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친구와 선배들의 조언도 지겨울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거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는 영화 <아일랜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누구냐고?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간절히 찾는 사람이지. 신은 그때 우릴 외면하는 사람이고.”

그래도 신이 공평해 보일 때가 있다. 안 보는 척하지만 시큰둥하게 하늘 위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재채기를 하듯 선행을 베푼다.

옛다. 미운 놈 떡 하나!




나는 종종 패션계 사람들의 속 안이 공갈빵 같다고 생각한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나라 보험 회사들은 전부 다 망할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부도 수표에 가깝다.




이곳에서 비밀이란 없다. 화장실에서도 말은 냄새처럼 퍼지게 되어 있다. 나쁜 소문일수록 퍼지는 속도는 빠르다. 소문은 변기 안의 지저분한 배설물을 처리하듯 버튼 하나로 간단히 내려버릴 수 없다.




편집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라.

결국 스테이크보단 제대로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었다.




내가 닥터 레스토랑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는 건 그가 누구보다 정직했기 때문이다. 잘난 수식어와 히스테릭한 공격들로 레스토랑을 초토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들에선 자신의 시선과 해석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돈이라고?

천만에!

21세기엔 돈이 시간이다.

돈은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해준다. 내가 돈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바로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에 늘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닥터 레스토랑이 정확한 비평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자기 돈을 주고 음식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취재나, 협찬이나, 요청이 아닌 자기 돈을 낸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通俗’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울고 웃게 만드는 힘, 내 꿈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란 믿음, 세상이 어쩌면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드라마가 가진 통속의 힘이라고 믿는다.




갈등을 다루지 않는 것은 드라마라고 할 수 없다!

소설이나 시와 달리 스무 살짜리 천재 드라마 작가가 나오지 않는 건 드라마가 갈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갈등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증폭된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패션잡지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건 앞으로 내가 쓸 드라마의 자산이 될 만한 갈등들이야! 이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저런 괴상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겠어. 잊지 말자. 그래야 나중에 내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우에게 저 동작을 설명해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것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남들은 고사하고 내 갈등 상황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신은 어떻게 써야 하고 클라이맥스의 갈등은 어떻게 폭발시켜야 할까.

마지막 엔딩은?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식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이곳에선 소문이 늘 사실처럼 유통된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신문의 ‘바로잡습니다’ 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은 절대 어린 기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관리자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울고 있는 어린애를 자를지언정 회사가 자진해서 윗선을 자르는 일은 결코 없다. ‘하극상’이란 단어는 회사 밖에나 있는 말이다. 그 애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진해서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다.




누군가에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이 고향이겠지만, 내겐 현대식 백화점이 세워지고, 새로 개통한 지하철이 들어서던 그곳이 고향이었다. 금강산의 비경秘境보다, 벚꽃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단지 풍경에서 더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나 같은 아이들은 놀이터와 주변 상가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유년기를 보낸다. 내게 압구정동은 시인 유하가 ‘바람 부는 날엔 반드시 가야 한다’고 노래하던 욕망의 집착지가 아니었다.




진정한 망각이란, 결국 그 단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미래를 준비한다고?

그건 마치 결혼과 함께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리 같다. 성대한 결혼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커플들의 심리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안전이 최고?




하긴 식감이 발달하지 않은 20대에 무슨 음식 평을 쓴단 말인가. 라면 끓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엉터리들이 온갖 재료들이 섞이고, 삭아 결국엔 전혀 다르게 통합되는 요리의 세계에 대해 알 리 없다. 어떤 재료들로 소스가 만들어지는지, 뼛속에서 어떻게 국물이 우러나고, 좋은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에서 얼마만큼의 글루텐을 뽑아내는지 알지 못한다면 좋은 음식 평론은 불가능하다. 고작 남들이 써놓은 칼럼을 자기 식대로 변형한 가짜 정보들만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백발의 현장 기자가 거의 없다.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관리자가 되어 후배들을 닦달하거나, 광고주들과 씨름하고, 조직의 윗선들에게 아부하는 데 현장의 노하우를 전부 다 쓴다. 지금이 나이와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가 중요시되는 시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엔 역설적으로 느림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한 시간이나 하루가 아닌 한 달씩 뭉텅이로 사라지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병원에선 천천히 흘러갔다. 시간이 침대 위에, 창가 옆에 자꾸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었다. 문장이 아닌 내 삶에 단단히 밑줄을 그으며, 몇 가지 단어 위엔 방점을 찍었다. 내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혁신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그저 조용히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란 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탔던 회전목마같이 돌고 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포개지고 겹쳐져서 어떤 것이 과거였고, 현재이며, 미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서늘한 눈빛에 질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런 눈빛엔 언제나 솔직함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산다. 이게 옳은 일일까. 이런 삶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패션지 기자들이 사용하는 ‘시크’, ‘엣지’, ‘잇 백’,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이 일상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이런 외국어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패션지를 고작 명품광고나 싣는 한심한 된장녀 잡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렵게 섭외한 소설가 폴 오스터나 샐먼 루시디의 10페이지짜리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한들, 사람들이 그 기사의 진정성을 믿어줄까?

하지만 누군가는 내가 만든 잡지를 보며 꿈을 꾸고 위안을 얻는다. 잡지의 독창적인 화보나 훌륭한 기사를 통해 누군가는 패션디자이너로서의 희망을 다지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이상을 엿본다. 내가 하는 일은 디테일과 꿈을 파는 일이다. 더 이상 무얼 바란단 말인가.




2호선 ‘서울대 입구역’이 서울대 입구가 아니듯, 7호선 ‘청담역’ 역시 진짜 청담동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명명해 놓은 것들 중, 그렇지 않은 건 얼마나 될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들을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에 필요한 사람을 구분하는 건 비즈니스에서 아주 중요한 거야. 대부분은 그걸 구분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지. 그게 우리 여자들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해. 바로 너 같은 사람의 단점이지.”




어느 아티스트가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감동받았었다. 바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의 고귀함 때문에 내 삶이 문득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뚱뚱해지는 게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뚱뚱한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얘기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라는 여자는 아직도 건강에 나쁘니까 담배를 끊으라는 얘기보단, 피부에 최악이니까 담배 끊으라는 피부과 의사들의 협박이 조금 더 사실적으로 들린다.

나라면 키가 작으면 하이힐을 신고,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화장을 하라는 빅토리아 베컴의 말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 그렇지만 성형 중독으로 하루가 다르게 일그러지고, 미라처럼 말라가는 미세스 베컴의 부푼 입술과 갈비뼈에선 섬뜩함을 느낀다. 결국 모든 건 균형이다. 과도함은 추남 추녀를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갈등을 다루는 건 드라마 작가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살벌하고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누군가 깊숙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는다는 건,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민준 선배를 위해 울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 우는 대신, 그의 미래를 위해 웃어주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해가 풀리고 그래서 기자 선배를 이해하게 되었다, 라고도 쓰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받은 상처만큼 그녀 역시 내게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젠 적어도 소문 속에서,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갑자기 마음속 깊이 응어리졌던 한숨이 한꺼번에 새어나왔다.

그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겠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했던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겠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나 또한 얽혀 있는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지 늘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치열하게 일하는 이 시대 도시 여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날씬하면서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근사한 여행을 하면서 돈 많은 여행사가 아닌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사회에서 더 이상 단선적으로 설명되는 ‘이즘’이나 ‘고민’같은 건 실종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나는 감히 ‘화해’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의 화해, 원수라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화해,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화해,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들과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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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할인행사
잭 클레이튼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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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던 고전이다. 그때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주인공에, 내용도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10년 정도 흐른 요즘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약간은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위대하다는 것은 반어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정말로 사랑 하나 밖에 몰랐던, 너무나 순수했던 개츠비에 대한 연민이 들어간 감상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개츠비 역을 맡은 로버트 레드포드는 소설로 읽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멋진 모습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분할 정도로 말이다. 데이지를 몇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 자신의 부를 은근히 과시하는 모습은 귀엽다. 하지만 데이지 역의 미아 패로우는 미스 캐스팅이다. 원작의 느낌대로라면 좀 더 순진하고 백치미가 느껴져야 할 텐데 약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 당시 미국의 모습이 잘 그려진 것 같다. 대저택의 모습이나, 스타킹이 흘러 내려가는지도 모르고 춤을 추는 파티장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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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올컬러 양장) - 너무너무 흥미진진한 메르헨의 여정
미카엘 엔데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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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는 없어.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걸.”

그렇다면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도깨비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한결같이 도깨비가 겁이 나 그러는지도 모른다.




“아우린은 환상 세계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힘이 있어. 그 존재가 빛의 피조물이든 암흑의 피조물이든 간에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 너와 나를 지배하는 힘도 갖고 있어. 그런데도 어린 여왕은 결코 힘을 행사하지 않거든. 여왕은 마치 없는 것 같아. 그러면서도 모든 것 안에 있어. 여왕도 우리와 같아?”

“아니,”

푸쿠르는 말했다.

“여왕은 우리와 달라. 여왕은 환상 세계의 피조물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여왕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그렇지만 여왕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




“왜 여왕님은 새 이름을 얻어야만 건강해지실 수 있나요?”

“올바른 이름만이 모든 존재와 사물에 그 실재를 부여하는 거란다. 옳지 않은 이름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되게 하지.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 하는 일이란다.”




“그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를 발견할 거다.”

“그리고 내가 그를 발견한다면 그는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임에도 동시에 태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과거란 그 이야기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지요.”




“환상 세계의 길은 오로지 주인님의 소망을 통해서만 열립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언제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지요. 주인님이 원치 않는 것은 주인님께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가깝고 먼’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 장소에서 떠나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장소를 향한 노력을 기울어야 하죠. 주인님의 소망이 주인님을 안내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간단히 소망할 수 없다니 이상해. 우리 마음속의 소망이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도대체 소망이라는 것이 뭘까?”




“이게 무슨 뜻일까? 네가 뜻하는 바를 행하라는 건 내가 행할 기분이 나는 것은 뭐든지 해도 좋다는 걸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인님이 자신의 참된 의지를 행해야만 한다는 뜻이지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답니다.”

“그게 대체 뭐지?”

“그것은 주인님도 모르는 주인님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이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하나의 소망에서 또 다른 소망으로, 그렇게 마지막 소망까지 소망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이 주인님을 주인님의 참된 의지로 안내할 겁니다.”




바스티안은 한 개인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자들과 똑같은 한 명이 아니라 어느 누구가 되고 싶었다. 바스티안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사랑받고 싶었다. 바스티안은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힘센 사람, 또는 가장 재치 있는 사람이 될 뜻은 없었다. 바스티안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사랑받기를 갈망했다. 좋든 나쁘든, 아름답든 추하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자기의 결함까지도 포함해서-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결함 때문에-사랑받기를 갈망했다.

그럼 대체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떠한가?

이제 바스티안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환상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고, 이 모든 선물과 힘에 눌려 더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어린 여왕이 죽을 병에 걸렸었단다. 여왕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는데 그 이름은 오직 사람의 아들만이 지어 줄 수가 있었지.......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여기로 왔어........ 그 아이가 어린 여왕에게 어린 달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단다. 여왕은 건강이 회복되었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린 여왕은 소년에게, 소년의 모든 소망이 환상 세계에서는 이루어지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어. 소년이 참된 뜻을 발견하기까지 말이지....... 그 가운데에는 좋은 소망뿐 아니라 나쁜 소망들도 있었지. 하지만 어린 여왕은 어느 것에도 차별을 두지 않거든. 여왕에게는 그녀 왕국 안의 모든 것이 똑같았고, 똑같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소망이 이루어질 때마다 어린 소년은 자기가 있었던 인간 세계의 기억을 한 조각씩 잊어 갔단다. 그것조차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 애당초 그리로 돌아갈 뜻이 없었으니까. 소년은 계속해서 소망을 했지만, 이제는 그 애의 기억이 거의 바닥나 버렸어. 기억이 없으면 더는 소망할 수도 없는 법이야....... 그런데 아직도 자기의 참된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자기의 마지막 기억을 다 써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어. 그건 말하자면 소년이 다시는 자기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거든. 그러다가 이윽고 소년은 변화의 집으로 안내되어 온 거야. 여기에 머물면서 자기의 참된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 변화의 집은 집 자체가 변화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단다. 이 변화야말로 어린 소년에게는 아주 중요했어. 지금껏 소년은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려고 했을 뿐 자기 자신을 바꾸려 하지는 않았거든.”




“너는 너의 소망의 길을 걸어온 거야. 다만 그 길이 똑바르지 못했던 것뿐이지. 너는 멀리 돌아서 갔지만 그것이 너의 길이었어. 왜 그런지 아니? 너는 생명의 물이 솟는 샘을 발견하고 나서야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 속해 있기 때문이야. 물론 거기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지만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떤 것이든 결국엔 올바른 길이란다.”




“아무것도 잃는 것은 없단다. 모든 것은 그저 변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라. 결국 시간은 걸릴 만큼 걸리는 거야.”




온갖 가능성을 다 늘어놓고 그중 한 가지를 골라내라 하더라도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이제 소년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기쁨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모두가 단 하나의 기쁨, 곧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그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그리고 먼 훗날, 바스티안이 자기의 세계로 되돌아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이 기쁨을 완전히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서도 바스티안은 마음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 남아 있어 미소를 짓고,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저마다 하나의 끝없는 이야기란다........어린 달님에게 너는 분명 두 번 다시 갈 수 없단다. 그녀가 어린 달님인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으면,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다시 만날 때마다, 그것은 처음이자 단 한 번의 만남이 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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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마이크 니콜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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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다는 착각이 사랑을 닫는다


Closer: 끝맺는 이 혹은 더 가까이. <클로저>는 사랑의 시작과 끝만을 포착해서 보여준다. 사랑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끝맺음으로 종결되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누가 과정이 중요하다 그랬던가. 유행가 가사마냥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인 사랑은, <클로저>에서 기적처럼 시작되어 잔인하게 끝난다. 그리고 4명의 주인공들은 진실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클로저>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영화다. 카메라는 오직 사랑의 시작선상과 끝자락에 서있는 주인공들의 모습만 비춰준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인 스토리의 전개는 완전히 지워진다. 관객은 주인공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오직 한, 두 마디의 대사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영화 속 시간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뛰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불친절한 화법은 과정을 생략하는 동시에 관객의 상상에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정의 불필요함, 그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과 호감을 조금씩 노출시키는 설렘의 단계에서 주인공들은 빛난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 속에서도 서로를 찾아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그 사람만 보인다고 했던가, 영화 오프닝에서 댄과 앨리스가 서로를 찾아내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부분이다. 그 슬로우 모션과 함께 어우러지던 대미언 라이스의 노래란.) 사진기 플래시 겨우 터질 짧은 시간에 서로 반해 가장 오래된 연인의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은 순간일 뿐이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주인공들의 관계는 어긋나고, 무엇이 진실인지 상대방에게, 결국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묻지만 해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클로저>의 사랑은 우리가 영화에서 봐오던 육체적인 교감도 감정의 소용돌이도 아니다. 영화는 네 남녀의 첫 만남, 어긋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고 사랑의 끝만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사랑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모든 소소한 과정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사랑인가? 아직은 사랑이 아닌 단계인 만남과 이별은 사랑이라 할 수 있나? 아니면 단지 출입구일 뿐인가?

<클로저>는 원작의 특성상 다분히 연극적이다. 연극은 불가피한 제약과 생략을 동반한다. 일반적인 영화화라면 틈새를 채워 넣는 과정이 따랐겠지만, 노장 감독은 오히려 더욱 연극적으로 영화를 꾸려나간다. 몇 야외 촬영을 제외하면 <클로저>는 대부분 폐쇄된 공간에서 두 명 정도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로 채워진다. 이것은 심지어 오픈된 공간 (안나의 전시회, 식당에서의 안나와 래리의 대화 등)에까지 적용된다. 트인 공간은 카메라가 주인공들에게 극도로 가깝게 다가서는 순간 닫혀 버리고 인물들은 주변과 분리된다. 카메라는 얼굴과 얼굴만을 번갈아 가며 잡아내고 그들의 대화를 더욱더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순간 관객은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차원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몰래 숨죽이고 혼자 엿듣고 있는 기분 말이다.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연극성의 정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인물 주변은 다 닫혀있지만 관객에게만은 단 하나의 통로가 열려있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통상적으로 영화는 일방적 전달이지만 <클로저>는 연극적 요소를 더해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이들은 인물들의 상황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다. 지하철역에서 실랑이 하는 연인을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상황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물들의 행위 뒤에 전개된 이야기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적으로 관계의 추이에 대한 단서를 던지지만 우리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감정 이입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정확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모든 인물들을 훑게 되는 것이다. 물론 깊이 들여다 볼 수도 없다. <클로저>는 그럴 찰나를 주지 않는다.

결국 음악으로 치자면 곡 전체에서 단 몇 마디씩만 떼어내 이어 붙인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다소 낯설고 불편했던 <클로저>의 진행은 내용으로 다시 돌아온다. 껍데기만, 형식만을 보고도 우리는 어떤 행위를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사랑의 시작과 끝은 제대로 갖춰졌지만 알맹이는 알 수 없을 때 말이다. 아니면 도리어 감독은 사랑 자체가 원래부터 껍데기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클로저>는 떠오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주지 않고 달라진 엘리스의 모습만을 비춰주면서 끝맺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100분 남짓한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관객에게 인물들은 여전히 낯설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길이는 무관하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빠진 첫 순간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Stranger) 일뿐이다. 사람이든 대상이든 무언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오만이자 착각일 뿐이다. 감독은 사랑도 낯선 이와 하는 낯선 행위임을 넌지시 얘기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주인공 3명은 (안나, 래리, 댄)의 결말은 슬프거나 바보 같다. 하지만 이를 너무나 잘 알았던 앨리스 (나탈리 포트만), 아니 제인은 영화 마지막에서 빛난다. 천천히 걷는 그녀는 참으로 빛난다.


[ 뉴스 글_전하영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27 16:06:56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




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 앞에 진실이 우선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사랑의 네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풍경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ㅎㅎㅎ

[ 뉴스 글_ToTo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12 16: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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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 감독판 박스세트 (8disc) -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안판석 감독, 송선미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의 장준혁, 일본의 자이젠’을 통해 돌아본 바람직한 의사상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대생들이 모이면 꼭 한번은 나오는 화제가 있었다. 의대생이라면 다들 관심 있게 보았을 드라마 ‘하얀 거탑’ 이다. 아마도 ‘장준혁’이 유서를 남기며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시청자도 많았을 것이다. 원래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78년 방송 당시 의료사고, 교수가 되고자 하는 야망, 대학병원의 뒷모습 등 그때까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내용을 세밀한 취재에 의해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의학계의 실상을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25년 만에 일본에서 연속극으로 리메이크한 작품 역시 원작이 지닌 압도적인 에너지, 그리고 철저한 취재와 치밀한 구성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냉철하고 비정한 대학병원의 조교수 자이젠 고로와 그의 라이벌이자 인간미가 넘치는 의사 사토미 슈지의 대비되는 삶을 그려내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MBC에서 방송된 ‘하얀 거탑’을 관심 있게 시청했는데 이번 방학 과제를 기회로 일본 판 ‘하얀 거탑’(2004년 리메이크 작품)을 보고 의학계의 이면과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인공의 성격, 지위 등은 거의 비슷했지만 한국의 장준혁은 간담췌외과를, 일본의 자이젠은 식도외과를 전문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드라마 ‘하얀 거탑’의 한국 시청자들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장면은 아무래도 장준혁이 유서를 남기고 죽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또 자문 교수님이 우리학교 선배님이어서 1, 2부의 수술 장면과 5부에서 간, 신장, 췌장 이식을 동시에 하는 장면, 그리고 10부에서의 세계외과학회 회장 부인의 담낭말기수술 장면은 바로 우리학교 부천병원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들어서 이번에 볼 때에는 더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중간에 법정 장면이나 정치적인 면을 묘사한 부분은 아마도 일반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을지는 모르지만 대다수 의대생이나 의사들에게는 보기 좀 불편한 장면이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랬다.




주인공의 캐릭터와 대부분의 에피소드까지 일본 판 원작과 매우 흡사하지만 원작과는 다른 몇몇 부분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식도외과를 전문으로 했지만 한국판에서는 간담췌외과 전문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그 분야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을 수 있지만, 드라마 방영 전까지 생소하게 느껴졌던 이 분야가 최대한 잘 그려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수술해야 하는 간담췌외과의 질환들은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의 환자들이 수술하지 않고 포기하려 한다고 들었다. 또 간담췌외과 자체가 대부분의 수술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간 자체가 신체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간부전인 환자는 간이식을 못 받으면 죽게 되는 등 매우 힘든 분야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보상을 받지 못해서 외과 중에서도 특히 간담췌외과는 지망을 잘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물론 드라마가 나온다고 해서 현실의 반전이 클까하는 생각은 들지만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본 수많은 의대생들이 조금이라도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른 시기부터 이 분야에 대한 꿈을 키운다면 이 드라마가 갖는 의의가 더욱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 MBC에서 ‘하얀 거탑’이 방영 중일 때, 원작에 비하여 장준혁이 최도영보다 훨씬 더 부각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번에 일본 판을 보니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에 기획을 할 때부터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드라마가 진행되어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장준혁을 미워하기보다는 그에게 공감하게 되면서 흐름이 그렇게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거탑’이 방영중일 때는 매 회당 70분 정도로 상당히 자세하고 길게 방송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편집상 빠진 장면이 좀 있다고 한다. DVD에는 아마도 편집된 부분이 추가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좋은 드라마를 DVD를 구입하여 언제든지 재미있게 보면서 오래오래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신문 ‘청년의사’ 참고)에서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최도영보다는 장준혁에 공감이 간다고 응답했다. 일반 시청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최도영보다는 장준혁에게 치료받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자문 교수님인 주종우 교수님께서 하신 인터뷰 기사에도 바람직한 의사는 장준혁과 최도영의 비율이 6:4이어야 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환자를 소홀히 보았다는 점, 또 너무 야욕을 부렸다는 점만 빼면 임상적인 스킬이나 의사로서의 자질로만 보면 최도영보다는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된다. 최도영은 너무 냉철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했고, 특히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외과의로서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고 생각된다. 물론 드라마를 보던 중에는 장준혁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항상 높은 데로만 올라가고 싶어 하는 장준혁의 욕망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음 한 구석에 다 야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얀 거탑’이 의사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에까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이 드라마가 병원 뿐 아니라 어느 사회의 누구에게도 충분히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장준혁의 죽음을 그의 모든 라이벌이 다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 사람이 죽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을 반성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살아서 계속 야욕을 부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가 살아서 남아있는 것이 의료계의 상당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드라마 내내 그와 격렬하게 대립했던 사람들도 드라마의 막바지에 가서는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에 장준혁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관심이 있어서 한번 찾아보니 의외로 의사들은 자신의 시신을 잘 기증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의대생일 때의 실습과 의사가 된 후 수많은 수술을 거치고 나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내어 주는 것에 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된다. 아직 예과생인 내가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나도 나중에 장기나 시신 기증 서약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품게 되었다.




‘하얀 거탑’과 비슷한 시기에 ‘외과의사 봉달희’라는 또 다른 메디컬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둘 다 인기를 끌어서 인터넷상에서는 두 드라마를 비교도 많이 했고, 나 역시 두 드라마를 모두 즐겨 시청했던지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의대생인 나로서는 ‘봉달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학교 모임에서도 병원 실습을 도는 본과 선배들로부터 ‘봉달희’가 재미있고 현실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마도 ‘봉달희’는 레지던트 1년차의 이야기이고 ‘하얀 거탑’은 전문의가 대학교수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의대생들과는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봉달희’보다는 ‘하얀 거탑’이 정치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낸 것도 의대생들이 더 멀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 방영 시기가 의료법 개정 때문에 전공의들이 많이 민감했던 때라서 ‘메디게이트’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하얀 거탑’이 많이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하얀 거탑’을 재미있게 봤고, 정치적인 부분도 솔직히 흥미롭게 보기는 했지만 의대를 다니는 학생으로서는 우리 의료 현실을 좀 더 반영하고 병원 내의 생활이 더 중심이 되는 그런 드라마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의대를 다니지 않는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는 ‘봉달희’를 보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하얀 거탑’에 비해서 ‘착한 의사’들을 많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의사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기존 시각이 부정적인 것에서 다소나마 ‘봉달희’를 통해 좋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터넷상에서는 두 드라마 모두 ‘재미를 위해 현실을 과장했다’는 비판과 함께, 비슷한 외국의 메디컬 드라마나 원래의 원작과 비교하여 부족한 점에 대한 질타가 방영 내내 이어졌다. 아마도 단순히 드라마적인 재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의학 전반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최고의 외과의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가 그런 삶의 목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의 첫 단계는 바로 정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 최고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세계최고가 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길이었다. 현재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 현실에 적응하고, 그 앞에서 선두주자로 나아가려면, 장준혁처럼 평생 동안 계속 공부하며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준혁은 그 과정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새로운 질병의 케이스들을 만나고 그것을 정복하는데 희열을 느꼈다는 점에서 약간 소름이 끼치기는 하지만,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만큼은 나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장준혁이 오로지 개인의 명예와 권력만이 목적이었다면 외과, 그 중에서도 남들이 다 기피한다는 간담췌외과를 굳이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담낭암, 담관암, 췌장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게 할까하는 나름의 사명감과 소신 때문에 그 분야를 택하고 거기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하고 생각된다. 가장 훌륭한 의사는 최도영의 마음과 장준혁의 기술이 조합된 의사일 것이다. 환자에 대한 애착과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는 노력, 거기에 체력까지 덧붙여진다면 아마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생각보다 여자의사에 대한 이야기나 비중이 좀 적은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과, 정치적인 면을 부각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내가 여자라서 지나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 의사, 또 여자 외과 의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어느 정도 드라마에서 짚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존재하는 여자의사에 대한 선입견이 바뀌는데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하얀 거탑’의 영향은 너무나 큰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외과는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들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또 선배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서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진정한 의사는 아마도 외과의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오랜 시간 동안의 수술 이후 죽기 직전의 환자가 살아나는 장면에서 짜릿한 감동을 느꼈을 정도인데 실제로 생명과 관련된 장기를 다룬다는 것은 정말 의사로서의 멋진 모습이고 큰 매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된다. 편한 것을 좋아하고 물질적인 것을 많이 따지는 요즘 세상에 단순히 이런 점 때문에 외과를 선택하는 현직 외과 의사 분들이 모두 존경스러웠다. 외과가 다른 과에 비해서 자기 분야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하고 특히 환자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외과에 대한 현재의 대우가 나중에는 달라지고 언젠가는 보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 반드시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거탑’은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가 컸다. 그래서 단순히 병원이 무대인 정치드라마라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아마도 중년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최근 들어 메디컬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나오고, 또 그 내용이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거탑’처럼 다양한 내용이 담기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반감이 매우 큰데 의사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것보다 장준혁처럼 의사도 불완전할 수 있고 충분히 공감갈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이 오히려 의사를 친근하게 느끼고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기 있는 드라마를 통해 지루함을 달래고, 약간의 감동과 재미를 느끼는 것은 어떤 시청자라도 할 수 있다. 나도 처음에 ‘하얀 거탑’을 시청했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 방학 때 이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돌려 보면서 생소했던 간담췌 분야에 대해서도 아주 약간이지만 알 수 있었고, 의사로서, 또 앞으로 의사가 될 의대생으로서 현재와 앞으로의 내 자세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다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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