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사이언스 북 - 엉뚱하고 기발한 과학실험 111
레토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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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사이언스 북.

 

한글 말로 옮기면? 미친 과학 책.

 

1304년 이후 지금까지, 700여년의 시간 동안, 과학사의 수많은 실험 중 "대체 어떻게 저런 실험을?" "저 사람 미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 밖에 없는 111가지 ‘미친’ 실험에 대한 소개서이다. '과학'이라는 말 떄문에 읽기도 전에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은 특별한 과학적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으며, 상당수는 심리학자들의 실험이 많고, 또 서프라이즈같은 프로그램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알려진 실험들도 많아서 전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스탠리 밀그램(1961 끝까지, 450볼트의 전기충격을 가한 까닭 1963 길바닥에 편지가 떨어져 있을떄 1967 정말, 여섯 단계만 거치면 모두가 아는 사이?)이나 필립 잠바르도 (1969 누구에게나 파괴본능은 있다 1971 스탠퍼드의 감옥, 아부그라이브의 감옥)처럼 한번쯤 들어봤던 실험들도 있다.

 

외국 책을 보면 이렇게 대중을 위한 과학서가 참 많고, 그 중에 훌륭한 책도 참 많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고, 나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쉬운 부분도 많다. 그 아쉽다는 것이, 저자가 부족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나의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은 과학 교양서를 즐겨 읽지 않는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이 책의 원제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 영어 단어 mad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미친다는 뜻으로 간단하지만, 우리말의 '미치다'도 사전을 찾아보면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지나치고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다'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다'로 미묘하게 다르며, 영어 단어로도 mad, crazy, insane, lunatic, frenzied, frantic 등등 다양하며 속어까지 합치면 훨씬 많다. 이 모든 단어가 비슷한 의미를 뜻하겠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미치다'라는 표현만큼은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다양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최소한 영어 단어 mad는 단순히 정신이상자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실린 모든 실험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경악할 내용인 것은 확실하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사에 일정한 정도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개중에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인용이 되며 영향을 주는 실험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의 실험일수록 피실험자의 인권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그 시기는 20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는데, 아마도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나,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인식은 그보다 더디게 확립되었을 것이고, 가장 과학이 발달하여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미국이 당시 세계 정세상 소련과 일본, 중국을 끊임없이 의식한 결과 지금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용인되기 힘들 정도의 실험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몇 가지 실험들>

 

1852 음탕한 얼굴근육

프랑스 의사 기욤 뱅자맹 아르망 뒤센 드 불로뉴는 1842년 36세의 나이에 프랑스 북부 영불해협 연안의 불로뉴쉬 르메르에서 파리로 이사한 후 확실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당시 센 강 좌안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는 병명이 명확하지 않은 마비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었다. 주로 간질병 환자, 경련 환자, 하반신마비 환자들을 진료한 그는 이들의 근육을 하나씩 전기로 자극해가며 신경성 질환에 관한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마비된 근육을 전기로 자극할 수 있다면, 이것은 조절메커니즘이 손상된 것, 즉, 뇌 속이나 뇌와의 연결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근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 뒤센의 이름은 가장 유명한 근육위축 질병인 뒤센형 근이영양증Duchenne type muscular dystrophy으로 기억되고 있다. 뒤센이 연구한 근육은 모두 얼굴근육으로, 실험하는 동안 전기로 얼굴을 자극해 감정의 동요를 유발하려고 애썼고, 감정에 따라 활성화된 근육에 각 감정의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슬픔의 근육(입꼬리내림근), 고통의 근육(눈썹주름근), 음탕의 근육(코근)등이다. 그리고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의 차이는 눈둘레근의 가쪽 부분에 있는데, 이 근육은 자연스러운 진짜 웃음의 경우에만 활성화된다고. 전극자극법에는 전기로 근육을 자극한 효과가 아주 잠깐 동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에, 순간적인 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사진술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뒤센은 오늘날 그저 역사적으로 흥미 있는 신경학자로 남는 데에 그쳤을 것이다. 

 

1945 48주 동안의 길고 긴 굶주림

 

100명이 넘는 양심적 전시군복무 거부자들이 지원한 안셀 키스의 실험이 1945년 2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최종 선발된 36명은 하루 1500킬로칼로리 정도의 영양을 공급받으며 체중 감소, 탈모, 추위에 대한 민감도, 인체의 화학조성과 변동, 내장 기관 같은 육체적 변화와 지능, 주의력, 개성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피실험자들은 어떤 지속적인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몸상태를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렸으며 실험기간동안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 무감동, 사회적 소극성이 관찰되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거식증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며 식이장애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1950 착하게 살아라, 그렇다고 얼간이 짓은 하지 말고!

존 내시의 최소최대정리와 관련된 실험의 이야기이다. 그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절도, 세금포탈, 무임승차,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까지, 세계는 온통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무런 해결점도 찾지 못했지만, 수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분양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바탕을 둔 수백 편의 연구논문이 쏟아진 이후, 입증된 최고의 전략은 이것이다. 처음에는 '협조'할 것. 그리고 두 번째부터는 앞에서 상대방이 했던 그대로 '협조'와 '비협조'를 따라할 것. 이것은 다음과 같이 진화되었다. 상대방이 속이면 즉시 반격하고, 그 다음에는 상대방을 용서하고 다시 협조할 것. 즉, 착하게 살되, 얼간이는 되지 말 것.

 

1955 거미들의 수난-3: 이젠 오줌물까지?

정신병을 일으키는 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다. 메스칼린이나 LSD같은 약물을 복용하면 건강한 사람도 정신분열증 환자와 같은 징후를 보였다. 화학물질들이 단기간의 환각작용과 자아분열증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단지 변덕스러운 신체화학의 작용이 항상 일어나기 때문에 늘 그런 증상이 생긴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물학자 한스 페터 리더는 정신분열증 환자 열다섯 명의 오줌을 모아 거미에게 먹인 후 정상인의 오줌을 먹인 거미와의 거미줄을 비교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고.

 

1959 세 명의 예수 그리스도, 한곳에서 마주치다

1959년 7월 1일, 심리학자 밀턴 로키치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여기고 있었던 세 남자를 2년 동안 한 병원에서 침대를 나란히 놓고 잠을 자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세탁소에서 비슷한 일을 하게 했다. 정신의학사에서 가장 기괴한 실험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가장 모순되는 상황, 즉, 자기와 똑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과 맞부딪힐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윤리적인 이유로 실행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정신병 환자들이라면 가능하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이 진짜 그리스도라는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정체성 문제를 단호하게 해결하여 충돌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냥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여 살게 되었다.

 

196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여덟 사람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심리학과 대학원생 한 명, 심리학자 세 명, 소아과의사, 정신과의사, 화가, 주부까지 총 8명이 같은 거짓 증상을 가지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가짜 환자 누구도 들키지 않았으며 평균 3주 후에는 모두  퇴원에 성공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연극을 알아챈 사람들은 다른 환자들이었다고 한다. 1973년 실험이 발표되고 비판과 성과가 이 실험의 결과에 함께 찾아왔다.

 

1984 박테리아야, 내게 위염을 일으켜다오!
서른세살의 베리마셜은 헬리코박터가 잔뜩 들어있는 죽을 마셨다. 대학 당국에 실험허가를 요청하지도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자기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은 그실험은 결코 허락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위궤양의 원인이 스트레스가 아닌 세균이며, 헬리코박터가 위염과 위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 공로로 200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 실험은 '코흐의 공리'가 실제로 적용된 아주 적합한 사례로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으며 실험이재미있고 과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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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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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이 단편에는 푸아로도 마플도 등장하지 않는다. 탄생 배경이 특이한데, 1947 BBC 방송국장이 당시 영국 메리 여왕의 80세 생일을 맞아 생일 축하 방송으로 무엇을 듣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는 웅장한 오페라나 셰익스피어 연극을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뜻밖에도 메리 여왕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극을 듣고 싶다는 대답을 보내왔다고. 크리스티의 열렬한 팬이었던 여왕의 의사를 전달받은 크리스티는 1주일 만에 작품을 완료했으며 메리 여왕은 3분짜리 방송극을 듣고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그 작품이 바로 이 쥐덫의 원본인 어린 쥐의 복수이다. 나중에 크리스티는 이것을 5막의 장막극으로 각색했으며 19521125일 런던 앰배서더스 극장에서 첫 공연을 한 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되어 최장기 공연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고.

괴상한 장난

마플 양이 등장하는 단편.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여배우 제인 헬리어의 소개로 백부로부터 거대한 유산 상속을 약속받았으나 실제로는 그 재산은 존재하지도 않아 당황한 두 젊은이들을 도와주는 이야기. 그녀가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언급했던 헨리 백부의 에피소드도 어우러져 짧은 단편인데도 두 가지 이야기를 읽은 느낌.

줄자 살인 사건

마플 양이 등장하는 단편. 하녀 출신으로 성공한 스패로우 부인의 살해된 사건. 범인을 추리하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지만 범인과 관련된 그 뒷이야기가 흥미롭다.

완벽한 하녀 사건

마플 양이 등장하는 단편. 괴상한 스키너 자매의 이야기. 나로서는 이야기흐름과는 큰 관계는 없지만 하녀들에 대한 묘사 때문에 더 재미있었던 이야기. 왜냐하면 이제는 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의 이야기니까.

관리인 사건

마플 양이 등장하는 단편. 끝없는 밤이 연상되었다. 관리인 노파는 집시 노파의 전신.

공동주택 4

푸아로가 등장하는 단편. 네 명의 젊은이가 등장하는데 상인들이 고기나 양배추 같은 것을 담아 올려 보내는 옥내 승강기, 석탄 운반기와 같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런 아파트에 푸아로가 거주했다니, 당시 경제적으로 아주 넉넉한 편은 아니었나 하고 추측하게 된다.

조니 웨이벌리 사건

갑부의 아들이 유괴당한 사건. 푸아로가 멋지게 해결한다.

검은 딸기로 만든 '스물네 마리 검은 새'

걸쭉한 토마토 수프에 비프스테이크, 콩팥 푸딩에 검은 딸기 파이. 사소해 보이는 단서가 살인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 푸아로가 등장하는 단편.

사랑의 탐정

할리 퀸 탐정이 등장하는 단편. 나는 크리스티 세계의 할리 퀸은 처음 접해봐서 할리 퀸 자체에 대한 묘사가 더 많았으면 했다. 사랑의 탐정이라는 말이 굉장히 로맨틱한데, 실제로는 살인 사건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연인 관계의 해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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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두번째 이야기 아주 사적인, 긴 만남 2
마종기.루시드 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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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말없이 노래만 하는 공연이다보니 서운하다거나 심지어 이거 불친절한 거 아니냐는 반응도 아주 일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이 상태가 가장 편하고 좋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왜 친절해야 하는지를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친절은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지요. 음악을 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면 그만입니다.

 

그래, 우리의 생은 비록 아무의 박수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정성을 다한 생애였고 보람찬 생애였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살아낸 삶, 남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뜬눈으로 밤샘을 한 그 숱한 날들이 그 순간 주마등같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비록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서로 외로워하며 생을 마칠지라도 우리 모두는 마지막 순간에 만족한 얼굴에 미소를 환하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치든 무엇이든 '극'을 싫어합니다. 극좌도 극우도 말이지요. 아무리 명분이 설득력이 있다고 해도 극단이 세상에 가져다주는 미덕은 없다고 믿으니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어떤 번역가의 인터뷰를 아주 인상 깊게 보았답니다. 두 가지 대목이 기억나는데, 하나는 "번역이 어렵지 않으세요?"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아니요,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해내는 일을 보면,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대단하다 싶지요. 하지만 각자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내는 것뿐입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 번역을 그냥 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머릿속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아니 내가 감각하는 것을 내 자아가 느끼게 되는 과정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든 encoding(부호화)decoding(해독)도, 심지어 디지털 아날로그의 converting(전환)도 모든 게 '번역'이지요. 그렇다면 예술가들도 그런 것일까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그것이 심상이든 정서든)를 각자의 방법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 어떤 방식의 번역에 능숙한가에 따라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곡을 지을 테고요.

 

그런데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기 떄문에 정작 체코인들은 그를 '국민작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사실 독일어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온 체코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소설가 카프카가 <몰다우(블타바) 강>의 스메타나만큼은 체코인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요. 생의 반 정도를 타의에 의해 외국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런 것에 비하면 카프카는 어차피 유대인이고 그가 프라하에 살던 때에도 한정된 주거지인 유대인 동네를 마음대로 떠나서 살 수 없는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카프카는 그가 태어나 대학까지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생전에는 발표하지도 못한 많은 소설과 산문을 쓴 곳이 바로 프라하이지요. 빈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죽은 후에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힌 것을 생각하면 비록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그를 프라하 사람으로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카프카를 말하다보니 그 30년 정도 후에, 비슷한 곳에 살면서 카프카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간 유명한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이 생각납니다. 그는 체코 출신은 아니고 그 주변국인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그리고 1970년, 50세 나이에 프랑스의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지요. 버림받으면서 늘 위험한 생을 살아야 했던 유대인 문학가. 원수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독일을 싫어하면서도 그 독일 언어를 사랑하여 독일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시인 첼란과 작가 카프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파울 첼란도, 프란츠 카프카도 여러 언어의 경계에 서 있던 작가들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프카가 태어났을 땐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기 이전이었으니 그의 제 1 언어는 자연스레 독일어였겠네요. 하지만 프라하의 아니 유럽의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나 체코어 화자들 가운데에서 살았을 테니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았겠지요. 독일어와 체코어, 이디시어가 뒤섞인 언어적 혼란이기도 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혼란스런 경계에서 파생된 에너지가 그들의 문학작품으로 고스란히 남겨진 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요즘 부쩍 그 '경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불안과, 그 불안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에너지 말이지요. 조금 우스운 비유일진 몰라도, 농사를 짓는 어떤 분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는데요. 한 품종을 한 밭에 심는 경우보다 섞어심기를 했을 때 작물이 훨씬 잘 자라더라는 겁니다. 심지어 밭을 반으로 나누어 두 작물을 양쪽에 반반 심었는데 한 가운데 경계에 맞물린 작물이 다른 작물보다 유독 더 잘 자라더라는 얘기도 해주셨지요. 그분도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그 경계에서 나오는 작물들의 경쟁과 투쟁의 에너지가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만 하셨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려는 사람은 떄떄로 고아처럼 외로워야만 한답니다. 오죽하면 작곡가 베토벤은 외로움이 자신의 종교라고까지 고백했겠습니까. 미국의 의사 시인으로 미국 현대시의 문을 연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외로움을 자주 느끼지 않는 자는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고아처럼 느끼게 하는 이 비 오는 우중충한 시간을 아파하면서도 고마워하고, 고국을 멀리 떠나 살고 있는 내 신세를 힘들어하면서도 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끔은 죽은 내 동생의 이름을 부르다가 너무 외로워져서 눈물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뜨거운 눈물은 시인이 되고 싶은 내 꿈의 다른 표징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아파하며 받아들입니다.

 

윤석군이 바리톤기타 솔로곡을 새로 만들어 피앙세에게 들려주었더니 '편안하다'고만 말했다고, 멜로디와 진행, 코드가 얼마나 독특하고 새롭고 의미 깊은 곡인데 그냥 편안하다고만 할까 하고 좀 섭섭했다는 말이 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제일 가까운 피앙세가 작품의 의도뿐 아니라 작품의 앞뒤 구석구석을 다 이해해주고 감동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어느 예술가에게는 없겠습니까. 나도 한떄는 문학이나 시를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 않는 아내에게 그런 욕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요. 가끔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동서양 예술가들의 평전을 심심풀이 삼아 읽어보면 상대방의 예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늘 격려해가면서 평생을 산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정반대의 부부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도스토옙스키같이 부인의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존경과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글을 썼던 소설가나 동시대의 문호인 톨스토이같이 아내로부터 소설가로서의 존경심이나 경외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글을 써왔던 이가 모두 다 같이 좋은 작품을 썼다는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내가 또 보로딘의 음악에 경도되고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세인트피터스버그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학자 겸 화학자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평생을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친 교수였고 알데하이드나 벤젠의 연구에도 세꼐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그의 음악이 스케일로 보아서 러시아 음악을 대표한다고도 하지요. 차이콥스키보다 보로딘의 음악,특히나 교향곡 2번을 들어야 러시아 음악의 정수를 접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지요. 어쩄든 보로딘 교수에게는 평생 '주말 음악가'라는 별명이 훈장같이 붙어다녔답니다. 그렇게 그는 의대에서 교수와 연구원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고 평생 아픈 아내를 간호도 해야 했다는군요. 언뜻 내가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엉터리 '주말 시인'이 아닐까 부끄러워했던 이곳에서의 내 의사생활이 기억나기도 하네요.

 

주말 음악가라...... 그것도 참 재미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꼬는 의도로 사람들이 만든 단어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한 때 주말 음악가였지요. 아니, 연말 음악가였다고 해야 하나요. 유학 시절, 연말에만 한국에 들어와 공연이나 녹음을 하고 돌아가곤 했으니까요. 저는 사람이 살면서 하나에 온 삶을 바치는 것도 의미 있고 숭고한 일이지만, 새로운 일에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후회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사랑이든, 일이든, 배움이든 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선생님이 온전한 의사이면서도 온전한 시인이시라고 굳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항상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의사일수록 초심을 잃은 분이 많고 진심이 많이 흩어져 환자를 다르게 보는 의사들이 많지요. 그런 분에게야말로 또다른 시야의 눈을 주고, 한계를 넓혀주는 인문학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 좋은 의사의 직분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략) 잘난 척하는 의사들은 단세포적인 과학 일변도의 사고이기 쉽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환자 진료나 진단에 단 하나의 오진이나 오판이 없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차가운 과학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과학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의학의 발전을 험담하자는 게 아닙니다. 의사는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지만 언제나 감성을 가진 환자의 도우미가 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과학으로 무장된 의학의 오진도 훨씬 줄어든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젊은 시인 한 분이 메일을 보내면서 요즘은 너무 외로워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내가 답신을 보내면서 그렇게도 사는 게 실망스러울 때는젊었던 날의 나를 좀 상상해봐달라고 했습니다. 고국의 산천과 그곳에 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천리만리 헤어져서 매일 언어도 안 통하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야 했던 20대의 내가 안고 살았던 긴장감과 불안과 절망 그리고 그 안에 숨은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요. 그렇게 온몸을 조이는 외로움으로 몸을 떨면서 그래도 악착같이 모국어로 시를 쓰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초라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냐고요. (중략) 그러고 보면 내가 오래전 한일회담 반대 서명으로 영창에 감금되고 평생 처음 받은 심문과 고문에 혼쭐이 나고 그 후유증이 오래갔던 일이나, 또 내가 2년 금고형을 받고 의사면허증을 빼앗길 것이라는 소문에 괴로워하시면서 내 구속중에 매일 소주를 한 되씩 드시고 급기야 얼마 안 가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내 아버지. 또 일간신문사 민완기자로 활동하다 이북에 사는 아들에게 쪽지 편지 한 장 전해달라는 큰아버지의 애걸을 거절하지 못하고 남북회담 취재 때 북쪽 기자에게 전했다가 그 당장 직장에서 쫓겨나 미국에 살던 내게 와서 고생만 하다가 갑작스런 참변으로 죽은 내동생. 동생의 죽음 후에 일부러인 듯 갑자기 치매 증세를 보이시다가 외로이 이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그 모두가 사랑하는 고국과 연결이 된 부끄럽고 불미스러운 일들이네요. 그러나 한마디로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합니다. 내 부모님도 내 동생도 물론 그럴 것입니다.

 

시는 내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 내 삶의 지주 역할을 해주었지요. 헛된 욕망에 시달리고 떄로 절망하며 중심과 균형이 흔들릴 때 내 문학은 그런 것을 버틸 수 있는 대들보의 역할을 해주었어요. 윤석군도 그런 믿음을 당신의 음악에서 찾아서 움켜가져야 합니다. 그런 결심과 믿음이 없이는 좋은 음악을 찾아 헤매는 고통과 번민의 와중에서 지쳐갈 때 깃발을 놓아버리기 쉽습니다. 언젠가도 말한 적이 있지만 문학이란 자유를 찾아가는 생의 한 과정이라고 나는 믿어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살아온 세상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나는 평생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확실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에만 의지해 살아온 의사였지만 누구에게라도 언제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마도 내가 어쩔 수 없이 삶과 죽음의 가교에 서서 오래 살아온 떄문인지 모르겠지만요. 그중 하나는 주위의 착한 이웃을 위해 정성을 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도 늘 엄격해야겠지만, 그래서 강직한 사람도 되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착하고 힘없는 것에 더 마음을 주고 그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시간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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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완전판) - 커튼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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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그 유명한 배트맨 트릴로지의 감독이며, 인터스텔라의 감독이기도 한 이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그의 두번째 영화였던 메멘토.

 

전형적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에, 당시 출연 배우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다 보고 나면 일단 그 반전 자체에 첫번째로 놀라고, 또 그 영화가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전을 택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메멘토 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이 배트맨 트릴로지 중 두번째 작품인 다크나이트.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조커로 나오는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2005년의 배트맨 비긴즈, 2008년의 다크 나이트, 2012년의 다크나이트 라이즈까지 모든 작품이 다 훌륭하지만 특히 가장 좋은 것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보통 형만한 아우 없다고, 속편이 더 좋은 경우는 드물다고 하는데 그 드문 예외중 하나가 배트맨 시리즈 말고도 대부 삼부작. 두번째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대부 2가 1편이 놓쳤던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속편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두번째 영화인 다크 나이트에 별점 10을 주었고, 세번째 영화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별점 8점을 주며 마지막 시리즈에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라는 20자 평을 주었다. 상관없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이 작품에 대한 내 생각이 딱 그렇기 때문이다. 수많은 크리스티의 작품 중 이 작품이 가장 훌륭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훌륭하며,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자 포와로의 마지막이 그려진 이 작품은 그야말로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첫 작품은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여러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끝에 겨우 출판되었다. 출판된 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사건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 물론 사후에 유작이 출간되기는 했지만 그녀가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 출간된 작품이며 그녀 스스로 푸아로의 최후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야말로 애거서 크리스티가 스스로 멋지게 마무리지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사실 이 작품은 실제 출간된 시기보다 30년전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즉, 이미 오래전, 거의 그녀 작품 활동이 중반부, 한참 푸아로가 활약하고 있던 그 시기에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작품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부러 첫 작품과 수미상관을 이룬 것도 그렇고. 바로 그 저택에서 함께 있었던 헤이스팅스와 함께 푸아로의 마지막을 그린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그 이후 헤이스팅스는 결혼도 했고 2남 2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현재 아내는 세상을 떠난 상태. 막내 주디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명의 자녀들은 해외에 나가 있고, 주디스마저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려고 한다. 스타일스 저택 당시의 한참 젊었고, 또 그 나이 또래의 여자에게 연정을 품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세월의 무상함이라고 할까. 마음 한 쪽이 아련해지는 맛이 있다. 스타일스 저택 또한 주인이 바뀌었고, 당시 소유주였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그 주변에 살고 있지 않다. 생전에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했던 크리스티는 시간의 흐름과, 거기에 따른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느꼈을 것이며, 꼭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종종 등장하는 푸아로나 마플 양의 대사에서 노년의 쓸쓸함을 읊기도 했다. 여러모로 마음 한 구석이 시리는 부분이 많은데, 특히 크리스티의 팬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 옛날처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동기나 수법에 있어서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띈다. 재미있는 것은, 크리스티 소설 후반에 갈수록 범인의 심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드러나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 범인 심리를 빼면 할말이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사실 크리스티의 말년이 아니라 오히려 초반에 가까운 시절일 텐데, 마치 그녀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계획해놓은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다소 맥빠진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범인이 누구이며 그 범인의 배경과 동기에 집중하기보다는 푸아로의 말년과 헤이스팅스와의 우정이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 이 소설에서는 범인 스스로의 동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이 전부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헤이스팅스와 그의 딸, 스타일스 저택의 세 주인이 된 러트렐 대령 부부, 헤이스팅스의 딸을 고용하고 있는 의사 프랭클린과 그의 아내, 전형적인 카사노바인 앨러턴 소령과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는 캐링턴 경, 그리고 쌍안경을 들고 새를 관찰하는 노턴과 매력적인 콜, 그리고 병약한 프랭클린의 아내를 간호하는 간호사 크레이븐, 사실 이 각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야말로 푸아로의 마지막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그야말로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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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3 (완전판) - 나일 강의 죽음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바로 그 올리비아 핫세가 여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그 영화를 우연히 TV에서 처음 봤을 때는 크리스티에 대해서 잘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올리비아 핫세가 활짝 웃으며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배를 내려가던 결말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난다. 영화 속 다른 인물이나 배경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도 크리스티가 누군지도 잘 모르던 어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결말의 그 모습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과연 세기의 미모란 것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커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이 영화에 핫세가 출연했던 시기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였는데 예쁘고 매력 있는 여배우가 데뷔작 이후로 주저앉아버린 느낌이어서.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영화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할 오리엔트 특급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 영화로 생애 세 번째 아카데미를 수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가 핫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기에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캐릭터의 매력도, 배우의 연기력도 비교할 때 수준 차이가 어쩔 수 없이 났겠지만 말이다.

 

두 작품은 공통점이 많다. 푸와로가 등장하고, 기차와 배 등 각각 대륙 단위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동 수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살인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는 점, 거기에 수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조력자가 작품 이전에 있었던 개인적인 인연으로 푸와로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점도. 이 소설 속에서 직접 푸와로가 과거에 자신이 해결했던 사건으로 오리엔트 사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가장 큰 공통점은 피살자가 위험을 감지하고 푸와로에게 개인적인 보호를 요청했고, 푸와로는 거절했으며, 밝혀진 범인에게 어느 정도의 온정을 베푼다는 점일 것이다.

 

미모와 부, 젊음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인이 있다. 소위 말하는 일등 신랑감의 구애를 거절하고 그녀가 택한 남자는 매력적이지만 가진 것 없는 남자, 거기에다 절친한 친구의 애인이었다. 배신당한 친구는 부부의 신혼여행까지 쫓아오고, 세 남녀와 푸와로를 비롯해 수많은 관광객이 타고 있던 배 안에서 젊은 아내는 머리에 총상을 남긴 시신으로 발견된다. 정황상 친구가 가장 의심이 되지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범인이 누구이며 대충 어떤 트릭을 썼을지 눈치챌 수는 있었다. 그 동안 워낙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기도 했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기억해서 확실히 용의자를 두 명 정도 제칠 수 있기도 했지만, 범인과 푸와로의 대화에서 두 번 정도 너무나 큰 단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써 스타일스 저택의 헤이스팅스나 테이블 위의 카드의 레이스 대령의 이름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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