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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KBS 2FM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을 추억하는 공감 에세이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유희열은 인기 있는 DJ였던 모양이다.
3년 반 동안 라디오로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졌던 입담 좋은 이 남자가 진행하던
라디오 코너 중 하나가 '그녀가 말했다'이다.
3년 반이라면, 결코 짧지는 않지만 워낙 오랫동안 라디오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라디오 속의 코너 '그녀가 말했다'는 책으로 나왔고, 인기가 많아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두번째 책이 나왔으며, 둘 다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그녀가 말했다'라는, 라디오 코너와 똑같은 제목의 노래가 토이의 앨범에 실려서 인기를 끌었다.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상, 아무래도 고독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공감받으며 위로받고, 내일을 위한 힘을 내는 경우가 많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히 그런 특성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살 무렵이 딱 그랬다. 덮어놓고 이해받고 싶었다. 무조건 격려받고 싶었다.
지금도 이 책을 살 때의 시간을 떠올려 보면, 몇 년 전 그 울고 싶었던 시기, 막막하기만 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나조차도 주체하지 못했던 그 감정은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았지만, 잊어버린 것은 아니라서 책을 보다 보면 슬금슬금 그 때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다. 더 이상 그 때만큼 힘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행복을 사는 방법>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적어도 인간은 물질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행복해지는 존재로
설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잘 들어봐, 행복을 사는 방법도 있다고 하거든."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중에는
새로 나온 가전제품을 살 때 느끼는 쾌감도 있고
새로 산 휴대전화의 첨단 기능을 익히면서 얻는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물질적인 만족감은 지속시간이 너무 짧아서
금방 다른 물건으로 관심이 옮아간다.
'만일 천 원이 있다면 엽서를 사보자.'
그 엽서에 손으로 글씨를 쓰고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으면
그것을 받는 사람과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게 된다.
엽서를 쓰는 방법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일에 돈을 쓸 때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쓸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
여행의 의의는 '일상을 잠깐 멈춘다'는 것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직장인이라면, 대개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8시까지 회사에 도착하고 그 후에는 퇴근할 때까지 책상 앞을 지켜야 하는
판에 박힌 생활을 할 겁니다.
아무리 청소를 열심히 해도
책상 위에는 그날 분량만큼의 스트레스가 쌓여 있겠죠.
하지만 여행을 가면 그 반복되는 과정이 딱 멈추게 됩니다.
즉,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거죠.
또 행복해지고 싶다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대신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내세요.
그리고 그 친구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한 끼의 식사를 사주세요.
읽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정말 행복은 마음 먹기에 달렸지만, 그래도 그 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게 사실이라면, 어차피 돈을 써야 행복하다면 쓰고도 더 많은 행복, 더 오래가는 행복을 누리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리스트>
시간낭비 습관들은 시간을 허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장에 꽂혀있던 에세이집을 차례로 뒤적거리거나
황혼에서 새벽까지 미국 드라마를 봤다면,
지금 당장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을 허비해가벼 익혔던 잡다한 경험과 기술들이
친구를 만나는 데, 동료를 이해하는 데, 또 일을 추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될 거에요.
우리의 인생은 잡다한 것에 관심을 두고 샛길로 자꾸 빠지는 과정,
즉 시간낭비 속에서 풍부해지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어쩌면 자기 위로에 그치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스펙에 좌절해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식의 여유 따위 부릴 사치 없다는 생각도 들 테고. 하지만 뭐가 정답이든 무슨 상관이람. 그저 위안일 뿐이라도 낭비처럼 보였던 수많은 나의 시간들이 '내일을 위한 저축'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나는데.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꽃을 싫어한다기보다 꽃을 봐도 아름다움을 못 느낄 수는 있겠지.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어.
아버지가 구조조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셨거든.
집 안에 모든 불을 다 켜도 집이 밝아지지 않았어.
개그 프로그램을 봐도 전혀 웃지 않는 아버지와 같이
TV를 보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어.
그때는 활짝 핀 꽃을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지."
"나도 그런 적 있었어.
어머니가 아주 오랫동안 많이 아프셨어.
그 몇 년 동안 꽃이 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스르르 허물어졌지."
그 시절에는 발걸음 떼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포기하고 싶어졌다.
도저히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면서
어려운 나날들은 꽃잎과 함께 쓸려 가버렸다.
그날 두 사람은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남다른 친밀감을 갖게 되었었다.
서로 상대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도 나처럼 많이 아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내밀한 감정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낄 때만
진짜 이야기를 하는 법이니까.
최근에 당신이 꽃을 보고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것입니다.
최근에 노을을 보고 감탄했다면 당신은 행복한 겁니다.
만일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항상 행복할 수는 없고
또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멋진 인생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하얀 목련이 강냉이 굽듯이 펑하고 피어날 때
이미 그 안에는 갈색으로 변해 땅에 떨어질 꽃잎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동생이 뜯어놓은 솜뭉치처럼 탐스럽게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피어날 미래도 숨어 있죠.
꽃이 피고, 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힘든 시간을 겪은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고 위로를 줄 수 있는 반가운 시간도 오겠지.
<에코의 진실, 혹은 농담>
인생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생은 진실 혹은 농담입니다.
거짓과 가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농담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오스카 와일드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었죠.
"삶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늘 진지하게만 말할 대상은 아니다."
세상에는 자신만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잉된 진실의 피로를 푸는 것은 농담이죠.
또 제대로 된 농담을 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진실은 농담이라는 은유를 통해 자신을 슬쩍슬쩍 내보이거든요.
더 나아가, 진실은 무엇일까요?
농담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인
커트 보네거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좀처럼 칠판 위에 진실을 그리지 못한다."
저 밑줄 친 부분 정말 좋다. 과잉된 진실, 그로 인한 피로, 해결책인 농담.
<조금 더 멋진 얼굴이 되는 방법>
그녀는 새로운 휴대전화가 생길 떄마다 꼭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새로운 기계에 큰 흥미가 있거나
휴대전화를 자주 바꾸는 건 아니었지만
휴대전화를 새로 사게 되면
혼자 할 수 있는 작은 의식을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찍힌 사진을 보고는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얼굴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어. 2년 반 사이에.'
그녀는 이전에 쓰던 휴대전화를 꺼내서
몇 년 전의 모습들을 다시 들여다봤다.
어떤 날에 그녀는 귀엽게 웃고 있었고
다른 날에 그녀는 조금 지친 듯이 보였다.
행복한 생각을 많이 했던 날 찍은 사진과
그렇지 못한 날 찍은 사진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일 내가 본 내 모습도 이렇게 다르다면
다른 사람이 본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겠구나.
그러면 행복한 순간에 만난 사람들만
날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하겠구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10년 후에 찍게 될 자신의 사진을 상상했다.
그녀는 종종 낮에도 꿈을 꾸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게 된다면 좋겠지만
미래의 일은 그녀도,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넉넉한 마음으로 넘길 수 있기를.
설사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그 사람을 많이 원망하지 않기를.
나를 아프게 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면
나의 허물에도 관대해지기를.
그래서 10년이 흐른 후에는 더 멋진 얼굴이 되기를.'
비슷한 일 나도 겪었었다. 20대 초반에 나름대로 큰 좌절을 겪고 나서, 마음을 추스릴 겸 갔던 짧은 여행. 혼자 간 여행이라서 다른 여행객들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저녁 때 그날 종일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복기해보니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내 표정이 너무나 굳어 있어서. 원래 나는 어릴 때부터 카메라만 들이대면 자동적으로 웃던 아이였는데, 당시 1년여 동안 셀카도 찍지 못할 정도의 감정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시절을 막 벗어나니, 나는 카메라를 보고 웃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간이 20년 동안 몸에 박힌 습관마저 바꾼 것이다. 웃을 일이 없다보니, 웃는 게 어색해진 것이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다집했다. 앞으로는 무조건 사진을 찍을 때는 웃겠다고.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MGMT의 <Time To Pretend>.
그는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시간에, 지하철 2호선 안에서 MGMT의 음악을 듣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말이다.
행운의 여신이 준 굉장한 선물이 눈앞에 있는데,
말을 걸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는 말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는 수업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
그녀를 따라 홍대입구역에서 내렸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피를 사 들고 산책을 이어갔다.
그는 산책하는 동안 자신의 22년 인새을 정리해서 말하겠다고 했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고
하루는 어떻게 보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이야기하는 데
커피를 내리는 시간보다 조금 긴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그동안 계속 웃었다.
이 짧은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것은 22살 청년의 가장 풋풋하고 아름다운 시기, 그야말로 청춘의 한 페이지가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때 내 나이도 22살이었다. 지나치게 낯선 사람을 경계했던 탓인지, 겁이 많았었는지, 아니면 그런 순간이 나에게 자주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이 이야기의 그녀처럼 처음 만난 그를 대하지는 못했다. 이국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그때의 상황도, 더운 여름에 환하게 부서졌던 햇살도, 짧은 흰 색의 옷을 입고 있던 그 사람이 꽤 잘생겼었다는 것도, 웃으며 말을 걸었다는 것도, 전부 다 기억이 나는 데다가 몇 년 전의 일이 최근에 와서 종종 생각난다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나의 무신경함 때문에 어쩌면 내 인생에서 비포선라이즈와 같은 일이 생길 뻔하다가 말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쉬워서인지도.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