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완전판) - 커튼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그 유명한 배트맨 트릴로지의 감독이며, 인터스텔라의 감독이기도 한 이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그의 두번째 영화였던 메멘토.

 

전형적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에, 당시 출연 배우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다 보고 나면 일단 그 반전 자체에 첫번째로 놀라고, 또 그 영화가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전을 택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메멘토 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이 배트맨 트릴로지 중 두번째 작품인 다크나이트.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조커로 나오는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2005년의 배트맨 비긴즈, 2008년의 다크 나이트, 2012년의 다크나이트 라이즈까지 모든 작품이 다 훌륭하지만 특히 가장 좋은 것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보통 형만한 아우 없다고, 속편이 더 좋은 경우는 드물다고 하는데 그 드문 예외중 하나가 배트맨 시리즈 말고도 대부 삼부작. 두번째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대부 2가 1편이 놓쳤던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속편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두번째 영화인 다크 나이트에 별점 10을 주었고, 세번째 영화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별점 8점을 주며 마지막 시리즈에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라는 20자 평을 주었다. 상관없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이 작품에 대한 내 생각이 딱 그렇기 때문이다. 수많은 크리스티의 작품 중 이 작품이 가장 훌륭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훌륭하며,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자 포와로의 마지막이 그려진 이 작품은 그야말로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첫 작품은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여러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끝에 겨우 출판되었다. 출판된 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사건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 물론 사후에 유작이 출간되기는 했지만 그녀가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 출간된 작품이며 그녀 스스로 푸아로의 최후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야말로 애거서 크리스티가 스스로 멋지게 마무리지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사실 이 작품은 실제 출간된 시기보다 30년전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즉, 이미 오래전, 거의 그녀 작품 활동이 중반부, 한참 푸아로가 활약하고 있던 그 시기에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작품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부러 첫 작품과 수미상관을 이룬 것도 그렇고. 바로 그 저택에서 함께 있었던 헤이스팅스와 함께 푸아로의 마지막을 그린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그 이후 헤이스팅스는 결혼도 했고 2남 2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현재 아내는 세상을 떠난 상태. 막내 주디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명의 자녀들은 해외에 나가 있고, 주디스마저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려고 한다. 스타일스 저택 당시의 한참 젊었고, 또 그 나이 또래의 여자에게 연정을 품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세월의 무상함이라고 할까. 마음 한 쪽이 아련해지는 맛이 있다. 스타일스 저택 또한 주인이 바뀌었고, 당시 소유주였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그 주변에 살고 있지 않다. 생전에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했던 크리스티는 시간의 흐름과, 거기에 따른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느꼈을 것이며, 꼭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종종 등장하는 푸아로나 마플 양의 대사에서 노년의 쓸쓸함을 읊기도 했다. 여러모로 마음 한 구석이 시리는 부분이 많은데, 특히 크리스티의 팬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 옛날처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동기나 수법에 있어서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띈다. 재미있는 것은, 크리스티 소설 후반에 갈수록 범인의 심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드러나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 범인 심리를 빼면 할말이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사실 크리스티의 말년이 아니라 오히려 초반에 가까운 시절일 텐데, 마치 그녀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계획해놓은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다소 맥빠진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범인이 누구이며 그 범인의 배경과 동기에 집중하기보다는 푸아로의 말년과 헤이스팅스와의 우정이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 이 소설에서는 범인 스스로의 동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이 전부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헤이스팅스와 그의 딸, 스타일스 저택의 세 주인이 된 러트렐 대령 부부, 헤이스팅스의 딸을 고용하고 있는 의사 프랭클린과 그의 아내, 전형적인 카사노바인 앨러턴 소령과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는 캐링턴 경, 그리고 쌍안경을 들고 새를 관찰하는 노턴과 매력적인 콜, 그리고 병약한 프랭클린의 아내를 간호하는 간호사 크레이븐, 사실 이 각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야말로 푸아로의 마지막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그야말로 '장중하고 우아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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