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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저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어느 날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늑대를 데려와 그 늑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을 함께 산 날들의 기록이다.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며, 본인이 가르치는 대학의 강의실까지 늑대와 동행할 정도로 모든 일상 생활을 늑대와 함께 했으며, 그 시간을 통해 얻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이 책으로 만들어냈다.
괴짜도 보통 괴짜가 아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숙한 삶을 살았으며, 작가를 거쳐간 개들이 평범한 개가 아니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충분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다. 독특하면서도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도 잘 알겠고. 처음 늑대를 집에 데려올 때가 20대라서 젊은 나이에 한번쯤 모험심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가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으며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기에 금전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시도라고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건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해볼만한 일은 물론 아니다.
아마도 시작할 때는 이 정도까지 올 줄은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곁에서 머물며 동반자가 되어주었고, 당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며 죽고 난 이후 작가의 삶에까지 영향을 줄 줄은 몰랐겠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히 읽으면서 이거 글쓴이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아마 나같은 독자를 의식했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 특히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한느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중요하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뜨끔했다. 첫번째 문장의 어떤 사람들 중 하나에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펼쳐지기도 전에 벌써 니체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 대체로 늑대와의 삶을 통해 깨달은 작가 나름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서술하면서 중간 중간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도 소개한다. 어렸을 때 읽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생각이 났다. 물론 형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사람들, 최소한 교양 있는 사람들과 반려동물 사이의 주된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합당한 개념은 소유가 아니라 보호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닌과의 관계에서는 이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브레닌이 내가 알았던 다른 개들과 확실히 다른 것이 이 때문이다. 브레닌은 특정한 상황과 환경에서만 동생 같았고, 보통은 형으로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형 말이다. 언뜻 보아도 알겟지만 그를 본받기는 쉽지 않았고 한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면서 나는 강해졌다. 브레닌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형이 있을까?
이 대목에서는 좀 황당하기도 했다. 동물 애호가들이나 일부 학자들 중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우월성에 대한 불확실함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거꾸로 자신이 늑대보다 더 미숙한 동생의 입장에 놓는다는 것은 놀라웠다.
보통 개들의 성질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인간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은 인간들마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개성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개들도 개성이 모두 다르다. 어떤 개들은 사람을 잘 대르고 어떤 개들은 아주 못됐다. 대부분은 성장 과정이 잘못되어 못된 성질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어릴 적에 키웠던 블루가 첫 3년간 겪었던 고통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부 인간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못된 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못된 개라고 하면 개별 개체를 말하는 것이지, 견종 전체를 싸잡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상, 견종과 성격 간에 약간의 연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부분은 사람으로 바꾸어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인간의 성격은 타고난 것도 어느 정도는 있고, 대부분 성장과정에서 결정되며 동일한 민족, 동일한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겠지만 절대로 그 집단이 전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이 지금은 전세계의 모든 종의 생명을 틀어쥘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우리 영장류는 늑대들이 결코 꿈꿀 수도 없는 것을 해낸다. 바로 예술 문학 문화 과학 등 사물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다. (중략) 인류의 과학적 예술적 지능은 속잉ㅁ수와 계략의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이다.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능이 단순히 속임수와 계략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략) 오히려 내 요지는 교향곡도 거짓말에 속기보다는 거짓말을 잘하는, 계략에 속기보다는 계락을 짜는 능력을 키우도록 발전해 온 자원 역사의 연장된 산물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같은 지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망각할 때 다른 존재를 부당하게 대하고 우리 자신을 학대한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늑대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걸은 길을 비난할 수도 없지만 자축할 것도 없다.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부분은 비약이 심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문명의 발전이 단순히 계략을 짜기 위해 발전해 온 역사의 연장이며, 그 이유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알 길도 없다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아무 근거 없이 억지로 끌어댄 느낌이다. 하지만 동물 실험에 대한 끔찍한 역사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대목에 가서는, 왜 이런 사유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늑대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종들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사이에 서열관계가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를 위한 연구를 위해 무분별하게 동물 실험이 남용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바닥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울타리의 높이를 단계를 거듭할 수록 점점 높여서 벗어나기 힘들게 하고, 설령 벗어나더라도 그 바닥에조차 전기를 흘려서 어느 쪽으로든 고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실험. 이 실험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짓을 집에서 몰래 했다면 솔로몬, 카민, 와인은 기소되어 벌금형에 처해지고 아마도 향후 5~10년간 동물을 키우지 못하다록 하는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감옥에 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하버드의 실험실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은 학문적 성공이라는 기묘한 보상을 받았다. 편안한 생활, 높은 급여, 학생들의 존경, 심지어 동료의 부러움까지. 개를 고문한 것에 대한 대가로 경력이 쌓였고 이를 흉내 낸 실험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후계자는 마틴 셀리그먼이다. 그는 최근 미국심리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비록 동반자로서의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완전히 공감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에서의 관계만큼은 인정해주고픈 생각이 든다. 늑대라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애환, 거기서 오는 자잘한 일화들, 그리고 철학적 사유. 이 사이에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 보면 작가의 결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신정론은 삶에서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신정론은 전통적으로 신에게 호소한다. 신은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신은 인간을 시험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것도 신이다 등등. 신정론 중에는 신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도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의 철학일 것이다. 그는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모든 신정론은 믿음에 근거한다. 그들은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삶이란 목표나 목적을 지닌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녔다면, 공포 아픔 고통은 어디쯤 자리해야 하는가를 탐색한다. 단순히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꺠달음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의미를 추구할 때 왜 우리의 삶은 진정 중요한 것에서 더 멀어지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정론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으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의미란 허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아픔이나 고통도 삶의 의미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삶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대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한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이후 무수히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한한 긍정, 그 허상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하며 삶의 허무를 이론적으로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철학자에게,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대한 명쾌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해지고 마음이 놓이는 결론이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도 저자는 말한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일까? 주변의 존재들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나쁘다는 것일까? 죽음이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야에 한계가 없듯이 삶도 한계가 없다고 했다. (중략) 그는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나타나지 않듯이, 삶의 한계도 삶에서 포착되는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시야의 한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만약에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즉 죽음은 당사자에게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이미 훨씬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닥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중략) 철학자들은 죽음을 박탈의 고통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이해한다.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박탈당한느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인 우리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박탈할 수 있는지이다. 죽음이 우리를 해치는 이유가 '생명'을 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옳다면, 그리고 죽음이 우리 삶의 한계면, 그래서 우리 일생 동안 닥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죽음이 닥치는 동안 삶이란 없는 것이다. (중략)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가능성'일 것이다. 죽음이 훼손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많은 가능성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늑대와 대조시켰을 때 선명해지며, 늑대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명확해진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보면 인간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그에 따라서 얻게 되는 경력에 열심인 이유이다. 우리는 투자한 교육에 비해 일을 해서 얻는 보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고 있다. 전문 교육자인 나 자신만 해도 배움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 양 연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경력 쌓기에 열심이다. 어떤 특정한 것들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망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는 충족될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운이 따르고, 열심히 한다면 특정한 시간 내에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부이건, 직업과 관련이 있건 없건 간에 비전 잇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 같은 욕망을 가지려면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래를 미래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묵시적 의미의 미래는, 충족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명시적 의미의 미래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에 맞추어 나의 삶을 설계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우리 안의 영장류는 이 차이를 알아채고는 자연스럽게 저울질한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종에는 없는, 인간에게만 있는 '미래'라는 개념을 통해 여태껏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저자는 비판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보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가혹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다른 어떤 동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에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믿었다. 어차피 영장류일 수밖에 없는 내가 집필한 《동물의 역습》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SF 철학》에서도 이를 잠시 다루고 있다. 지금 나는 선견지명이 없었던 내 자신과 못난 영장류의 편견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투자라니, 어떻게 이 이상 영장류스러울 수 있을까? 이제야 내 눈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 죽음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그때까지 우리가 쏟았던 투자를 한꺼번에 없애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다른 종보다 잃을 것이 많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그 논리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바위를 굴려 언덕 위로 향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며, 그 행위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아침에 어디론가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몇 년 후 그 자손들이 나와 똑같이 이 행위들을 반복하고... 대체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냐고 작가는 묻는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 목적을 절대로 달성하면 안된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계속 의미를 갖고자 하는 삶의 필요 조건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것은 삶의 의미를 하나의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헛된 희망은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처음에 시지프스는 분명히 언덕 위 그가 올려놓은 장소에 바위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으리라. 하지만 이 희망은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의미가 어떤 최후의 지점이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중략) 브레닌의 죽음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 나는 최상의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간 줄 알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삶보다는 차라리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옥이 온당해 보일 정도였다. 거의 격리 수용되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가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희망이라는 화살은 미지의 세계인 미래를 향하여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다. 희망 또한 욕망의 한 형태이기에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가 되곤 한다. 가끔은 희망을 원래 들어 있었던 하찮은 상자에 다시 넣어 두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 평소에도 막연히 느끼고 있던 삶의 무게,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삶의 허무함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이런 작가는 당연히 종교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나타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생각을 드러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그 삶은 막을 내렸다. 적어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춥고 어두운 1월의 어느 날 밤, 내가 브레닌을 랑그도크에 묻고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거의 죽을 지경으로 술을 퍼마시던 떄, 나는 가끔 내가 그날 밤 정말로 죽은 것처럼 느낀다. 데카르트는 길고도 어두운 영혼의 밤을 극복하기 위한 안식을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았다. 데카르트는 거의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그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리적 신체마저도 의심했으니 말이다. 천부적인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면서도 그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말하는 진실을 의심했다. 하지만 마음이 좋고 너그러운신 하나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엇다. 충실한 마음으로 믿음을 평가한다면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이었다. 데카르트는 아마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하나님과 너그러운 하나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좋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그러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고도 남을 것이다.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은 우리를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약하게 만든다. 우리 삶의 가치가 오직 순간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외의 방법들로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적인 개념의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브레닌이 죽은 그날 밤 브레닌의 무덤 앞에 피운 모닥불 너머로 그의 돌 유령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신이 나에게 '마크, 괜찮네. 항상 그렇게 힘들어 할 필요는 없어. 그만 안심하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좋은 하나님이 아닌 너그러운 하나님이 어떤 죽은 사람에게 하사하신 엄청나게 아름다운 꿈이 아닌가 하고. 이 하나님은 내가 속고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너그러운 하나님이 하실 행동이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마도 늑대 브레닌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작가는 절대로 신의 존재나 종교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책 말미에 저자 마크 롤랜드는 결혼을 하고, 아들도 생겼으며, 그 아들에게 11년 동안 동거했던 늑대 브레닌의 이름을 주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권위,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유명세, 안정된 직장의 연봉에서 나오는 경제적 여유, 남편과 아빠라는 가정에서의 위치까지, 종합적으로 다 고루 갖춘 것 같아 보이는, 그래서 너무나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처럼 보이는 현재의 그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커리어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보잘것없는 대학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시한 강사였던 내가 지금은 미국 유수의 대학으로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과장된 연봉을 받고 있다. 내 책들은 적어도 학구적 출판계에서 인정받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략) 자랑하기 위해서나 지금의 내 자신에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어지러울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끝에 가면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가치 있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자신감을 경계한다. 이 자신감은 영장류의 자신감이다. 사람들에게 심술부리고 꾀부리는 나의 영장류적 영혼이다. 그 영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이며, 이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산 정상에 서야 한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자와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고양이를 키웠더라면 철학자와 고양이가 되었을 것이고, 고래를 키웠다면 철학자와 고래가 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키운 늑대를 통한 철학적 사유. 하지만 이 작가는 대상이 어떤 동물이든, 어떤 식물이든, 그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이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그 자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