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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이 책은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좀 다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무대가 20세기의 영국이 아니라, 기원전 2000년 경, 이집트 테베의 나일 강 서쪽 강가이다. 물려줄 유산이 많은 아버지와 세 아들, 사별한 딸과 그를 흠모하는 아버지의 부하, 젊은 계모 등 흐름은 우리가 늘 보던 소설과 유사하게 흘러간다. 이 소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것, 인간이 품는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진보하고, 문명이 발달하더라고 결국 대동소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굳이 이 소설의 배경을 이집트로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무대가 수천년 전 이국적인 공간으로 바뀌면서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4계절이 아니라, 농경생활에서 더 유용하게 계산되는 3계절이라는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었고, 죽은 사람의 묘를 관리하는 것이 단순히 자손이 아니라, 묘지기라는 별도의 직업이 있으며 죽은 사람의 재산을 기증받고 그 대가로 그 사람을 공양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직업적인 묘지기는 꽤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책 앞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은 크리스티의 친구였던 이집트 학자 스티븐 글랜빌의 요청에 의해 탄생했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을 써 보라는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이 소설은 1945년에 발표되었다. 크리스티가 1930년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과 재혼한 후 한동안 함께 이집트 등지를 여행했다고 손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경험들이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나일 강의 죽음 같은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의 주요 무대였던 영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며, 그 배경 탓에 떄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모호한 분위기를 쉽게 만들어낸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나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미신 같은 것들은 예외없이 결말에서 전부 인간이 한 일이라고 밝혀지는데, 20세기 초반, 근현대의 영국 사람들이 애초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괴이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작품에서는, 역사와 신화, 민담과 전설의 구분히 모호했던 그 시대적 배경 떄문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인 믿음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은, 아마도 그녀의 재혼으로 인해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당시 이집트 사회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떄문이다. 어쩌면 스티븐 글랜빌도 재혼한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일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8년간의 결혼 후 아이 한 명을 낳고 사별한 레니센브는, 딸 하나를 낳은 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한 크리스티 자신의 분신이기도 할 것이다. 남은 일생을 혼자 살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인 한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보면서 문득문득 아이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 앞에서 왠지 머뭇거리게 되는 과정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도 크리스티 자전적인 부분이 들어가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순수하고 사람을 잘 믿는 레니센브는 헤이스팅스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를 늘 걱정하는 호리는 푸아로, 할머니 에사는 마플 양이 변신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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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람도 마찬가지야. 장식 문을 만들지. 속이려고.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을 깨닫는 순간 자만과 허풍과 압도적인 권위로 장식된 근사한 문을 만들지. 그리고 얼마 후에는 정말로 그 존재를 믿는단다. 사람, 모든 사람은 그 문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하지만 레니센브, 그 문 뒤에는 벌거벗은 바위뿐이야....... 그래서 현실이 찾아와 진실의 깃털로 건드리면, 참된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카이트의 경우 온순함과 복종심은 그녀가 바라는 모든 걸 가져다줬어. 남편과 아이들. 아둔함은 그녀에게 손쉬운 삶을 선사했지. 하지만 위험이라는 형태로 현실이 찾아와 겁을 주자 본모습이 드러난 거야. 그녀는 변하지 않았단다, 레니센브. 그 힘과 그 무자비함은 늘 거기 있었어."
"네, 아마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돼요. 집안사람들 모두 부들부들 떨면서 사원으로 달려가 부적을 사고, 해 질 녘에는 이 길을 걷지 않는 게 좋다고 떠들어요. 하지만 사티피가 비틀거리다 추락한 건 마술이 아니었어요. 두려움이었어요. 그녀가 저지른 사악한 짓으로 얻게 된 두려움 말이에요. 젊고 강하고,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건 나쁜 짓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사악한 짓을 한 적이 없고, 설령 노프레트가 절 미워했다 해도 그녀의 증오가 저를 해칠 수는 없어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리고 어쩄건 늘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러니 저는 두려움을 극복하겠어요."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게 아닐까? 그녀가 진심으로 널 도와주면서 자기가 떠벌리는 사랑이란 걸 보여 준 적이 있니? 상처 주고 화를 불어일으킬 말만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서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했잖아?"
"카이트는 지나치게 아둔한 여자야. 하지만 나는 늘 아둔한 여자를 의심했단다. 그들은 위험한 존재야. 오로지 자기 주변의 일만 보고 한 번에 하나만 알지. 카이트는 자기 자신과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 아빠인 소베크만 존재하는 작은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왔어. 야흐모세만 제거하면 제 자식들이 부자가 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지. 소베크는 늘 임호테프의 눈에 마뜩찮았어. 경솔하고, 통제를 못 견디고, 순종을 모르지. 야흐모세는 임호테프가 의지하는 아들이었어. 하지만 야흐모세가 사라지면 임호테프는 소베크에게 의지해야 돼. 아마 카이트는 그렇게 단순한 생각을 했을 게다."
"전에 네가 노프레트의 등장이 악을 몰고 왔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악은 이미 가족들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노프레트의 등장은 그걸 은밀한 곳에서 밖으로 끌어낸 것뿐이지. 그녀의 존재가 장막을 거둔 거야. 카이트의 온화한 모성은 자기 자신과 자식을 위한 무자비한 이기심으로 변했어. 소베크는 더 이상 쾌할하고 매력적인 젊은이가 아니라, 허풍 떠는 방탕한 약골이었고. 이파이는 매력적인 개구쟁이 소년에서 교활하고 이기적인 놈으로 변했지. 헤네트의 가식적인 헌신을 통해 그 독기가 명백히 드러나기 시작한 거야. 사티피는 악녀이면서 동시에 겁쟁이의 모습을 보였어. 임호테프 자신은 말 많고 거만한 폭군으로 퇴보했고......"
"성장이라는 것 때문인지도 몰라. 점점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훌륭해지지 않으면, 그 성장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사악한 마음을 품게 되지. 혹은 공간도 시야도 없이 삶이 너무 폐쇄적이거나 너무 침잠해서 그럴지도 몰라. 아니면 전염성 병충해처럼 차례차례 병에 걸리거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기질로 보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야흐모세는 항상 소심하고, 쉽게 굴복하고, 반항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지. 그는 임호테프를 사랑했기에 그를 기쁘게 하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임호테프는 착한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멍청한 느림보라고 생각했어. 아들을 무시했지. 사티피 역시 불한당처럼 온갖 조롱으로 야흐모세를 괴롭혔어. 감춰져 있던 한 맺힌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온순해 보일수록 내면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 야흐모세가 마침내 아버지의 동업자로 인정받아 근면과 성실에 대한 보상을 거두는 꿈에 부풀었을 떄, 마침 노프레트가 나타난 거야. 마지막 불꽃을 점화한 것은 노프레트, 어쩌면 노프레트의 미모였겠지. 그녀는 세 형제의 남성적 자존심을 건드렸어. 소베크를 바보라고 조롱해 아픈 곳을 찔렀고, 이파이를 남자 자격도 없는 건방진 꼬마로 취급해 성질을 돋웠고, 야흐모세를 남자도 아니라며 멸시했지. 사티피의 혀가 마침내 야흐모세의 인내심을 무너뜨린 건 노프레트가 온 뒤 부터였어. 자기가 남편보다 더 남자답다는 조롱과 모욕 떄문에, 결국 그의 자제력이 무너진거야. 그는 이 길에서 노프레트와 마주치자 인내심을 잃고 그녀를 던져 버렸어."
"하지만 일단 마음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은 옥수수 밭의 양귀비처럼 만개하는 법이야. 어쩌면 야흐모세는 평생 폭력을 선망하면서도 그걸 얻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자신을 경멸했지. 아마 노프레트를 살해하고 나서 엄청난 힘을 느꼈을 거야. 우선 사티피에게서 그걸 꺠달았지. 자신을 위협하고 모욕하던 사티피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온순해졌으니까. 그러자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모든 불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어. 지난번에 이 길 위에서 고개를 쳐든 뱀처럼. 소베크와 이파이는 야흐모세보다 한 놈은 더 잘 생기고, 다른 한 놈은 더 똑똑했어. 따라서 제거 대상이었지. 야흐모세가 집안의 통치자가 되어 아버지의 유일한 위안이자 의지가 돼야 하니까. 사티피의 죽음은 살인의 즐거움을 증폭시켰어. 그 뒤로 더욱 강해진 것이지. 이후부터 그의 탐욕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어. 그떄부터 철저히 악에 사로잡힌 거야."
그날 배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던 카메니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잘생기고, 강건하고, 쾌활한 그를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피의 맥동과 가락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그를 사랑한다. 카메니라면 크하이가 그녀의 인생에서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함께 살면 행복할 거야. 그래, 우린 행복할 거야. 함께 살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튼튼하고 예쁜 아이들을 키울 거야. 바쁘게 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고, 나일 강에서 배를 타는 즐거운 날도 있겠지. 크하이와 함께했던 그런 삶이 다시 시작될 거야. 그 이상 뭘 더 바라겠어? 그 이상 뭘 더 원하겠어?'
호리와 함께하는 삶이 어떨지 짐작할 수 없엇다. 비록 다정하고 그녀를 사랑하지만,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아름다움과 풍요의 순간들은 함께 나누겠지만 일상의 삶은 어떨까?
"네 인생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어, 레니센브. 네인생이니까. 결정은 너만이 할 수 있는 거란다."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카메니처럼 금세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말도 듣지 못한다는 것을 꺠달았다. 호리가 손마 잡아줬더라면....... 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자 두 가지 선택이 가장 간단한 말로 확연하게 떠올랐다. 쉬운 삶과 어려운 삶. 그녀는 몸을 돌려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 이미 익숙한 평범하고 행복한 삶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예전에 크하이와 함께 누렸던 삶. 그곳은 안전했다. 늙어죽는 것 말고는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일상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삶.......
죽음. 그녀는 삶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빙 돌아 다시 죽음에 이르렀다. 크하이는 죽었다. 카메니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의 얼굴 또한 크하이의 얼굴처럼 그녀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