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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마이크 니콜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낯설지 않다는 착각이 사랑을 닫는다
Closer: 끝맺는 이 혹은 더 가까이. <클로저>는 사랑의 시작과 끝만을 포착해서 보여준다. 사랑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끝맺음으로 종결되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누가 과정이 중요하다 그랬던가. 유행가 가사마냥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인 사랑은, <클로저>에서 기적처럼 시작되어 잔인하게 끝난다. 그리고 4명의 주인공들은 진실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클로저>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영화다. 카메라는 오직 사랑의 시작선상과 끝자락에 서있는 주인공들의 모습만 비춰준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인 스토리의 전개는 완전히 지워진다. 관객은 주인공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오직 한, 두 마디의 대사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영화 속 시간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뛰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불친절한 화법은 과정을 생략하는 동시에 관객의 상상에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정의 불필요함, 그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과 호감을 조금씩 노출시키는 설렘의 단계에서 주인공들은 빛난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 속에서도 서로를 찾아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그 사람만 보인다고 했던가, 영화 오프닝에서 댄과 앨리스가 서로를 찾아내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부분이다. 그 슬로우 모션과 함께 어우러지던 대미언 라이스의 노래란.) 사진기 플래시 겨우 터질 짧은 시간에 서로 반해 가장 오래된 연인의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은 순간일 뿐이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주인공들의 관계는 어긋나고, 무엇이 진실인지 상대방에게, 결국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묻지만 해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클로저>의 사랑은 우리가 영화에서 봐오던 육체적인 교감도 감정의 소용돌이도 아니다. 영화는 네 남녀의 첫 만남, 어긋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고 사랑의 끝만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사랑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모든 소소한 과정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사랑인가? 아직은 사랑이 아닌 단계인 만남과 이별은 사랑이라 할 수 있나? 아니면 단지 출입구일 뿐인가?
<클로저>는 원작의 특성상 다분히 연극적이다. 연극은 불가피한 제약과 생략을 동반한다. 일반적인 영화화라면 틈새를 채워 넣는 과정이 따랐겠지만, 노장 감독은 오히려 더욱 연극적으로 영화를 꾸려나간다. 몇 야외 촬영을 제외하면 <클로저>는 대부분 폐쇄된 공간에서 두 명 정도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로 채워진다. 이것은 심지어 오픈된 공간 (안나의 전시회, 식당에서의 안나와 래리의 대화 등)에까지 적용된다. 트인 공간은 카메라가 주인공들에게 극도로 가깝게 다가서는 순간 닫혀 버리고 인물들은 주변과 분리된다. 카메라는 얼굴과 얼굴만을 번갈아 가며 잡아내고 그들의 대화를 더욱더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순간 관객은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차원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몰래 숨죽이고 혼자 엿듣고 있는 기분 말이다.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연극성의 정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인물 주변은 다 닫혀있지만 관객에게만은 단 하나의 통로가 열려있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통상적으로 영화는 일방적 전달이지만 <클로저>는 연극적 요소를 더해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이들은 인물들의 상황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다. 지하철역에서 실랑이 하는 연인을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상황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물들의 행위 뒤에 전개된 이야기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적으로 관계의 추이에 대한 단서를 던지지만 우리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감정 이입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정확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모든 인물들을 훑게 되는 것이다. 물론 깊이 들여다 볼 수도 없다. <클로저>는 그럴 찰나를 주지 않는다.
결국 음악으로 치자면 곡 전체에서 단 몇 마디씩만 떼어내 이어 붙인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다소 낯설고 불편했던 <클로저>의 진행은 내용으로 다시 돌아온다. 껍데기만, 형식만을 보고도 우리는 어떤 행위를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사랑의 시작과 끝은 제대로 갖춰졌지만 알맹이는 알 수 없을 때 말이다. 아니면 도리어 감독은 사랑 자체가 원래부터 껍데기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클로저>는 떠오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주지 않고 달라진 엘리스의 모습만을 비춰주면서 끝맺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100분 남짓한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관객에게 인물들은 여전히 낯설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길이는 무관하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빠진 첫 순간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Stranger) 일뿐이다. 사람이든 대상이든 무언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오만이자 착각일 뿐이다. 감독은 사랑도 낯선 이와 하는 낯선 행위임을 넌지시 얘기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주인공 3명은 (안나, 래리, 댄)의 결말은 슬프거나 바보 같다. 하지만 이를 너무나 잘 알았던 앨리스 (나탈리 포트만), 아니 제인은 영화 마지막에서 빛난다. 천천히 걷는 그녀는 참으로 빛난다.
[ 뉴스 글_전하영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27 16:06:56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
사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 앞에 진실이 우선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사랑의 네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풍경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ㅎㅎㅎ
[ 뉴스 글_ToTo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12 16: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