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의 증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강표.양현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원제는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1 이다.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2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6권이고 이 책은 77권인데 왜 1, 2가 뒤바뀌어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계속 궁금한 점은, 이 전집의 순서는 어떻게 정해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가 실제로 소설을 출간한 순서도 아니고, 동일한 탐정끼리 묶은 것도 아니다. 좋은 소설부터 먼저 출간했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다 불현듯 든 생각이, 번역이 되는 대로 책이 나온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수십 권의 책이기 때문에, 여러 명의 번역가가 여러 작품씩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중 먼저 번역이 되어 나오는 순서대로 책을 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76, 77권의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알만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과 계약을 할 때,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1, 2로 두 권을 나누면서 각각에 들어가는 소설을 명시하여 계약하였을 텐데, 2가 1보다 먼저 번역이 되었겠지.

 

어차피 국내에서의 제목은 76권이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77권이 <검찰 측의 증인>으로, 각 소설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따왔기 때문에 순서가 뒤집혀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국내에 번역된 순서가 더 낫기도 하다. 77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스터데일 미스터리>는 제목에 들어간 '미스터리'가 실린 모든 소설들을 관통하는 핵심단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로맨스가 되었건 스릴러가 되었건 범죄물이 되었건 어드벤처가 되었건 간에, 그 밑바닥에는 '미스터리'가 언제나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 <검찰 측의 증인>은, 대부분의 소설이 마치 심령 소설 같아서, 읽다 보면 정말 이 소설들을 크리스티가 쓴 게 맞아?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범인을 연구하는 작가로는 좀 믿기 어려운 부분인데, 셜록 홈즈를 쓴 아서코난도일도 말년에 심령술에 빠졌다고 한다. 마지막 세 작품을 제외하면 사실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지막 세 작품이 파커 파인이 등장하는 작품 2편, 할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 1편인데, 각각 <파커 파인 사건집>과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에 수록되어 출판되었으면 더 나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사냥개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도련님, 벼랑 위에 있는 로즈 선생의 작은 집을 기억하지요? 지난번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쓸려 내려갔어요. 그 바람에 의사 선생과 가엾은 마리 안젤리크 수녀가 죽었어요. 해변에 떨어진 잔해가 정말로 끔찍하대요. 엄청나게 큰 덩어리로 쌓여 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사냥개처럼 보여요......."

내 손에서 편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중략)

물론 이건 모두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의사가 마리 안젤리크 수녀의 환각을 믿은 것은 단지 그 자신의 정신도 좀 불안정하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때때로 한때 인간이 살았으며 우리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달성하고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린 대륙에 대한 꿈을 꿀 때가 있다.......

아니면 그런 가능성을 믿는(수녀가 실은 미래를 보았다는 가능성? 원형 도시 전설이 존재했다는 가능성?) 사람의 말처럼 마리 안젤리크 수녀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 원형의 도시라는 것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바보 같으니! 당연히 그 모든 것은 그저 환각일 뿐이다!

붉은 신호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일이었네. 휴전 직후였는데 어느 날 저녁에 내 천막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예감이 들었어. 위험하다! 주의해라! 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전혀 모르겠는 거야. 그래 괜히 야단법석을 떨며 캠프 주위를 둘러보거나 적성 아랍인들에 대한 방어 태세를 점검하거나 했지. 그러고 나서야 다시 내 천막으로 돌아갔는데,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처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들더군. 위험하다! 결국 나는 담요를 들고 나와서 밖에서 둘둘 말고 잠을 잤다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텐트로 들어갔을 때,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건 내가 평소에 잠을 자던 침대에 꽂혀 있는 칼이었네. 거의 50센티미터쯤이나 되더군. 나는 곧 범인을 찾아냈지. 아랍인 하인 중 하나가 범인이엇어. 아들이 스파이 혐의로 총살된 사람이었지. 앨링턴 삼촌, 제가 붉은 시호의 예로 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중략)

더못은 입을 다물었다. "네, 오늘 밤까지는 그랬습니다."라는 말이 거의 입에서 튀어나올 뻔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깨닫기도 전에 생각이 말로 나와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붉은 신호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위험하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네 번째 남자

"그 처녀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지요.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그녀를 만나러 갔으니까요. 그녀는 네 개나 되는 전혀 다른 인격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들은 펠리시 1, 펠리시 2, 펠리시 3 등으로 불렸지요."

(중략)

"네. 그리고 아네트 라벨도요. 아네트 라벨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신 것 같군요? 그런데 펠리시 볼트의 이야기는 아네트 라벨의 이야기입니다.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당신들이 아네트 라벨의 이야기를 모른다면 펠리시 볼트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중략)

'정말 난 무서워. 무서워. 그 애 목소리가 들려. 귀에서 들리는 게 아냐. 아냐,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야. 여기, 머리에서.......'

그러면서 이마를 툭툭 두드렸습니다.

'그 애는 나를 몰아낼 거야. 완전히 몰아낼 거야.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떻게 될까?'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매우 교활한 웃음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에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무슈 라울,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 손아귀 힘은 아주 세거든. 내 손힘은 아주 세.'

전에는 특히 그녀의 손을 눈여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손을 살펴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죠. 뭉뚝하고 거친 손가락은 펠리시가 말했던 것처럼 굉장히 힘이 세 보였습니다....... 욕지기가 갑자기 치밀어 올랐는데 이유를 확실히 설명하지는 못하겠네요. 틀림없이 그런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아내를 목 졸라 살해했을 겁니다.......

(중략)

"저쪽에 계신 무슈 르 독퇴르(의사 선생님)가 이게......."

그의 손이 배를 세게 치는 바람에 참사회원은 주춤했다.

"단지 집이라고 했잖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당신 집에 강도가 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집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수술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답니다. 간호사였다더군요. 그게 당신이었다고 그는 생각했지요. 사실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게는 간호사로 일하는 사촌이 한 명 있어요. 어둑한 불빛에서 보면 저와 좀 비슷해 보여요. 아마 그녀였을 거예요."

그녀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누구든 상관있나요?"

(중략)

"재능을 갖고 계실 줄 알았어요. 저긴 옛날에 태양 숭배자들이 산 제물을 바치던 곳이에요. 그 얘기를 듣기 전부터 전 알 수 있었죠. 그들의 느낌을 정확히 알 때도 있어요. 그곳에 제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요....... 여기 황무지에는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뭔가가 있어요....... 물론 제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저는 퍼거슨 집안사람이니까요. 저희 집안은 대대로 예지력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영매셨지요. 성함이 크리스팅이신데 상당히 이름을 날리셨지요."

(중략)

"설마? 땅거미가 지고 나면 황무지에 나타난다는 무시무시한 것들 말인가요? 흰 옷을 입은 여자나 악마의 대장장이, 선원과 집시......."

"뭐라고요? 선원과 집시요?"

"그렇대요. 제가 젊었을 땐 유명한 전설이었죠. 아주 먼 옛날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미 한참 전부터 그 둘의 유령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나타나지 않는다고요? 혹시 그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요......."

"아이고! 맥팔레인 씨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계요! 그런게 그 젊은 여자 분은......."

"어떤 젊은 여자요?"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응접실에 계신데, 성함이 로즈 양이라고 그러셨어요."

"아!"

레이첼! 원근이 바뀌면서 그는 기묘한 수축감을 느꼈다. 이제까지 그는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느라 레이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첼은 이 세상에만 속하는 여인이기 떄문이다....... 그 기묘한 원근의 변화가 다시 3차원만의 세계로 그를 돌려놓은 것이다.

그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레이첼....... 정직한 갈색 눈을 가진 레이첼이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끓어오르는 기쁨에 찬 따뜻한 현실이 그를 어루만졌다. 그는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인간히 확신할 수 있는 인생은 하나밖에 없어! 바로 이것!'

"레이첼!"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을 맞췄다.


등불

"그런데....... 저어....... 그 아이는 결국 굶어 죽었답니다."

그는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하는 것과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럼 이 집에 나타나는 게 그 아이의 유령인가요?"

랭커스터 부인이 물었다.

래디시 씨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다급히 말했다.

"실제로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어요. 뭐가 보이지도 않고요.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사람들이,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소리가 들린다고,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더군요."

랭커스터 부인은 현관 쪽으로 가며 말했다.

"집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 임대료로 이보다 더 좋은 집을 얻을 수는 없을 거예요. 생각해 보고서 연락드릴게요."

(중략)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들의 발이 타닥타닥, 타닥타닥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서 문을 지나 함께 밖으로 나갔다.

랭커스터 부인은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가 둘이었어요, 둘이었다고요!"

엄습하는 공포에 납빛이 된 얼굴로 그녀는 방구석에 있는 어린이용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조용히 딸을 막아서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그는 간단히 말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라디오

당연히 외숙모는 유언장을 태우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생각이 갑자기 끊겼다. 눈앞에 떠오르는 이 영상은 무엇일까?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노부인....... 뭔가가 미끄러져 내리고....... 종이 한 장이....... 새빨갛게 단 석탄 위로 떨어진다.......

찰스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묻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만약에 유언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하터 부인이 앞서 작성하신 유언장이 남아 있습니다. 1920년 9월에요. 그것에 따르면 하터 부인은 현재 미리엄 로빈슨이 된 질녀 미리엄 하터 부인에게 전 재산을 남기셨습니다."

이 늙은 바보가 뭐라고 말하는 거야? 미리엄이라고? 근본도 모를 남편에 찡얼대는 애새끼들 넷이 딸린 미리엄? 솜씨 좋게 처리한 일들이 다 미리엄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의 팔꿈치께에서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의사의 쾌활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지웨이 씨?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부검이 막 끝났어요. 사인은 제가 짐작했던 대로네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생전에 부인의 심장이 훨씬 심각한 상태였더군요. 최대한 조심했어도 기껏해야 두 달 이상을 넘기시지 못했을 겁니다. 궁금해 하실 것도 같고, 또 위로가 좀 되실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 드렸어요."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찰스가 말했다.

의사가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부인은 두 달 이상 사시지 못했을 거라고요. 그것도 만사가 순조로울 경우에 말입니다, 리지웨이 씨......."

하지만 찰스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의식했다.

"이봐요, 리지웨이 씨, 어디 아픈가요?"

빌어먹을!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변호사. 불쾌하기 짝이 없는 멍청한 메넬. 그의 앞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오로지 교도소 담벼락의 그림자뿐.......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누군가 틀림없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을 것이다.


검찰 측의 증인

"변호사님, 저는 남편을 구해야 했어요.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증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거예요.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전 군중 심리에 대해 좀 알거든요. 제가 한 증언이 위증이라는 걸 인정해서 법률상으로 아주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면 당장 피고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세가 굳어지게 되는 거죠."

"그럼 그 편지 다발은?"

"단 한 장만, 결정적인 편지 한 장만 있으면, 그걸 뭐라고 하죠, 혹시 조작극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답니다."

"그런 그 맥스라는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변호사님."

"저는 우리가....... 에에....... 정상적인 항소 절차를 통해서도 남편 분을 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메이헌 씨는 기분이 상한 듯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남편이 무죄라고 생각하셨잖아요."

"그럼 당신은 알고 있었군요? 그렇군요."

"메이헌 씨, 전혀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저는 알고 있었어요....... 남편이 유죄라는 것을!"

로메인이 말했다.


푸른색 항아리의 비밀

그의 삼촌은 발작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간신히 소리쳤다.

"그 항아리. 그 푸른색 항아리! 그게 어떻게 됐다고?"

잭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삼촌을 바라보다가 그 뒤 삼촌의 입에서 홍수처럼 퍼부어진 말들이 마음에 새겨지자 사태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삼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단숨에 쏟아냈다.

"명나라 자기로, 하나밖에 없는 진기한 물건이고, 내 수집품 중 최고이며, 최소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데다, 미국의 백만장자 호겐하이머가 팔라고 제안까지 한, 세상에 다시없는 일품인데, 망할 놈, 내 청자를 어떻게 한 거냐?"

잭은 식당에서 달려 나갔다. 그는 라빙턴을 꼭 찾아야 했다. 사무실의 젊은 아가씨는 냉담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빙턴 박사님은 어젯밤 늦게 떠나셨어요. 자동차로요. 손님께 편지를 남기셨죠."

잭은 편지 겉봉을 찢어서 열었다. 간결하게 요점만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젊은이,

초자연적인 현상의 시대가 끝났을까? 아직은 아니겠지. 특히 새로운 과학 용어로 속임수를 썼을 때는 말일세. 펠리스와 병자 아버지, 그리고 내가 안부를 전하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해서 우리는 12시간 먼저 떠나네.

언제나 자네의 친구인

영혼의 의사,

앰브로즈 라빙턴


날개가 부르는 소리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아무튼 난 견딜 수가 없어.......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네......."

다시 버나드 셀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나라면 그 불구의 남자를 만나보겠네."

그가 충고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운하라니....... 놀랍군."

(중략)

그때 믿을 수 없을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청년이 균혀을 잃고 선로에 떨어진 것이다.......

수많은 생각이 해머의 머리에 동시에 떠올랐다. 버스에 치어서 축 늘어진 살덩이를 보았던 일과 "댁 탓이 아니야, 선생. 댁도 어쩔 수 없었어."라는 쉰 목소리가 하던 말. 그리고 이 생명은 구할 수 있으며, 만약 구한다면 그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이에는 아무도 없고 전동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전광석화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묘하게도 그는 침착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을 할 수 있엇다.

(중략)

해머는 재빨리 청년을 양팔로 들어올렸다. 자연스런 의협심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떨고 있는 육체는 희생을 요구하는 다른 세상의 초자연적 존재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그는 자신이 뛰어내린 플랫폼 위로 청년을 던졌다.......

그때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졌다. 물질세계는 더 이상 그의 자유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다. 잠시 동안 목양신의 기쁨에 찬 피리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점점 더 가까이 더 크게 다른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세차게 몰려오는 반가운 무수한 날개짓 소리가 다가와서...... 그를 에워쌌다.......


마지막 강신술

"내가 왜 영매를 걱정해야 되지? 난 내 아이를 원해."

(중략)

"이리 오렴, 내 딸."

마담 엑스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아이를 팔에 안았다. 커튼 뒤에서 몹시 괴로워하는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시몬느! 시몬느!"

라울이 부르짖었다.

그는 마담 엑스가 그의 옆을 쏜살같이 지나서 자물쇠를 열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커튼 뒤에는 아직도 소름끼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라울은 그런 비명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명 소리를 꼴록거리는 섬뜩한 소리로 이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고는 몸이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중략)

"이런! 피, 온통 피로 물들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서 엘리스가 떨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아씨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무슈, 무슨 일이 있엇던 거예요? 왜 아씨 몸이 오그라든 거죠? 어째서 아씨 키가 절반으로 줄어든 거예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SOS

"맥달란 양, 당신은 과거를 믿지 않지요. 하지만 나는 믿어요. 나는 이 집의 분위기를 믿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어쩌면 그가 꾸민 계획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앞으로 샤를로트 양의 안전을 위해서 이 두 개의 시험관을 보관해 둘 겁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SOS를 쓴 손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폴렌사 만의 사건

"배웅하러 나왔어요, 파커 파인 씨. 베티가 인사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베티와 저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정말 근사하게 해결하셨어요. 베티와 어머니도 사이가 좋아졌고요. 어머니를 속인 건 죄송스런 일이지만 워낙 까다로우셨잖아요. 아무튼 이제는 다 해결됐어요. 눈치채지 못하게 제가 이삼 일 더 괴로워하는 척만 하면 끝이죠.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베티도 저도."

"당신들 모두 행복하길 빌게요."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대다가 바질은 짐짓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저, 드 사라 양은 어디 있나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파커 파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힐긋 보았다.

"미안하지만 드 사라 양은 자고 있어요."

"아, 아쉽네요. 그래도 런던에서 이따금 만날 수 있겠지요."

"실은 내 일 때문에 드 사라 양은 곧장 미국으로 갈 거라서."

"그렇군요. 그럼, 전 그만 가 봐야겠네요......."

바질은 멍한 어조로 말했다. 파커 파인은 미소 지었다. 선시로 가는 길에 그는 마들렌의 선실 문을 두드렸다.

"기분은 어때? 괜찮은 거야? 우리의 젊은 친구가 다녀갔어. 예외 없이 가벼운 마들렌 병에 걸렸더군. 그 친구는 하루 이틀이면 회복할 게야. 자네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레가타 미스터리

"아니, 맞습니다. 그 일당의 세 번째 멤버가 로열 조지에서 임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어요. 휴일에는 임시 웨이터들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요. 어쩌면 그가 정식 웨이터를 매수해서 쉬게 하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무대가 준비된 겁니다. 이제 이브가 포인츠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내기를 거는 거예요. 그는 전날 밤에 했던 대로 다이아몬드를 돌ㄹ립니다. 웨이터들이 방에 들어오자 레던은 그들이 나갈 때까지 보석을 그대로 들고 있어요. 하지만 웨이터들이 나갈 때, 다이아본드도 함께 사라진 거예요. 피에트로가 들고 나간 접시 밑바닥에 약간의 추잉검으로 교묘하게 붙여서 말이에요. 그처럼 간단한 겁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제가 보석을 봤는 걸요."

"아니, 아니에요. 당신은 얼핏 보면 속을 만한 모조품을 본 거지요. 당신 말대로 스타인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않았어요. 이브는 그것을 떨어뜨리고서 유리잔도 떨어뜨린 뒤에 보석과 유리잔을 함께 힘껏 밟아서 깨뜨려버린 겁니다. 그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다이아몬드가 사라져 버린 거지요. 이제 이브와 레던은 누구라도 만족할 만큼 보석을 찾아볼 수 있게 된 겁니다."


할리퀸 티세트

마지막으로 퀸을 본 위후로 얼마나 지났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퀸이 '연인들의 길'이라고 불리는 오솔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본 바로 그날이었지? 그는 늘 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가능하다면 일 년에 두 번이라도. 하지만 바람뿐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

"여성이 유전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도 여성을 통해서 유전될 수는 있지. 릴리는 색맹이 아니었지만 릴리의 아들은 어쩌면 색맹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새터스웨이트, 티머시는 릴리의 아들이 아니잔항요. 롤리가 릴리의 아들이지요. 두 아이가 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죠. 동갑에다 머리 색깔도 같고. 하지만...... 뭐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지요."

"그랬지, 난 기억하지 못했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 닮은 점이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롤런드는 베릴의 아들일세. 사이몬이 재혼했을 당시에 저 애들은 둘 다 갓난아이였지 않나. 한 부인이 애기 둘을 보살피는 건 부담되는 일은 아닐 거네. 특히 두 아이 모두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면 말이네. 티머시가 릴리의 아들이고 롤런드는 베릴의 아들이네. 베릴과 크리스토퍼 이든의 아들이란 말이네. 그러니 그가 색맹이어야 할 이유가 없엇던거지. 정말이네. 난 확신하네!"

(중략)

그는 릴리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할리퀸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궁금해졋다. 그는 돌아서서 잔디밭을 가로질러 차탁자와 할리퀸 티세트, 그리고 탁자 너머에 앉아 있는 자신의 오랜 친구 톰 애디슨을 향해 걸어갔다. 베릴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도보톤 킹스본은 다시 안전해졋다.

잔디밭을 가로질러서 작은 검정개가 쏜살같이 달려왓다. 검정개는 새터스웨이트에게 다가오서 숨을 헐떡거리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검정개의 목걸이에 종잇조각이 감겨 잇었다. 새터스웨이트는 몸을 구부리고 그것을 떼어냇다. 종잇조각을 반반하게 펴서 보니 다양한 색갈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혀 잇었다.

 

축하합니다! 다음 번 만남을 기약하며.

H.Q.

 

"고맙다, 헤르메스."

새터스웨이트가 말햇다. 그는 검정개가 풀밭을 가로질러서, 그곳에 있다는 건 알지만 더 이상 자신이 볼 수 없는 두 사람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앗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강표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원제는 short story collection: agatha christie omnibus 2이다. 즉, 아가사 그리스티의 여러 단편을 모은 책인데, 아마도 단편마다 발표 시기가 전부 달라서 출판된 날짜는 따로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생전에 쓴 다양한 단편들 중 한 권으로 엮여 출간되지 못한 단편들을 모았다고 하는데, <푸아로 사건집> <열세가지 수수꼐끼> <쥐덫> <헤라클레스의 모험> <뮤스 가의 살인>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 <파커파인 사건집> <부부탐정>도 단편을 모은 책들이지만 출판 연도가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생전에 한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빛이 있는 동안>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크리스티 소설의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고, 미스터리와 로맨스, 스릴러 등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빛이 있는 동안>은 1997년에 출판된 작품으로,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모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책은 발표는 되었으나, 책으로 묶인 적이 없는 작품들을 모은 책일 것이다.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말도 안 되게 싸게 나온 리스터데일 경의 저택. 덕분에 성 빈센트 부인의 딸은 훌륭한 남자와 약혼하게 되고, 아들은 집사 퀜틴을 의심하는데, 결국 중년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게 된다.

 
필로멜 코티지

몇 천 파운드 유산을 받은 알릭스에게, 자존심 강한 남자친구 딕은 오히려 청혼을 망설이고, 친구의 집에서 제럴드를 만난 알릭스는 일주일만에 약혼한다. 그 후 꿈에서 딕이 찾아와 제럴드를 죽이며, 자신은 오히려 기뻐하며 딕에게 감사하는 꿈을 꾸는 알릭스. 그러던 중 제럴드의 방에서 신문기사를 발견하게 된다. 

 

기차를 탄 여자

기차에서 만난 의문의 여자. 카토니아 왕국의 대공비 아나스타시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대공비가 사랑하는 남자의 여동생. 어쨌든 조지 롤런드에게는 아름다우면서도 후작 아버지를 둔 여자와의 결혼과, 그로 인한 거부 삼촌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6펜스의 노래

크랩트리 양이 사망한다. 범인은 집안에 있던 사람. 충실한 하녀는 집안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라고 하고, 식구 중 한 숙녀는 십여년 전의 인연으로 왕이 임명한 칙선 변호사 에드워드를 찾아와 범인을 밝혀달라고 한다. 범인은 결국 하녀의 출소한 아들. <주머니 속의 호밀>의 그 마더구스의 노래가 여기에도 등장한다.


진짜 사나이, 에드워드 로빈슨

상식적이며 신중한 모드는 훌륭한 아내가 될 수 있겠지만, 때로 그녀 앞에서 짓눌린 지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로빈슨. 한 신문사에서 개최한 시합에서 1등을 한 상금으로 늘 꿈꾸던 차를 사지만, 그 차 때문에 모험에 휩싸이게 된다. 유명 인사의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한 목걸이 강도 소동.  24시간 후 모드를 만난 에드워드 로빈슨은 진짜 사나이가 되어 나타난다.


사고

앤터니 부인이었던 메로우든 부인. 앤터니는 '사고'로 사망했다. 메로우든 부인의 계부도 '사고'로 사망했다. 전직 경감인 에번스는 친구 헤이독 대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뛰어든다. 크리스티의 단편 중 가장 반전이 놀라웠던 작품.

 
제인은 구직 중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 금발에 푸른 눈, 170센티미터의 날씬한 몸매, 검은 눈썹과 속눈썹, 곧게 뻗은 코의 소유자로, 흉내를 잘 내고 불어를 할 줄 아는 아가씨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제인 클리브랜드. 오스트로바 왕국의 폴린 대공비의 대타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자신이 미국 여자 강도의 대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진짜 대공비가 파리에서 운전수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며 파렐 경감은 그녀를 안심시키고, 똑같아 보이지만 굽이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고 제인을 뒤쫓아온 남자는 화가가 되고 싶어 6년간 집을 떠났지만 결국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온 '신발 왕'의 아들. 이제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찾았다는 그. 결국 제인은 구직에 성공한다.


일요일의 열매

모퉁이에서 과일을 산 에드워드와 도로시. 체리 바구니 바닥에는 핏빛 붉은 돌들로 길게 이루어진 반짝이는 사슬이 나타나고, 신문에는 5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루비 목걸이가 분실되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경찰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순간 갈등하는 두 사람. 결국 하루가 지나 마음을 굳게 먹는데, 다음날 기사에 실린 루비 강도의 검거 소식. 그리고 같은 신문에 실린 기발한 광고 전략. 과일 바구니 쉰 개 중 하나당 모조 목걸이가 들어 있는 판매 방식이 매주 일요일마다 벌어지며, 목걸이는 해당 금액에 비하여 훌륭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크리스티는 럭키백 창시자?

  
이스트우드 씨의 어드벤처

소설가 이스트우드 씨는 오이의 미스터리로 글을 쓰려고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 주소를 불러주며 그쪽으로 와 달라고 하며 끊어버리는 여자. 잘못 걸려온 전화니까 무시해버릴듯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암호명은 오이라고 말한 탓에 혹시 어떤 계시같은 느낌이 들어 그곳으로 향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자마자 경찰 두 명이 들이닥치고, 이스트우드 씨는 여인을 안심시키고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밝히며 자택으로 데려가 수사를 허용한다. 한 사람이 이스트우드에게 스페인 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다른 사람은 자택에서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 일체를 약탈해 사라지고, 이윽고 다른 사람도 핑계를 대며 빠져나온다. 잠시 후 발가벗겨진 집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 이스트우드는 좌절하던 도중, 오이에서 스페인 숄로 소설의 소재를 바꾼 후, 재빠르게 타자를 쳐나가기 시작한다.


황금 공

부유한 삼촌으로부터 이제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다고 통보받는 조지. 친척에게 버림 받아 길거리로 나앉은지 여섯 시간 만에 연봉 2만 파운드를 얻어냈다고 당당하게 삼촌에게 통보한다. 아름답고 유명한 사교계 아가씨는 신랑감을 찾기 위해 자신의 저택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청년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던 것. 조지는 열한 번째 남자로, 유일하게 메리를 구해낸 남자. 손수레에서 파는 2펜스 바나나 한 개로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라자의 에메랄드

분수에 넘치도록 돈을 쓰게 부추긴 그레이스. 정작 제임스는 허름한 하숙집에 묵고 있으며 그레이스는 친구들과 호텔에서 묵고 있다. 3년 동안 사귀어 왔지만,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신실한 남자의 사랑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그레이스. 그곳에서 솝워스라는 남자와 어울리며 솝워스가의 여자들과 늘 몰려 다니는 그레이스. 제임스는 급한 김에 남의 탈의 막사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수영을 즐긴 후,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막사의 주인들이 돌아오는 통에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알고 보니 잘못 입은 옷. 거기에다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도난당한 에메랄드. 다시 그곳으로 가 바지를 조용히 바꿔 입으려다 경찰에게 적발되고, 그 사람이 진범임을 눈치챈 제임스는 기지를 부려 범인을 검거하고, 에드워드 경에게 대접을 받으며 에메랄드의 주인인 라자까지 만나게 된다.


백조의 노래

유명한 오페라 스타 폴라 나조르코프 부인.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그녀는 토스카를 고집하고, 상대남자는 식중독에 걸린 와중에 이제는 은퇴한 유명한 바리톤 브레온에게 대신 무대에 서줄 것을 부탁한다. 막이 오른 무대에서, 나조르코프는 전무후무한 연기를 펼치고,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같이 연기하고 있던 브레온을 칼로 찌른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머물던 브레온은 궁벽한 극장에서 토스카를 부르던 비앙카 카펠리를 보고 그녀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한다. 브레온은 비앙카를 원했지만 그녀는 애인에게 충실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애인을 구하기 위해 비앙카는 브레온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브레온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결국 애인이 사형당하고, 비앙카는 수도원에 들어간다. 바로 그녀가 나조르코프였던 것. 그야말로 백조의 노래. 나조르코프는 서른 해의 무대 생활을 되돌아보며 더이상 토스카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활짝 핀 목련 꽃

빈센트 이스턴은 시어도라 다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도피 중 남편의 회사가 위기 상황이라는 기사를 보고 시어도라는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오고, 자신을 파멸시킬 서류를 빈센트가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남편에게 듣고 다시 빈센트에게로 간다. 서류를 받고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후, 이제는 정말 그와 끝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으로 돌아온 시어도라. 문득 남편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고 집을 나온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니면, 찰나의 시간이었을까? 창문 밖에서 뭔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활짝 핀 목련 꽃과 같은 그녀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까지의 이야기. 


강아지와 함께

강아지 때문에 좋은 기회도 잃고 경멸하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조이스. 강아지가 죽고 나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필요도 없어지고 놓쳐야 할 것 같던 기회도 얻게 된다.

재봉사의 인형

시빌과 앨리시어는 맞춤옷가게를 동업한다. 어느 날 어느 경로로 생긴지 모르는 인형이 가게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늑미을 받게 된다. 불쾌감을 느낀 앨리시어는 창밖으로 인형을 던져 버리고, 한 소녀가 그 인형을 집어들며 사랑이 필요한 이 인형을 자신이 사랑해 주겠다며 안고 간다.


희미한 거울 속

친구 닐의 집에 놀러갔다가 거울 속에서 한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는 환영을 보게 되고, 그들은 닐의 여동생 실비아와 그녀의 약혼자 찰스임을 알게 된다. 실비아는 경고를 받아들여 약혼을 파기하고, 전쟁으로 닐과 찰스는 사망한다. 종전 후 실비아와 결혼하고, 무섭게 질투에 시달리던 도중, 실비아는 예전의 그 집으로 가버리고, 그 뒤를 쫓아가다가 자신이 거울 속에서 봤던 환영을 재현하고 만다. 순간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이후 질투심은 없어졌으며, 부부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다지며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완전판) - 운명의 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천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부부도 이름을 한두 가지 생각해 보았지요. 그런데 비어트리스가 그러는데 아가씨는 전에 이 마을에 살던 메리 조던이라는 사람을 안다고요?"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전쟁 무렵의 일이죠. 아니, 지난번 전쟁 말고요.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체펠린 비행선이 날아왔을 때의 전쟁 말이에요."

"체펠린에 대해서라면 나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터펜스가 말했다.

"1915년인가 1916년에 런던을 공습했다더군요."

"내가 어느 날 작은 할머니와 함께 육해군 매점에 가 있는데 공습경보가 울리더군."

"밤에 날아오는 때도 있었다던데요? 꽤 무서웠겠어요."

"글쎄,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어요. 모두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하지만 저번 세계대전 때의 비행 폭탄보다는 덜 무서웠지요. 그것은 우리가 달아나는 곳은 어디든 뒤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밤마다 지하철 역에서 지내곤 했다면서요? 런던에 친구가 있었는데 밤이면 지하철 역에 머물렀다더군요. 워렌 가에 있는 것 말예요. 모두들 자기가 찾아갈 역을 정해 놓고 있었답니다."

"나는 이번 대전 중에는 런던에 있지 않았어요. 밤새 지하철 역에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데."

터펜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니라는 이 친구는 아주 재미있었다고 했어요. 역에서 한사람씩 사용하는 계단이 정해져 있었대요. 그 계단에서 잠도 자고 샌드위치도 먹고 함께 놀고 얘기도 나눴대요. 밤새 그런 식으로 재미있게 보냈대요. 지하철도 아침까지 운행되었고요. 제 친구는 전쟁이 끝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더래요."

"어쨌든 1914년에는 비행 폭탄 같은 건 없었어요. 체펠린 비행선 뿐이었지."

이미 체펠린 같은 것은 그웬다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다.

 

1973년에 나온 소설로,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이다. 1922년의 <비밀결사>, 1929년의 <부부탐정> 1941년의 <N 또는 M>, 1968년의 <엄지손가락의 아픔>을 이은 소설로, 이제는 70대가 되고 손자, 손녀까지 둔 노부부로, 한적한 마을로 막 이주한 상태이다. <비밀결사>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였다. 토미와 터펜스가 만나게 된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군인과 간호사로 만난 것이다. 정보부에서 일하며 국가와 국가 사이의 첩보전까지 확대되었던 <부부탐정>을 지나 <N 또는 M>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겪었고, <엄지손가락의 아픔>에서는 전쟁이 아닌 개인적인 사건을 겪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영화처럼 생각하는 세대와의 대화는, 이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겪어냈는지 한순간에 느끼게 한다.

 

"할로케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지? 정말 스파이와 관련된 일이었나?"

"사실 워낙 옛날 일이라서 나도 그다지 잘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세. 그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 나무랄 데 없는 젊고 우수한 해군 장교에다 꼭 영국인 같았어.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고용되어 있었던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독일인이었던 것 같아.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야. 맞아, 그게 틀림없어."

"그 사건에는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메리 조던인가 하는 여자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군.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네. 신문에도 났는데 아마 그 남자 아내라고 생각되네. 아까 말한 그 해군 장교 말일세. 그 여자가 러시아 사람들과 접촉해서...... 아니, 그건 그 뒤에 있었던 일이지. 자칫하면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모두 비슷비슷한 이야기라서 말일세.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의 수입이 넉넉지 못하다, 즉, 자기 실수입이 넉넉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아니, 그런데 이 사람아! 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캐내려고 하나? 이제 와서 그게 자네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 자네는 옛날 루시타니아 호에 탔다든가, 루시타니아 호와 함께 가라앉았다든가 하는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권 『비밀결사』의 내용-옮긴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사건에 자네나 자네 부인이 말려들었지?"

"둘 다 말려들었지만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네."

"그때도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지 않았나? 제인 피시인가 하는 여자, 아니 제인 왜일이었던가?"

"제인 핀이야."

"그 여자는 지금 어디서 사나?"

"미국 사람과 결혼했다네."

"흠, 그거 잘됐군. 옛날 친구들과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항상 이야기에 열을 올리게 된단 말이야. 옛날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녀석들이 죽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더 놀라기도 하지. 그러니 참 까다로운 세상이야."

 

머튼 촙이라는 별명을 지닌, 토미의 과거 동료와 토미와의 대화이다. 예전에 빨강 머리 톰이라고 불리던 토미는 이제 백발의 톰이 되어 버린 상태로 최근에 이주한 할로케이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와 나눈다. 머튼 촙이란 양의 갈빗살을 가리키는 단어로,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구레나룻을 뜻하기도 한다고 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제인과 그녀의 부자 사촌, 그리고 토미 베레스퍼드와 프루던스 카울리는 4각관계였을 것이다. 잠깐 서로 엇갈려서 끌리는 듯 했지만, 결국 로맨스는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미국으로 건너간 제인 핀과 그녀의 남편의 이야기 또한 토미와 터펜스 못지 않는 장대한 스토리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단시간 내에 크리스티의 전집을 읽고 있기 때문에 수십년의 세월을 한 번에 느끼게 되어서 좀 아찔했지만, 오랫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며 그녀와 함께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희 내외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렇겠죠. 저도 압니다. 전기 기사가 마룻바닥을 온통 차지하고 여기 저기 구멍을 뚫어 대지요. 그러면 거기에 발이 빠져서......."

"전에 살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책을 저희한테 팔고 갔습니다. 아동용 도서가 많았는데 정말 종류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헨티(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년 위주의 모험 역사 소설 작가-옮긴이)라든가 그런 작가들의 작품 말입니다."

"기억 나네요. 헨티의 작품이라면 어릴 때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읽던 책 속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글자 밑에 그어진 줄을 이어나가다 보니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흠,기대가 되는군요. 엉뚱한 이야기는 언제나 듣고 싶어지더군요."

"이런 문장이 되는 겁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범인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흥미롭군요. 이런 건 처음인데요. 틀림없이 그런 문장이었습니까?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고요? 누가 그렇게 적어 놓았죠?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있었습니까?"

"초등학생 정도의 사내아이 같습니다. 파킨슨이 그 일가의 성입니다. 그 일가가 저희가 이사 간 집에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내아이도 아마 파킨슨 집안의 한 사람이겠지요. 알렉산더 파킨슨! 어쨌든 지금 그 아이는 그 지방의 교회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파킨슨이라? 잠깐, 생각 좀 해 봅시다. 사건에 관련된 이름 중에 파킨슨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저희 내외는 메리 조던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쪽은 당신의 전문 분야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정말 묘한 이야기로군요. 혹시 메리 조던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고작 지금으로 말하자면 오페어 걸이거나 가정 교사였다고 알려 준 사람이 있었지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맘젤이나 프로라인이라고 불렸다는 정도였죠. 완전히 두 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녀의 사망 원인은 뭐죠?"

"누군가가 디기탈리스 잎을 시금치와 함께 정원에서 모르고 뜯어 와서 그것을 먹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정도로는 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요. 그 정도로는 죽지 않지요. 하지만 치사량의 디기탈리스 알칼로이드를 커피나 식전에 마시는 칵테일에 넣어 두고 그것을 메리 조던이 마시도록 했다면 디기탈리스 잎 때문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알렉산더 파커인가 하는 학생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는 거죠? 그밖에 알게 된 것 없습니까? 언제적 일이죠? 2차 대전, 1차 대전, 아니면 그보다 앞서 일어난 일입니까?"

"그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독일 스파이였던 모양입니다."

"그 사건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큰 소란을 일으켰죠. 1914년 이전에 영국에서 일했던 독일인은 모두 스파이라고들 했습니다. 사건에 가담한 영국인 장교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죠. 저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을 유심히 살핍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군요. 최근에는 기삿거리도 되지 않죠. 사건 기록이 공개되어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기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는 모두 개략적인 것이지요."

"예, 그럴 테지요. 그 사건은 그 무렵 도난당한 잠수함 기밀과 관련이 있었지요. 아니, 비행기에 관한 기사도 있었지. 이쪽 사건의 기사도 꽤 많았어요. 그런 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죠. 하지만 다른 사정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면도 있었지요. 유명한 정치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어요. 대중으로부터 정말 청렴결백한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 말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청렴결백이라니 얼미도 없는 소리죠. 그러보 보니 2차 대전 무렵이 생각나는군요. 세상 소문과는 반대로 청렴결백한 면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이 부근에서 살았지요. 해안 쪽에 방갈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봉자를 잔뜩 길어서는 히틀러를 추켜세웠지요. 이 나라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밖에 없다면서 말입니다. 분명 그 녀석은 고결한 인물로 보였지요. 아주 훌륭한 뜻을 품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가난, 억압, 부정 같은 것들을 근절하자고 소리 높여 외쳐댔습니다. 파시즘은 아니라고 하면서 실은 파시즘의 기수였던 것이죠.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코를 위시한 그 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변을 토하고 다닌 무솔리니도 물론 있었죠. 전쟁 직전에는 언제나 많은 간접적인 원인이 있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일 말입니다."

"모르시는 게 없는 것 같군요. 이런 말씀 드리면 무례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을 만나면 사실 저는 몹시 흥분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종종 그런 일들에 관여했습니다. 원인이나 배경이 되는 문제들 말입니다. 귀를 열고 있으면 많은 얘기를 듣게 되지요.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 많은 것을 아는 옛친구들한테서도 얘기를 듣게 되죠. 당신도 그런 친구를 찾아 나설 생각이겠죠?"

"예, 실은 저도 옛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옛친구들과 만나곤 하니까요. 그러는 가운데 많은 얘기를 듣게 되죠. 그때까지는 한데 묶어서 생각지 않았던 이야기도 다시 들어보게 되면 아주 흥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예, 이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건과 부딪치다니 재미있군요."

"문제는 그걸 나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발을 들여 놓았는지도 모르지요. 오래 전부터 탐내던 집도 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집을 손보고 나서 정원을 꾸며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 다시는 사건이나 그런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지 호기심에서 이러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알고 싶은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여기에 어떤 목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해 봐야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로빈슨 씨와 토미의 대화이다. 이사한 집에서 발견한 의문의 메시지를 보고 부부는 각자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다. 터펜스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토미는 옛 동료들을 수소문한다. 로빈슨 씨는 이쪽 분야에서 일급 인물로, 그가 토미의 지인의 딸의 대부인 관계로 그를 만나게 된다.

 

"응, 그러니까 모두들 나를 찾는 것 아닌가? 연기로 숨이 막히니 어쩌니 군소리를 해 가면서도 나를 찾아오지. 그건, 그래 그 무렵이었어. 바로 그 프랑크푸르트 일당의 사건 무렵이었어.(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권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의 내용-옮긴이) 우리는 그것을 겨우 막아냈지. 사건의 배후 인물을 밝혀내어 겨우 막았던 것일세. 이번 경우에도 누군가가, 그렇다고 한 사람은 아니야. 여러 사람이 배후에 있을 걸세. 설령 배후 인물을 밝혀낼 수 없다고 해도 일의 경위는 알 수 있겠지."

 

파이커웨이 대령과의 면담이다. 로빈슨 씨도, 파이커웨이 대령도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인 1970년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에서 활약한 인물로 이 소설에 나타난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히틀러가 사망한지 25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망령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티의 심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소설에도 그 기조가 이어진다.

 

"메리 조던?"

"그래. 그 일 때문이었어."

"나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대체 현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과거가 어떻다는 건가요? 아무 관계가 없어야 마땅해야. 지금 와서......."

"과거는 현재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야? 하지만 관계가 있어. 틀림없이 잇지. 생각지도 못할 묘한 곳이나, 설마 하고 생각할 그런 곳에서 말이야."

"과거에 원인을 두고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기다란 사슬 같은 것이지. 당신도 가지고 있잖아. 틈새가 있고 군데군데 구슬이 달려 있는 것."

"제인 핀 사건 같은 거로군요. 우리가 젊어서 모험이 하고 싶었을 때 원하던 대로 모험을 하게 된 그 제인 핀 사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모험을 했었지. 가끔 옛날 모험을 되돌아보면 둘 다 용케 목숨을 부지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또 있어요. 생각 안 나요? 둘이서 손을 맞잡고 사립 탐정 흉내를 내던 일 말이에요."

"응, 그건 재미있었지. 당신, 기억 나? 왜, 그때......?"

"아니, 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건 사양하겠어요. 뭐 발판으로라면 또 모르지만. 정말이에요. 하지만 여하튼 그건 좋은 연습은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있었죠."

"그래, 블렌킨솝 부인, 맞아?"

터펜스는 웃었다.

"네, 블렌킨소프 부인이에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당신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봤던 일은 잊혀지지도 않아요."

"잘도 그런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지, 터펜스. 장롱 뒤인가 하는 곳에 숨어들어 가서 나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블렌킨솝 부인이라고요."

터펜스는 다시 웃었다.

"N 또는 M, 그리고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잖아요."

"하지만 설마......."

토미는 잠깐 주저했다.

"설마 그런 것들이 이번 사건의 발판이 되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어떤 뜻으로는 발판이 되는 거지요. 로빈슨 씨도 그런 옛날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당신 동료 중 한 사람이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내 동료 중 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 일로 완전히 사정이 바뀌고 말았어요. 아이작 말이에요. 그가 살해당했잖아요? 머리를 얻어맞고, 우리 집 정원에서요."

"설마, 그 일과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점을 나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지금부터는 단순한 범죄 사건을 조사한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과거에 대해 조사하고 과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죽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야 해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작 영감이 죽은 것을 말하고 있는 거 말예요."

 

설령 메리 조던과 알렉산더 파킨슨의 일에 음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을 때쯤 부부의 정원일을 도와주던 노인이 살해된다. 여기까지 소설이 도달하면 크리스티 특유의, 과거의 죄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로 그런 스토리로 연결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건은 너무나 쉽게 풀려버려 맥이 빠진다. 1973년 <운명의 문> 이후로 1975년 <커튼>, 1976년 <잠자는 살인>이 나왔지만, 뒤의 두 소설은 사실 몇 십년 전에 미리 쓴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 이 소설일 것이다. 소설이 다소 헐거운 것에 불만을 표하고 싶다가도 이 소설을 쓸 당시의 크리스티의 나이가 83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마을은 깨끗해졌습니다. 벌집이 완전히 제거되었거든요. 조용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마을로 되돌아간 겁니다. 녀석들은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 부근으로 본부를 옮겼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으니까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리스핀이 말했다.

터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제 딸 데보라가 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따금 묵어 가곤 하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N 또는 M' 사건이 있은 뒤로 두 분은 그 사건과 관련된 아이를 양녀로 삼으셨죠? 그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인가 하는 동화책을 가지고 있던 아이 말입니다."

"베티 말이에요? 네, 대학에서 성적이 좋아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고 있어요. 그런 일에 열중하는 젊은이가 꽤 많은가 봐요. 베티는 정말 귀여워요. 아주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요."

로빈슨은 목청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건배 하시죠. 베레스퍼드 부부의 조국에 대한 공로에 감사하는 뜻에서."

일동은 한마음이 되어서 잔을 비웠다.

"한 번 더 건배하죠. 이번에는 한니발을 위해서."

로빈슨이 말했다.

"자, 한니발!"

터펜스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분들이 너를 위해 건배를 해주시는 거란다. 이건 기사의 작위나 훈장을 받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야. 전 얼마 전에 스탠리 웨이먼의 『한니발 백작』을 읽었답니다."

"저도 어릴 적에 그 책을 읽었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내 형에게 상처를 주는 자는 타반에게 상처 주는 자다.'라고 했던가요? 파이커웨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에게 작위 수여식을 하고 싶은데."

앞으로 한 발짝 나선 한니발을 로빈슨이 관례에 따라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자 개는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지금부터 그대를 우리 왕국의 백작에 봉하노라."

"한니발 백작, 멋지지 않니?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니?"

터펜스가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주머니 속의 호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사일 가능성은 눈꼽만큼도 없지."

번스도프 선생은 호언장담하더니 "물론 비공시적인 이야기지만." 하면서 뒤늦게 몸을 사렸다.

"예, 예, 이해합니다. 그런데 독살인가요?"

"응, 게다가...... 이건 정말 비공식적인 이야기인데......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해....... 어떤 독극물이 쓰였는지 내기를 해도 되겠어."

"그래요?"

"탁신이야, 이 친구야. 탁신이라고."

"탁신? 그런 독극물은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그래서 아주 특이한 사건인 거야. 기분 좋을 만큼 특이한 사건이라고. 3~4주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면 나도 몰랐을 거야.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들 몇 명이 주목 열매를 따가 그걸로 차를 끓였거든."

"거기 들어 있는 겁니까? 주목 열매에?"

"열매 아니면 잎에 들었지. 아주 유독해. 물론 알칼리성이고. 이 독극물이 사용된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 정말 흥미진진하고 특이한 사건 아닌가....... 허구한 날 제초제만 다루다 보면 얼마나 지겨운지, 닐 자네는 모를 거야. 탁신은 고마운 선물이지. 물론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절대 다른 데 옮기지는 말아 줘. 하지만 거의 확실해. 자네한테도 흥미진진한 사건이 되겠군. 일상의 변화 아닌가?"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는 건가요? 희생자만 빼고?"

"그렇지, 그렇지. 희생자만 딱하게 됐지. 아주 운이 안 좋았던 거야."

번스도프 선생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나요?"

"글쎄? 자네 부하 직원 하나가 공책을 들고 옆에 앉아 있었으니 자세한 건 그 사람한테 듣도록 해. 차가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마신 차 속에 뭐가 들어 있었다고 말이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닐 경위는 매력적인 그로브너 양이 차를 끓인 다음, 그 속에 주목열매를 넣는 장면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하지만 이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게 금세 효과가 나타날 수 없거든. 듣기로는 차를 마시자마자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새 효과가 나타나는 독극물은 거의 없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게 청산가리라고...... 순수 니코틴인데......."

"그런데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고요?"

"이봐. 그랬다면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거야.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어. 스트리크닌인가 의심하긴 했는데, 스트리크닌의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경련을 일으키지 않아.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탁신이라는데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한 시간? 혹은 두세 시간? 죽은 사람을 보아하니 대식가였던 것 같던데, 만약 아침을 푸짐하게 먹었다면 그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겠지."

"아침이라......."

닐 경위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예. 아침일 것 같네요."

"범인과의 아침 식사였던 셈이지."

 

부유한 금융 회사 사장이 출근 후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사망한다. 죽기 전 그는 차가 이상하다는 말을 남겼고, 사인은 탁신으로 인한 독살. 현재 보톡스에 쓰이는 그 독극물이다.

 

"예. 그런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입고 있는 양복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봤거든요. 손수건, 열쇠, 잔돈, 지갑. 여기까지는 평범한데, 특이한 게 한 가지 있었어요.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곡식이 들어 있는 겁니다."

"곡식?"

"예."

"곡식이라니? 옥수수나 보리, 뭐 그런 거 말인가?"

"예,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호밀 같았는데, 제법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호밀>이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는, 호밀밭 근처에서 살해당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범인의 눈속임이었다

 

닐 경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약 10초 동안 마플 양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처음에는 이 노부인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지빠귀요?"

마플 양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빠귀."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가사를 읊었다.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이럴 수가."

닐 경위가 말했다.

"딱 들어맞지 않나요? 그 사람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게 호밀 맞지요? 어느 신문에서 그러던데. 다른 신문에서는 그냥 곡식이었다고 했으니 쌀일 수도 있고, 옥수수일 수도 있지만, 호밀이었지요?"

닐 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마플 양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렉스 포티스큐. 렉스는 라틴어로 왕이라는 뜻이지요. 왕은 보물 창고에서, 왕비인 포티스큐 부인은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다가....... 그래서 범인이 가엾은 글래디스의 코를 빨래집게로 집은 거랍니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던 마더 구스의 노래가 또 한 번 등장한다. 미친 사람의 소행인지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상황. 부자 사장과 그의 아내가 사망하였고, 동기만 놓고 보면 두 아들 부부와 딸에게로 좁혀진다.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닐은 등이 똑바르고 조그만 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예전보다 조금 더 주의 깊게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여자 같았다. 그리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불안해하고, 불만이 많고, 소견이 좁아 보이지만, 간호사라는 자기 직업 세계에서는 유능하고 능숙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잣집 도련님과의 결혼을 통해 여유를 얻었지만, 그 여우가 만족을 선물하지는 못했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달짝지근한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겠지만, 경위는 렉스 포티스큐가 죽은 날 밤에 소식을 듣고 몹시 흥분하던 퍼시벌 부인의 모습이 생각났고, 그 모습에서 잔인한 기쁨을 포착했다기보다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권태라는 사막을 보았다. 그가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아래로 내리깔렸다.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긷 하고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번째 며느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 남자가 돈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나요?"

"예. 할머님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가요?"

"장담하지만 돈 많은 철물점 딸, 매리언 베이츠와 결혼한 엘리스 같겠죠. 매리언은 아주 평범한 아가씨고 엘리스한테 홀딱 반했는데, 의외로 잘 살았어요. 엘리스나 이 제럴드 라이트 같은 청년은 사랑한답시고 가난한 집 아가씨와 결혼했을 때 정말 꼴불견이 된답니다. 그런 짓을 저질러다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부인한테 화풀이를 하거든요. 하지만 돈 많은 아가씨하고 결혼하면 부인을 계속 대접해 주지요."

 

가난한 남자와 사귀고 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대화이다. 놀랍게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사실상 공범인줄도 모르고 이용만 당한 사람까지 죽었기 때문에 범인을 검거하기는 힘든 상황. 이 때 책 마지막에서 의외의 단서가 나온다.

 

추신: 버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같이 보내요. 행락지에서 어떤 남자가 찍어서 준 거예요. 버트는 저한테 이 사진이 있는 걸 몰라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마님도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은 입술을 오므리고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플 양의 시선이 홀딱 반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글래디스의 가엾은 얼굴에서 옆 사람 얼굴로 넘어갔다. 미소를 짓고 있는 랜스 포티스큐의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애처로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연민의 뒤를 이어 분노가 치밀었다. 잔인한 살인범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다 연민과 분노가 잦아들면서 승리의 기쁨이 용솟음쳤다. 턱뼈 일부분과 이빨 몇 개를 가지고 멸종된 생물은 복원하는 데 성공한 전문가가 느낌직한 승리의 기쁨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완전판) - 잠자는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6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크리스티 사후에 출간되었기에, 마플 양 최후의 소설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1973년에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미 1962년 소설 <깨어진 거울>에서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또 세인트메리미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웨스트 부부가 하나의 사건만이 그곳에서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목사관의 살인>과 <서재의 시체> 사이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1930년에서 1942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이 소설이 제때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크리스티 스스로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독자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1975년에 나온 <커튼>이 실제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여진 이야기이며, 푸아로의 죽음을 다루었기에 출판될 시기를 조절한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1976년에 사망한 크리스티가 1975년에 <커튼>을 출판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커튼>은 크리스티가 제2차세계대전 중 집필했고, 폭격을 피해 금고에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녀에게 몇 년만 더 허락되었더라면, 마플 양에게도 비슷한 결말이 주어졌을 수 있을 것이리라. 어쨌든 1971년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이었기에, 이 소설이 1976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195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날카로우며, 원숙했다.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는 자일스의 젊은 아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그웬다가 그들을 보고 내심 좀 놀랐다 해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선 레이먼드는 외모가 괴상했다. 안 그래도 활개 치는 까마귀 같은 인상인데,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솟았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그의 이해하기 힘든 말버릇 때문에 그웬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할 뿐이었다.

그와 조앤은 둘이서 꼭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학구적인 분위기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웬다에겐 정말 낯선 체험이었다.

"그웬다, 우리와 같이 쇼를 한두 개 보러 갔다 오죠."

레이먼드가 말했다. 먼 길을 온 그웬다가 홍차였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진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웬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늘 밤에는 새들러즈 웰스에서 발레를 보고, 내일은 우리의 놀라운 능력자 제인 아주머니의 생일 축하 파티를 합시다. 길더그 주연의 「말피 공작부인」을 보러 가자고요. 그리고 금요일엔 「그들은 발 없이 걷는다」를 봐야 해요. 러시아 번역 작품인데, 지난 20년간의 공연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요. 위트모어 극장으로 가는 겁니다."

 

주인공인 그웬다는 신혼 부부로, 남편인 자일스는 웨스트 부부와 사촌 관계이다. 새로 이사한 집인데 마치 자신이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때문에, 충동적으로 웨스트 부부를 방문하게 되고, 함께 연극을 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온다. 마플 양은 특유의 따뜻한 태도로 그웬다를 위로하며, 그웬다는 마플 양에게 처음 힐사이드 집을 보았을 때부터 시작해, 서서히 당혹감을 느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나무를 새로 심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정원 길, 막아놓았던 문, 본 적도 없는데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했던 그대로였던 벽지, 그리고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살인 사건까지. 그웬다는 마플 양의 조언을 받아 죽은 어머니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웬다의 부모가 인도에서 만나 결혼하였고, 그웬다가 2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는 영국으로 그웬다를 데리고 와 재혼하였고, 1년 후 그녀와도 헤어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환각이라고 느꼈던 것은 실제 그웬다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사실들로, 아버지는 오래 전에 사망했기에 살인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을 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일스와 그웬다는 마플 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년 전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정의가 잘못 실현된 경우는 없었을까요? 이 범죄의 결과로 고통 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겁니까?"

"제가 아는 한은 없었어요."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 사건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살인자는 반드시 범행을 되풀이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한 번 죄를 저지르고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절대 다시 목을 빼지 않고 조심하는 범죄자도 있지요. 그런 자가 그 뒤 내내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으니까요. 세상에 여러 가지 형태의 징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만은 모든 일이 평화로웠겠지요. 마들렌 스미스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스미스와 보든은 비록 유죄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여자들 둘 다 유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름을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범행을 되풀이하지 않았지요. 한 번의 범행만으로 바라던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위협을 느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말씀하신 살인자가 바로 그런 종류의 범죄자일 걸로 생각합니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요. 그는 죄를 저지르고 보기 좋게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았지요. 하지만 누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돌아다닌다면? 쿡쿡 찌르고, 쑤시고, 파내어 결국엔 목표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살인범의 행동은 어떠할까요? 그저 빙그레 웃고 앉아서 수색이 점점 가까워 오기를 기다릴까요? 아니죠. 저는 무슨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그저 내벼려 두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당시 영국에도 공소시효가 있었을지, 있었다면 몇 년 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도 함께. 우리나라 공소시효는 15년이라 이미 영화 개봉 당시 공소시효까지 4년도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2006년을 기점으로 7차까지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이 개정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발생한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당신의 가엾은 아이인가요?"(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엄지손가락의 아픔』에도 등장하는 말-옮긴이)

그웬다는 뒤로 팔짝 뛸 뻔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 난 혹시나 하고."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마셨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10시 30분이에요. 항상 10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지요. 특이하기도 하지."

그녀는 또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벽난로 뒤랍니다. 하지만 내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말아요." (이 역시 『엄지손가락의 아픔』의 패러디-옮긴이)

 

1968년 출판된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출판시기로는 이 책보다 먼저지만, 사실 이 책이 훨씬 더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추측되기에 여기에서 잠깐 사용했던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 <엄지손가락의 아픔> 에 크리스티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의 말과는 정반대일 것 같다. 그곳에서도 요양원에 부부가 방문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부부가 정신 병원을 방문한다. 그웬다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 그웬다는 자신이 본 살인 사건에서 목을 졸린 여자는 새어머니이며, 남자는 아버지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도, 새어머니의 배다른 오빠인 의사도, 아버지가 살인자는 아니며 다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살인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범인일까? 피살된 새어머니와 애정 관계가 있었던 세 명의 남자로 용의자는 좁혀지지만,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아버지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새어머니의 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마치 크리스티 자신을 닮은 듯한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