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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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알란 칼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사상도 거부하는 사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도 걱정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인생에서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단지 누워 잘 수 있는 침대, 세끼 밥,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는 술 한 잔만 있으면 그 무엇이라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믿기 힘들 정도의 무사태평한 성격인 그는 1905년 5월 2일 스웨덴에서 출생한 이후로 100년동안 살면서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에 끼어들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읽는 느낌이랄까.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물고, 주인공은 어떤 환경에서든 불사신처럼 생존하며, 수십, 수백만명이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그 시대를 묘사하는 톤은 심각하지 않고 경쾌해서 종종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극중 인물들이 총이나 칼을 통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실수로 냉동실 전원을 끄지 않았든 코끼리로 깔아뭉겠든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모습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질 정도로 절묘하다. 요컨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그 구조는 꽤 탄탄하며, 이렇게 즐겨도 되나 하는 자책이 들면서도 저절로 새어나오는 폭소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책의 맨 뒤를 보니 44쇄. 국내에서만 대체 몇 부가 팔린 것이고 전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독자자들이 이 책을 즐겼단 말인가? 그럴만한 가치가 이 책은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작품성이 아주 뛰어난 소설은 아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작가가 계속 이 소설 이후에 히트작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한국, 미국, 일본, 영국, 간혹가다 프랑스와 독일, 그보다 더 간혹가다 중국 등으로 편중되어 있던 독서 생활에 이 책은 분명히 환기가 되었다.

 

영국하면, 안개와 비오는 날씨, 여왕, 피시 앤 칩스, 딱딱한 발음, 축구 등등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프랑스라면 에펠탑과 몽마르트, 카페와 빵집, 세느 강과 노래하는 듯한 불어가 생각나리라. 실재로 거기에 살지도 않으면서, 며칠 간의 체류, TV 여행 프로그램의 화면, 사춘기 시절부터 이어진 독서로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들.

 

스웨덴 작가의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신선한 단어와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3750만 크로나, 아니 5000만 크로나, 말코손바닥 사슴고기, 감자로 만든 독한 증류주인 슈납스, 볼보, 불가리아인과 터키인의 피가 섞인 가게 주인, 핀란드 작가 파실린나, 여가수 소냐 헤덴브라트, 스물아홉가지 약초와 향료를 석 달 동안 화주에 담가 만든다는 감멜단스크.

 

익숙해서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그 풍경이 아니라, 색다른 지역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즐길 만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거세와 정신 병원 강제 입원,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변화 등 1900년대 전반의 스웨덴 역사도 흥미로웠고.

 

 

복습해 보는 알란의 100년 연보 (마지막 장 참조)

 

1905~1929 0~24세 5월 2일 스웨덴 플렌 시의 소읍 윅스훌트에서 알란 엠마누엘 칼손 출생. 열 살의 나이에 폭약 회사에 취직.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다섯 살에 자신의 회사 <칼손-다이너마이트>사를 창립. 폭약 실험을 하다가 정신 병원에 수용됨.

1914~1918 제 1차 세계 대전.

1917 러시아 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의 공산 정권 수립.

1918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처형.

 

1929~1939 24~34세 고향 윅스훌트를 떠나 헬레포르스네스 주물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 그곳에서 스페인 사회주의자 에스테반을 만나 스페인으로 떠남.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폭약이 설치된 다리를 건너려던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함.

1936~1939 스페인 내전. 프랑코 장군이 인민전선 내각에 맞서 반란을 일으킴.

1039 1월 프랑코군 바르셀로나 점령. 3월 마드리드 입성.

 

1939~1945 34~40세 미국으로 건너가 핵폭탄 개발이 한창이던 로스 앨러모스의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함. 부통령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됨.

1943~1945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핵폭탄 연구 진행.

1945 7월 미국, 세계 최초로 핵 실험에 성공. 4월 1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해리 트루먼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1945~1947 40~42세 쑹메이링의 국민당을 돕기 위해 중국으로 떠남. 이빈 시에서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구함.

1946~1949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내전. 공산당 승리 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7~1948 42~43세 이란 테헤란의 비밀경찰 감옥에 갖혀 퍼거슨 신부를 만남.

1945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영국 총선 패배.

 

1948~1953 43~48세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따라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남. 반동으로 몰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노역을 가게 됨.

1949 8월 소련 핵 실험 성공.

 

1953 48세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 탈출. 김일성, 김정일을 만남. 마오 쩌둥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남.

1950~1953 한국 전쟁.

 

1953~1968 48~63세 발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냄. 친구 아인슈타인의 부인 아만다는 정치인이 됨.

1963 3월 발리 아궁 화산 폭발로 2천여 명 사망.

1968 3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선출.

 

1968 63세 파리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함. 존슨 대통령을 만나 미국 스파이로 일하게 됨.

1968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도한 사회 변혁 운동인 68혁명 발발.

 

1968~1982 63~77세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미국 첩자로 포섭. 모스크바에서 스파이 활동.

1945~199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 고착. 1990년 독일 통일, 1992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종식.

 

1982~2005 77~100세 고향으로 돌아옴. 2005년 5월 2일 백 회 생일 파티를 앞두고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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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크래커 2015-04-2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코손바닥 사슴고기??? 이따금 들르는 서점에서 특이한 제목 땜에 두어번 시선이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화주˝란 말도 궁금하군요.

마고할미 2015-04-29 03:16   좋아요 0 | URL
화주란 불이 붙을 만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라고 합니다. 소주나 위스키, 브랜디가 화주에 속한다는군요. 추운 지방일수록 아무래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자주 마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코손바닥 사슴고기`는 제가 띄어쓰기를 틀렸군요. `말코손바닥사슴의 고기`입니다. 말코손바닥사슴은 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 그러니까 이른바 북유럽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북부 지역, 시베리아, 캐나다, 알래스카 등지에 분포한다고 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엘크, 혹은 무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저도 말코손바닥사슴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처음 봤는데 엘크나 무스라는 단어는 다른 책에서 본 적 있어요. 사슴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 크기가 커서 원주민들은 말처럼 타고 다닌다고 하는군요. 한때 멸종 위기에 있어서 적극적인 보호정책이 있었고, 최근에는 그 수가 다시 늘어났다고 합니다.

치즈크래커 2015-04-29 07:11   좋아요 0 | URL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마고할미 2015-04-29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특이하지만, 표지도 예쁜 책입니다.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순간들을 다루고 있지만 따로 역사책을 봐야 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전혀 아니고, 중간 중간 유머 요소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치즈크래커 2015-04-29 07:12   좋아요 0 | URL
넵. 꼭 한번 읽어 봐야겠네요.~^^
 
빅 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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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창옌은 빅 포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창옌은 전체를 통제하고 움직이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는 리창옌을 1인자라고 지칭했다. 2인자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두 선이 있는 S 모양, 즉 달러를 나타내는 모양이다. 또 두 줄과 별 하나도 그를 상징한다. 따라서 2인자는 미국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3인자가 여성이고 프랑스인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류층 요부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도 있으나, 어떤 것도 분명치는 않다. 4인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멈췄다. 푸아로가 앞으로 몸을 숙여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 4인자가 뭐라고?"

푸아로의 눈은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압도적인 공포가 남자를 지배한 듯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다.

"파괴자."

 

이 책을 읽기 전에 평점이 너무 낮아서 놀랬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한 박한 평가는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실망스럽다는 것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읽으면서 빅 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평들의 요지는 대부분 이 책의 설정에 대한 아쉬움이었으니까.

 

이 책은 영화로 치자면 첩보물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 가장 영화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책의 분량이 300쪽이 채 되지 않는 데다가, 속도감 있는 전개 때문에 읽는 내내 스릴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줄거리의 스케일은 엄청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남미까지. 직접적으로 등장하든 간접적으로 묘사되든 이 소설은 전지구적인데, 의외로 요모조모 귀여운 구석도 있다. <커튼>에서 붉은 색 머리에게 이끌리는 헤이스팅스를 놀리며, 예전에 그것 떄문에 큰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푸아로가 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여기에서의 한 일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푸아로의 쌍둥이 이야기도. 베라 로샤코프 백작 부인은 다른 작품에서 푸아로와 만났던 것 같은데 나중에 읽게 될 미지의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러한 구성이 용두사미 같을 수도 있겠지만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냥 꼭두각시일 뿐이고 뒤에서 모든 행동을 조종하는 수뇌가 있다'거나 '마담 올리비에는 천재야. 퀴리 부부는 올리비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라는 대목에서는 작가의 포부(?)가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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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지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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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플 양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

 

크리스티 자신도 마플 양이 수십 년을 걸쳐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대단히 연극적으로 보이는 푸아로에 비해서 마플 양의 생김새는 수수한 편에 가깝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은 시골 할머니의 느낌이지만, 이 책에서의 마플 양은 마냥 푸근한 모습은 아니다.

 

"나는 마플 양이 좋던데. 적어도 유머 감각은 있거든."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고약한 여자예요. 일어나는 일마다 사사건건 다 알려고 들고. 게다가 늘 최악의 결론만 내리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젤다는 나보다 훨씬 어리다. 나 정도 살아 본 사람들은 모두 진실은 대개 최악이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구절도 있다.

 

마플 양은 상냥하고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진 백발의 노처녀였다. 반면 위더비 양은 심술궂고 야단스러운 여자였다. 하지만 둘 중 더 위험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플 양이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습관은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떄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갑자기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플 양, 지금 우리 모두가 혀를 지나치게 함부로 놀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을 익히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심술궂은 뒷공론으로 그 어리석은 혀를 함부로 휘둘러 수많은 해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목사님."

마플양이 말했다.

"목사님은 정말이지 속세의 떄가 묻지 않은 순수한 분이세요. 저처럼 사람들의 품성에 대해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감히 말씀 드리는데 객쩍은 수다와 잡담이 매우 고약하고 잘못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종종 그 속에 진실이 있는 법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마플 양의 마지막 공격은 나의 급소를 찔렀다.

 

특히나 이 소설에서 마플 양의 집요함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고집스런 행동은 마플 양만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이 마을에서는, 마플 양 뿐 만 아니라 그 나이대의 모든 여자들이 온갖 소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웨더비 양이 막 전화를 걸어왔어요. 레스트랭 부인이 8시 15분에 밖으로 나갔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녀가 어디에 갔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그걸 누가 알아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헤이독 의사 선생님께도 가지 않았단 말이에요. 웨더비 양이 그건 확실하대요. 헤이독 의사 선생님 집 바로 옆에 사는 하트넬 양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는데 레스트랭 부인을 못 봤다고 분명히 말했다는군요."

"정말이지 대단한 미스테리로군."

내가 말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을 위한 영양분을 얻는지가 미스테리란 말이야. 누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지 놓치지 않고 다 살펴봐야 하니 식사도 창가에 서서 해야 할 거 아닌가."

 

화자인 목사가 드물게 이성을 상실할 때가 바로 마플 양을 비롯한 마을 여자들의 이 일사분란하면서도 끈질긴 행위들을 접할 떄이다.

 

"그 쭈글쭈글한 노파는 자기가 이 세상의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평생 동안 이 마을 밖으로는 나가 보지도 못했으면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일이야. 저런 여자가 인생에 대해 뭘 알겠나?"

 

경찰서장인 멜쳇 대령의 평가이다. 멜쳇이라는 이름은 꽤 익숙한데, 아마 마플 양이 등장하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서 본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멜쳇은 마플 양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실에 도달하는 매우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사람들이 통찰력이라 부르며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 대는 것이죠. 하지만 사실 통찰력은 단어의 철자를 일일이 다 외우지 않고도 단어를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일이에요. 어린 아이들은 할 수 없는 거죠.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른들이라면 전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알 수 있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목사님은 아시죠?"

"알 것 같군요. 그러니까 어떤 것을 보고 다른 것이 연상된다는 말씀이시죠.그러니까 아마도 비슷한 종류의 일이 떠오른다는 거죠."

 

통찰력. 바로 이것이다. 마플 양 추리의 핵심. 사건에 접할 때마다 그녀가 이전에 겪었던 다른 사건을 통해 유추해내는 힘.

 

"아시겠지만 저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취미가 필요한 법이랍니다. 물론 취미를 갖는 건 어렵지 않죠. 털실 자수며 바느질, 복지사업, 그림 그리기 등등 많이 있어요. 하지만 제 취미는...... 아주 옛날부터 그랬는데요...... 바로 인간의 품성에 대해 연구하는 거랍니다. 인간의 품성이란 너무나 다양하거든요. 그래서 매우 매력적이랍니다. 물론 기분 전환할 거리 하나 없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도 연구에 필요한 훈련을 할 기회가 충분하답니다. 일단 사람들을 구분하는 거예요. 마치 새나 꽃을 분류하듯이 종, 속, 목 등으로 명확히 나누는 거예요. 물론 사람이다 보니 실수로 잘못 구분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수가 줄어들어요. 그러고 나서 실험도 해보죠. 작은 과제를 정해 보는 거예요. (중략) 하지만 언젠가 정말로 큰 미스테리가 발생하면, 그떄도 이런 일들처럼 똑같이 해결할 수 있을까 늘 궁금하답니다. 미스테리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든 실용 모형 어뢰는 아무리 작아도 진짜 어뢰와 똑같이 작동하는 법이니까요."

 

이 책이 참 흥미로운게, 마플 양의 첫 등장이니만큼 그녀 자체에 대한 묘사와, 그녀의 추리 방식에 대한 설명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매 소설마다 반복했으면 결국 중언부언이 될 테니까.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책에서야 가장 범인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범인인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 규칙이 적용된 적이 없더라고요. 종종 아주 뻔한 것이 그대로 진실이랍니다. 제가 프로더로 부인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녀가 레딩의 손아귀에 놀아나서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요. 레딩 씨는 돈 한 푼 없는 여자와 야반 도주를 할 그런 젊은이가 아니에요. 그로서는 프로더로 대령을 없애야만 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를 없앤 거죠. 젊고 매력적인 남자지만 도덕관념이란 게 없는 사람이죠."

 

실제에서는 가장 범인일 것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범인이라는 결론. 어쩌면 크리스티의 문학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교묘한 장치들로 독자의 뒤통수를 치기란, 어쩌면 글쟁이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반전. 하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에 매번 감탄하고야 마는 것은, 범인이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복잡함과 더불어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졌을 때, 왜 그가 범인이어야 했는지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크리스티의 인간에 대한 통찰 떄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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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 보급판
루이 르테리에 감독, 마크 러팔로 외 출연 / 데이지 앤 시너지(D&C)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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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배우 때문에 선택한 영화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제시 아이젠버그,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멜라니 로랑, <비긴 어게인>의 마크 러팔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본 영화들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배우들이다. 영화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경우이다. 영화 자체가 정말 좋았던 경우. 그리고 영화는 무난했지만 배우가 인상적이었던 경우. 전자의 경우는 아마도 타이타닉일 것이고, 위에 언급한 세 영화는 명백히 후자다.

 

세 영화가 절대로 졸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무난했다. 아니 좋았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이 연기했더라면 분명히 언짢았을 수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독특한 천재를 연기한 아이젠버그,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40분이 지나서야 등장하지만 다른 배우들의 아우라를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했던 로랑, 그리고 그야말로 엄친아인 애덤 리바인이 단순히 애송이로 보일만큼 영화 내내 따뜻하고 안목이 있으며 우정과 의리를 넘치도록 보여주었던 러팔로.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배우의 모습이 계속 잔상에 남았다.

 

처음 이 영화를 보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솔직히 배우의 매력에 기대를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다들 호연을 펼쳤지만, 이 영화는 사실 캐릭터의 승리라기보다는 줄거리와 반전, 결말이 훨씬 인상적인 영화다. 아이젠버그도, 러팔로도, 로랑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바로 그 캐릭터, 그 연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는 있지만,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포 호스맨. 성경에 나오는 네 명의 기사로 하느님을 대신해 인간의 죄를 벌하는 이들로 극 중 네 명의 마술사의 팀명이 포 호스맨인 것은 현대판 로빈 후드를 자처하는 그들의 목적 때문이다. 개봉 시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케이퍼 무비인 <도둑들>과 비교가 되었는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도둑들>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술을 소재로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을 떠올렸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일루셔니스트, 프레스티지, 연애술사... 영화의 중심 소재로 다루든, 맥거핀이든, 곁가지든 간에 마술은 어떤 영화에서든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아마도 영상을 다루는 예술인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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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사나이 할리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나중길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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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의 제목은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이다. 원제는 The Mysterious Mr. Quin. 할리퀸에서 퀸은 성이고 할리는 이름인가 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의 극중 이름이 할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이름은 영어권에서 남녀 구별없이 쓰이는 이름인가 보다. 할리퀸이라는 단어가 기시감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영국의 팬터마임에 등장하는 젊은 마술사나 연인 역의 정형으로, 보통 가면을 쓰고 화려한 얼룩무늬 의상에 목검이나 지팡이를 든 광대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마스크를 쓴 것 같았다'거나 '색유리 때문에 일곱 빛깔 무지개 옷을 입은 것 같았다'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미 당대에 있던 할리퀸이라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크리스티가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할리퀸은 푸아로의 소설에 여러 번 등장하는 탐정이다. 이른바 연애 탐정으로, 그가 엮인 사건은 꼭 남녀지사가 빠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던 상식이다. 이 책은 사실 할리퀸보다 새터스웨이트라는 사람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새터스웨이트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나고, 어김없이 할리퀸이 등장하여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할리퀸은 새터스웨이트에게 격려도 하고, 때로는 자극도 하면서 그가 스스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마도 할리퀸은 처음부터 사건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왜 이 사내는 직접 해결하지 않고 새터스웨이트가 해결하도록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법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할리퀸은 광대니까, 일정 역할만 하고 무대에서 사리져버리니 남은 일은 주연배우인 새터스웨이트에게 넘겨준다는 것까지 크리스티가 계산한 것일까.

 

푸아로하면 콧수염, 마플 양은 뜨개질하는 모습 등 크리스티의 탐정들은 외양이 인상적인데, 이 책의 할리퀸은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다. 여기 책에서 묘사한 내용만 보자면 키가 크고 홀쭉한 사내로, 머리카락은 검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며 높낮이가 없다. 거무스름하고 매력적인 얼굴을 가졌으며 소리내어 웃을 때는 그 웃음이 비웃음 같기도 하고, 구슬픈 울음소리 같기도 한 묘한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미스테리한 사나이다.

 

이 책에는 총 12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전에 <쥐덫>을 읽으면서 할리퀸의 이야기는 한 편을 보았는데, 그때의 느낌이 독특해서 할리퀸의 활약을 더 볼 수 있었으면 했었다. 이 단편집이 매력적인 것은, 단편의 제목들이 처음에는 그저 사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치처럼 보이는데, 결국엔 사건을 풀어나가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앞쪽에 실려 있는 <어둠 속의 목소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코르시카 섬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작 코르시카에서의 이야기는 뒤쪽의 <세상의 끝>인 걸 보면, 책에 실려 있는 단편집은 아마도 시간적 순서는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편집할 때, 시간적 순서를 조금 맞춰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퀸의 방문>

 

모든 면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이상하지만 그는 직관적으로 그녀가 매우 행복하든지, 아니면 매우 불행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쪽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초조했다. 게다가 묘하게도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새터스웨이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포털이 자기 마누라를 끔찍이도 아끼는군. 그런데 가끔, 맞아, 가끔 마누라를 두려워하고 있어! 정말 재미있군.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일이야.'

 

그러자 이브샴의 태도가 약간 변했다. 그것은 영국인의 기질을 연구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다. 아까는 어딘지 모르게 삼가는 태도였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그에게서 사라졌다. 퀸이 데릭을 알고 있다니 말하자면 그는 친구의 친구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믿을 수 있고 신분은 확실해진 것이다.

 

"안녕히 계십시오, 새터스웨이트 씨. 당신은 연극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새터스웨이트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어릿광대 연극을 보시도록 권하고 싶군요. 지금은 쇠퇴하고 있지만 한번 볼 만합니다. 그 상징성을 이해하기는 좀 어렵지만, 시대가 변한다고 상징성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모두들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그랬듯이 색유리 때문에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

 

"저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범죄학자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의 순간이든 마음에 두드러지게 새겨지는 한 순간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려도 그 순간은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남죠. 새터스웨이트 씨는 사건 현장에 계셨던 분들 가운데 가장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셨을 겁니다. 새터스웨이트 씨, 기억을 더듬어서 제일 강한 인상을 받은 순간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총소리를 들은 순간이었습니까? 처음 시체를 본 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권총을 들고 있던 스태버턴 부인을 본 순간이었습니까? 선입견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말씀해 주시죠."

 

"제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당신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그토록 골똘히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비극과 무관한 생각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설령 미신 같은 생각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어릿광대 여관>

 

"런던 경찰청에서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우리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새터스웨이트가 날카롭게 물었다. 퀸은 특유의 몸짓을 하며 말했다.

"못 풀 까닭이 없죠. 시간은 흘렀습니다. 3개월이나요. 이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 사실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다니 참 특이한 생각이시네요."

새터스웨이트가 느리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분별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한 사실을 다른 사실과 제대로 연관지어 바라볼 수 있게 되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건과 관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계가 없습니다. 분위기를, 젊은 하웰 부인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분위기란 항상 중요하지요."

 

"사건 당일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죠. 실종 사건이 발생한 건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아, 아니죠."

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상상 속에서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으니까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대위의 실종 사건이 백 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지금이 서기 2025년이라고 가정하고 그 사건을 되돌아보는 겁니다."

"참 이상한 분이군요."

새터스웨이트가 느리게 말했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믿으시는데 왜죠?"

"아까 당신은 분위기라는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현재에는 분위기라는 게 없습니다."

"그건 맞는 말일지 모릅니다."

새터스웨이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예, 맞습니다. 현재는 아무래도...... 편협해지기 쉬운 경향이 있지요."

"편협! 아주 적합한 표현입니다."

퀸이 말했다.

새터스웨이트는 우스꽝스럽게도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올해라는 시간은 너무 어려울 수 있으니까 지난해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지난해의 일들을 간추려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표현력은 타고나신 분이니까."

새터스웨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상대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었다.

"백 년 전은 화약과 세력 다툼의 시대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19224년은 십자 낱말 맞추기와 도적질의 시대였다고나 할까요?"

"아주 좋습니다."

퀸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방금 말씀은 국제 사회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 그랬다는 말씀이시겠죠?"

"낱말 맞추기에 대해서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새터스웨이트가 말했다.

"그러나 도둑질은 유럽 대륙에서 끊이질 않았죠. 프랑스의 성에서 잇따라 발생한 유명한 도난 사건을 기억하시죠? 사람들은 단독범의 소행은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허가까지 받고 당당하게 성 안으로 들어간 그 솜씨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곡예사들이 관련돼 있다는 설도 있었지요. 클론디니스 곡마단 말입니다. 저도 한 번 연기를 본 적이 있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어머니와 남매가 곡예를 펼쳤습니다. 근데 그들은 무대에서 좀 특이하게 사라지더군요. 아, 이거 얘기가 엉뚱한 데로 새어 버렸네요."

"그다지 많이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단지 영국 해협 너머의 일인걸요 뭐."

"아까 여관 주인이 프랑스 부인들은 발가락조차 물에 젖는 걸 싫어한다고 했죠."

 

 

<하늘에 그려진 형상>

 

그는 퀸을 여태 세 번 만났지만 만날 때마다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퀸이라는 이 이상한 사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껏 알고 있던 사실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갑자기 새터스웨이트는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항상 구경꾼 역할을 맡았지만 퀸과 함께 있으면 때떄로 배우, 그것도 주연 배우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전 단지 당신의 기대가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결국 당신은 루이자 불라드가 어떤 의도에 따라 국외로 보내진 걸 밝혀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녀가 당신에게 해준 이야기 속에 반드시 있을 겁니다."

새터스웨이트는 따지듯 말했다.

"그래요? 그녀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만일 법정에서 증언을 했더라면 어떤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자신이 본 것을 말했겠죠."

"그녀가 뭘 봤죠?"

"하늘에 그려진 형상."

새터스웨이트는 퀸을 응시했다.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게 하나님의 손일 거라는 미신 같은 생각을?"

"어쩌면 그것이 신의 손이었을지도 모르죠."

퀸이 말했다.

퀸의 심각한 태도에 새터스웨이트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녀 자신도 기차에서 나온 연기라고 했잖습니까?"


 

<카지노 딜러>

 

새터스웨이트는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진지한 연구가였지만, 자신의 연구 재료가 매우 다채롭기를 바랐다. 그는 실망감이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가치들은 변해 가는데 자신은 늙어서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5만 프랑짜리 수표잖아. 아시겠어요? 오늘 밤에 딴 돈입니다. 그녀가 가진 돈의 전부죠. 그 여자는 이걸로 제 담뱃불을 붙여준 겁니다! 제 동정을 받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존심이 무척 센 여잡니다. 특이하고 대단한 여자입니다."

 

 

<바다에서 온 사나이>

 

부겐빌레아를 지나쳐 길 끝에 파란 바다가 보이는 하얀 길을 걸어 내려가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꼴사나운 개 한 마리가 양지바른 길 한가운데에 서 있다가 하품을 하면서 길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보였다. 개는 자못 기분이 좋은 듯 한 껏 기지개를 켜고 나서 그대로 눌러앉아 흡족하게 몸을 긁어 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몸을 부르르 한 번 털고는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궁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가에는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개는 즐거운 기대감으로 코를 킁킁거리면서 쓰레기 더미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개의 코는 틀림이 없었다. 예상대로 진동하는 부패물의 냄새! 개는 점점 커져 가는 기쁨으로 코를 킁킁거리다가 갑자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달콤하고 맛 좋은 쓰레기 더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미친 듯이 몸을 굴렀다. 분명히 오늘 아침의 이 세상은 그 개에게는 천국이었다.

개는 마침내 지쳐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길 한가운데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바로 그때, 아무런 경고도 없이 덜커덩거리는 차 한 대가 길 모퉁이를 난폭하게 돌더니 달려와서 개를 정면으로 치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다.

개는 간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잠시 동안 막연한 비난의 눈길로 새터스웨이트를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그대로 고꾸라졌다. 새터스웨이트는 개에게 다가가서 몸을 구부렸다. 개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는 생의 비애와 잔혹함에 치를 떨고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개의 말없는 비난의 눈빛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개의 두 눈은 마치 '아아, 이 빌어먹을 세상! 내가 믿었던 멋진 세상아, 넌 왜 내게 이런 짓을 한 거지?'하고 말하는 듯했다.

 

새터스웨이트는 그를 젊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호텔에 있는 늙은이들과 비교할 때 실제로 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흔 고개는 훨씬 넘엇고, 한눈에 봐도 거의 쉰 살은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렸다. 새터스웨이트는 그런 일에는 대체로 정확했다. 그 젊은이는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완전히 자란 개들 중에도 강아지 같은 구석이 있는 놈이 있는 것처럼 이 낯선 남자에게도 그런 구석이 있었다.

 

"당신은 사후 세계를 믿죠? 저승에도 이승과 같은 소망과 욕구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만일 그 욕구가 충분히 강하면 저승사자라도 발견되겠죠."

그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지다가 사라졌다.

새터스웨이트는 조금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호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새터스웨이트는 말했다.

하지만 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제가 온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새터스웨이트가 뒤를 돌아봤을 때, 퀸은 절벽의 끄트머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의 목소리>

 

"별다른 이유는 없엇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왔다가도 금방 사라지곤 하잖습니까."

이 말은 새터스웨이트의 마음에 무언가 추억을 일깨우는 듯했다. 조금 선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기분 좋은 기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클레이턴은 너무 나이가 많아요."

새터스웨이트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어떤 환상이 그의 앞에 떠올랐다. 백발의 쇠약한 노파와 칸의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던 빛나는 금발의 여자가 자매간이라니!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는 바론 집안의 자매가 서로 얼마나 빼닮았는지 기억해냈다.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걸어온 탓에 그토록 달라진 것이다.

그는 인생의 경이와 비애에 가슴이 저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헬렌의 얼굴>

 

새터스웨이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혼란스러웠다. 그는 사람들의 성격 분석에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엇다. 그의 판단으로는 필립 이스트니는 그런 감상적인 요청을 절대 할 수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시시한 부류가 틀림없었다. 질리언은 그런 요구가 자기가 차 버린 남자의 성격과 딱 맞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새터스웨이트는 약간, 아주 약간 실망했다. 그 자신도 감상적인 남자여서 충분히 그런 부분을 이해했지만, 그는 다른 인간한테는 자신과는 좀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감상 따위는 그의 세대에나 해당하는 전유물이고, 현대에선 이미 소용이 없어진 애물단지 같은 것이다.

 

새터스웨이트는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엇다. 그는 어쩄든 필립 이스트니에게 이상한 동료 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느끼는 감정, 감상적인 인간이 애인에게 품는 감정, 평범함 인간이 천재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았다.

 

그는 트로이의 헬렌을 생각했다. 마음씨 착하고 평범한 여자에게 아름다운 얼굴은 축복일지, 아니면 고통일지 그는 그것이 궁금했다.

 

 

<죽은 할리퀸>

 

이것이 애스파샤 글렌의 행동 방식이었다. 새터스웨이트는 마음속으로 이 버릇없는 아가씨의 태도와 지극히 여성스러운 면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애스파샤 글렌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녀는 그를 나이 많은 미술 애호가로, 아름다운 여자의 부탁에는 금방 마음이 움직이는 남자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터스웨이트는 정중한 태도 이면에 날카로운 비판력을 갖추었다. 그는 사람들의 본모습을 상당히 잘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 그가 바라보는 사람은 일시적 변덕으로 그에게 간구하는 미인이 아니라, 그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자기 방식대로 물건을 손에 넣으려는 무자비한 이기주의자였다. 새터스웨이트는 애스파샤 글렌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를 꺾을 이유가 없다고 결심했다. 그는 「죽은 할리퀸」이라는 그림을 그녀에게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좀 여쭤보겠는데요, 어째서 그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셨나요?"

브리스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장소의 어떤 것, 그러니까 찬리 저택이 제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비어 있는 큰 방, 바깥쪽의 테라스, 유령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생각들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도 권총 자살을 한 찬리 경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만일 당신이 죽고 나서 당신의 혼이 계속 살아 있다면 이상하겠죠? 당신은 바깥 테라스에 서서 창문으로 죽은 자신의 몸을 들여다본다든가 다른 모든 걸 보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 선생님 친구 분은 가 버리셨군요. 그분이 떠나는 것은 못 봣는데. 참 이상한 분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 양반은 왔다가도 금방 사라진답니다. 그게 그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지요. 그의 출몰을 모를 때가 많아요."

새터스웨이트가 말했다.

"마치 할리퀸 같군요. 눈에 안 보이는 사람."
 

 

<날개 부러진 새>

 

그녀는 분명히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거기에 없었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원형 식탁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인물 같았다. 몸을 옆으로 돌리자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식탁 너머로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새터스웨이트의 시선과 마주쳤다. 바로 그때, 그가 찾고 있던 말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마력,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력 같은 게 있엇다. 절반만 인간인 '숲속의 요정'인지도 모른다. 그녀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나치게 세속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상하게도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불분명한 인간적 속성이 그녀한테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느낌을 표현할 말을 찾다가 간신이 찾아냈다.

새터스웨이트는 ''날개 부러진 새.'라고 생각했다.

 

메이벌 앤슬리를 죽인 사람은 로저 그레이엄이 아니다. 그녀한테서 달아날 수는 있었겠지만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엇을 것이다. 그는 그여자를 두려워했다. 그는 그녀의 실체 없는 요정 같은 분위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이 홀린 걸 알고는 그녀한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그는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안전하고 이성적인 쪽을 택했고, 장래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듯한 허황한 꿈을 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는 분별력을 갖춘 젊은이다. 따라서 예술가이자 인생의 감식가인 새터스웨이트에게는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킬리는 말했다.

"그것이 이유요! 게다가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본 사람도 없죠. 나는...... 나는 사람들을 비웃어 주고 싶어서......."

 

"죽음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입니까?"

"저...... 아마...... 그건 아니죠......."

새터스웨이트는 상상해 보앗다. 매저와 로저 그레이엄. 달빛을 받은 메이벌의 얼굴........ 잔잔하고 숭고한 행복감.......

"아닙니다."

퀸은 말했다.

"아닙니다. 죽음이 가장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새터스웨이트는 새의 날개처럼 보였던 그녀의 주름진 청색 비단옷을 기억해 냈다. 날개 부러진 새.......

고개를 들어보니 새터스웨이트는 혼자였다. 퀸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퀸은 무언가를 남겨 두고 사라졌다.

좌석에는 흐릿하게 파란빛이 도는 돌을 대충 조각해 만든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예술적인 가치는 그다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미술품 감정가인 새터스웨이트의 판단이었다.

 

 

<세상의 끝>

 

새터스웨이트는 아직도 스케치를 살피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그림의 배후에 있는 완벽한 기교를 알아보았다. 그는 놀랐고 동시에 기뻤다. 그는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칼튼 스미스 양, 이 그림 가운데 한 장을 파실래요?"

"5기니만 주시고 아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세요."

처녀는 무심하게 말했다.

새터스웨이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인장과 알로에가 그려진 작품을 골랐다. 그림의 전면에는 샛노란 미로사가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었고, 주홍색 알로에 꽃이 그림 안팎으로 흔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가시가 돋친 장방형의 선인장과 칼처럼 생긴 알로에가 기막히게 정확한 전체적 기조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그는 처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러한 작품을 얻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게다가 헐값에 귀한 작품을 샀습니다. 칼턴 스미스 양, 언젠가는 이 스케치를 매우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그가 고른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에 새로운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진심으로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힐끔 재빠르게 쳐다보는 눈빛에는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누구나 뭔가에 관심을 갖고 있지요. 물론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그렇지만 부인 말씀대로 그 아가씨는 그런 성격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성격이 강하죠.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처음엔 그것이 그녀의 예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닙니다. 저는 그처럼 삶에 초연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위험한 겁니다."

 

"칼턴 스미스 양은 여기를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데 근사한 이름 같지 않습니까?"

퀸은 천천히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암시적인 이름이군요. 이런 곳에 오는 건 평생에 한 번 뿐일 겁니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장소죠."

"무슨 뜻이죠?"

나오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퀸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대개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죠?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혹은 앞으로 가느냐 뒤로 가느냐. 그런데 여기서는 뒤에는 길이 있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새터스웨이트는 퀸과 함께 있을 때에 자신이 연극 속에서 배역을 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몇 번 들었다. 지금 그러한 착각이 무척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건 꿈이다. 모두 각자의 배역이 있다. '내 오팔'이라는 말이 그가 등장해야 된다는 신호였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스케치북을 돌려주었다.

"정말 훌륭해.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림에는 저 친구가 가장무도회 복장을 하고 있는 거죠?"

아주 잠깐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제겐 저분이 그렇게 보이거든요."

나오미 칼턴 스미스가 말했다.

 

 

<할리퀸의 오솔길>

"퀸 씨, 연인들을 위해 큰일을 하셨습니다."

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숙였다.

"퀸 씨는 그들을 슬픔에서, 아니 그보다 더한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당신은 죽은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 오셨습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선생님한테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상대가 말이 없자 새터스웨이트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나를 통해서 당신이 한 일입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직접 행동하지 않더군요."

"직접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이제 퀸의 목소리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새터스웨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조금 떨었다. 그는 분명 오후의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해는 여전히 밝았다.

 

존 덴먼은 금발에다 무뚝뚝하고 영국인 같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머리도 검고 야위어 묘하게 어딘지 비슷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뭐지? 아! 드디어 깨달았다. 발퀴레의 제1막이다. 서로 흡사한 지그문트와 지그린데, 거기에 이방인 훈딩. 그의 머릿속에서는 추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퀸이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일까? 하나만은 그도 굳게 믿었다. 그것은 퀸이 출현하는 곳엔 반드시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엔 어떤 것일까. 낡아빠진 진부한 삼각관계의 비극?

 

"옛날에 그 여자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콜롬비나 역을 맡아서 춤을 출 때도 완벽한 할리퀸을 찾지 못했답니다. 모르도프나 카스닌도 완벽하지 않았죠. 그 여자에겐 자신만의 상상이 있어요.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답니다. 언제나 꿈속의 할리퀸과 춤추고 있다고. 실제는 없는 남자와 말입니다. 할리퀸, 그 사람이 다가와 함께 춤춘다고 했어요. 그 여자가 연기하는 콜롬비나가 대단히 훌륭했던 건 바로 그러한 상상력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고 길의 끝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발견할까요?"

퀸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그는 머리 위의 허물어진 오두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신들이 꿈에서 본 집, 혹은 쓰레기 더미,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저는 한 번도 당신의 오솔길을 지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새터스웨이트는 기가 죽엇다. 퀸이 갑자기 거대하게 보였다. 눈앞에는 어딘지 협박을 하며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기쁨, 슬픔, 그리고 절망이.......

그리고 그의 여린 마음은 깜짝 놀라 움츠러들엇다.

"후회하십니까?"

퀸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에겐 어딘지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 아닙니다."

새터스웨이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기운을 되찾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 가지를 봤습니다. 저는 인생의 구경꾼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봅니다. 당신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퀸 씨."

그러나 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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