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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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두 종류의 나를 만난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1)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2) 내가 원하는 문장을 만났을 때

 

내게 독서란 단순히 작가의 생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세상을 여행하는 행위다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긍정하며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은 1)의 경우일 것이고, 낯선 장소에서 익숙함을 발견하는 것은 2)의 경우일 것이다. 여행에서는 1)2) 모두 중요하다. 1)로만 가득한 여행은 쉽게 지칠 수 있으며, 2)로만 점철된 여행은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방문일 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도 두 가지가 곁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의 문장들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 ,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반면에 1)의 문장들은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절대 건너지 못할 것 같은 냇가에서 징검돌 역할을 해준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2)의 문장들만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2)의 문장만을 찾게 된다면, 독서는 쉽고 간편해진다. 새로운 걸 찾을 이유는 없다. 알고 있는 걸 확인하면 된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증거를 찾기만 하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이 발목을 잡게 된다.

 

소설가 김중혁이 위즈덤하우스 문학 연재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의 일부이다.

 

 

이 책은 나에게는, 전적으로 2)에 일치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마치 내 생각을 그대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문장, 미처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는 표현 못했던 것들을 남이 써 놓은 문장으로 확인할 때 사이다같은 청량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려다가 포기했던 것은 이 책이 밑줄로 점철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정작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이 지난 지금은 신기하게도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책에서 내가 감탄했던 문장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화내지 않기, 그리고 핀란드까지.

아직 핀란드를 다녀온 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일상에 점점 희미해지지만 사진을 꺼내 보면 다시 그 때의 감동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기. 구태여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최근 개봉한 공유와 전도연이 출연한 영화 남과 여의 영향이었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핀란드를 겪고 싶다는 생각과,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교차하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책을 집어들었고, 목차에 나온 저자의 여행 목록에서 핀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라는 생각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편안했다. 깊이 행복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인데도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놀랍게도 익숙했다. 마치 내가 다녀와서 쓴 것처럼. 그리고 안도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을 오랫동안 꽉 잡고 있는 문장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내용이 떠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단어나 묘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비 오는 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익숙한 그리움, 친숙한 외로움으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물론 화도 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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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에서 보낸 여름방학 여름방학 시리즈 2
조인숙 지음 / 버튼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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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별 점 네 개를 준 것은 객관적인 기준이라기보다는, 나의 사심이 상당히 작용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사실 나도 얼마 전에 북유럽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여행이었기에, 짐을 싸는 그 순간부터 설렜고, 다녀오고 난 지금도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채 환상에 젖어 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다녀왔던 한 달 간의 베낭 여행이 그러했듯, 또 일본어 한 마디도 못하면서 용감하게 오사카, 교토, 고베 자유 여행을 감행했던 시절이 그러했듯, 너무나 강렬해서 당시에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번 여행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을 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흐릿해져 가는 기억만 붙들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고자, 아직 내 몸의 일부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 즈음에 열심히 다녀왔던 곳의 사진을 보고, 책을 읽고, 영상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여행의 이유가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북유럽이 궁금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선진국의 교육을 느끼게 하려는 것도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없었다. 사소한 이유나 목적이 때로는 거창한 무언가를 더 앞설 때도 있으니까.

 

모든 것에는 떄가 있다.

무엇인가를 가장 하고 싶을 때, 정말 가고 싶을 떄, 너무 원할 떄가 그때라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든 해보지 않고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듯 가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법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왜 그리도 북유럽을 가고 싶어했던가? 자문해보면 명확한 이유가 사실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몇 배나 높고 세계적으로 복지, 평화, 청렴 지수가 늘 최상위권인 나라를 배우고 싶어서? 요즘 '핫'하다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 이제는 가 볼 만큼 다 가봤기에 안 가본 나라 중 찾다 보니? 전부 아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아주 사소했다.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알았던 것은, 지금이 바로 북유럽으로 출발할 떄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기 떄문에,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딸과 조카를 데리고 여행했던 것처럼 다채로운 경험을 하지 못했다. 점점 읽으면서 안타깝기도, 어떤 대목에서는 부아가 나기도 했다. 나도 현지인의 집에 숙박해보고 싶다, 나도 무민 월드와 레고랜드와 삐삐 박물관에 가고 싶다, 나도 영화 카모메 식당의 카하비라 수오미와 카페 알토에 가고 싶다, 속이 쓰렸다.

 

하지만 내 인생의 여백을 일부러 만들기 위해 간 여행에서 마치 리스트를 작성하고 뭔가를 꼭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동동거리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작가도 이야기한다.

 

꼭 사려고 마음 먹었던 바구니를 결국 사지 못했다.

꼭 가려고 다짐했던 삐삐마을을 안타깝게 가지 못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듯 여행 또한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신기하게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다음에 그 핑계로 다시 와야겠다는 야무진 다짐을 하자 오히려 힘이 났다.

 

그래, 내가 북유럽에 가서 그 곳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낀 점도 그랬다.

아둥바둥하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걱정 없이,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던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국에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온 몸에 쫙 들어갔던 기합을 풀고,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래, 다 잘 할 수는 없지. 다 해낼 수는 없지. 부족한 부분은 생길 수 밖에 없지.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이 순간을 느끼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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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 이동진의 시네마기행 탐사와 산책 16
오태진, 이동진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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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평론가 이동진이 아직 조선일보 기자 시절일 때, 선배 기자와 함께 연재했던 기사들을 모은 책이다. 나는 잘 몰랐는데, 의외로 영화에 대한 서적은 많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대중들에게 영화라고 한다면, 골치아프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2시간여동안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라고 인식되기 떄문이 아닐까. 굳이 머리 싸매고 읽어갈 필요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동진의 우직함이 더 빛나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국내 영화감독에 대한 그의 인터뷰집 2권을 보면 그 두께와 정성에 압도당할 지경이다.

 

이동진의 팬이라면, 초창기 시절 그가 썼던 글을 읽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낯선 거리에서 영화를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되었는데 그 이후에 나온 여행기들이 '필름 속을 걷다',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여서 세 권의 여행기를 가만히 보면, 영화에 나온 장소를 찾아가 영화의 일부 장면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점, 그리고 책이 전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완결성을 느낄 수 있다. '필름 속을 걷다'는 아직 읽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면 이동진이라는 사람의 변화의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읽은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와 이 책은 동일한 사람의 글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명확히 하자면 이 책은 오태진과 이동진이 함께 썼고, 뒤의 두 책은 회사를 나온 뒤 오롯이 이동진 혼자서 쓴 책이다. 아무래도 이동진이 쓴 유럽편에 시선이 더 많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인사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세월을 두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미생>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쟁'속에서 쓴 글과 '지옥'에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면 너무 센 거 같고,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지만 나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었던 결과물과 자유롭지만 오히려 소소하게 신경쓸 부분은 훨씬 더 많은 가운데서 만들어낸 창작물과의 차이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크게 유럽편과 미국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럽편을 이동진이 썼고, 반 이상에 해당되는 미국편을 오태진이 썼다. 이 책만 보면 둘 사이의 차이가 확 드러나는데, 오태진의 글이 좀 더 기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둘 중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점이 아니라 이때부터 이동진의 글이 일반적인 기사와는 다르게 문학적 향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쓴 책들을 보면 그 경향이 더 도드라지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말랑말랑함에 더 거부감이 들었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딱딱 끊어지는 문장들에 정이 안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묘사를 하거나 감상을 담는 것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나는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보다도 이 책에서의 이동진 스타일이 더 좋았다. '시네마기행', '낯선 거리에서 영화를 만나다', '필름 속을 걷다', '~어렴풋이 꿈을 꾸다'에서 책 제목만 보아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감성적인 면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는데, '어렴풋이 꿈을 꾸다'는 그 제목이 너무 멜랑꼴리해서 책 읽기 전 약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이 때의 사진들은 전문 사진기자가 당연히 동행해 촬영했고, 최근의 여행기는 이동진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이것또한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사진 때문만이라도 이 책이 나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작가 개인의 입장에서는 최근의 책이 더 애착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나만의 감상이 아니라 모두의 감상이 되려면 지나치게 나의 감성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사진가의 사진이 비록 정형화되어 있고 개성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여행지의 느낌을 가장 잘 전달해주고 책을 읽는 독자에게 사진 한 장만으로도 끌어당기는 힘이 크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뭐냐면, 여행기만 읽는 것으로는 절대 책을 완전히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을 열고 닫는 지점이 전부 영화이기 때문에, 소개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여행기가 재미있을 것이고,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면 여행기가 지루할 것이다. 이동진이 소개했던 영화는 한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재미있게 본 영화라서 그런지 여행기가 재미있었다. 특히 '베를린 천사의 시'의 베를린은 다른 책에서 잘 소개되지 않는 곳이라서 더 인상깊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오스트리아 빈을 읽으면서는 가지고 있던 'before sunrise&before sunset' 시나리오 집에 이동진이 언급한 부분을 밑줄을 치기도 했다. 절판된 게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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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은 식탁 -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우에하라 요시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어크로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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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은 식탁.

이 제목만 보아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번 더 부제.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음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하루 하루 생존하기 위해 입으로 구겨넣어야 하는 것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기 위해 단 몇 번만 집어 먹고는 더 이상 그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비싸려면 한없이 비싸질 수 있고, 저렴하려면 한없이 저렴해질 수 있는 음식.

 

 

저자는 오사카의 한 부락 출신이라고 한다. 부락? 이게 뭘까?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에서 최하층 천민들이 살던 곳을 부락, 그곳에 살던 이들을 부락민이라고 부른다며 신분제 철폐 이후의 근현대 일본에서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천민의 후예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태어났던 곳은 오사카 나부의 '사라이케'라는 부락이었고, 현재 이 지명은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주민이나 관계자들에게는 불리는 지명이며 부락민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곳 주민의 80퍼센트가 식육업에 종사했으며 저자의 아버지도 지금까지 식육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의 백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일반 지역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소와 말의 고기를 먹기 쉽고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한 음식들이 생겨났으며, 그 중 하나가 소 창자를 바싹 튀긴 아부라카스라는 요리라고 한다. 저자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신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이 음식이 일반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에 긍지를 갖게 되었다는 저자는, 어느 날 '각국의 차별받은 사람들이 서로 엇비슷한 소울푸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세계 곳곳의 차별받은 이들의 독자적인 식문화를 취재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기가 범람하는 요즘이다. 음식에 대한 서적도 마찬가지. 그 수많은 시류에 영합하는 책들 속에 이 책이 유독 가슴을 울렸던 것은, 우리가 열광하던 부분 이면, 잘 모르고 있던 부분에 대해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도달하기까지 저자 개인의 삶을 생각하면 뭉클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실 음식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 아니다. 음식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매개체인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음식들의 공통점은, 지배층이 먹지 않는 식재료를 가지고 가공하여 피지배층의 배고픔을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세계 뒷골목의 음식을 맛보면서, 저자는 음식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탄생시켰던 차별하는 문화가 공식적으로만 사라졌을 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다.

 

"당시 우리와 대립했던 KKK멤버나 백인들을 지금도 거리에서 마주치고 있어요. 모두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요. KKK의 창설자 중 한 병이었던 포레스트 장군의 동상이 그 증거입니다. 셀마에 흑인 시장이 나오자, 백인들은 이에 대항해서 마을 공동묘지에 그의 동상을 세웠지요."(중략) 이 흑인 청년의 말에 따르면, 이 동상이 세워진 것은 불과 4~5년 전이라고 한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이 어딨어요"하며 중얼거린다.

 

저자가 2004년 가을에 미국을 방문했을 테니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은 2000년 쯤일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2008년 말이고 임기를 시작한 것이 2009년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발전이 빠른 나라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해야 할까, 아니면 공식적인 평등 이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크다는 쪽으로 해석해야 할까? 출신에 상관없이 개인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에 균열이 갈 때 쯤, 브라질의 상황이 등장한다.

 

"지금은 백인들에게서 받는 직접적인 차별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신문에는 흑인 범죄만 보도되고 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교육이나 환경 등 근본적인 해결책을 세우는 데는 태만하고요. TV에 출연하는 아이들도 전부 백인입니다. 나도 어렸을 떄 TV에 나간 적이 있는데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매우 분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피부가 하얗지 않으면 TV에 나가는 건 꿈도 꾸기 어렵죠. 백인을 동경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 중역을 비롯해 정부 요직 인사, 모델 등의 직업은 대부분 백인이 차지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을 운운하는 것도 브라질의 상황에 대면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 중역, 정부 요직 인사, 모델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상당수의 검은 피부의 미국인들을 생각하면 TV에 출연조차 힘들다는 브라질의 현실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런 현실들에 주목했던 여행기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사람의 특성이라면, 유독 이 작가의 시선을 붙든 이유는 아마도 그 자신이 미국과 브라질의 흑인 노예, 불가리아와 이라크의 로마, 네팔의 불가촉민에게 강한 공감을 보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부자 나라, 선진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뒷골목 출신이더라도 자국에서 인정 받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또한 타고난 환경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전쟁 등의 인재를 포함한 대재해가 일어나면 피차별민에 대한 박해가 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 2차 대전 말기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을 때, 그날 밤 히로시마의 부락을 군대가 포위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는 천재지변을 이용해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일반 주민이나 정부가 벌이는 히스테리적인 행동이며, 근본적으로는 주민들이 그들을 일상적으로 차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부분을 보면 '그들의 식탁에 앉다'라는 프롤로그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음식이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강하게 기억으로 남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여행은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분명히 작가는 밝히고 있고, 실제로도 유럽의 로마를 취재하면서 스스로를 '일본의 로마'라고 소개했다는 점에서 취재 대상인 사람들과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저자가 소개한, 이라크의 알피다 지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텐트촌과 똥오줌 방을 보고 나서 돌아가려는데 생긴 일이다. 몇 사람이 사례를 요구해왔고, 나는 리더에게 이라크 돈 몇 장을 건네주고 이 정도면 됐는지 물었다. 그들이 고개를 그덕이기에 우리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차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차까지 따라와서 돈을 요구했다. 매일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끈질기게 돈을 달라고 매달렸다. 며칠이나 씻지 않은 그들의 새까만 얼굴과 이곳저곳 찢어진 옷을 걸친 모습에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중략)

"잘 들어, 나는 일본의 가잘이야. 넌 지금 이라크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가잘에게도 돈을 구걸하는 거란 말이야. 그 먼 일본에서 너희를 만나러 온 가난한 가잘에게도 그렇게 돈을 뜯어내고 싶니!" 그러자 험악한 나의 기세에 놀란 소년은 그때까지 내밀고 있던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너덜너덜한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50디나르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나는 아차 싶고 가슴이 뭉클해져서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초콜릿을 꺼내 나에게 먹으라고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지금 난 배가 부르단다. 건강하게 지내."

이렇게 말하자 소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순간이다. 비슷한 일화는 네팔의 불가촉민 가족과의 만남에서도 있다.

 

"저희 집에 와주어서 기뻤어요. 지금까지 일부러 저희 집을 찾아와준 사람도 없었고, 함께 소고기를 먹어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중략)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고빈다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지테는 없었다. 가족의 얘기에 따르면, 포카라의 마을로 나간 뒤 벌써 반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 다시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인도에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

 

미국의 프라이드 치킨이 흑인들만 먹던 음식에서 전세계에 확산된 미국의 대표적인 국민 음식이 되었고, 브라질의 하층민의 음식이던 페이조아다가 지금은 고급 음식이 되어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못 먹는 음식이 된 반면, 네팔에서 불가촉민만 먹던 소고기는 이제 불가촉민으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차별받는 가장 큰 이유가 소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네팔 불가촉민 최초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차별받으니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외친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먹던 그 맛을 잊을 수 있을까. 외국에 나갈 때마다 소고기를 먹는다는 그는 특히 한국의 소고기 맛이 기가 막히다고 이야기한다. 국외로 나갈 기회가 많은 네팔의 지식인들 중에는 최고 계층인 브라만이라도 소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음식이 주는 힘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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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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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오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떠올린 시이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고 간절한 당신에 대한 마음이 압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아마도 황동규 시인의 이 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 나는 '끌림'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병률의 이름 석 자는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읽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반발심리랄까. 모두가 열광할 때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떄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 '끌림'이 이병률 시인의 첫번째 여행기라면, 이 책은 두번째 여행기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작가를 있게 한 첫번쨰 여행기가 어떤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확실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모습을, 마치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그 마음이 정말 간절하지만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많은 나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먹고, 자고, 글을 썼던 시간들을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다루는 데에서 이 여행기가 특징이 있다. 어느 곳에는 어떤 명소가 있고, 거기를 가려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경제적이며, 어떤 맛집과 어떤 문화 유적에 대한 구구절절한 소개가 아니라, 그저 잠시 일상을 떠나 몸도 마음도 가벼운 상태, 그 상태를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여행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구 반대편,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야만 가능한 나라에서의 일들이 흥분되는 모험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주말 같은 느낌을 준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 치고 싶은 구절도 있고,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속된 말로 오글거린다고 느껴지는 구절도 있다. 아마도 한참 내가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 이 책을 읽으면 눈물날 정도로 반가웠으리라. 그 당시, 이런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격언처럼, 그 시간 또한 지나가니, 외로움을 다룬 책을 절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덤덤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듣고, 못 견디게 외로울 때는 외로움을 다룬 시를 읽으면 오히려 위로가 되듯이, 이 책 또한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또 슬픈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것 또한 바이오리듬처럼 시기를 타는 때라,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이 책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진폭이 차이가 날 수 있겠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별 다섯개를 줬겠지. 책도 사람도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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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자,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여행은 시간을 버리거나 투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그 친구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느냐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역시 축구의 왕국이라 그런지 어딜 가나 축구들을 하고 있다. 지갑 들고 다니듯 어디든 공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 같다. 땀을 식히려고 공터 나무 밑에 앉았는데 저기 건너편에서도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경사가 너무 심해서 한쪽 편이 심하게 불리해 보인다. 저건 뭐지? 저래가지고 무슨 축구야?

한쪽 편은 속도를 줄일 수 없었고 또다른 편은 속도를 낼 수도 없는 데다 공조차도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경사진 공터에서의 축구는 아무리 봐도 엉터리였다. 헌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양편이 서로 방향을 바꿔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쩔쩔매던 상대가 이번에는 훨훨 날고 있었다.

전반과 후반, 경사진 길과 평평한 길.

우리 인생도 그 둘로 나뉘어져 있다.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유난히 빵집에 집착한다. 지내는 동안 빵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곳일 때 빵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흐린 날의 빵 굽는 향은 멀리 간다. 그 향을 맡은 공사장의 인부들도, 성당의 신부님도 하는 일 없이 기뻐지거나 괜히 빗방울이라도 후두둑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빵이 너무 커서 가슴팍에 안고 먹어야 하는 그루지아의 화덕 빵이나, 빵 굽는 냄새가 맡아지면 킁킁대며 빵집을 찾아야 하는 시리아의 골목 빵집, 맛이 얼마나 좋으면 한입을 베어 물고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양의 크루아상을 사게 되는 파리의 빵가게. 세상의 빵 냄새에 홀려 동물이 되는 것이 나는 좋다. 사실 빵이야 여행지에서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는 거라서, 빵에 눈을 많이 얹어서 먹은 기억이나 말라비틀어진 방을 석탄기차 난로에 구워서 먹은 기억까지 합하자면 빵에 대한 내 취향은 동물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나 여행지의 숙소에서 작은 잼이나 버터가 나오면 하나씩 주머니에 넣어두는 끈적한 버릇까지 생겼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불러 내 앞에 앉혔다.

오늘 떠난다고, 여기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리투아니아의 '십자가 무덤'으로 기도를 하러 갈 거라 했다. 기도를 담은 어떤 물건이라도 좋으니 '십자가의 무덤'에, 너의 기도와 함께 내려놓고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도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온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나무든, 철사든, 종이든 십자가를 만들면 어떨까? 작아도 되고, 뭐 커도 되고......."

두시가 되었다.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웅을 하러 나온 수사님께 청년을 보고 가야 한다고 했더니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람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혹시 많은 돈을 준다면 모르지. 십자가를 만들어서 나왔을지도."

내가 느릿느릿 그 마을을 떠날 때가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그의 존재를 훼손시켰다는 기분이 들어 며칠이 괴로웠다.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아... 이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오글거리는 부분이었다. 감정의 과잉 때문에 읽는 내가 감당하기가 힘든?)

 

몸이 안 좋아 목욕을 하다가 졸도한 노인과, 직접 내 손으로 입히면서 속사정까지 알게 된 그의 남루한 옷가지들과, 대저택의 장미정원. 이 셋의 서늘한 하모니 가운데 어느 하나도 커지거나 작아지면 안 됩니다. 옷이 깨끗해도 안 되고, 장미 정원이 작아도 안 되고, 또 몸이 건강한 노인이어도 안 됩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하나라도 내가 본 그대로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토록 강렬한 불꽃처럼 기억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완벽히 혼자인 노인에게 그토록 완벽한 장미정원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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