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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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은 쪽수는 적지만 읽으면서 이해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저자의 생각을 꽉꽉 눌러담았기 때문이다. 주장을 강화할 수 있는 사례, 도표, 연구 결과, 사진이나 그림 자료 등은 아예 없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각각의 목차를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본다.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 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넌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은 명확히 들어오지만 비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성 질환들이 21세기에 급격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명확한 이유는 밝혀낼 수 없지만, 항생제에도 듣지 않는 박테리아와 완전한 치료가 힘든 바이러스 질병들이 현재에도 있으며, 변종마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 과정을 가로막는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학겨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명쾌하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겅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Hyperaktivitat에서 과잉hyper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첫장을 요약하면, 현대인은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원인은 과다긍정이고 결과는 신경성 질환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호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규율사회는'~하지 마라' 혹은'~해야 한다'의 사회이다. 부정성의 사회인 것이다.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의 사회, 긍정성의 사회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스스로가 소진될 때까지 혹사시킨다.

 

 

깊은 심심함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과엽,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며, 우리에게 사색의 시간을 뺏는다.

 

 

활동적 삶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보는 법의 교육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오래 천천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바틀비의 경우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해석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장이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예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아니, 부적합하다기보다는 저자의 정반대편에서 사례로 들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를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없는 인물로 보고 있는데 나는 소설 속 그의 모습이 관습과 제도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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