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친구와 선배들의 조언도 지겨울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거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는 영화 <아일랜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누구냐고?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간절히 찾는 사람이지. 신은 그때 우릴 외면하는 사람이고.”

그래도 신이 공평해 보일 때가 있다. 안 보는 척하지만 시큰둥하게 하늘 위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재채기를 하듯 선행을 베푼다.

옛다. 미운 놈 떡 하나!




나는 종종 패션계 사람들의 속 안이 공갈빵 같다고 생각한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나라 보험 회사들은 전부 다 망할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부도 수표에 가깝다.




이곳에서 비밀이란 없다. 화장실에서도 말은 냄새처럼 퍼지게 되어 있다. 나쁜 소문일수록 퍼지는 속도는 빠르다. 소문은 변기 안의 지저분한 배설물을 처리하듯 버튼 하나로 간단히 내려버릴 수 없다.




편집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라.

결국 스테이크보단 제대로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었다.




내가 닥터 레스토랑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는 건 그가 누구보다 정직했기 때문이다. 잘난 수식어와 히스테릭한 공격들로 레스토랑을 초토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들에선 자신의 시선과 해석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돈이라고?

천만에!

21세기엔 돈이 시간이다.

돈은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해준다. 내가 돈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바로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에 늘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닥터 레스토랑이 정확한 비평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자기 돈을 주고 음식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취재나, 협찬이나, 요청이 아닌 자기 돈을 낸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通俗’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울고 웃게 만드는 힘, 내 꿈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란 믿음, 세상이 어쩌면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드라마가 가진 통속의 힘이라고 믿는다.




갈등을 다루지 않는 것은 드라마라고 할 수 없다!

소설이나 시와 달리 스무 살짜리 천재 드라마 작가가 나오지 않는 건 드라마가 갈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갈등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증폭된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패션잡지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건 앞으로 내가 쓸 드라마의 자산이 될 만한 갈등들이야! 이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저런 괴상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겠어. 잊지 말자. 그래야 나중에 내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우에게 저 동작을 설명해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것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남들은 고사하고 내 갈등 상황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신은 어떻게 써야 하고 클라이맥스의 갈등은 어떻게 폭발시켜야 할까.

마지막 엔딩은?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식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이곳에선 소문이 늘 사실처럼 유통된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신문의 ‘바로잡습니다’ 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은 절대 어린 기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관리자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울고 있는 어린애를 자를지언정 회사가 자진해서 윗선을 자르는 일은 결코 없다. ‘하극상’이란 단어는 회사 밖에나 있는 말이다. 그 애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진해서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다.




누군가에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이 고향이겠지만, 내겐 현대식 백화점이 세워지고, 새로 개통한 지하철이 들어서던 그곳이 고향이었다. 금강산의 비경秘境보다, 벚꽃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단지 풍경에서 더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나 같은 아이들은 놀이터와 주변 상가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유년기를 보낸다. 내게 압구정동은 시인 유하가 ‘바람 부는 날엔 반드시 가야 한다’고 노래하던 욕망의 집착지가 아니었다.




진정한 망각이란, 결국 그 단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미래를 준비한다고?

그건 마치 결혼과 함께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리 같다. 성대한 결혼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커플들의 심리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안전이 최고?




하긴 식감이 발달하지 않은 20대에 무슨 음식 평을 쓴단 말인가. 라면 끓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엉터리들이 온갖 재료들이 섞이고, 삭아 결국엔 전혀 다르게 통합되는 요리의 세계에 대해 알 리 없다. 어떤 재료들로 소스가 만들어지는지, 뼛속에서 어떻게 국물이 우러나고, 좋은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에서 얼마만큼의 글루텐을 뽑아내는지 알지 못한다면 좋은 음식 평론은 불가능하다. 고작 남들이 써놓은 칼럼을 자기 식대로 변형한 가짜 정보들만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백발의 현장 기자가 거의 없다.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관리자가 되어 후배들을 닦달하거나, 광고주들과 씨름하고, 조직의 윗선들에게 아부하는 데 현장의 노하우를 전부 다 쓴다. 지금이 나이와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가 중요시되는 시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엔 역설적으로 느림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한 시간이나 하루가 아닌 한 달씩 뭉텅이로 사라지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병원에선 천천히 흘러갔다. 시간이 침대 위에, 창가 옆에 자꾸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었다. 문장이 아닌 내 삶에 단단히 밑줄을 그으며, 몇 가지 단어 위엔 방점을 찍었다. 내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혁신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그저 조용히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란 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탔던 회전목마같이 돌고 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포개지고 겹쳐져서 어떤 것이 과거였고, 현재이며, 미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서늘한 눈빛에 질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런 눈빛엔 언제나 솔직함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산다. 이게 옳은 일일까. 이런 삶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패션지 기자들이 사용하는 ‘시크’, ‘엣지’, ‘잇 백’,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이 일상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이런 외국어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패션지를 고작 명품광고나 싣는 한심한 된장녀 잡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렵게 섭외한 소설가 폴 오스터나 샐먼 루시디의 10페이지짜리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한들, 사람들이 그 기사의 진정성을 믿어줄까?

하지만 누군가는 내가 만든 잡지를 보며 꿈을 꾸고 위안을 얻는다. 잡지의 독창적인 화보나 훌륭한 기사를 통해 누군가는 패션디자이너로서의 희망을 다지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이상을 엿본다. 내가 하는 일은 디테일과 꿈을 파는 일이다. 더 이상 무얼 바란단 말인가.




2호선 ‘서울대 입구역’이 서울대 입구가 아니듯, 7호선 ‘청담역’ 역시 진짜 청담동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명명해 놓은 것들 중, 그렇지 않은 건 얼마나 될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들을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에 필요한 사람을 구분하는 건 비즈니스에서 아주 중요한 거야. 대부분은 그걸 구분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지. 그게 우리 여자들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해. 바로 너 같은 사람의 단점이지.”




어느 아티스트가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감동받았었다. 바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의 고귀함 때문에 내 삶이 문득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뚱뚱해지는 게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뚱뚱한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얘기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라는 여자는 아직도 건강에 나쁘니까 담배를 끊으라는 얘기보단, 피부에 최악이니까 담배 끊으라는 피부과 의사들의 협박이 조금 더 사실적으로 들린다.

나라면 키가 작으면 하이힐을 신고,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화장을 하라는 빅토리아 베컴의 말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 그렇지만 성형 중독으로 하루가 다르게 일그러지고, 미라처럼 말라가는 미세스 베컴의 부푼 입술과 갈비뼈에선 섬뜩함을 느낀다. 결국 모든 건 균형이다. 과도함은 추남 추녀를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갈등을 다루는 건 드라마 작가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살벌하고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누군가 깊숙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는다는 건,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민준 선배를 위해 울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 우는 대신, 그의 미래를 위해 웃어주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해가 풀리고 그래서 기자 선배를 이해하게 되었다, 라고도 쓰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받은 상처만큼 그녀 역시 내게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젠 적어도 소문 속에서,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갑자기 마음속 깊이 응어리졌던 한숨이 한꺼번에 새어나왔다.

그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겠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했던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겠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나 또한 얽혀 있는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지 늘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치열하게 일하는 이 시대 도시 여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날씬하면서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근사한 여행을 하면서 돈 많은 여행사가 아닌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사회에서 더 이상 단선적으로 설명되는 ‘이즘’이나 ‘고민’같은 건 실종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나는 감히 ‘화해’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의 화해, 원수라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화해,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화해,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들과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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