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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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늦은 밤, 아니 이른 새벽, 잠은 오지 않고 외로워 미칠 것 같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자니 너무 힘들고, 밖에 나가자니 무섭고, 누군가에게 전화로 문자로 위로받고 싶은데 미안해서, 또 답문이 바로 안 올까봐, 민망해서, 연락도 못하겠다. 그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사람도 없다. 남들도 다 이런 건지, 아니면 내가 유독 예민한 건지, 외로움이라는 것이 비록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잘 알지만 이렇게 자주 강하게 느낀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과연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죽기 전에 만날 수나 있을지, 끝끝내 못 만난다면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외로울 때마다 찾게 되는 책이 공지영의 책들이다. 그러나 이 책만큼은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녀의 소설이나 여타 산문집과는 달리, 이 책은 그녀 자신의 넋두리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녀의 딸이나 독자들로 청자를 한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전의 책들이 쏙쏙 마음에 와 닿았다면, 이 책은 그녀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흘러 한참 어지러운 마음의 내가 귀 기울이기는 힘들다. 마치 술에 취해, 감정에 취해, 힘들게 늘어놓는 친구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 이전의 책들이 독자를 위로한다면,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며 쓴 글 같다. 나의 일로도 번잡스러운데 남의 가슴앓이까지 들어주기에는 지금의 나는 너무나 벅찬 것 같다. 남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스킬이 필요하고, 남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으려면 정제된 말보다는 두서없을지언정 쏟아지는 말들로 인해 내 마음이 풀어지는 법인데, 이 책은 후자인 것 같다. J는... 그녀 자신이거나, 아니면 작가 스스로 위로받고 싶은 어떠한 존재가 아닐까. 많은 독자들에게 공지영이 그래왔듯이.

 

 

 

 

 

 

 

 

 

 

 

나를 버리고, 빗물 고인 거리에 철벅거리며 엎어진 내게 일별도 남기지 않은 채 가버렸던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지요.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저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토록 끈질기며 이기적이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만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직 다 용서할 수 없다 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입니다. 우리 생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를 이룰 수 있다면, 그 힘겨운 피안에 다다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이별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걸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리하여 슬퍼지고 말았습니다.
책을 덮고, 살아온 모든 생애의 힘을 다해서 오래도록 움켜쥐고
있었던 손을 폈습니다.
내가 움켜진 많은 것들..
결혼에 대한 집착, 행복한 가정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집착.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집착,
심지어 도덕적으로 옳고 착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그 끔찍한 집착까지!
그러고 나자 마지막으로 억울하고 가련한 희생자가 되고 싶은
저의 교활한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지요.
그것은 제가 그토록 경원하던 무책임한 삶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요.
제 온 몸에서 푸릇푸릇한 녹즙들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던 나날이었습니다.

 

신이 저를 사랑하시고 제가 진실에 가까이 근접하기를 원하셨다면
고만고만한 행복에 제가 머무르도록 허락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불완전함만큼 더 큰 동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오래 앓았고
그러나 이제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처럼 담담하고 맑아지고 있습니다.
씩씩해지고 많이 웃을 수 있습니다.
가끔 달리기도 하고
아이들과 자전거도 탑니다.
J,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끝에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거리를 기웃거리는 외로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쓰다보면 언제나 외롭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 그 외로움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선택하면 고독이라고. 우리는 한참 웃었습니다만 외로우니까 글을 쓰고, 외로우니까 좋은 책을 뒤적입니다. 외로우니까 그리워하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예민하고 내가 남들보다 감정의 폭이 격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남들이 잘 안 쓰는 피아노 건반의
가장 낮은 옥타브부터 높은 옥타브까지 모두 두드리며 사는 부류들이 있는데
제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글도 쓰고 그래서 남들 표현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그것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생애 동안 우리는 대개 낮은 건반을 두드리는 일이
높고 경쾌한 건반을 두드리는 일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냥 인정해버리자
저는 저 자신을 비로소 얼마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에게
"그러지마. 이건 진짠데 난 남들보다 더 많이 아파해"
하고 담담하게 말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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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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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말 그대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과 '바람의 딸' 시리즈를 읽었기에 의외다, 라고 생각했다. 또 편견...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평범한 에세이 집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읽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자주 가는 북카페에서 (이상하게 북카페에서는 소설보다 수필 종류가 잘 읽히더라) 몇 번 흘깃흘깃 보다가 오늘에서야 집었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사랑', 말 그대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부분도 있었다. 저자의 대학시절 첫사랑 이야기,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이란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불평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던 요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토요일 오후, 아무리 책상에 앉아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고 다잡히지 않던 이 시간, 나에게 이 책은 딱 맞는 책이었다. 

외국계 홍보회사의 잘나가던 시절, 오지 여행가, 국제 구호 단체 팀장을 거친 그녀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책 말미에 적었듯이 자신의 분야에서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무릎팍 도사에 나오기 전부터 그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소위 젊은이들의 멘토이자, 특히 여대생들에게는 닮고 싶은 명사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리고 나서 그녀를 지지하는 분위기 반대쪽에서 그녀와 그녀가 속해 있는 단체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고 묘사했으나 육로로 다녔을 뿐 실제 걷지는 않았다, 교통편이 연결된 곳만을 다녔으므로 엄밀히 이야기해서 '오지'를 다닌 것도 아니다, 위험한 지역에서 금지된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마치 대단한 모험인 것처럼 묘사해 뒤의 여행자들에게 잘못된 상식을 심어주었다, 실제 월드비전이라는 단체는 선교가 중심이지 구호가 중심이 아니다, 등등.  

좀 더 책임감 있고 겸손했으면 좋겠다, 는 바람, 응당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여행기를 썼을 때만 하더라도 일단 우리나라에 그녀와 같은 사람은 무척 드물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 사실 나도 '걸어서' 시리즈를 고등학교 때 접했을 때는 '이게 진짜야?'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겸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7막 7장을 쓴 홍정욱 씨도 이제 와서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너무 자신감이 넘쳤었다고 민망하다고 느껴진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넘치는 자신감, 어찌 보면 교만으로까지 보이는, 그러나 그런 때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고 아마 그 시절의 한비야도 그런 시절이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면 좀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더구나 그녀는 홍보회사에서 일했었고, 그 누구보다 '홍보', '자기PR'에 능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또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구호 활동을 하고, 책을 쓰면서 자신의 그 능력으로 추진체를 달았을 것이다. 과장되었다,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이해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여행이나 구호 활동에 정통한 것은 아니며, 아직도 못 사는 외국을 돕자고 하면 '그럴 돈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부터 도와라'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현실에서는, 분명 그녀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좋은 일에 동참하게 하는 것에는 그녀와 같은 방식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두번째 비판, 그녀가 속한 단체 이야기.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판단하기가 힘들다. 솔직히 그녀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얼마든지 쉴드(?)를 쳐주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닌 것 같다. 월드비전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고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거의 한비야를 보고 기부했을 것이므로 그녀또한 이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실제 성금의 대다수가 구호가 아닌 선교에 쓰이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녀를 믿고 싶다. 실제로 그렇다면, 또 그녀가 알면서 그것을 묵인했다면, 참 마음 아플 것 같다.

분명 그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도 들리고 과대포장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그녀는 큰 귀감을 주었고 지금도 영감을 주고 있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쿠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우리의 것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가장 영향을 미친 발명은 쿠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선정되었다. 왜냐고? 엄청난 속도로 성경을 찍어 당시 유럽의 농민들에게 보급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의 부패에 눈을 뜨게 하고, 유럽 전체에 그 분위기가 급속하게 퍼짐으로써 종교 개혁을 일으켰고, 나아가 유럽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비야 이전에, 동시대에, 이후에 그녀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여행가, 구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한비야처럼 대중적으로 어필하지 못했고 그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으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비야를 높게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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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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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 거대(巨大)가 실은 언제나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우리에게 체험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고기압은 맑은 햇살과 쨍한 바람으로, 저기압은 눈이나 안개, 구름으로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저기압 속을 걸어가고 있어, 라거나 고기압을 맞고 있어, 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은 그 두 기압 중의 하나를 벗어날 수가 없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산이나 외투, 따뜻한 찻잔이나 장갑 등이 사실은 다 그 고기압과 저기압의 파생물이기도 한데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것들, 이를테면 역사, 이를테면 지구, 환경, 정치 등의 파생물인 풀잎, 감나무, 라디오 프로그램, 반찬, 세금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이 책이 아주 가벼운 깃털이지만 그 깃털 하나로 전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여자가 남자를 친구로 여기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인 거 같아. 하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응해줄 택도 없으니까. 또 하나는 정말 필이 안 와서……. 그리고 남자가 여자 친구를 가지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야. 혹시 언젠가 애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구절을 꼽은 이유는……. 읽는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참 깔끔한 분이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 도무지 자기가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소 안 하는 버릇과 깔끔한 장소에서 생활하던 버릇이 상충함으로써 오는 괴로움, 나도 늘 겪는 일이지만 전혀 이런 생각은 못하고 있던 차에 ‘맞아, 맞아’하며 공감하게 되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공지영은 이런 사소한 일상을 잡아내어 나와 같은 독자의 웃음을 유도한다. 내가 공지영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 같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웃게 해 줄 수 있어서.

 

“무엇이 그리 겁날게 있어? 까짓 거 상처밖에 더 받겠느냐고. 그리고 인생에 상처도 없으면 뭔 재미로 사냐 말이야.”

 

-내 인생을 소설에 비교한다면 작품성은 몰라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나 간판? 미쑈, 당기쇼가 보여”

 

-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이라…….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냈나? 또 작가의 주변에는 어쩜 이렇게 흥미진진한 사람들이 많은지.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의 차이 중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은,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물으면, 응, 나는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닫는 재미로 살고 싶어, 라고 대답하곤 하던 내게 패랭이꽃은 많은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이 교훈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살아 있기에 보기에도 싫고 쓸모없고 심지어 버리면 더 좋을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한 모양을 가지고 완벽한 초록으로 무장한 비닐 화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푸라기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이나 아이들이나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청사진은 그러므로 내게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이 부분. 내 삶의 군더더기,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 더 좋을 부분에 치여 허덕이는 바로 지금의 나에게는 눈물이 날 만한 구절이었다.

 

나는 어릴 때 내 성이 너무 특이해서 싫었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눈에 뜨이는데 성까지 특이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구절을 읽고 나니 묘하게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났다. 남편의 수입이 괜찮은 날은 문패에 새긴 이름이 힘차게 보이고, 수입이 줄어들면 똑같은 이름이 쪼그라든 것처럼 보인다는 구절. 어릴 때는 그런 구절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얼마 전에 읽을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힘들고 창피한 일을 겪을 때는 눈에 띄기 싫어 죽겠는데 가뜩이나 이름까지 튀어 숨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두려움, 수치……. 막연히 세상이 나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꼈던 어릴 때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뿌듯해했지만 요즘은 자꾸 내 이름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의 등장인물에 ‘김’, ‘이’, ‘박’과 같은 성을, 평범한 성을 가진 작가는 ‘독고’, ‘황보’, ‘석’과 같은 성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고 한다. 음……. 그래도 공지영씨가 자신의 이름 덕을 조금은 보고 있는 것처럼(작가가 되고 난 이후에 틀림없이 어느 정도는 이름에서 오는 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하고 막연히 바래본다.

 

나는 아직도 모임 끝에 지금부터 공지…….하면 깜짝 놀라는 버릇이 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공지 사항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 또한 이름으로 인해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감했다. 작가처럼 특정 단어에 매번 아닌 줄 알면서도 반응하는 것도 똑같고. 특이한 이름 때문에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간 법원에서조차 사인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가슴 아팠지만, 마지막에 웃고야 말았다는 부분에서조차도 묘하게 공감이 갔다. 그 순간에 터져 나왔을 웃음이 어떤 빛깔일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이들은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오래전 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도 아마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친구와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했던 모진 말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히 나, 네 이야기에 이제 지쳤어. 설사 나쁘게 악화되었다 해도 좋으니 새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

 

-한동안 연락이 끊기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찾은 친구는 또 그 레퍼토리를 반복했고 결국 공지영은 또 한 번 모진 말을 하고 친구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이 구절은 왜 내 마음에 들었을까? 나 또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럴 경우엔 정말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이런 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심리학에 따르면 언제나 남의 탓을 하는 성격장애와 언제나 자기 탓을 하는 신경증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거칠게 말하면 주로 남자에게 성격장애가 많고 여자에게 신경증적인 요소가 많은데, 병원을 찾는 이들은 주로 신경증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둘 다 병적인 상태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면담 치료에 꽤 효과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탓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한 지 하루가 지났거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쯤 지나면 남을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다.

나 역시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그 쉽고도 유명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까지 정말 많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남의 눈의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보라”는 성경 말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의 들보 사이사이로 남의 티끌이 그렇게 잘 보이더라는 한 친구의 말. 모든 유머는 정곡을 찌르기에 이 말은 아마 당시에 상당한 유머였을 것이라고. 알고 실천한다는 것이란……. 아는 것도 한 단계이지만, 알고 실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단계이다.

 

“너는 그 상처들을 어떻게 다 이겨냈니?”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상처들을 이겨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해질 수 있는 경로를 좀 개발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신기하게도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라는 걸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처음에는 이것이 갑자기 마라톤을 뛰려는 것처럼 어림도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런데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도 어찌됐든 그래 보려고 애쓰면 신기하게도 근육이 생기듯이 조금씩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힘든 친구에게 가끔 말하곤 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잘하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 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장미란 선수의 어깨가 처음부터 그 무거운 걸 들어 올렸던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로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쪽으로 가보려고 애쓰는 것. 그건 꼭 보답을 받아. 물론 네 자신에게 말이야.”

살아 있는 것일수록 불완전하고 상처는 자주 파고들며 생명의 본질이 연한 것이기에 상처는 더 깊다.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는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상처를 버리기 위해 집착도 버리고 나면 상처가 줄어드는 만큼 그 자리에 들어서는 자유를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신의 특별한 축복이 아닐까도 싶다.

 

-내 잘못으로 인한 상처가 아닌데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나를 궁극적으로 움츠리게 하더라.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무조건 당당하라고 옆에서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는데 점점 안으로 웅크릴 수밖에 없어서 더 화가 난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똑같이 꼬집었을 때 노인보다는 어린아이에게, 동일하게 손톱자국을 낸다면 낙엽보다는 새싹에게 더 큰 자국을 남긴다는 말.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파릇파릇하고 어리고 가능성이 많고 주어진 날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 상처받은 만큼, 최소한 내 자아는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한때 삶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는 평화를 간절히 갈구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 생이 안정을 찾고 나자 나는 자유를 원했다. 처음 자유를 원한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솔직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피에 젖은 맨발 같은 것이었다. 자유라는 게 말이 그렇게 그게 쉬운가 말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자유라는 걸 얻는다는 것은 결국 핏빛 깃발을 휘날리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유란 결국 평화의 다른 이름이며 정말로 예수의 말대로 그건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진리란 결코 옛것의 이름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하다가 처참하고 사형당한 사람이고 보니, 내가 처음에 생각한 피에 젖은 맨발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과 상처를 버리는 곳에 조금씩 고이는 이 평화스러운 연둣빛 자유가 너무나 좋다. 편견과 소문과 비방과 비난 속에서도 나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을 늘 쐬고 있으며 내게 덕지덕지 묻은 결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고통 속에서도 내게 또 다가올 그 자유가 그립고 설렌다.

 

-난 솔직히 이렇게까지 자유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 발에 피를 적시면서 자유를 갈구할 바에는 구속을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상처를 받고, 나름대로 그 상처를 극복까지는 아니어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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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 작은 탐닉 시리즈 1
고경원 지음 / 갤리온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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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탐닉 시리지의 첫 권이란다. 나도 어렸을 때 꽤나 뭔가에 탐닉했었는데. 이상하게 남들 다한다는 우표 수집에는 관심없었고 스티커를 모았었다. 그때 하나하나 스티커를 붙인 노트만 세 권이었나. 왜 한 번 붙여버리면 다시 떼어 쓰지도 못할 스티커에 그토록 탐닉했던가.

2. 지금의 나는 무엇에 탐닉하는가. 없다. 공부, 살기 위한 생존 말고 순수히 즐거움 때문에 탐닉하는게 있는가. 없다. 없다. 없다. 음악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고 요리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돈이 든다고 시간이 든다고. 결과적으로 나는 더 피곤해지고 연약해졌다.

3. 탐닉耽溺 즐겨빠지다

4. 어쩌면 지금 난 평생을 걸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마음놓고 탐닉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빨리 찾아지지 않아서 내가 불안해하는지도, 생각보다 찾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아 힘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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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나는 많이 다운되어 있다. 그게 이 수필 때문만은 아니다. 다운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에 있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하철 안에서 집에 도착하고 나서까지 내내 읽었던, 그리고 다 읽어버린 이 수필로 인해 마음결이 잔잔하게 골라진 상태에서 그 원인을 접했을 때, 다소 심란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해서 지금껏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잘까? 자고 나면 나아질까? 하지만 몇 시간 후 아침의 일정이 있어서 마음껏 자지도 열정을 소비하지도 못한다. 자고 일어나도 마음의 상태가 변화가 없을 까봐. 차라리 평일이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그러면 이 번잡한 내 감정에서 해방되어 일상으로 돌아가, 일상을 살 수 있으니까. 여기 지금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지금 꼭 이 수필에 대한 리뷰를 써야 한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는 제목을 보면 대강 이 수필이 무엇을 이야기할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 노희경, 열렬한 매니아층을 확보한, 결코 쉽지 않은, 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를 쓰는 작가. 이야기한다. 연인이든, 부모든, 친구든, 자식이든, 누구든, 사랑하라고. 계산하지 말고, 예측하지 말고, 예단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마지막까지 나를 다 주어버려라. 나를 완전히 다 지키려고 머뭇대거나 물러서거나 망설이지 마라. 하, 읽으면서는 당연하다고 고개 끄덕였는데 내 손으로 써놓고 나니 쉽지 않다. 절로 숨이 턱 나온다. 절대 쉬운 게 아니다. 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겠나. 물론 한번쯤은 꿈꾸는 사랑이겠지만. 

이 책을 읽기 전, 사실 한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다소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자라서 더 안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차라리, 매번 드라마를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하나 푸념하고 저것들이 지속되는 짧은 시간 동안 환상에 빠지는 내가 낫다고. 그러다 다시 읽다만 이 책을 읽게 되었고,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 아닌지. 어차피 획 지나갈 인생인데. 

하지만 그래도, 결국,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노희경은 자기 자신을 끝까지 옹졸하게 지켜내어 후회한다고 했지만, 아마 나도 후회할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알면서 후회하는 쪽을 택할 것 같다. 나는, 나는, 자신이 없다. 그 끝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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