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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안나 카레니나 2
그녀가 운 것은 자신의 처지가 분명해지고 명백해졌으면 하던 꿈이 영원히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 남게 되리라는 것, 아니 예전보다 더욱 나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 온 사회적 지위,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토록 보잘것없게 보이던 그 지위가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정부와 살림을 차린 여자라는 그런 수치스러운 지위를 위해 지금의 지위를 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본래의 자신보다 더 강해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결코 사랑의 자유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124쪽 안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여운 것은 분명한데도 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심정적으로 남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브론스키는 세르푸호스키를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는 구레나룻을 길러 훨씬 남자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녔으며 잘생긴 외모보다는 얼굴과 체격에서 풍기는 부드러움과 고상함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브론스키가 그에게서 발견한 한 가지 변화는 성공을 거두고 모든 이들에게 그 성공을 인정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얼굴에 흔히 떠오르는 한결같은 고요한 빛이었다. 브론스키는 이 빛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르푸호스키의 얼굴에서 즉각 그 빛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157쪽 신기하게도 이 부분은 1권에서 레빈이 브론스키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브론스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레빈. 여기에서도 브론스키는 세르푸호스키에게 어쩔 수 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잠깐, 기다려! 그래, fardeau를 지고 양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경우는 fardeau를 등에 묶었을 때뿐이야. 그것이 바로 결혼이지. 나도 결혼한 후에 그것을 깨달았어. 갑자기 내 손이 홀가분해지더군.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이 fardeau를 질질 끌고 다니면, 손이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마잔코프와 크루포프를 봐. 그들은 여자 때문에 스스로 출셋길을 짓밟아 버렸잖아.˝ -164~165쪽 fardeau는 ‘짐’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한다. 이 책 곳곳에서는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외래어가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귀족들이 대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그 단어가 모국어에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대체 가능한데도 쓰고 있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외국어를 쓰면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스비야슈스키는 미소를 띤 눈으로 레빈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희미한 조소의 신호를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레빈은 지주의 말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비아슈스키보다는 지주의 말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 그는 분명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그 생각은 그가 나른한 지성을 무언가로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서 이르게 된 생각이 아니라, 그의 삶의 조건에서 나온 생각이며 그가 시골의 고독 속에 칩거하며 모든 측면을 곰곰히 숙고하여 얻은 생각이었다. -206쪽 농촌에서 살던 레빈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던 시절 놀러간 친구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비틀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기에서 만난 여러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어떻게든 방향을 잡고 싶으나 상대가 회피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탓에 번번이 좌절하는 레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빈의 장점은 쉽게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길을 찾아 묵묵히 가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는 그 때 본 것을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특히 학교 가는 아이들, 지붕에서 보도로 내려앉는 회청색 비둘기들, 보이지 않는 손이 진열해 둔 가루 묻힌 흰 빵, 이런 것들이 그를 감동시켰다. 이 빵과 비둘기와 두 소년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다. 소년은 비둘기에게 달려가다 레빈을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비둘기는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허공에 아른거리는 눈가루 틈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작은 창문 안쪽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고 뒤이어 흰 빵들이 진열되었다. 레빈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좋아 기쁨에 겨워 울고 웃었다. 그는 가제트니 거리와 키슬로프카를 따라 멀리 돌아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기 앞에 시계를 놓고 앉아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353쪽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청혼이 거절된 뒤 힘들어하다가 결국 시간이 돌고 돌아 다시 그 여자를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날의 기쁨이다. 톨스토이가 문단 첫 번째 문장에 써 놓았듯이 다시는 못 올 환희의 순간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아껴주며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느낌. 이 부분을 읽으면서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한 후 펼쳐지던 뮤지컬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이 부당하게 경멸했던 사람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자각은 그의 슬픔에서 작은 일부만을 차지했다. 지금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최근 차갑게 식은 줄로만 알았던 안나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영원히 잃었음을 깨닫게 된 지금에 와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나가 아픈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고 그녀의 영혼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껏 그녀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그녀를 알고 그녀에게 마땅히 주었어야 할 사랑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지금, 그는 그녀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고 그녀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치욕적인 기억만을 남긴 채 영원히 그녀를 잃은 것이다. -379쪽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이기적인 것인지, 안나가 임신을 하고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브론스키가 안나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을 느낄 때 점점 안나에 대해 멀어지는 느낌을 받다가, 안나가 사경을 헤매는 시기에 결국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정당하고 관대한 사람인지 자신은 결국 이 부부에게서 곁가지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가고 나서야 안나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게 된다. 나는 이 책의 결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부분에서 진심으로 안나가 브론스키를 단념하고 카레닌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회화와 중세 시대에 대한 브론스키의 열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 대해 어느 정도 취미를 갖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그림을 완성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그림은 중단되었다. 그는 만약 자신이 그림을 계속 그린다면 처음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그림의 단점이 놀랄 만큼 두드러지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고 느끼면서도 생각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은 지금 생각을 성숙시키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기만하는 골레니셰프처럼 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골레니셰프는 그 일로 격분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브론스키는 자신을 속일 수도, 괴롭힐 수도, 특히 격분한 수도 없었다. 그는 그 특유의 단호한 성격으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을 정당화시키지도 않은 채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511쪽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브론스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숙하고 자신만만했던 주인공이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만약 현대 서구 사회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안기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19세기 러시아에서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레빈이 결혼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레빈은 행복했다. 그러나 일단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 그는 걸음걸음마다 그 행복이 그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걸음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행복하게 떠다니는 보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그 보트에 몸소 앉았을 때 느꼈음 직한 것을 경험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한시도 잊지 말고, 발아래에 물이 있다는 점, 노를 저어야 한다는 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하면 아프다는 점, 보고만 있을 때는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해 보면 무척 즐겁기는 해도 굉장히 힘들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512쪽 백조를 보면 물 위에 둥둥 우아하고 편안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물 밑으로는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다. 이런 비유는 겉으로는 유유자적 여유롭게 보여도 실은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비유할 때 많이 쓰이는 표현이기는 한데, 바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 같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 결혼생활의 유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혼식 후 그녀를 교회에서 데리고 나올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그제야 비로소 분명히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이제는 어디까지가 그녀이고 어디서부터가 자기인지 모르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그 순간 경험한 둘로 나뉘는 괴로움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화를 냈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곧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그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후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때린 사람을 찾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자신이 무심코 자신을 친 것일 뿐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고 그저 아픔을 참으며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는 것을 확인했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517쪽 결혼 생활에서 부부간에 완전하게 분리하여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하나로 붙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상하고도 낯설게 느껴지면서 어느 순간 상대방 자체가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느낌을 오가는 것이 결혼 생활의 초기인 것 같다.
‘그래, 집에 대한 관심(그녀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을 제외하면, 자신의 몸치장을 제외하면, broderie anglaise를 제외하면, 그녀에게는 진지한 관심이 전혀 없어. 나의 일에 대해서도, 농사에 대해서도, 농부들에 대해서도, 그녀가 상당한 재능을 보인 음악에 대해서도, 독서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야.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어.’ 레빈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닥칠 활동 시기, 즉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아이들을 낳아 젖을 먹이고 키울 시기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 무시무시한 노동에 대비하여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랑의 행복과 평안의 순간들 속에서 자책 없이 즐겁게 미래의 보금자리를 엮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525쪽 broderie anglaise 는 영국 자수라고 한다. 흰색의 면이나 마에 흰 실로 수를 놓는 것으로 실제로 보면 우아한 느낌이 든다. 결혼 후 본능적으로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아내를 보며 결혼 전 매혹되었던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워하는 남편의 마음인 것 같다. 어쩌면 이중적인 마음일 수도 있겠다. 안주인으로서 하인들을 잘 통솔하고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주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진지한 관심’을 아내가 가졌으면 하는 마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오직 한 가지, 그가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 사실을 감춘 채 그에게 병에 든 약을 주기도 하고 약과 의사를 찾기도 하면서, 그와 자신과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거짓, 혐오스럽고 모욕적이고 불경스러운 거짓이었다. 레빈은 성품의 특성상,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이러한 거짓을 특히 가슴 아프게 느꼈다. -558쪽 5부 20장에는 다른 장과는 다르게 부제가 붙어 있다. 죽음. 레빈의 형이 죽어가고 레빈의 아내는 그를 위해 봉사한다. 레빈과는 다른 방식으로. 훨씬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의 마음속에서는 분명 그가 죽음을 욕망의 충족으로, 행복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굶주림, 피로, 갈증처럼 고통이나 결핍이 일으키는 개별적 욕망이 쾌락을 부여하는 육체의 작용을 통해 충족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결핍과 고통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충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새로운 고통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따라서 모든 욕망은 오직 하나의 욕망, 즉 모든 고통과 그것의 기원인 육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해방에 대한 욕망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습관에 따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560쪽 한 가정의 가벼운 불륜으로 시작했던 이 소설이 삶이 5부의 중반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을 이야기하려면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왜 유일하게 이 장에만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의 죽음을 통해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커졌지만, 아내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절망하지는 않았으며 더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부모로부터 자라나 태어날 때부터 나의 피붙이임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형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장의 마지막은 키티가 임신을 확인한 것으로 끝난다.
˝아뇨˝ 리디야 이바노프나 백작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나도 부도덕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는 무엇이 여자를 부도덕으로 이끄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는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잔인함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것도 누구에게요? 바로 당신에게요! 어떻게 당신이 있는 이 도시에 머물 수 있죠? 아뇨, 평생 공부라고 했어요. 그리고 난 지금 당신의 숭고함과 그녀의 천박함을 배우는 중이에요.˝ -593쪽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생각해보면 안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랑 없는 결혼, 고지식한 남편 때문에 힘들었더라도 상대에게 이 정도의 좌절과 슬픔을 안기면서까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을 과연 솔직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남편보다 안나가 훨씬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상대방에 대한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을 이중적이라고 지탄하면 내가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하지만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나와 느끼는 방식이 다른가,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가, 결혼하는 방식이 다른가, 그 다른 사람들은, 브론스키 같은 사람들은, 오블론스키 같은 사람들은......, 뚱뚱한 장딴지를 지닌 그 시종은?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그 원기왕성하고 건강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나 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끌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줄지어 떠올랐다. -596쪽 아내의 외도로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에 휩싸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수해야만 했던 카레닌은 이 대목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려고 노력한다. 방향이 혹시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고민하는 카레닌과 대조적으로 안나는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없다. 안나는 이러면서도 왜 바로 이혼을 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사회적인 시선, 실제적인 지위를 버릴 용기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그와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ㅡ세료쟈는 그렇게 느꼈다ㅡ마치 자신이 상상해 낸, 책에나 나오는, 그러나 세료자와 전혀 닮지 않은 어떤 남자아이를 대하듯 했다. 그래서 세료쟈는 아버지와 있을 때면 늘 바로 그런 책 속의 남자아이인 척하려고 애썼다. ˝이해하겠니? 그랬으면 좋겠다만.˝ 아버지가 말했다. ˝네, 아빠.˝ 세료쟈는 상상 속의 남자아이인 척하면서 대답했다. -605~606쪽 카레닌은 결국 자기가 커온 방식대로 아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는 아버지처럼 파국에 도달해서야 자기 감정을 뒤늦게 감지하게 되는 어른으로 클 지도 모른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눈꺼풀이 눈동자를 보호하듯 그것을 지켰다. 그리고 사랑의 열쇠가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의 교육자들은 그가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그의 영혼은 인식에 대한 열망으로 넘쳤다. 그래서 그는 교사가 아니라 카피투니치에게서, 보모에게서, 나젠카에게서, 바실리 루키치에게서 배웠다. 아버지와 교사가 자신들의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기 위해 기대하던 물은 이미 오래전에 새어 나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608쪽 만약에 이 아이가 안나와 함께 컸더라면 좀 더 아버지의 가치에 순응하는 아이가 되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 어머니의 부재가 아이를 매사에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다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신비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나게 했을 수도 있겠다.
나중에 그녀는 아들에게 할 수 있었을 말을 얼마나 많이 생각해 냈던가!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세료쟈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머니가 불행하다는 것,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보모가 귓속말로 이야기한 것까지 이해했다. 그는 `언제나 9시에.`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아버지에 관한 말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아버지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그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왜 엄마의 얼굴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떠올랐을까......? 엄마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부끄러워한다. 그는 자기에게 이 의혹을 풀어 줄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료쟈는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어머니에게 바짝 기대어 이렇게 속삭였다.
“아직 가지 마. 아버지는 금방 오시지 않아.” -630쪽 마음 아픈 구절이다. 여러 번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끝내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안나가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사교계에서의 지위나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아들이었을 것이다. 당대에 외도로 이혼당한 아내는 자식을 키울 수도 마음껏 볼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각오하고 결국 브론스키와 그 사이에 태어난 딸과 함께 해외로 간 안나가 끝까지 공감이 가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안나가 자신의 아들을 단 한순간일지라도 외면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