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두번째 이야기 아주 사적인, 긴 만남 2
마종기.루시드 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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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말없이 노래만 하는 공연이다보니 서운하다거나 심지어 이거 불친절한 거 아니냐는 반응도 아주 일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이 상태가 가장 편하고 좋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왜 친절해야 하는지를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친절은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지요. 음악을 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면 그만입니다.

 

그래, 우리의 생은 비록 아무의 박수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정성을 다한 생애였고 보람찬 생애였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살아낸 삶, 남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뜬눈으로 밤샘을 한 그 숱한 날들이 그 순간 주마등같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비록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서로 외로워하며 생을 마칠지라도 우리 모두는 마지막 순간에 만족한 얼굴에 미소를 환하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치든 무엇이든 '극'을 싫어합니다. 극좌도 극우도 말이지요. 아무리 명분이 설득력이 있다고 해도 극단이 세상에 가져다주는 미덕은 없다고 믿으니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어떤 번역가의 인터뷰를 아주 인상 깊게 보았답니다. 두 가지 대목이 기억나는데, 하나는 "번역이 어렵지 않으세요?"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아니요,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해내는 일을 보면,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대단하다 싶지요. 하지만 각자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내는 것뿐입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 번역을 그냥 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머릿속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아니 내가 감각하는 것을 내 자아가 느끼게 되는 과정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든 encoding(부호화)decoding(해독)도, 심지어 디지털 아날로그의 converting(전환)도 모든 게 '번역'이지요. 그렇다면 예술가들도 그런 것일까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그것이 심상이든 정서든)를 각자의 방법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 어떤 방식의 번역에 능숙한가에 따라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곡을 지을 테고요.

 

그런데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기 떄문에 정작 체코인들은 그를 '국민작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사실 독일어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온 체코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소설가 카프카가 <몰다우(블타바) 강>의 스메타나만큼은 체코인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요. 생의 반 정도를 타의에 의해 외국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런 것에 비하면 카프카는 어차피 유대인이고 그가 프라하에 살던 때에도 한정된 주거지인 유대인 동네를 마음대로 떠나서 살 수 없는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카프카는 그가 태어나 대학까지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생전에는 발표하지도 못한 많은 소설과 산문을 쓴 곳이 바로 프라하이지요. 빈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죽은 후에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힌 것을 생각하면 비록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그를 프라하 사람으로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카프카를 말하다보니 그 30년 정도 후에, 비슷한 곳에 살면서 카프카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간 유명한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이 생각납니다. 그는 체코 출신은 아니고 그 주변국인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그리고 1970년, 50세 나이에 프랑스의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지요. 버림받으면서 늘 위험한 생을 살아야 했던 유대인 문학가. 원수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독일을 싫어하면서도 그 독일 언어를 사랑하여 독일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시인 첼란과 작가 카프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파울 첼란도, 프란츠 카프카도 여러 언어의 경계에 서 있던 작가들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프카가 태어났을 땐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기 이전이었으니 그의 제 1 언어는 자연스레 독일어였겠네요. 하지만 프라하의 아니 유럽의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나 체코어 화자들 가운데에서 살았을 테니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았겠지요. 독일어와 체코어, 이디시어가 뒤섞인 언어적 혼란이기도 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혼란스런 경계에서 파생된 에너지가 그들의 문학작품으로 고스란히 남겨진 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요즘 부쩍 그 '경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불안과, 그 불안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에너지 말이지요. 조금 우스운 비유일진 몰라도, 농사를 짓는 어떤 분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는데요. 한 품종을 한 밭에 심는 경우보다 섞어심기를 했을 때 작물이 훨씬 잘 자라더라는 겁니다. 심지어 밭을 반으로 나누어 두 작물을 양쪽에 반반 심었는데 한 가운데 경계에 맞물린 작물이 다른 작물보다 유독 더 잘 자라더라는 얘기도 해주셨지요. 그분도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그 경계에서 나오는 작물들의 경쟁과 투쟁의 에너지가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만 하셨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려는 사람은 떄떄로 고아처럼 외로워야만 한답니다. 오죽하면 작곡가 베토벤은 외로움이 자신의 종교라고까지 고백했겠습니까. 미국의 의사 시인으로 미국 현대시의 문을 연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외로움을 자주 느끼지 않는 자는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고아처럼 느끼게 하는 이 비 오는 우중충한 시간을 아파하면서도 고마워하고, 고국을 멀리 떠나 살고 있는 내 신세를 힘들어하면서도 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끔은 죽은 내 동생의 이름을 부르다가 너무 외로워져서 눈물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뜨거운 눈물은 시인이 되고 싶은 내 꿈의 다른 표징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아파하며 받아들입니다.

 

윤석군이 바리톤기타 솔로곡을 새로 만들어 피앙세에게 들려주었더니 '편안하다'고만 말했다고, 멜로디와 진행, 코드가 얼마나 독특하고 새롭고 의미 깊은 곡인데 그냥 편안하다고만 할까 하고 좀 섭섭했다는 말이 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제일 가까운 피앙세가 작품의 의도뿐 아니라 작품의 앞뒤 구석구석을 다 이해해주고 감동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어느 예술가에게는 없겠습니까. 나도 한떄는 문학이나 시를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 않는 아내에게 그런 욕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요. 가끔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동서양 예술가들의 평전을 심심풀이 삼아 읽어보면 상대방의 예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늘 격려해가면서 평생을 산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정반대의 부부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도스토옙스키같이 부인의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존경과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글을 썼던 소설가나 동시대의 문호인 톨스토이같이 아내로부터 소설가로서의 존경심이나 경외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글을 써왔던 이가 모두 다 같이 좋은 작품을 썼다는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내가 또 보로딘의 음악에 경도되고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세인트피터스버그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학자 겸 화학자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평생을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친 교수였고 알데하이드나 벤젠의 연구에도 세꼐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그의 음악이 스케일로 보아서 러시아 음악을 대표한다고도 하지요. 차이콥스키보다 보로딘의 음악,특히나 교향곡 2번을 들어야 러시아 음악의 정수를 접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지요. 어쩄든 보로딘 교수에게는 평생 '주말 음악가'라는 별명이 훈장같이 붙어다녔답니다. 그렇게 그는 의대에서 교수와 연구원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고 평생 아픈 아내를 간호도 해야 했다는군요. 언뜻 내가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엉터리 '주말 시인'이 아닐까 부끄러워했던 이곳에서의 내 의사생활이 기억나기도 하네요.

 

주말 음악가라...... 그것도 참 재미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꼬는 의도로 사람들이 만든 단어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한 때 주말 음악가였지요. 아니, 연말 음악가였다고 해야 하나요. 유학 시절, 연말에만 한국에 들어와 공연이나 녹음을 하고 돌아가곤 했으니까요. 저는 사람이 살면서 하나에 온 삶을 바치는 것도 의미 있고 숭고한 일이지만, 새로운 일에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후회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사랑이든, 일이든, 배움이든 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선생님이 온전한 의사이면서도 온전한 시인이시라고 굳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항상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의사일수록 초심을 잃은 분이 많고 진심이 많이 흩어져 환자를 다르게 보는 의사들이 많지요. 그런 분에게야말로 또다른 시야의 눈을 주고, 한계를 넓혀주는 인문학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 좋은 의사의 직분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략) 잘난 척하는 의사들은 단세포적인 과학 일변도의 사고이기 쉽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환자 진료나 진단에 단 하나의 오진이나 오판이 없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차가운 과학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과학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의학의 발전을 험담하자는 게 아닙니다. 의사는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지만 언제나 감성을 가진 환자의 도우미가 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과학으로 무장된 의학의 오진도 훨씬 줄어든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젊은 시인 한 분이 메일을 보내면서 요즘은 너무 외로워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내가 답신을 보내면서 그렇게도 사는 게 실망스러울 때는젊었던 날의 나를 좀 상상해봐달라고 했습니다. 고국의 산천과 그곳에 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천리만리 헤어져서 매일 언어도 안 통하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야 했던 20대의 내가 안고 살았던 긴장감과 불안과 절망 그리고 그 안에 숨은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요. 그렇게 온몸을 조이는 외로움으로 몸을 떨면서 그래도 악착같이 모국어로 시를 쓰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초라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냐고요. (중략) 그러고 보면 내가 오래전 한일회담 반대 서명으로 영창에 감금되고 평생 처음 받은 심문과 고문에 혼쭐이 나고 그 후유증이 오래갔던 일이나, 또 내가 2년 금고형을 받고 의사면허증을 빼앗길 것이라는 소문에 괴로워하시면서 내 구속중에 매일 소주를 한 되씩 드시고 급기야 얼마 안 가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내 아버지. 또 일간신문사 민완기자로 활동하다 이북에 사는 아들에게 쪽지 편지 한 장 전해달라는 큰아버지의 애걸을 거절하지 못하고 남북회담 취재 때 북쪽 기자에게 전했다가 그 당장 직장에서 쫓겨나 미국에 살던 내게 와서 고생만 하다가 갑작스런 참변으로 죽은 내동생. 동생의 죽음 후에 일부러인 듯 갑자기 치매 증세를 보이시다가 외로이 이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그 모두가 사랑하는 고국과 연결이 된 부끄럽고 불미스러운 일들이네요. 그러나 한마디로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합니다. 내 부모님도 내 동생도 물론 그럴 것입니다.

 

시는 내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 내 삶의 지주 역할을 해주었지요. 헛된 욕망에 시달리고 떄로 절망하며 중심과 균형이 흔들릴 때 내 문학은 그런 것을 버틸 수 있는 대들보의 역할을 해주었어요. 윤석군도 그런 믿음을 당신의 음악에서 찾아서 움켜가져야 합니다. 그런 결심과 믿음이 없이는 좋은 음악을 찾아 헤매는 고통과 번민의 와중에서 지쳐갈 때 깃발을 놓아버리기 쉽습니다. 언젠가도 말한 적이 있지만 문학이란 자유를 찾아가는 생의 한 과정이라고 나는 믿어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살아온 세상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나는 평생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확실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에만 의지해 살아온 의사였지만 누구에게라도 언제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마도 내가 어쩔 수 없이 삶과 죽음의 가교에 서서 오래 살아온 떄문인지 모르겠지만요. 그중 하나는 주위의 착한 이웃을 위해 정성을 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도 늘 엄격해야겠지만, 그래서 강직한 사람도 되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착하고 힘없는 것에 더 마음을 주고 그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시간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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