워진 초인 집단은 독일의 꽃과도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나치스는 굳게 믿었어. 지금도 누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족속들이 넙죽 받아먹을 만한 사상이니까. 잘만 포장해서 내놓는다면 말이야."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중국인이나 러시아 인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얘기에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 게다가 과거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어. 아까 말한 패턴 말이야. 패턴! 러시아? 공산주의의 수렁에 빠져서, 이제는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고 있지. 중국? 중국은 완전히 갈팡질팡 헤매고 있더구나. 너도나도 자기가 마오쩌둥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서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계획을 세우고 주도하는 배후 집단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모른단다. 아까도 말했지만 중요한 건 왜, 어디서, 언제, 그리고 누구인가야."

"아주 흥미롭네요."

"흥미롭기도 하지만, 무섭지. 같은 사상이 자꾸자꾸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 보면. 역사가 반복되고 있어. 젊은 영웅, 모두가 본받아야 하는 초인."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2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망령이 아직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정부에서 일하는 그 멍청이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또 정부에 어떻게든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다음에 들어설 정부에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정치인들은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자기가 사는 나라를 하나의 거대한 유세장으로밖에 보지 않아. 그것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자기들 입장에서 정말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일들을 추진하는데,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걸 못 깨달으니까 결과가 안 좋은 걸 보고도 정치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들한테 거짓말을 할 특권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 볼드윈 씨(세 차례나 영국의 수상을 지낸 정치가 스탠리 볼드윈을 말함-옮긴이)가 그 유명한 말을 뱉은 게 바로 얼마 전이었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선거에서 졌을 것이다.' 영국 수상들은 아직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가끔가다 좋은 정치가가 나오는 게 그나마 신께 감사할 일이지. 너무 드물어서 문제지만."

 

1970년의 영국 할머니가 아니라, 2015년의 한국 할머니가 이 말을 했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상 요즘 모든 신문의 사설과 칼럼에서 나오는 말과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대사 부인 중 하나였는데, 똑똑하고 지적이고 교육도 많이 받은 여자였지.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연설을 직접 듣고 싶어서 안달을 했어. 물론 2차 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의 얘기야. 연설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던 거야.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감동을 받을까. 그래서 갔지. 갔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어. '정말 놀라웠어요. 직접 들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독일어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동을 받을 정도라니까요. 이제 모두들 왜 그렇게 난리인지 이해하겠어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사상은 정말 굉장한 것이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그 사람이 한 말들....... 듣고 있으면 이것만이 진리로구나. 저 사람만 따라가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겟구나. 그렇게 믿게 되더군요.아, 말로 잘 설명 못하겠어요.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서 나중에 보여 줄게요. 그럼 내가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해 줬지.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와서 이러는 거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들은 이야기, 히틀러가 한 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거든요. 근데 그 말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정말로...... 무시무시한 얘기였어요. 옮겨 적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문장은 단 한 개도 떠올릴 수 없었거든요. 몇 마디 떠오르기는 했는데, 적고 보니까 들었을 때 생각했던 뜻과 전혀 달랐어요. 그 말들은...... 그냥, 쓸데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았어요. 어째서 그럴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일화는 사람들이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는 위험 한 가지를 일깨워 주지. 분명 실재로 존재하는 위험이야.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어. 어떤 삶, 어떠한 일의 환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야. 그들이 하는 말, 즉 우리가 듣는 말로써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이야기하는 개념에 자극을 받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다른 뭔가가 있어. 바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야. 그런 힘을 가진 자들만이 뭔가 시작하고 또 환상을 빚어낼 수 있어. 그 인간적 매력을 이용해 환상을 창조하는 건데, 이를테면 목소리 톤이라든가 아니면 직접 마주했을 때 풍기는 감화력 같은 것이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그런 게 분명 있어.

그런 자들에게는 힘이 있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힘을 가졌고, 사악한 권력자도 그런 힘을 가졌어. 신념은 어떤 특정한 운동을 통해 불러일으킬 수가 있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신천지를 창조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면,사람들은 그걸 믿고 그렇게 되도록 기를 쓰고 투쟁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치는 거야."

앨터마운트 경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얀 스머츠가 이런 말로 잘 표현해 주었지. '리더십은 위대한 창조의 동력이지만, 때로 사악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라고 말이야."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 <목적지 불명>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크리스티가 그녀의 지인으로부터 실제로 들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이 일화를 계속 소설 속에서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저한테 몇 가지를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아돌프 히틀러라고 믿는 환자들을 제가 많이 상대해 봤다고 마틴 B씨가 귀띔해 줬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꽤 흔한 일이며, 그 환자들이 히틀러 총통을 얼마나 존경하고 숭배하는지를 고려했을 때 히틀러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은 자신들을 히틀러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연히 점차 사그라지게 될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할 때 속으로 조금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총통 각하가 대단히 만족한 듯해서 안심이 되더군요. 고맙게도 각하는 자기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열망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어서, 그런 증상을 앓고 있는 환자들 몇몇을 추려서 만나 보게 해 줄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논을 했습니다. 마틴 B씨는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는 듯 보였지만, 그래도 저를 따로 불러 총통 각하가 진심으로 이 만남을 경험하고 싶어 하신다고 확신을 시키더군요. 마틴 B 씨가 특별히 다짐받고 싶어 한 것은 히틀러 총통이 혹시나....... 아니, 쉽게 말해서 각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거였어요. 작가 히틀러라고 주장한느 환자들 중에 혹시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자칫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였죠....... 그래서 제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가장 온순한 히틀러들만 골라서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B 씨는 총통 각하가 환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제가 안 끼었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병원장이 합석하면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요. 게다가 폭력적으로 돌변할 위험이 없다면야....... 그래서 저는 위험이야 없지만 B 씨가 총통 각하와 동석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B 씨는 그건 문제없다고 했죠. 그래서 그렇게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대단하신 분이 방문하셔서 꼭 대화를 나눠 보고자 하시니 히틀러들은 지정된 방으로 모여 달라고 방송을 내보냈습니다.(중략)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감춰 왔고 우리가 감춰 온 사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총통, 히틀러는 그날 자의로 정신병원에 남았고, 진짜 히틀러와 가장 많이 닮은 환자 한 명이 마틴 B와 함께 그곳에서 나갔습니다. 나중에 벙커에서 발견된 건 그 환자의 시체였습니다. (중략) 진짜 히틀러는 미리 준비된 지하 루트를 통해 아르헨티나로 밀입국해 거기서 몇 년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아리안 혈통의 예쁜 여자를 만나 아들을 하나 두었고요. 영국 여자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히틀러의 정신병은 계속 악화되엇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미쳐서 자기가 전장에서 군을 지휘하는 환영을 보며 죽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독일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그 계획을 받아들인 거였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그런 정보가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고 철저히 감춰져 왔다는 겁니까?"

"물론 소문이 돌았죠. 소문이란 항상 돌게 마련입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 러시아 황제의 딸 중 하나가 황실 가족의 참변을 탈출해 살아남았다는 소문도 있었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요. 조작된 거짓이었잖아요."

조지 패컴이 또 말을 더듬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증명했지요. 다른 무리는 진실이라고 끝까지 믿었고요. 양쪽 다 황제의 딸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진짜로 황제의 딸이었다, 아니다,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라는 여자는 사실 농부의 딸에 불과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소문이란! 오래 돌수록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죠.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계속 믿지, 히틀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문은 여러 차례 돌았습니다. 시체를 부검했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러시아 측이 부검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요."

 

생전에 히틀러는 대역을 썼으며, 죽은 것은 그의 대역이었고 히틀러가 살아 남았다는 음모론은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 러시아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져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아나스타샤라도 주장한 여성의 상속권은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사망 후 유전자 검사 결과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불일치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경우도 설령, 음모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1889년에 출생한 그는 지금으로부터 몇십년 전에는 사망했을 것이다. 물론, 2차 세계 대전 후 지금까지 히틀러의 직계 후손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둘 다 그저 루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1970년대에는 이런 소문들이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소설자체의 완결성만 놓고 보면 사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80세에 도달한 크리스티가 이 소설을 쓴 이유, 또 굳이 길게 서문을 쓴 이유는 단순히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어땠을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그런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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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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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원제는 They do with mirrors 이다. 대체 거울을 가지고 뭘 했는지가 궁금해지는데, 소설을 다 읽다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직접 살인의 도구로 거울이 쓰인 것은 아니지만, 거울을 보다가 마술을 연상하고 힌트를 얻게 된다. 이 책의 번역된 제목인 '마술 살인'만 보면, 왠지 마술사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역시 이 또한 살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힌트인 것이다. 마술사 옆의 한 명의 보조자가, 알고 보니 두 명이었다더라, 보조자 또한 마술사와 한 편으로 관객을 속인다고 생각해 보면, 굉장히 간단하게 사건이 해결된다.

 

매튜 프리처드에게

 

크리스티는 늘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특정 인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크리스티 소설의 팬일 때도 있고, 때로는 소설을 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지인일 때도 있고, 때로는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친구일 때도 있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한 매튜 프리처드는 바로 크리스티의 외손자다.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로잘린드 힉스라는 딸 하나만이 유일한 자녀인 그녀에게, 현재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그녀의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는 매튜 프리처드는 아마도 크리스티에게는 귀한 손자였을 것이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크리스티 전집의 모든 책에는 빠짐없이 매튜 프리처드가 정식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한국 독자에게 쓴 글이 실려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의식하여 출판사 쪽에서 재단으로부터 받은 일종의 허가장을 독자들에게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크리스티는 1928년에 로잘린드를 출산하였으며 이 책은 1952년에 출판되었다. 두 사건의 시간차가 24년인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이 책이 나오기 직전 손자가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손자는 크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자신의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과 함께 평생 기록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그래. 그 애 자신 때문이겠지. 캐리 루이즈는 우리완 달리 항상 이상에 젖어 있었어. 물론 우리 젊은 시절엔 다들 이상을 쫒는 게 유행이었지만 말이야. 모든 여자들이 다 그랬지. 특히 젊은 여자들은 더욱 더. 제인 너는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싶어했고, 나는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더랬지.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누구나 그런 어이없는 생각은 관둬 버리는 거야. 누군가는 결혼이 그런 변화의 계기라고 했지. 하긴 나 역시 결혼으로 피해 본 것은 없었어."

 

우리의 마플 양은 지금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녀는 캐리 루이즈라고 하는 여성의 친언니로, 캐리 루이즈 자매와 마플 양은 소녀 시절 이탈리아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캐리의 언니는 동갑내기인 마플 양과 자주 만나고 있지만, 동생인 캐리와 마플 양이 마지막 만난 것은 20년 전이다.

 

"이상주의자들 말이지. 캐리 루이즈야 원래 '이상('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 아니니. 옛날 그 애 모습 기억나? 열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면서도 그 걸브랜드센이라는 늙은이가 인류를 위한 계획이 어쩌니 큰소리치는 모습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보고 있었잖아. 결국 그 앤 쉰 살도 넘은 데다 다 큰 자식이 딸린 그 홀아비하고 결혼했더랬지. 다 그 영감의 박애주의 때문이었어. 남편 옆에 붙어 앉아 꼭 마법에 홀린 것처럼 얘길 듣던 그 모습을 보면 데스데모나와 오셀로가 따로 없었다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 사이를 망쳐 놓는 악당 이아고가 없었다는 정도? 그나마 걸브랜드센이 유색인종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지. 아마 스웨덴이거나 노르웨이쪽 혈통일 거야."

 

캐리라는 여성은 이상주의자로, 총 세 번의 결혼을 하며 그 세 번의 결혼은 전부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혹은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는 결과였다.

 

"내가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야 물론 돈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캐리 루이즈는 달라. 그 영감이 캐리가 서른두 살이던 해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는 미망인으로선 최적의 나이지. 경험도 쌓였는 데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충분한 시기이거든."

 

첫번째 남편과의 결혼은 그녀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주었고, 그 유산으로 인해 두번째 결혼이 가능했다. 정작 캐리 본인은 돈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남편들이 이전 결혼으로 얻은 자식까지 지극히 챙긴다.

 

"캐리 루이즈가 조니 레스태릭과 결혼했을 때 난 진심으로 기뻤어. 하긴 그 남자는 캐리의 돈을 보고 결혼한 게 맞지. 음, 꼭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그 애가 가난했다면 그 남잔 캐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거야. 조니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건달이었단다. 그래도 괴짜보다야 그 편이 훨씬 안전하지. 조니가 바라는 건 오직 인생을 편하게 사는 것뿐이었어. 캐리 루이즈와 함께 최고급 의상실이나 드나들고 요트, 자동차 여행을 즐기며 살길 바란 거야. 이런 종류의 남자는 지극히 안전해.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만 갖춰 주면 고양이처럼 애교를 떨며 여자에게 복종하니까. 나야 그 남자가 한다는 연극 관련 일을 대수롭지 않다고 봤지만, 캐리 루이즈는 그런 것이 멋져 보였나봐. 심지어는 그걸 가리켜 '진짜 예술'이랬던가? 그래서 그쪽 업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지원한 거고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그 악독한 유고슬라비아 여자가 나타나 그 남자를 가로채 도망간 거 아니겠어? 사실 조니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지. 캐리 루이즈가 좀 더 느긋이,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그는 분명 돌아왔을 거야."

마플 양이 말했다.

"캐리가 아주 슬퍼했겠네?"

"그게 참 웃기는 구석이야.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거든. 원래 마음씨가 좋은 애라서 그런 걸까? 조니와 그 계집애가 결혼할 수 있게 이혼을 해 줬는가 하면, 조니와 전처 사이의 아이 둘하고 그 계집애가 같이 살 수 있도록 집까지 사 주다니. 그래야 생활 기반이 잡히지 않겠냐느니 하며 말이야. 덕분에 가엾은 조니는 그 여자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엇어. 결국 반 년의 지옥 같은 결혼 생활 끝에 조니는 차를 몰고 절벽 낭떠러지로 돌진하고 말았지 뭐니. 사고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게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라고 믿어."

 

그녀가 결혼한 세번째 남편과 함께 그녀는 소년 범죄자를 위한 시설을 집 주변에 짓고, 그들을 위한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상담사, 교사까지 고용한다. 그 중 일부는 과거를 딛고 훌륭한 어른으로 성정했으나, 일부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청소년시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부와는 달리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불만과 걱정이 많은 상태. 얼마 전에 동생인 캐리를 방문한 언니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마플 양에게 그 저택에 가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던 중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 캐리 루이스를 독살하고 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

 

"그런데 캐리 루이즈는 그 뒤에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현 남편 루이스 새러콜드와 결혼한 일 말이야. 이번에도 괴짜였어! 거기 더해 이상주의자! 아, 그 남자가 캐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실제로 내 동생을 무척 사랑하는 모양이고. 다만 이 남자 역시 전 인류의 복지를 꾀하겠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문제지. 너도 알다시피 자기 삶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건데 말이야."

 

이 소설은 굉장히 복잡해 보인다. 일단 구성부터가 복잡하다. 주인공인 캐리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번째 남편은 전처 소생의 아들 셋이 있었으나 정작 캐리와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어서 딸을 입양해서 키운다. 몇 년 후 캐리는 임신을 하고, 딸을 얻는다. 첫번째 남편과의 사별 후, 두번째 남편이 데리고 온 두 명의 아들들에게도 캐리는 사랑을 베풀며 가족으로 대한다. 이후 그녀의 두 딸은 각각 결혼하였고, 입양한 딸은 딸 하나를 남긴 채 사망하며, 친딸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한다. 현재 저택에는 캐리와 그녀의 세번째 남편, 친딸, 입양한 딸의 딸, 그러니까 캐리의 손녀와 그녀의 남편, 두번째 남편의 두 아들이 함께 살고 있으며, 그 외에도 캐리의 가정부와 세러콜드의 비서 등이 있다. 여기에 첫번째 남편의 아들이 저택을 급하게 방문하고, 살해당한다.

 

이른바 족보가 계속 꼬이는 상황. 등장인물들이 늘 보던 익숙한 위치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읽어나가면서 사건이 더 어렵다고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한 사건이다. 전체적인 사건도 그렇고, 그 사건에 쓰인 트릭도 그렇다. 다 알고 나면 이 단순한 장치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마치 눈 앞에 안대를 씌워놓은 것 같은 느낌. 꼭 마술의 비밀을 보고 나서, 저렇게 간단한 마술이었구나 하고 한편으로는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하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느낌이다.

 

초반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뒤바뀌는 것은 여주인공에 대한 판단도 포함된다. 이상주의자에,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들, 남편이 데리고 온 자식이나 입양아까지 전부 사랑으로 품는 캐리. 책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이제는 할머니 나이가 된 그녀가 현실을 아직도 직시하지 못하고 이 세상은 선하고 좋은 곳이라는, 소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답답하게 된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 도달하면, 그녀야말로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선량할 뿐만 아니라 겸손했고, 그랬기에 자신의 주변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선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아하면서도 깔끔하고, 그러면서도 핵심을 관통하는, 그야말로 크리스티다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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