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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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은 쪽수는 적지만 읽으면서 이해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저자의 생각을 꽉꽉 눌러담았기 때문이다. 주장을 강화할 수 있는 사례, 도표, 연구 결과, 사진이나 그림 자료 등은 아예 없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각각의 목차를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본다.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 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넌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은 명확히 들어오지만 비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성 질환들이 21세기에 급격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명확한 이유는 밝혀낼 수 없지만, 항생제에도 듣지 않는 박테리아와 완전한 치료가 힘든 바이러스 질병들이 현재에도 있으며, 변종마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 과정을 가로막는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학겨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명쾌하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겅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Hyperaktivitat에서 과잉hyper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첫장을 요약하면, 현대인은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원인은 과다긍정이고 결과는 신경성 질환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호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규율사회는'~하지 마라' 혹은'~해야 한다'의 사회이다. 부정성의 사회인 것이다.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의 사회, 긍정성의 사회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스스로가 소진될 때까지 혹사시킨다.

 

 

깊은 심심함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과엽,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며, 우리에게 사색의 시간을 뺏는다.

 

 

활동적 삶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보는 법의 교육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오래 천천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바틀비의 경우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해석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장이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예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아니, 부적합하다기보다는 저자의 정반대편에서 사례로 들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를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없는 인물로 보고 있는데 나는 소설 속 그의 모습이 관습과 제도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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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완전판) - 0시를 향하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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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는 생전에 66권의 장편과 20권의 단편을 남겼다. 가히 '추리 소설의 여왕' 답다. 수많은 독자들은 각자의 best 소설 목록이 있을 것이다. 모든 소설이 다 훌륭하지만, 특히 이 작품들만은 최고다, 라고 꼽는 것들. 열 손 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정작 그 수많은 작품들을 탄생시킨 작가도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은 분명히 있지 않을까? 크리스티 자신이 선정한 '베스트 10'에 이 작품 또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예고살인

오리엔트 특급살인

화요일 클럽의 살인

0시를 향하여

끝없는 밤

비뚤어진 집

누명

움직이는 손가락

 

이 열 작품 중 '0시를 향하여'가 포함되며, 독자들이 선정한 베스트 순위에서도 이 소설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크리스티하면 명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외에 다른 해결사들(베틀 총경, 토미와 터펜스 부부, 할리 퀸, 고트 형사, 파커 파인)이 등장하는 작품만 해도 31편이 된다고 한다. 그 중 이 작품에 등장한 베틀 총경은 침니스의 비밀,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위치우드 살인사건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며, 특히 이 '0시를 향하여'는 포와로와 마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한다.

 

벼랑 위에 우뚝 솟은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으로 테니스 선수 네빌과 아내 케이, 전처 오드리 등 7명이 초대된 파티가 열린다. 나머지 4명은 오드리를 짝사랑하는 먼 친척 토머스, 케이를 짝사랑하는 오랜 친구 테드, 경험 많은 변호사 트레브스, 그리고 초대된 손님은 아니지만 트레실리안 부인의 먼 친척이자 함께 살면서 그녀를 돌보아주는 메리 올딘. 삼각관계가 스트레인지라는 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하나, 그리고 그 삼각형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각각의 삼각 관계가 하나씩 더 추가 되어 젊은 이들의 기묘한 애정 전선이 복잡하게 펼쳐지고, 트레실리안 부인의 살인에 대해서 참석한 사람들 중 유산 때문에 동기를 가진 사람이 여럿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더 꼬여 간다. 여러 명의 용의자 중 유력한 사람이 먼저 등장하고, 다시 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익숙한 전개가 펼쳐지며,  예사롭게 넘겼던 일들이 결말에 가서 큰 요소로 작용한다. 재미있는 것이, 그것들은 살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에는 충실할 지언정, 사건 자체에 대한 추리를 하는 데에는 사실 큰 도움은 또 되지 않는다. 크리스티 소설의 큰 두 축이 사건 자체에 대한 재미와, 인간들의 심리 변화의 과정이라면, 양쪽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한번은 이쪽에 힘을 실어주고, 또 한 번은 이쪽에 힘을 실어주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프롤로그에서의 트레브스의 말이 이 소설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온갖 종류에 온갖 형색을 하고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긴 하지만, 특출나게 머리가 좋은 부류도 있어. 출신 지역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스코틀랜드의 랭커셔 출신이 있어. 그 식당 주인은 이탈리아 출신이고, 그 학교 여선생은 미들 웨스트 어디 출신이라지.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마침내 11월의 어느 흐린 날 런던의 법정에서 함께 마주치게 된걸세. 여기 휘말린 사람들에겐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네. 모든 요소가 결합하여 살인 사건 공판이라는 정점을 이룬 게야. (중략) 탐정 소설이란 게 대개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살인에서 시작을 한다고. 하지만 살인은 그 결말일세. 이야기는 살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네. 때로는 수년 전부터 시작되지. 어느 날 몇 시, 어떤 장소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게끔 하는 원인과 사건들에서 시작하는 거란 말일세. 그 하녀 계집애의 증언을 놓고 보자고. 만일 이 부엌데기가 자기 애인을 들들 볶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거고 라몬에 갈 필요도 없었을걸세. 그렇다면 피고 측 주요 증인이 될 필요도 없었겠지. 그 쥐세페 안토넬리라는 청년은 한 달 동안 자기 형을 대신하려고 온 것이지? 이 형이란 인물은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동생이 그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던 것을 보지 못했을걸세. 또한 만일 그 경관이 48번지에 있는 식당의 요리사와 허튼수작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그 경관은 자기 순찰 구역에 늦게 도착하는 일이 없었을걸세......(중략)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두세.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아마도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상호관계에 집중하며 비교적 살인은 늦게 나타나고, 그 살인 사건 또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여 보여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크리스티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지. 어떤 드라마가, 살인의 형태로 나타날 어떤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어. 피와 범죄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가 한편 써야 한다면, 나는 늙은 노인이 난로 앞에 앉아서 편지를 열어보는 장면으로 시작할 거야. 그 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가는 것이지.......> 이런 대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소설, 이 부분은 굉장히 위트있으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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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 (완전판) - 오리엔트 특급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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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 본 추리 소설이 절대로 많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만 말한다면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최고의 추리 소설가는 애거서 크리스티이며, 역시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만 말한다면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크리스티의 최고 작품은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싶다.

 

뭐, 나뿐만이 아니라, 크리스티의 최고 작품들을 선정한다면 이 작품은 반드시 목록에 포함되며, 1974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잉그리드 버그만이 생애 세 번째 아카데미 트로피를 받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발견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일본 후지 TV에서 2부작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리엔트란 동방, 즉,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프랑스의 칼레까지 가는 열차로 탐정 포와로는 시리아에서 출발하여 이스탄불에 머물 예정이었는데, 갑작스레 일정이 바뀌어 오리엔트 열차에 탑승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에서 주요 등장 인물만 총 17명. 주인공 포와로와 그의 갑작스런 탑승을 가능하게 한 국제 침대차 회사의 중역과 우연히 같은 열차를 타게 된 의사, 그리고 제때 예약한 13명의 승객과 차장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3명의 승객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에는 다소의 집중이 필요하다.

 

기차는 출발하고, 13명의 승객 중 한 명이 포와로에게 다가와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탐정다운 관찰력과 육감으로 그에게 거부감을 느낀 포와로는 거절한다.

 

그리고, 그가 살해당한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그 전율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완벽한 밀실 살인, 모두의 알리바이는 입증되어 있으며 죽은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읽으면서, 뭐지? 뭐지? 하다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죽은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할 때,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포와로가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결말은 정말 우아하고 완벽했다.

 

12명의 승객과 12명의 배심원, 여러 계층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인 미국, 그리고 살해당한 범죄자가 스스로 요청한 신변 보호를 거절한 후, 살인 사건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최상의 결말을 제시한 탐정.

 

하나부터 열까지 크리스티가 완전무결하게 창조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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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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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라블레의 아이들.

이게 무슨 뜻일까? 제목만 들어서는 거리의 아이들과 같은 느낌인데?

 

부제: 천재들의 식탁.

동서고금의 천재들이 먹었던 음식이란 말인가?

 

책 표지의 설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속에는 먹을 것들이 풍성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대식가로, 그들은 종종 향연을 벌이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요리들을 앞에 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음식을 탐하는 먹보들이었다. 그건 단순히 식욕의 차원을 넘어 그들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누구는 훌륭한 레시피집을 남겼고 또 누구는 후세의 전기를 통하여 그 왕성한 식욕 상이 전해졌다. 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라블레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 책은 과거에 쓰여진 책을 읽는 것과 미지의 요리가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인생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한 평론가에 의해 쓰여진 실험보고서이다.

 

 

여기까지 보면 이 책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수아 라블레라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먹는 것에 대한 다양한 묘사로 요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천재들은 직접적으로 라블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 혹은 숭배나 찬탄으로 한 가지 이상의 일화가 있는 사람들로 그런 면에서 과연 라블레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평론가로, 음식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하는 사람이며, 실험보고서라는 것은 이 책의 예술가들이 그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방식으로 저자 스스로 맛을 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한 책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대가인 사람들이라면 특정 부분에 대한 자기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방법론이 있기 마련이며, 요리에도 예외는 없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본인만의 취향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다케미쓰 도루의 버섯 파스타 정도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정도일 것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서 저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다. 아마도 전문 요리사의 솜씨와 전문 사진 작가의 기술과 전문 편집자의 능력, 삼박자가 모두 맞았다고 생각되는데, 반면에 글은 또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은 몇 번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어떤 장은 한 번을 읽기에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책이<예술신초>라는 곳에 1년 정도 연재된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각 글마다 농밀함의 편차가 들쑥날쑥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저자가 책 뒤편에서 밝혔듯이 전적으로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개인의 취향이 크게 작용하여 연재된 음식 중 상당수가 돼지고기 요리였으며, 이 책만 하더라도 절반 정도의 예술가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라서, 일본 국민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 많다는 것. 즉, 상당히 편향되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다행이게도, 이 책을 읽은 바로 직후에 일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이라는 것과, 제한된 예산이라는 두 가지 제한 조건 속에서 효과적으로 메뉴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 덕분이었다는 사실. 물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겠지만, 쉽게 오기 힘든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미리 읽었던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음식들 덕에 먹고 싶은 요리를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만족했다는 것.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아오야마 뇌병원의 원장인 모키치는 환자를 봐야 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니 자연히 식사는 배달시켜 먹는 일이 많았고 음식은 당연히 '장어요리'였다. 심한 경우엔 내리 나흘을 장어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업무에서 해방되어 외식을 할 대도 역시 장어를 먹는다. 하지만 고급 요정은 아들의 상견례 자리 말고는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모키치는 병원 근방에 있는 미야마스자카를 내려가 도겐자카를 오르는 그 중간에 있는 하나비시라는 아주 소박한 장어 집을 즐겨 찾았는데 이 점포는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중략) 이윽고, 일본이 영미 열강과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면 느긋하게 장어집에서 가바야키(장어 꼬치구이)를 먹기는 힘들 테고 장어가 없으면 시를 지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가인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모키치가 즉흥적으로 대량의 통조림을 구입한 이유가 그런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학자다운 예방 차원에서 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일기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신중한 모키치는 시내에서 아직 장어를 사다 먹을 수 있는 동안에는 통조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중략) 모키치는 2년 후에 도쿄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때에도 대량의 통조림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장어 통조림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중략) 전자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니 찬밥과 통조림 속의 장어를 덥히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오차즈케처럼 뭔가 따뜻한 국물을 끼얹는 것이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아마도 차갑게 식은 밥에 장어 통조림만으로 밥을 먹는 건 너무도 비참해 역시 우유를 부어서 먹었나보다. 당연히 이 때의 우유는 따뜻하게 데운 것이어야만 한다. (중략)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늦게까지 진찰실에 틀어박혀 있던 모키치에게는 이 방법은 너무도 간편하면서도 장어를 먹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삽화를 통해 판단해 본 결과 모키치는 결코 미식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장어는 어느 강에서 나는 천연 장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양식 장어가 나돌 무렵에는 그걸로라도 만족하며 소박하게 기뻐하고 통조림이라고 해서 업신여긴 적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장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그것들을 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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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 아웃케이스 없음
톰 포드 감독, 니콜라스 홀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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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명의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2. 콜린 퍼스가 최고의 연기를 한 작품.

3.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의 영화 감독 데뷔작.

4. 동성의 연인 사망 후 괴로워하던 한 남자의 하루를 다룬 이야기.

5. 원작 소설의 작가도, 디자이너 출신 감독도, 영화 속 주인공도 모두 동성애자.

 

이 정도가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었다.

원작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볼까, 아니면 그 반대가 좋을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소설 쪽이 서사가 더 풍성할 수 있고,

영화 평들이 나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장점도 많지만 원작보다는 못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으며, 영화를 먼저 볼 경우 소설의 세세한 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영화를 보면서 원작에 못 미치는 점에만 시선을 뺏길 것 같아서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콜린 퍼스는 최근에 '킹스맨'으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전에도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에서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으로 영화팬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있던 배우였다. '킹스맨'은 그의 '영국 신사'와 같은 이미지에서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기존의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에게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킹스 스피치' 역시 그가 영국 국왕으로 나온 작품이었다.

 

그러나 콜린 퍼스의 가장 훌륭한 연기는 이 작품이었다는 한 평론가의 평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다. 영화 자체는 꽤 매력적인 작품이며 장점도 많다. 그러나 단점도 눈에 띄는데, 그 단점을 촘촘하게 메꾸는 것이 콜린 퍼스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이다. 이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교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영국 출신 지적인 신사라는 점에서는 다른 영화 배우에게는 없는 그만의 장점을 발휘하고 있으며,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오직 자신의 그 이미지에만 묻히지 않는다.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흐르거나 혹은 냉소적으로 흐를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으며, 자살 결심 후 전혀 뒤집힐 가능성이 없을 것처럼 굳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순간에 자신의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의 연기는 압권이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잡는 장면이 많으며, 대부분 그 클로즈업은 눈이다. 소설 속에서 어떻게든 묘사가 되어 있을 텐데 그 묘사가 궁금해진다. 또 보통 클로즈업과 함께 화면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선명해질 때가 있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감독만의 아이디어 같으며, 활자와 비교해 영상만이 줄 수 있는 기교일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소설을 읽어보아야 알겠지만.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추천해 줄 것 같다. 워낙에 원작이 탄탄하기 때문에 이만한 영화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소설보다 영화로 감상하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이 몇 개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이기 때문에 아마도 시대적 배경인 1960년대의 의상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고증이 철저할 것이며, 콜린 퍼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몇몇 사람들은 지나치게 화면이 아름다우며, 집이며, 차며, 배우들의 의상까지 과하게 섹시하고 사치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호사스러움이 오히려 나에게는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했다. 1960년대의 이야기이지만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영화에 펼쳐지는 남자들만의 애정어린 관계를 묘사한 화면은 누군가에게는 보기 힘들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시각적으로 우아한 영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며,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묘사한 몇 몇 장면조차 전혀 거북하지 않기 때문이다. 

 

DVD에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패션은 일시적이지만 영화는 영원하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그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하나의 동기가 아닐까 싶다. 20대에 이 소설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며, 영화 속에 자신의 동성 애인과 작가의 동성 애인을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젊은 시절부터 감명 깊게 읽었던 이 원작에 대해 예의를 표시한다. 톰 포드가 이 이후에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이 정도로 인정을 받을지, 아니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조차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절대로 기존 감독에게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다른 감독들이 이 원작을 영화화했다고 가정하더라고 이만큼의 영화는 나오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짐과 조지가 함께 있는 장면이나 또 다른 몇 가지의 장면과 대사 등은 감독이 직접 만들어낸,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라고 하는데 동성애자인 감독의 개인적인 인생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원작에 동화될 장면들이 아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성애자인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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