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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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전에 선정한 best 10에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독자 입장에선느 아리송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당연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녀 스스로 밝혔듯이 이런 트릭은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다고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그 약속을 깬 것이다. 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그녀가 스스로 선정한 best 10에 들어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그 트릭 때문에 best에 들어갔다면, 이 책은 왜 들어간 것일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다. 그러나 그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여섯 편의 소설들은 전부 '여성의 삶'을 주제로 했다는 공통점과 함께 그동안 그녀가 써왔던 추리 소설이 아닌, 심리 서스펜스부터 로맨스, 대하소설까지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생전에 그녀가 이 책에 애착을 가졌다는 것도 당연해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장르 소설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셜록 홈즈의 아서 코난 도일의 경우, 이른바 '진지한' 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서 자신의 책에서 홈즈의 죽음을 암시하는 결말로 끝을 낸 적이 있는데, 결국 다음 책에서 그를 부활시킨다. 홈즈가 모든 이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은 인물로 독자들의 원성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이른바 그가 구상한 '진지한' 문학이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사람들 마음은 다 비슷할 것이다. 크리스티도 도일도. 길이길이 문학사에 평가되는 작품, 스스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이 강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그녀가 76세에 쓴 작품으로, 굉장히 원숙하고 우아한 느낌이 있다. 특히 제 2장과 3장의 묘사는 인상적이며,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케빈에 대하여가 떠오르기도 한다. 살인자에 대한 심리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의 비중을 더 늘렸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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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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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의 감독 데뷔작,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우 콜린 퍼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역시 영국 출신의 니콜라스 홀트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평은 콜린 퍼스가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는 것. 평론가가 아닌 그저 관객에 불과한 내 눈에도 콜린 퍼스의 연기는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매튜 구드의 연기도 훌륭했다는 점. 그리고 어바웃 어 보이에서 그저 똘망똘망하고 귀여웠던 소년 니콜라스 홀트의 성인 모습이 반가웠고, 엑스맨 시리즈에서는 알지 못했던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 그리고 톰 포드는 의외로 이 작품을 잘 연출해냈다는 점.

 

그래서 원작 소설이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사실 원작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늘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 더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동성연애자이며, 작가 또한 동성연애자로 주인공을 작가 자신과 같은 해에 출생한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 또한 동성연애자이고, 그 때문에 이 작품에 강하게 끌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화를 먼저 보고, 다음에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잘 이 작품을 즐기게 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떄문에 소설만 읽어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조롭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훨씬 풍성하기 떄문에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텀을 길게 두지 말고 보면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소설 속 이야기들을 더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한 차별은 오죽했을까, 또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도 마음껏 내색하지 못하는 슬픔은 어느 정도였을까.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삶을 통해서 이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책을 읽기 전에 들었던 이 의문은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프랙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프랙탈.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와 닮은 도형을 뜻하는 말로, 우리 주변에서는 눈송이나 나무 껍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의식을 찬찬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남자의 상실을, 절망을,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에게 연민을, 공감을, 위로를 보내고 싶어졌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하루만으로 부족하다면 평생이 주어져도 모자란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제 조지 주위에는 온통 남녀들이다. 매일 고속도로라는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이 공장에 공급되는 재료인 남녀들. 가공되어서 포장되고 시장에 놓일 남녀들이 조지를 향애 다가오고 온갖 방향에서 조지의 앞길을 지나간다. 흑인, 멕시코인, 유대인, 일본인, 중국인, 라틴아메리카인, 슬라브인, 노르딕인, 금발에 비해서 검은 머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학생들은 강의 시간표에 맞춰 종종걸음을 치거나, 이성을 꼬드기며 느릿느릿 걷거나, 열띤 토론을 하면서 한가롭게 걷거나, 혼자서 입을 다물고 걷는다. 걸음은 달라도 모두가 지친 표정으로 책을 들고 있다.

 학생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까? 공식적인 대답은 물론 있다.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래서 직업과 안정을 얻고, 아이들을 키워서 그 아이들이 앞날을 준비하게 하고, 그래서 아이들이 직업과 안정을 얻게 한다. 그러나 직업 선택에 대한 갖가지 조언들, 가령, 대학교 팸플릿에서 확실한 기술을 배우는 약학과 같은 학과들이나 취업 기회가 많은 여러 전자 계통 학과들을 수입이 좋은 학과로 꼬집어 말하는 것 같은 조언들에도 불구하고, 정말 놀랍게도 아직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쓰겠다는 학생이 꽤 많다! 이들은 수면 부족으로 멍한 채, 수업과 파트타임 일과 결혼 생활 사이사이 짧은 빈 시간에 글을 휘갈긴다. 수술실에서 걸레질을 하거나,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거나,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리거나, 햄버거를 굽는 동안, 이들의 머릿속은 단어들로 어지럽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예속된 상태 한가운데 어디에서, 광기는 속삭인다. 경험을 쌓으라고. 무엇을? '경이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밤으로의 긴 여로에 오르고, 지혜의 일곱 기둥을 지나고, 공허의 선명한 빛을 찾고....... 이런 학생들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 물론이다. 최소한 한 명. 많아야 두세 명. 이 수천 명 중에서.

 이제 그 학생들 속에서 조지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아, 세상에. 이 학생들이 모두 어떻게 될까? 무슨 기회가 있을까? 지금 당장 가망이 없다고 소리쳐서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지는 그럴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이없고 부적절하게,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조지 자신이 학생들에게 희망의 상징이기 떄문이다. 희망은 잘못이 아니다. 정말이다. 조지는 다만 거리에서 진짜 다이아몬드를 5달러에 파는 사람과 같을 뿐이다. 바삐 지나가는 대다수는 감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니,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대체 이게 몇 년 전 이야기이지? 어떻게 수십 년 전,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가 현재 한국의 상황과 이렇게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는 10년이 늦고 미국보다는 20년이 늦는다는 이야기를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이야기가 돌았던 시절은 우리 나라가 경제 규모로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저 숫자는 기술이나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현재 기준으로는 상황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 분위기나 의식 수준은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저 숫자가 실제로는 더 클 수도 있고. 이것 뿐 아니다. 대학 교수라는 주인공의 직업 특성상, 당시의 대학 모습과 학생들에 대한 묘사가 상당수 등장하는데 놀랄 정도로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똑같은 대학생이라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가 도드라지는데, 이 부분은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짙은 색의 단정한 옷, 흰 셔츠와 넥타이(강의실 안의 유일한 넥타이)는 젊은 남학생들의 공격적으로 남성적인 캐주얼웨어와 확연히 구별된다. 남학생들 대부분은 운동화와 흰 울 양말, 추울 때는 청바지, 더울 떄는 반바지(허벅지를 가리는 버뮤다팬트로, 더 짧은 반바지는 강의실에 어울리지 않는다) 차림이다. (중략) 공부하는 학생에서 한순간에도 공사장 인부나 싸움하는 갱으로 변할 것 같은 모습이다. 남학생은 여학생에 비하면 지저분한 어린아이로 보인다. 여학생들은 모두 십대 시절의 칠푼바지나 헐렁한 셔츠, 위로 부풀린 헤어스타일에서 벗어났기 떄문이다. 여학생들은 벌써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풍기며, 아주 고상한 파티에 참석하는 차림새로 강의에 들어온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내용이 약간씩 바뀐 게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마도 결말 부분일 것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중간 중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20대 시절 이 소설을 접하고 수십 년간 그 감동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작품 속 조지를, 감독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소설 속 조지의 몇몇 대사들이 영화에서는 바뀌었는데, 그 기준은 감독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아니, 환각이라고 말할 만한 효과는 없어. 처음에는 멀미가 나더군. 심하지는 않았어. 그래도 좀 무섭긴 했어. 지킬 박사가 처음으로 약을 먹었을 때도 무서웠겠지. 그런 느낌이었어. 그러다가 색이 아주 밝게 두드러져 보였어. '사람들이 왜 저 색을 못 알아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식당 테이블에 어떤 여자 지갑이 놓여 잇었는데, 그 빨간색이 지금도 눈에 선해. 신문에 난 스캔들 기사처럼 생생했어. 사람들 얼굴은 캐리커처로 보였어.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 성격이 확 드러나 보이고, 아주 단순해지고 선명해졌어. 몹시 잘난 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자기 몸이 아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싸움만 바라는 사람도 잇어. 무엇에도 화내거나 공격적이지 않기 떄문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사람도 몇 명 보여. 이런 사람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 모든 것이 점점 삼차원이 돼. 커튼이 아주 무거워 보이지. 조각품처럼 보이기도 해. 나뭇결은 꺼끌꺼끌해보이고, 꽃과 식물도 아주 생생해져. 보랏빛 화분 하나는 지금도 눈에 선해. 움직이지는 않지만, 분명 움직일 듯 보여. 움직이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아. ......그러다가 사물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내지. 방의 벽들과 주위 모든 것이 숨을 쉬고, 나뭇결이 액체처럼 흐르기 시작하지. ......그러다가 그런 모습은 서서히 다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가. 숙취는 없어. 약효가 사라진 뒤에는 괜찮아."

 

젊은 시절, 잠깐 약물을 복용하고 난 후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조지의 대사이다. 실제로 약물을 복용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렇게 길게 구체적으로 쓰여진 글은 나는 처음 봤기에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내용이 조금 바뀌었는데, 조지는 자신의 눈썹이 보기 싫어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제자인 케니에게 너는 그렇지 말라고 한다. 바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고. 감독이 얼마나 이 소설에, 소설 속 조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침울하고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슬프다. 왜 자기 삶을 이렇게 살고 있을까? 물론 보수가 적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세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물론 회사 중역들과 섞이는 축복을 즐길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4분의 1밖에 살지 않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나? 쓸모없는 소비재를 파는 데 도움을 주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나? 자신이 이 나라의 직업 중 절망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직업을 가진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나?

 확실히 이 우울한 교수들은 모르고 있다. 알려고 노력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 사람들은 스스로 이 직업을 택했고, 이 직업으로 살아야 한다.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을 등치는 법을 배웠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중년, 장사치, 야바위꾼 같은 다수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도 얻은 것은, 인정 못 받고 메마르고 어려운 지식 뿐이다. 그렇다. 대중은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중은 지식없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제품과 실용적인 응용만 바란다. 대중은 말한다. 이 교수들은 한심하다고. 어떤 지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그 지식을 왜 알아야 하나? 우울한 교수들은 그런 대중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며, 자신이 약고 탐욕스럽지 못한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한다.

 

아, 어쩌면 이렇게 요즘 현실과 다를게 없을까. 인류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조지는 지금 이 취기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주 조야하게 말하면, 플라톤의 『대화』같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 그렇다. 그렇지만 『대화』같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은 아니다.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로를 헐뜯는 대결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지루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아니다. 무엇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얼마든지 주제를 바꿀 수 있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특별한 관계에 함꼐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의 생각으로는, 여자와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여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남자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화 상대 사이에는, 가령 흑인과 백인의 대화 같은, 양극성이 있어야 한다. 대화 상대인 두 사람 사이에는 상반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지와 케니의 경우처럼, 연륜과 젊음 같은. 왜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나? 대화는 그 속성상 개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징적인 만나밍다. 대화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편이 갈라지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화에서는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다. 굳은 자기주장이나 무시무시한 비밀이라도, 상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나 단순한 은유를 통해서 객관적인 말이 된다.

 조지는 이 모두를 케니에게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자칫 케니가 이해 못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지는 케니가 이해하기를 바라며, 케니가 이 대화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다.

 

이것 또한 일종의 상징인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동성애가 활발했으며, 그것은 사랑보다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존경이나 찬사와 같은 행위이고 상대의 지식을 내 것으로 전수받고 싶다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소설 속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여기까지 소설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성적 기류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 속에서는 조지, 또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성애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것마저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이 둘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러면서 조지가 떠올리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최고 학자였던 플라톤의 『대화』. 그리고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상대가 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 애인의 갑작스런 죽음 후 스스로 싱글맨이기를 자처하던 그가 조심스레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닥치는 종말.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을 떄까지 싱글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상대와의 진정한 소통을 갈망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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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손가락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권도희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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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1942년 발표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41번째 소설로, 작가 자신이 선정한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나는 혼자 런던에 머무르면서 <N 또는 M>과 이 작품을 번갈아 가며 썼다. 이 작품을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건 17, 18년이 흘러 다시 읽어도 여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훌륭하게 생각되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제리 버턴은 여동생과 함께 요양을 위해 라임스톡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머물게 된다.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시골마을. 그러나 추잡한 모함과 비방을 담은 익명의 편지들이 떠돌고, 편지를 받은 사이밍턴 부인이 모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그 집 하녀 역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된다.

마을 목사의 부인 모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 마플양을 불러오고... 제리는 우연히 또다른 살인을 위한 준비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오히려 기대감을 많이 낮추고 보는 편이 이 책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자신이 선정한 베스트 10에 들어가며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도 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대치가 많이 올라가는데 작가 스스로는 어떤지 몰라도 독자에게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보다 특별히 이 작품이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떡밥'이 많은 작품, 또는 '맥거핀'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으스스하거나 조여오는 듯한 긴장감이 다른 작품들보다는 덜한 편이고, 크리스티의 몇몇 소설을 읽고 나서 한동안 그 소설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작품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오히려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쪽이다. 마플 양은 소설이 절반도 더 지나서야 등장하는데, 아예 등장하지 않았거나 초반에 등장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제리가 초반에 살인 사건을 나름대로 이리 저리 궁리하며, 내쉬 경 또한 이 사건을 제리와 합심하여 또는 제리를 배제하고 풀어나가려 애쓰고, 마지막에 마플 양까지 등장하여 사건 해결은 이리 저리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남녀 두 쌍의 로맨스가 부각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아쉽고,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소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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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이동진의 시네마기행 탐사와 산책 16
오태진, 이동진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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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평론가 이동진이 아직 조선일보 기자 시절일 때, 선배 기자와 함께 연재했던 기사들을 모은 책이다. 나는 잘 몰랐는데, 의외로 영화에 대한 서적은 많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대중들에게 영화라고 한다면, 골치아프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2시간여동안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라고 인식되기 떄문이 아닐까. 굳이 머리 싸매고 읽어갈 필요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동진의 우직함이 더 빛나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국내 영화감독에 대한 그의 인터뷰집 2권을 보면 그 두께와 정성에 압도당할 지경이다.

 

이동진의 팬이라면, 초창기 시절 그가 썼던 글을 읽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낯선 거리에서 영화를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되었는데 그 이후에 나온 여행기들이 '필름 속을 걷다',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여서 세 권의 여행기를 가만히 보면, 영화에 나온 장소를 찾아가 영화의 일부 장면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점, 그리고 책이 전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완결성을 느낄 수 있다. '필름 속을 걷다'는 아직 읽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면 이동진이라는 사람의 변화의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읽은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와 이 책은 동일한 사람의 글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명확히 하자면 이 책은 오태진과 이동진이 함께 썼고, 뒤의 두 책은 회사를 나온 뒤 오롯이 이동진 혼자서 쓴 책이다. 아무래도 이동진이 쓴 유럽편에 시선이 더 많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인사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세월을 두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미생>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쟁'속에서 쓴 글과 '지옥'에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면 너무 센 거 같고,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지만 나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었던 결과물과 자유롭지만 오히려 소소하게 신경쓸 부분은 훨씬 더 많은 가운데서 만들어낸 창작물과의 차이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크게 유럽편과 미국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럽편을 이동진이 썼고, 반 이상에 해당되는 미국편을 오태진이 썼다. 이 책만 보면 둘 사이의 차이가 확 드러나는데, 오태진의 글이 좀 더 기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둘 중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점이 아니라 이때부터 이동진의 글이 일반적인 기사와는 다르게 문학적 향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쓴 책들을 보면 그 경향이 더 도드라지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말랑말랑함에 더 거부감이 들었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딱딱 끊어지는 문장들에 정이 안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묘사를 하거나 감상을 담는 것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나는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보다도 이 책에서의 이동진 스타일이 더 좋았다. '시네마기행', '낯선 거리에서 영화를 만나다', '필름 속을 걷다',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 책 제목만 보아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감성적인 면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는데, '어렴풋이 꿈을 꾸다'는 그 제목이 너무 멜랑꼴리해서 책 읽기 전 약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이 때의 사진들은 전문 사진기자가 당연히 동행해 촬영했고, 최근의 여행기는 이동진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이것또한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사진 때문만이라도 이 책이 나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작가 개인의 입장에서는 최근의 책이 더 애착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나만의 감상이 아니라 모두의 감상이 되려면 지나치게 나의 감성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사진가의 사진이 비록 정형화되어 있고 개성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여행지의 느낌을 가장 잘 전달해주고 책을 읽는 독자에게 사진 한 장만으로도 끌어당기는 힘이 크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뭐냐면, 여행기만 읽는 것으로는 절대 책을 완전히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을 열고 닫는 지점이 전부 영화이기 때문에, 소개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여행기가 재미있을 것이고,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면 여행기가 지루할 것이다. 이동진이 소개했던 영화는 한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재미있게 본 영화라서 그런지 여행기가 재미있었다. 특히 '베를린 천사의 시'의 베를린은 다른 책에서 잘 소개되지 않는 곳이라서 더 인상깊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오스트리아 빈을 읽으면서는 가지고 있던 'before sunrise&before sunset' 시나리오 집에 이동진이 언급한 부분을 밑줄을 치기도 했다. 절판된 게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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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저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어느 날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늑대를 데려와 그 늑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을 함께 산 날들의 기록이다.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며, 본인이 가르치는 대학의 강의실까지 늑대와 동행할 정도로 모든 일상 생활을 늑대와 함께 했으며, 그 시간을 통해 얻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이 책으로 만들어냈다.

 

괴짜도 보통 괴짜가 아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숙한 삶을 살았으며, 작가를 거쳐간 개들이 평범한 개가 아니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충분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다. 독특하면서도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도 잘 알겠고. 처음 늑대를 집에 데려올 때가 20대라서 젊은 나이에 한번쯤 모험심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가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으며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기에 금전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시도라고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건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해볼만한 일은 물론 아니다.

 

아마도 시작할 때는 이 정도까지 올 줄은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곁에서 머물며 동반자가 되어주었고, 당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며 죽고 난 이후 작가의 삶에까지 영향을 줄 줄은 몰랐겠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히 읽으면서 이거 글쓴이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아마 나같은 독자를 의식했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 특히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한느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중요하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뜨끔했다. 첫번째 문장의 어떤 사람들 중 하나에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펼쳐지기도 전에 벌써 니체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 대체로 늑대와의 삶을 통해 깨달은 작가 나름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서술하면서 중간 중간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도 소개한다. 어렸을 때 읽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생각이 났다. 물론 형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사람들, 최소한 교양 있는 사람들과 반려동물 사이의 주된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합당한 개념은 소유가 아니라 보호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닌과의 관계에서는 이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브레닌이 내가 알았던 다른 개들과 확실히 다른 것이 이 때문이다. 브레닌은 특정한 상황과 환경에서만 동생 같았고, 보통은 형으로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형 말이다. 언뜻 보아도 알겟지만 그를 본받기는 쉽지 않았고 한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면서 나는 강해졌다. 브레닌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형이 있을까?

이 대목에서는 좀 황당하기도 했다. 동물 애호가들이나 일부 학자들 중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우월성에 대한 불확실함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거꾸로 자신이 늑대보다 더 미숙한 동생의 입장에 놓는다는 것은 놀라웠다.

 

보통 개들의 성질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인간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은 인간들마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개성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개들도 개성이 모두 다르다. 어떤 개들은 사람을 잘 대르고 어떤 개들은 아주 못됐다. 대부분은 성장 과정이 잘못되어 못된 성질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어릴 적에 키웠던 블루가 첫 3년간 겪었던 고통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부 인간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못된 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못된 개라고 하면 개별 개체를 말하는 것이지, 견종 전체를 싸잡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상, 견종과 성격 간에 약간의 연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부분은 사람으로 바꾸어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인간의 성격은 타고난 것도 어느 정도는 있고, 대부분 성장과정에서 결정되며 동일한 민족, 동일한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겠지만 절대로 그 집단이 전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이 지금은 전세계의 모든 종의 생명을 틀어쥘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우리 영장류는 늑대들이 결코 꿈꿀 수도 없는 것을 해낸다. 바로 예술 문학 문화 과학 등 사물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다. (중략) 인류의 과학적 예술적 지능은 속잉ㅁ수와 계략의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이다.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능이 단순히 속임수와 계략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략) 오히려 내 요지는 교향곡도 거짓말에 속기보다는 거짓말을 잘하는, 계략에 속기보다는 계락을 짜는 능력을 키우도록 발전해 온 자원 역사의 연장된 산물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같은 지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망각할 때 다른 존재를 부당하게 대하고 우리 자신을 학대한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늑대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걸은 길을 비난할 수도 없지만 자축할 것도 없다.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부분은 비약이 심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문명의 발전이 단순히 계략을 짜기 위해 발전해 온 역사의 연장이며, 그 이유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알 길도 없다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아무 근거 없이 억지로 끌어댄 느낌이다. 하지만 동물 실험에 대한 끔찍한 역사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대목에 가서는, 왜 이런 사유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늑대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종들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사이에 서열관계가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를 위한 연구를 위해 무분별하게 동물 실험이 남용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바닥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울타리의 높이를 단계를 거듭할 수록 점점 높여서 벗어나기 힘들게 하고, 설령 벗어나더라도 그 바닥에조차 전기를 흘려서 어느 쪽으로든 고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실험. 이 실험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짓을 집에서 몰래 했다면 솔로몬, 카민, 와인은 기소되어 벌금형에 처해지고 아마도 향후 5~10년간 동물을 키우지 못하다록 하는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감옥에 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하버드의 실험실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은 학문적 성공이라는 기묘한 보상을 받았다. 편안한 생활, 높은 급여, 학생들의 존경, 심지어 동료의 부러움까지. 개를 고문한 것에 대한 대가로 경력이 쌓였고 이를 흉내 낸 실험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후계자는 마틴 셀리그먼이다. 그는 최근 미국심리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비록 동반자로서의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완전히 공감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에서의 관계만큼은 인정해주고픈 생각이 든다. 늑대라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애환, 거기서 오는 자잘한 일화들, 그리고 철학적 사유. 이 사이에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 보면 작가의 결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신정론은 삶에서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신정론은 전통적으로 신에게 호소한다. 신은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신은 인간을 시험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것도 신이다 등등. 신정론 중에는 신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도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의 철학일 것이다. 그는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모든 신정론은 믿음에 근거한다. 그들은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삶이란 목표나 목적을 지닌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녔다면, 공포 아픔 고통은 어디쯤 자리해야 하는가를 탐색한다. 단순히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꺠달음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의미를 추구할 때 왜 우리의 삶은 진정 중요한 것에서 더 멀어지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정론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으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의미란 허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아픔이나 고통도 삶의 의미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삶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대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한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이후 무수히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한한 긍정, 그 허상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하며 삶의 허무를 이론적으로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철학자에게,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대한 명쾌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해지고 마음이 놓이는 결론이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도 저자는 말한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일까? 주변의 존재들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나쁘다는 것일까? 죽음이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야에 한계가 없듯이 삶도 한계가 없다고 했다. (중략) 그는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나타나지 않듯이, 삶의 한계도 삶에서 포착되는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시야의 한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만약에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즉 죽음은 당사자에게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이미 훨씬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닥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중략) 철학자들은 죽음을 박탈의 고통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이해한다.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박탈당한느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인 우리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박탈할 수 있는지이다. 죽음이 우리를 해치는 이유가 '생명'을 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옳다면, 그리고 죽음이 우리 삶의 한계면, 그래서 우리 일생 동안 닥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죽음이 닥치는 동안 삶이란 없는 것이다. (중략)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가능성'일 것이다. 죽음이 훼손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많은 가능성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늑대와 대조시켰을 때 선명해지며, 늑대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명확해진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보면 인간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그에 따라서 얻게 되는 경력에 열심인 이유이다. 우리는 투자한 교육에 비해 일을 해서 얻는 보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고 있다. 전문 교육자인 나 자신만 해도 배움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 양 연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경력 쌓기에 열심이다. 어떤 특정한 것들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망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는 충족될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운이 따르고, 열심히 한다면 특정한 시간 내에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부이건, 직업과 관련이 있건 없건 간에 비전 잇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 같은 욕망을 가지려면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래를 미래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묵시적 의미의 미래는, 충족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명시적 의미의 미래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에 맞추어 나의 삶을 설계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우리 안의 영장류는 이 차이를 알아채고는 자연스럽게 저울질한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종에는 없는, 인간에게만 있는 '미래'라는 개념을 통해 여태껏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저자는 비판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보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가혹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다른 어떤 동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에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믿었다. 어차피 영장류일 수밖에 없는 내가 집필한 《동물의 역습》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SF 철학》에서도 이를 잠시 다루고 있다. 지금 나는 선견지명이 없었던 내 자신과 못난 영장류의 편견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투자라니, 어떻게 이 이상 영장류스러울 수 있을까? 이제야 내 눈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 죽음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그때까지 우리가 쏟았던 투자를 한꺼번에 없애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다른 종보다 잃을 것이 많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그 논리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바위를 굴려 언덕 위로 향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며, 그 행위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아침에 어디론가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몇 년 후 그 자손들이 나와 똑같이 이 행위들을 반복하고... 대체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냐고 작가는 묻는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 목적을 절대로 달성하면 안된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계속 의미를 갖고자 하는 삶의 필요 조건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것은 삶의 의미를 하나의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헛된 희망은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처음에 시지프스는 분명히 언덕 위 그가 올려놓은 장소에 바위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으리라. 하지만 이 희망은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의미가 어떤 최후의 지점이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중략) 브레닌의 죽음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 나는 최상의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간 줄 알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삶보다는 차라리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옥이 온당해 보일 정도였다. 거의 격리 수용되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가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희망이라는 화살은 미지의 세계인 미래를 향하여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다. 희망 또한 욕망의 한 형태이기에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가 되곤 한다. 가끔은 희망을 원래 들어 있었던 하찮은 상자에 다시 넣어 두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 평소에도 막연히 느끼고 있던 삶의 무게,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삶의 허무함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이런 작가는 당연히 종교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나타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생각을 드러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그 삶은 막을 내렸다. 적어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춥고 어두운 1월의 어느 날 밤, 내가 브레닌을 랑그도크에 묻고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거의 죽을 지경으로 술을 퍼마시던 떄, 나는 가끔 내가 그날 밤 정말로 죽은 것처럼 느낀다. 데카르트는 길고도 어두운 영혼의 밤을 극복하기 위한 안식을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았다. 데카르트는 거의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그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리적 신체마저도 의심했으니 말이다. 천부적인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면서도 그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말하는 진실을 의심했다. 하지만 마음이 좋고 너그러운신 하나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엇다. 충실한 마음으로 믿음을 평가한다면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이었다. 데카르트는 아마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하나님과 너그러운 하나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좋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그러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고도 남을 것이다.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은 우리를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약하게 만든다. 우리 삶의 가치가 오직 순간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외의 방법들로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적인 개념의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브레닌이 죽은 그날 밤 브레닌의 무덤 앞에 피운 모닥불 너머로 그의 돌 유령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신이 나에게 '마크, 괜찮네. 항상 그렇게 힘들어 할 필요는 없어. 그만 안심하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좋은 하나님이 아닌 너그러운 하나님이 어떤 죽은 사람에게 하사하신 엄청나게 아름다운 꿈이 아닌가 하고. 이 하나님은 내가 속고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너그러운 하나님이 하실 행동이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마도 늑대 브레닌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작가는 절대로 신의 존재나 종교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책 말미에 저자 마크 롤랜드는 결혼을 하고, 아들도 생겼으며, 그 아들에게 11년 동안 동거했던 늑대 브레닌의 이름을 주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권위,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유명세, 안정된 직장의 연봉에서 나오는 경제적 여유, 남편과 아빠라는 가정에서의 위치까지, 종합적으로 다 고루 갖춘 것 같아 보이는, 그래서 너무나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처럼 보이는 현재의 그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커리어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보잘것없는 대학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시한 강사였던 내가 지금은 미국 유수의 대학으로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과장된 연봉을 받고 있다. 내 책들은 적어도 학구적 출판계에서 인정받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략)  자랑하기 위해서나 지금의 내 자신에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어지러울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끝에 가면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가치 있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자신감을 경계한다. 이 자신감은 영장류의 자신감이다. 사람들에게 심술부리고 꾀부리는 나의 영장류적 영혼이다. 그 영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이며, 이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산 정상에 서야 한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자와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고양이를 키웠더라면 철학자와 고양이가 되었을 것이고, 고래를 키웠다면 철학자와 고래가 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키운 늑대를 통한 철학적 사유. 하지만 이 작가는 대상이 어떤 동물이든, 어떤 식물이든, 그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이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그 자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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