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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첫 해가 끝나갈 무렵, 이 과부는 지나칠 정도로 사람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칠팔천 프랑의 공채 이자를 받고, 마치 첩의 물건들처럼 아름다운 보석들과 휼륭한 은그릇을 가지고 있는 이 부자 장사꾼이, 왜 자기 재산에 비해서 너무 싼 하숙비를 지불하면서 머무르고 있나 하고 의아해했다. 첫해 대부분의 경우 고리오씨는 매주 한두 번 외식했다. 그 다음에는 달마다 두 번만 남몰래 하기에 이르렀다. 고리오 씨가 밖에서 식사하는 일은 보케르 부인의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자기 집에서 꼬박꼬박 식사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불쾌한 노릇이었다. 이러한 고리오 씨의 변화는 그의 재산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데다 주인인 자기를 괴롭히려는 생각에서 비롯했다고 그녀는 짐작했다. 속좁은 인간들이 지닌 가장 밉살스러운 버릇 중의 하나는 자신이 쩨쩨하니까 남도 쩨쩨할 것이라고 억측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읽으면서 답답해진다. 고리오 영감이 살던 시대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인가, 아니면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리어 왕 생각도 나고. 그냥 죽을 때까지 영감이 돈을 자식들에게 주지 말고 다 들고 있어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딸들을 그렇게 키우지 말지.
내가 발자크에 대해 안 것은 의외로 좀 어린 시절이었는데,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 책에서 발자크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진한 커피를 하루에도 여러 잔 마셨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다는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고, 또 그 책도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어린이들에게 바른 생활과 루틴을 강조하는 교육적인 책이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래서 정작 발자크가 어떤 소설가이고 어떤 책을 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새벽에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만 아주 어릴 때부터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번 독서는, 그렇게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발자크에 대한, 화석이 되어 버린 기억에 물을 주어서 다시 소생시키는 경험이었다. 발자크는 먼저 쓴 소설에 나온 인물들을 다음 소설에 재등장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면 그 거대한 유니버스를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참 좋은 책이 많아.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라 찾아봤는데 구스타브 카유보트라는 화가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그림이었는데 제법 유명한 그림인지 검색하니까 많은 내용이 나온다. 빠르게 훑어보니 그림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림 밖의 일화나 작가에 대한 설명 등도 할 이야기가 많은 그림인 것 같다. 인상주의 화가이면서도 사실주의 화풍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모네나 르누아르 등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사고 전시회를 후원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있다는데 그냥 보는 것보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습이 사진상으로만 보아도 훨씬 더 멋있는 것 같다. 직접 보면 더 감탄이 나오겠지. 그림의 배경은 아직도 존재하는 프랑스 파리의 뒤블랭 광장이라는데 만약 가게 된다면 이 구도로 사진을 찍어봐도 멋진 추억이 되겠지. 인상주의면서도 사실적으로 파리의 풍경을 멋지게 담아낸 화가의 그림과 당시 낭만주의 문학을 벗어나 사실주의 문학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해 예리하게 해부하는 듯한 소설가의 작품이 묘하게 어울린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