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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평점 :
나이가 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 거대(巨大)가 실은 언제나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우리에게 체험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고기압은 맑은 햇살과 쨍한 바람으로, 저기압은 눈이나 안개, 구름으로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저기압 속을 걸어가고 있어, 라거나 고기압을 맞고 있어, 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은 그 두 기압 중의 하나를 벗어날 수가 없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산이나 외투, 따뜻한 찻잔이나 장갑 등이 사실은 다 그 고기압과 저기압의 파생물이기도 한데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것들, 이를테면 역사, 이를테면 지구, 환경, 정치 등의 파생물인 풀잎, 감나무, 라디오 프로그램, 반찬, 세금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이 책이 아주 가벼운 깃털이지만 그 깃털 하나로 전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여자가 남자를 친구로 여기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인 거 같아. 하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응해줄 택도 없으니까. 또 하나는 정말 필이 안 와서……. 그리고 남자가 여자 친구를 가지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야. 혹시 언젠가 애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구절을 꼽은 이유는……. 읽는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참 깔끔한 분이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 도무지 자기가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소 안 하는 버릇과 깔끔한 장소에서 생활하던 버릇이 상충함으로써 오는 괴로움, 나도 늘 겪는 일이지만 전혀 이런 생각은 못하고 있던 차에 ‘맞아, 맞아’하며 공감하게 되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공지영은 이런 사소한 일상을 잡아내어 나와 같은 독자의 웃음을 유도한다. 내가 공지영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 같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웃게 해 줄 수 있어서.
“무엇이 그리 겁날게 있어? 까짓 거 상처밖에 더 받겠느냐고. 그리고 인생에 상처도 없으면 뭔 재미로 사냐 말이야.”
-내 인생을 소설에 비교한다면 작품성은 몰라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나 간판? 미쑈, 당기쇼가 보여”
-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이라…….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냈나? 또 작가의 주변에는 어쩜 이렇게 흥미진진한 사람들이 많은지.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의 차이 중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은,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물으면, 응, 나는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닫는 재미로 살고 싶어, 라고 대답하곤 하던 내게 패랭이꽃은 많은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이 교훈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살아 있기에 보기에도 싫고 쓸모없고 심지어 버리면 더 좋을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한 모양을 가지고 완벽한 초록으로 무장한 비닐 화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푸라기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이나 아이들이나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청사진은 그러므로 내게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이 부분. 내 삶의 군더더기,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 더 좋을 부분에 치여 허덕이는 바로 지금의 나에게는 눈물이 날 만한 구절이었다.
나는 어릴 때 내 성이 너무 특이해서 싫었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눈에 뜨이는데 성까지 특이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구절을 읽고 나니 묘하게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났다. 남편의 수입이 괜찮은 날은 문패에 새긴 이름이 힘차게 보이고, 수입이 줄어들면 똑같은 이름이 쪼그라든 것처럼 보인다는 구절. 어릴 때는 그런 구절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얼마 전에 읽을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힘들고 창피한 일을 겪을 때는 눈에 띄기 싫어 죽겠는데 가뜩이나 이름까지 튀어 숨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두려움, 수치……. 막연히 세상이 나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꼈던 어릴 때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뿌듯해했지만 요즘은 자꾸 내 이름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의 등장인물에 ‘김’, ‘이’, ‘박’과 같은 성을, 평범한 성을 가진 작가는 ‘독고’, ‘황보’, ‘석’과 같은 성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고 한다. 음……. 그래도 공지영씨가 자신의 이름 덕을 조금은 보고 있는 것처럼(작가가 되고 난 이후에 틀림없이 어느 정도는 이름에서 오는 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하고 막연히 바래본다.
나는 아직도 모임 끝에 지금부터 공지…….하면 깜짝 놀라는 버릇이 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공지 사항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 또한 이름으로 인해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감했다. 작가처럼 특정 단어에 매번 아닌 줄 알면서도 반응하는 것도 똑같고. 특이한 이름 때문에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간 법원에서조차 사인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가슴 아팠지만, 마지막에 웃고야 말았다는 부분에서조차도 묘하게 공감이 갔다. 그 순간에 터져 나왔을 웃음이 어떤 빛깔일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이들은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오래전 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도 아마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친구와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했던 모진 말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히 나, 네 이야기에 이제 지쳤어. 설사 나쁘게 악화되었다 해도 좋으니 새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
-한동안 연락이 끊기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찾은 친구는 또 그 레퍼토리를 반복했고 결국 공지영은 또 한 번 모진 말을 하고 친구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이 구절은 왜 내 마음에 들었을까? 나 또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럴 경우엔 정말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이런 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심리학에 따르면 언제나 남의 탓을 하는 성격장애와 언제나 자기 탓을 하는 신경증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거칠게 말하면 주로 남자에게 성격장애가 많고 여자에게 신경증적인 요소가 많은데, 병원을 찾는 이들은 주로 신경증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둘 다 병적인 상태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면담 치료에 꽤 효과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탓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한 지 하루가 지났거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쯤 지나면 남을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다.
나 역시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그 쉽고도 유명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까지 정말 많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남의 눈의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보라”는 성경 말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의 들보 사이사이로 남의 티끌이 그렇게 잘 보이더라는 한 친구의 말. 모든 유머는 정곡을 찌르기에 이 말은 아마 당시에 상당한 유머였을 것이라고. 알고 실천한다는 것이란……. 아는 것도 한 단계이지만, 알고 실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단계이다.
“너는 그 상처들을 어떻게 다 이겨냈니?”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상처들을 이겨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해질 수 있는 경로를 좀 개발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신기하게도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라는 걸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처음에는 이것이 갑자기 마라톤을 뛰려는 것처럼 어림도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런데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도 어찌됐든 그래 보려고 애쓰면 신기하게도 근육이 생기듯이 조금씩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힘든 친구에게 가끔 말하곤 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잘하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 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장미란 선수의 어깨가 처음부터 그 무거운 걸 들어 올렸던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로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쪽으로 가보려고 애쓰는 것. 그건 꼭 보답을 받아. 물론 네 자신에게 말이야.”
살아 있는 것일수록 불완전하고 상처는 자주 파고들며 생명의 본질이 연한 것이기에 상처는 더 깊다.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는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상처를 버리기 위해 집착도 버리고 나면 상처가 줄어드는 만큼 그 자리에 들어서는 자유를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신의 특별한 축복이 아닐까도 싶다.
-내 잘못으로 인한 상처가 아닌데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나를 궁극적으로 움츠리게 하더라.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무조건 당당하라고 옆에서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는데 점점 안으로 웅크릴 수밖에 없어서 더 화가 난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똑같이 꼬집었을 때 노인보다는 어린아이에게, 동일하게 손톱자국을 낸다면 낙엽보다는 새싹에게 더 큰 자국을 남긴다는 말.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파릇파릇하고 어리고 가능성이 많고 주어진 날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 상처받은 만큼, 최소한 내 자아는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한때 삶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는 평화를 간절히 갈구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 생이 안정을 찾고 나자 나는 자유를 원했다. 처음 자유를 원한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솔직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피에 젖은 맨발 같은 것이었다. 자유라는 게 말이 그렇게 그게 쉬운가 말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자유라는 걸 얻는다는 것은 결국 핏빛 깃발을 휘날리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유란 결국 평화의 다른 이름이며 정말로 예수의 말대로 그건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진리란 결코 옛것의 이름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하다가 처참하고 사형당한 사람이고 보니, 내가 처음에 생각한 피에 젖은 맨발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과 상처를 버리는 곳에 조금씩 고이는 이 평화스러운 연둣빛 자유가 너무나 좋다. 편견과 소문과 비방과 비난 속에서도 나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을 늘 쐬고 있으며 내게 덕지덕지 묻은 결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고통 속에서도 내게 또 다가올 그 자유가 그립고 설렌다.
-난 솔직히 이렇게까지 자유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 발에 피를 적시면서 자유를 갈구할 바에는 구속을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상처를 받고, 나름대로 그 상처를 극복까지는 아니어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