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들지 못한다는 것은 4대 비극보다 작품성이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셰익스피어 작품 통틀어서 남녀노소 전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져 있고 인기 있는 작품인 것을.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이었던, 우리 세대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로미오였던 영화가 있었다. 원수 집안의 10대 자녀들이 며칠 만에 사랑에 빠지고 끝내 죽어버리는 이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이후에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박하게 별점을 매겨도 되나... 고민했지만 결국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학이란 동일한 잣대로 평가되는 시험도, 운동 경기도, 순위 결정전도 아니다.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 중요한 것 아닌가? 모두가 좋다고 해도 내가 별로라고 느낀다면 적어도 그 소설은 나에게는 별로인 것이다. 심리 묘사가 탁월한 것은 인정한다.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의 문장이 많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밀하게 심리 묘사를 했는데 왜 이렇게 소설이 와닿지가 않지? 하다가 그 답을 찾았다. 등장 인물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등장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껴야 나와 가공의 인물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생면부지의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 나를 던져놓아 몰입하는 과정이 가능할텐데 소설을 읽는 내내 너는 너, 나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너의 슬픔은 너의 슬픔이지 나의 슬픔은 아니다, 아니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전과의 연결을 끊을 기회까지 주어졌는데 이러니 저러니 말은 많아도 결국 온갖 핑계를 대어가며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너가 자초한 거니까 내 연민조차 너에게는 아깝구나, 아니 여기서 두 발 더 나아가... 넌 대체 슬프기는 하니? 아프기는 하니? 이 단계까지 나가니 오히려... 등장 인물에도 소설 전체에도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전문직인 20대의 남자 주인공, 인생과 사랑과 돈과 일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된 역시 전문직의 30대 여자 주인공, 자주 이기적이지만 현실적이고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40대 남자 주인공. 모든 주인공마다 조금씩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하기 힘든 이유는 작가가 20대의 여성이었던 시절에 이 책을 썼기 때문이려나? 나이에 대한 회한이 드러나는 부분은 다소 억지스러워 젊은이가 노인을 보고 머릿속으로 그려낸 정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꽤 잘 그리기는 했지만 아주 잘 그린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는 디저트로 참 유명한 나라인데, 예쁘고 앙증맞은 디저트를 보다 눈이 즐거워 선택한 뒤 막상 한 스푼 뜨면 달디 단 맛이 확 퍼지다가, 앞에 앉은 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두 스푼 세 스푼 뜨고 마지막 스푼에 이르러 없어지면 그제서야 그동안 내가 뭘 먹었지? 무슨 맛이었더라? 하고 생각도 안 날 때가 있다. 하고 있던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만큼, 화제를 먹고 있는 디저트로 돌릴 만큼 임팩트가 크지는 않았던 탓이다. 이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4년 전에는 문학동네 출판사의 책이었는데, 양쪽의 표지는 둘 다 마음이 들지만 특히 이번에 읽은 민음사 판은 마치 가상의 도시인 무진에 진짜 가서 찍어온 것 같은 안개 자욱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왔다. 좀 더 오래 길게 글을 써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들게 만드는 작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나 카레니나 3


모스크바에 온 처음 얼마 동안, 레빈은 시골 사람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방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비생산적이지만 불가피한 지출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점에서 그에게 일어난 현상은 흔히 술 취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고들 하는 현상이었다. 첫 잔은 막대기처럼 목에 걸리고, 두 번째 잔은 매처럼 날아가고, 세 번째 잔부터는 작은 새들처럼 마구 넘어가는 것이다. -265쪽 이 부분을 읽으면 당시 사회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을 알 수 있다. 하인과 수위의 제복을 별도로 구매해야 하고, 친척들에게 만찬을 베푸는 등의 일은 레빈에게 요구되는 비생산적이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농사를 짓는 그는 일정한 곡물에는 일정한 가격이 있어서 그 밑으로는 팔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도시에서는 이미 그 밑으로 팔린다.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는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입술에 닿은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을 믿지 않는 그가 입술로만 그 말을 되풀이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알았다. 자신의 모든 의심뿐 아니라 자신이 내면에서 인식하고 있던 불가능성, 즉 이성을 통해서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까지도 자신이 신에게 호소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모든 것들은 이제 그의 영혼 속에서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자신을,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사랑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그 존재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에게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 333~334쪽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평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던 그가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는 장면이다. 결혼을 통하여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을 재점검하거나 타협해나가는 레빈이 책 전체에서 가장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 -396쪽 아마도 권태기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까?

‘저기야!’ 안나는 객차의 그림자를, 석탄 가루와 뒤섞인 채 침목을 뒤덮은 모래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저기가 바로 중간이야. 난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
...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객차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그녀와 나란히 온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일어날 자세를 취하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짓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점점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455-456쪽 브론스키와 싸우고 나서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상상 속에서 들은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모습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리 증상이 생긴 것일까? 질주하는 사고는 안나가 밤에 잠이 안 와서 복용하던 아편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녀의 죽음의 의미가 떠오른다. 상대에 대한 엄청난 분노로 상대를 벌주기 위해 자기를 파괴하는 방법으로서의 자살. 죽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읽으면서 소름이 끼치고 문장 하나하나가 엄숙하고 아름답다.

그는 그녀와 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러한 순간은 독에 오염되어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회환을 남긴 채 실현되어 버린 그녀의 의기양양한 협박만을 기억했다. 그는 더 이상 치통을 느끼지 않았다. 흐느낌이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486쪽 자살을 하고 나면 남은 사람이 얼마나 파괴되는지 브론스키를 보면 알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안나 카레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들려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념들은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그를 괴롭히고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그를 내버려 두는 법이 없었다. 그는 읽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읽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최근 그는 모스크바에서나 시골에서나 유물론으로부터는 해답을 발견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셸링, 헤겔, 쇼펜하우어 등 삶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은 철학자들의 책을 다시 읽어 보거나 처음으로 통독을 하곤 했다.
그들의 사상은 그가 책을 읽거나 다른 학설, 특히 유물론에 대한 반박을 찾으려 할 때는 유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책을 읽거나 직접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 할 때면, 언제는 곧 똑같은 것이 되풀이되곤 했다. 정신, 의지, 자유, 본질 같은 모호한 말들의 정의를 따라가는 동안, 철학자들이나 그 자신이 그에게 쳐 놓은 말들의 덫에 일부러 빠지는 동안, 그는 마치 무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인위적인 사유 과정을 잊은 채, 삶에서 벗어나 그저 주어진 실을 따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만족을 준 것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카드로 만든 집 같은 그 인위적인 구조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그 구조물은 삶에서 이성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와 상관없이 그저 치환된 것에 불과한 똑같은 말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곤 했다.
언젠가 그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의지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에 사랑을 넣어 보았다. 그러자 그 새로운 철학은 그가 그 철학을 벗어나기까지 이틀 동안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삶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자, 그것 역시 와르르 무너지며, 몸을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하는 모슬린 옷이었음을 드러냈다. -501∼502쪽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에서 톨스토이언은 톨스토이의 사상을 바탕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정작 톨스토이 자신은 톨스토이언이 아니라고 톨스토이언이 되고자 찾아온 젊은이에게 톨스토이 스스로 이야기한다. 아마도 평생 자기 모순 속에서 톨스토이는 싸워 왔을 것이다.

'이건 비밀이야. 이것은 나에게만 필요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중요한 비밀이야.
이 새로운 감정은 나를 바꾸지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아, 그리고 내가 상상하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계몽시키지도 않아. 아들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지. 역시 뜻밖의 선물은 없었어. 믿음인지 아닌지, 난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 감정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을 통해 들어와 내 영혼 속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어.
난 여전히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겠지.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여전히 내 생각을 부적절하게 표현할 거야. 나의 지성소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와의 사이에도 여전히 벽이 존재할 거야. 난 여전히 나의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비난하고 그것을 후회하겠지. 나의 이성으로는 내가 왜 기도를 하는지 깨닫지 못할 테고,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기도를 할 거야.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559∼560쪽 이 책 전체의 마지막 단락이자 레빈의 생각이다. 여기까지 다 읽고 나면 과연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이 안나 카레니나인지 레빈인지 알 수가 없다. 레빈은 누가 뭐라고 해도 톨스토이의 분신이며, 우리 모두의 고민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삶의 부분들에 대해 답답해하다가, 결국 그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삶의 본성이라는 깨달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나 카레니나 2

그녀가 운 것은 자신의 처지가 분명해지고 명백해졌으면 하던 꿈이 영원히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 남게 되리라는 것, 아니 예전보다 더욱 나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 온 사회적 지위,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토록 보잘것없게 보이던 그 지위가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정부와 살림을 차린 여자라는 그런 수치스러운 지위를 위해 지금의 지위를 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본래의 자신보다 더 강해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결코 사랑의 자유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124쪽 안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여운 것은 분명한데도 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심정적으로 남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브론스키는 세르푸호스키를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는 구레나룻을 길러 훨씬 남자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녔으며 잘생긴 외모보다는 얼굴과 체격에서 풍기는 부드러움과 고상함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브론스키가 그에게서 발견한 한 가지 변화는 성공을 거두고 모든 이들에게 그 성공을 인정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얼굴에 흔히 떠오르는 한결같은 고요한 빛이었다. 브론스키는 이 빛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르푸호스키의 얼굴에서 즉각 그 빛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157쪽 신기하게도 이 부분은 1권에서 레빈이 브론스키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브론스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레빈. 여기에서도 브론스키는 세르푸호스키에게 어쩔 수 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잠깐, 기다려! 그래, fardeau를 지고 양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경우는 fardeau를 등에 묶었을 때뿐이야. 그것이 바로 결혼이지. 나도 결혼한 후에 그것을 깨달았어. 갑자기 내 손이 홀가분해지더군.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이 fardeau를 질질 끌고 다니면, 손이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마잔코프와 크루포프를 봐. 그들은 여자 때문에 스스로 출셋길을 짓밟아 버렸잖아.˝ -164~165쪽 fardeau는 ‘짐’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한다. 이 책 곳곳에서는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외래어가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귀족들이 대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그 단어가 모국어에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대체 가능한데도 쓰고 있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외국어를 쓰면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스비야슈스키는 미소를 띤 눈으로 레빈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희미한 조소의 신호를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레빈은 지주의 말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비아슈스키보다는 지주의 말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 그는 분명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그 생각은 그가 나른한 지성을 무언가로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서 이르게 된 생각이 아니라, 그의 삶의 조건에서 나온 생각이며 그가 시골의 고독 속에 칩거하며 모든 측면을 곰곰히 숙고하여 얻은 생각이었다. -206쪽 농촌에서 살던 레빈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던 시절 놀러간 친구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비틀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기에서 만난 여러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어떻게든 방향을 잡고 싶으나 상대가 회피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탓에 번번이 좌절하는 레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빈의 장점은 쉽게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길을 찾아 묵묵히 가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는 그 때 본 것을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특히 학교 가는 아이들, 지붕에서 보도로 내려앉는 회청색 비둘기들, 보이지 않는 손이 진열해 둔 가루 묻힌 흰 빵, 이런 것들이 그를 감동시켰다. 이 빵과 비둘기와 두 소년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다. 소년은 비둘기에게 달려가다 레빈을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비둘기는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허공에 아른거리는 눈가루 틈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작은 창문 안쪽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고 뒤이어 흰 빵들이 진열되었다. 레빈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좋아 기쁨에 겨워 울고 웃었다. 그는 가제트니 거리와 키슬로프카를 따라 멀리 돌아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기 앞에 시계를 놓고 앉아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353쪽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청혼이 거절된 뒤 힘들어하다가 결국 시간이 돌고 돌아 다시 그 여자를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날의 기쁨이다. 톨스토이가 문단 첫 번째 문장에 써 놓았듯이 다시는 못 올 환희의 순간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아껴주며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느낌. 이 부분을 읽으면서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한 후 펼쳐지던 뮤지컬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이 부당하게 경멸했던 사람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자각은 그의 슬픔에서 작은 일부만을 차지했다. 지금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최근 차갑게 식은 줄로만 알았던 안나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영원히 잃었음을 깨닫게 된 지금에 와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나가 아픈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고 그녀의 영혼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껏 그녀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그녀를 알고 그녀에게 마땅히 주었어야 할 사랑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지금, 그는 그녀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고 그녀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치욕적인 기억만을 남긴 채 영원히 그녀를 잃은 것이다. -379쪽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이기적인 것인지, 안나가 임신을 하고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브론스키가 안나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을 느낄 때 점점 안나에 대해 멀어지는 느낌을 받다가, 안나가 사경을 헤매는 시기에 결국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정당하고 관대한 사람인지 자신은 결국 이 부부에게서 곁가지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가고 나서야 안나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게 된다. 나는 이 책의 결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부분에서 진심으로 안나가 브론스키를 단념하고 카레닌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회화와 중세 시대에 대한 브론스키의 열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 대해 어느 정도 취미를 갖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그림을 완성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그림은 중단되었다. 그는 만약 자신이 그림을 계속 그린다면 처음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그림의 단점이 놀랄 만큼 두드러지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고 느끼면서도 생각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은 지금 생각을 성숙시키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기만하는 골레니셰프처럼 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골레니셰프는 그 일로 격분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브론스키는 자신을 속일 수도, 괴롭힐 수도, 특히 격분한 수도 없었다. 그는 그 특유의 단호한 성격으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을 정당화시키지도 않은 채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511쪽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브론스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숙하고 자신만만했던 주인공이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만약 현대 서구 사회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안기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19세기 러시아에서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레빈이 결혼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레빈은 행복했다. 그러나 일단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 그는 걸음걸음마다 그 행복이 그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걸음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행복하게 떠다니는 보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그 보트에 몸소 앉았을 때 느꼈음 직한 것을 경험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한시도 잊지 말고, 발아래에 물이 있다는 점, 노를 저어야 한다는 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하면 아프다는 점, 보고만 있을 때는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해 보면 무척 즐겁기는 해도 굉장히 힘들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512쪽 백조를 보면 물 위에 둥둥 우아하고 편안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물 밑으로는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다. 이런 비유는 겉으로는 유유자적 여유롭게 보여도 실은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비유할 때 많이 쓰이는 표현이기는 한데, 바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 같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 결혼생활의 유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혼식 후 그녀를 교회에서 데리고 나올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그제야 비로소 분명히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이제는 어디까지가 그녀이고 어디서부터가 자기인지 모르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그 순간 경험한 둘로 나뉘는 괴로움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화를 냈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곧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그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후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때린 사람을 찾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자신이 무심코 자신을 친 것일 뿐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고 그저 아픔을 참으며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는 것을 확인했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517쪽 결혼 생활에서 부부간에 완전하게 분리하여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하나로 붙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상하고도 낯설게 느껴지면서 어느 순간 상대방 자체가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느낌을 오가는 것이 결혼 생활의 초기인 것 같다.

‘그래, 집에 대한 관심(그녀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을 제외하면, 자신의 몸치장을 제외하면, broderie anglaise를 제외하면, 그녀에게는 진지한 관심이 전혀 없어. 나의 일에 대해서도, 농사에 대해서도, 농부들에 대해서도, 그녀가 상당한 재능을 보인 음악에 대해서도, 독서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야.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어.’ 레빈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닥칠 활동 시기, 즉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아이들을 낳아 젖을 먹이고 키울 시기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 무시무시한 노동에 대비하여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랑의 행복과 평안의 순간들 속에서 자책 없이 즐겁게 미래의 보금자리를 엮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525쪽 broderie anglaise 는 영국 자수라고 한다. 흰색의 면이나 마에 흰 실로 수를 놓는 것으로 실제로 보면 우아한 느낌이 든다. 결혼 후 본능적으로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아내를 보며 결혼 전 매혹되었던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워하는 남편의 마음인 것 같다. 어쩌면 이중적인 마음일 수도 있겠다. 안주인으로서 하인들을 잘 통솔하고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주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진지한 관심’을 아내가 가졌으면 하는 마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오직 한 가지, 그가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 사실을 감춘 채 그에게 병에 든 약을 주기도 하고 약과 의사를 찾기도 하면서, 그와 자신과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거짓, 혐오스럽고 모욕적이고 불경스러운 거짓이었다. 레빈은 성품의 특성상,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이러한 거짓을 특히 가슴 아프게 느꼈다. -558쪽 5부 20장에는 다른 장과는 다르게 부제가 붙어 있다. 죽음. 레빈의 형이 죽어가고 레빈의 아내는 그를 위해 봉사한다. 레빈과는 다른 방식으로. 훨씬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의 마음속에서는 분명 그가 죽음을 욕망의 충족으로, 행복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굶주림, 피로, 갈증처럼 고통이나 결핍이 일으키는 개별적 욕망이 쾌락을 부여하는 육체의 작용을 통해 충족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결핍과 고통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충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새로운 고통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따라서 모든 욕망은 오직 하나의 욕망, 즉 모든 고통과 그것의 기원인 육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해방에 대한 욕망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습관에 따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560쪽 한 가정의 가벼운 불륜으로 시작했던 이 소설이 삶이 5부의 중반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을 이야기하려면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왜 유일하게 이 장에만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의 죽음을 통해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커졌지만, 아내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절망하지는 않았으며 더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부모로부터 자라나 태어날 때부터 나의 피붙이임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형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장의 마지막은 키티가 임신을 확인한 것으로 끝난다.

˝아뇨˝ 리디야 이바노프나 백작부인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나도 부도덕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는 무엇이 여자를 부도덕으로 이끄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는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잔인함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것도 누구에게요? 바로 당신에게요! 어떻게 당신이 있는 이 도시에 머물 수 있죠? 아뇨, 평생 공부라고 했어요. 그리고 난 지금 당신의 숭고함과 그녀의 천박함을 배우는 중이에요.˝ -593쪽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생각해보면 안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랑 없는 결혼, 고지식한 남편 때문에 힘들었더라도 상대에게 이 정도의 좌절과 슬픔을 안기면서까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을 과연 솔직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남편보다 안나가 훨씬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상대방에 대한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을 이중적이라고 지탄하면 내가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하지만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나와 느끼는 방식이 다른가,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가, 결혼하는 방식이 다른가, 그 다른 사람들은, 브론스키 같은 사람들은, 오블론스키 같은 사람들은......, 뚱뚱한 장딴지를 지닌 그 시종은?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그 원기왕성하고 건강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나 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끌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줄지어 떠올랐다. -596쪽 아내의 외도로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에 휩싸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수해야만 했던 카레닌은 이 대목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려고 노력한다. 방향이 혹시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고민하는 카레닌과 대조적으로 안나는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없다. 안나는 이러면서도 왜 바로 이혼을 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사회적인 시선, 실제적인 지위를 버릴 용기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그와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ㅡ세료쟈는 그렇게 느꼈다ㅡ마치 자신이 상상해 낸, 책에나 나오는, 그러나 세료자와 전혀 닮지 않은 어떤 남자아이를 대하듯 했다. 그래서 세료쟈는 아버지와 있을 때면 늘 바로 그런 책 속의 남자아이인 척하려고 애썼다. ˝이해하겠니? 그랬으면 좋겠다만.˝ 아버지가 말했다. ˝네, 아빠.˝ 세료쟈는 상상 속의 남자아이인 척하면서 대답했다. -605~606쪽 카레닌은 결국 자기가 커온 방식대로 아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는 아버지처럼 파국에 도달해서야 자기 감정을 뒤늦게 감지하게 되는 어른으로 클 지도 모른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눈꺼풀이 눈동자를 보호하듯 그것을 지켰다. 그리고 사랑의 열쇠가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의 교육자들은 그가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그의 영혼은 인식에 대한 열망으로 넘쳤다. 그래서 그는 교사가 아니라 카피투니치에게서, 보모에게서, 나젠카에게서, 바실리 루키치에게서 배웠다. 아버지와 교사가 자신들의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기 위해 기대하던 물은 이미 오래전에 새어 나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608쪽 만약에 이 아이가 안나와 함께 컸더라면 좀 더 아버지의 가치에 순응하는 아이가 되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 어머니의 부재가 아이를 매사에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다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신비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나게 했을 수도 있겠다.

나중에 그녀는 아들에게 할 수 있었을 말을 얼마나 많이 생각해 냈던가!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세료쟈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머니가 불행하다는 것,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보모가 귓속말로 이야기한 것까지 이해했다. 그는 `언제나 9시에.`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아버지에 관한 말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아버지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그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왜 엄마의 얼굴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떠올랐을까......? 엄마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부끄러워한다. 그는 자기에게 이 의혹을 풀어 줄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료쟈는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어머니에게 바짝 기대어 이렇게 속삭였다.
“아직 가지 마. 아버지는 금방 오시지 않아.” -630쪽 마음 아픈 구절이다. 여러 번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끝내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안나가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사교계에서의 지위나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아들이었을 것이다. 당대에 외도로 이혼당한 아내는 자식을 키울 수도 마음껏 볼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각오하고 결국 브론스키와 그 사이에 태어난 딸과 함께 해외로 간 안나가 끝까지 공감이 가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안나가 자신의 아들을 단 한순간일지라도 외면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