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존 쿠삭 주연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원작 소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책을 다 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은 어떤지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이 상당히 좋아서 언젠가는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감명깊게 봤던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작가 닉 혼비가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남자 주인공의 성장기, 그 과정에서 사람들, 특히 여인들에 의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많이 닮아 있다.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은 유명한 작곡가를 아버지로 두어서 그 저작권료로 살아간다는 점이나, "하이 피델리티"의 주인공은 음반 가게를 운영한다는 점 등 두 작품 사이의 세세한 연결고리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저자 닉 혼비의 분신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이에게는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글쎄, 그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어바웃 어 보이"를 이미 접해서인지 다소 어린아이같은 면이 있는 남주인공이 두번째에도 크게 매력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에서의 휴 그랜트는 이기적이어도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어서 귀여웠는데. 만약 원작 소설이 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영화가 소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었을 것이다. 아니면 휴 그랜트의 연기력이 그만큼 뛰었났겠지. 아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도 비슷할 것 같다. 한글 영화 제목을 참 잘 붙였다는 느낌이 드는데, 원제에 비해 더 세련되고도 많은 것을 함축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존 쿠삭의 연기도 좋을 것 같고. 한번 영화를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어바웃 어 보이"를 보고 난 만족감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아쉬운데, 원본을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번역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가 남발되어서 그런지 느낌상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 않고 중간 중간 끊어지는 느낌이 강했는데 비록 원본에 조금 어긋난다 하더라도 융통성있게 번역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생소한 브릿 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밑의 주석과 비교하면서 읽느라 전체 내용을 쫒아가기도 급급했다. 아마도 그 노래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끼는데 그쳐야만 했다. 하다못해 소설에서 언급된 장소를 사진으로 실어 놓거나 소개된 가수나 음반들을 뒤에 별도 주석을 달아 좀 더 상세히 언급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한 번 리플레이 판타 빌리지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놀랍고도 괴이한 시간 이동의 현실이 이대로 쭉 계속된다면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반복해서 삶을 다시 살아가는 수밖에. 이 대체된 현실은 시시각각 한층 구체적이고 견고한 삶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흔세 살까지 산 그는 이제 여기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학 1학년생이며 열여덟 살이라는 것,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나이이며 졸업할 때까지 유치하고 지긋지긋한 수업 수십 개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어마어마한 부의 제국도, 더체스군의 집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호리호리한 몸집에 숙녀로 완성되어 가던 그레천,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눈빛의 귀여운 딸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는 지독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딸은 죽은 것도 아니고 이번 생에서는 아예 태어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다리를 부순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 하지만 디어더 선생은 그를 용서해주었고 그 일로 곤란을 겪지 않게 보호해 주었으며 섣부르게 용서해주겠노라는 말을 해서 그를 모욕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분별 있는 분이었다. 그가 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이 외로움과 까닭 없는 분노 때문이고 남편과 아기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일종의 배신으로 해석했기 때문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인생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제프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았고 남자로서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물질적인 성공, 낭만적인 사랑,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냈으나……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그는 빈손으로 무력하게 홀로 내던져졌다. 최선을 다해 살아도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은 이렇게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는 걸까?

 

“당신이 만든 작품만 사라지는 거죠.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노력에 있는 것이고, 그 노력은 삶이 재생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내면에 있으니까.”

 

“어떤 인생이든 잃는 부분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실감을 감당해 내기까지 나 역시 정말 오랜 세월이 결렸고, 삶이 재생될 때 잃는 부분에 대해 앞으로도 완전히 달관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외면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대충 살아서도 안 되겠죠. 우리 몫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보람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언제 이 아이들을 잃을지 정확히 아는 거잖아요.”

 

“우린 세상에 변화를 주고 나아지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그저 매번 세상을 그 전과 달라지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처음에 그들은 무한한 선택과 기회를 제공받으며 영원히 살 줄 알았다. 그래서 재생 때마다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을 비통함과 죄책감,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낭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찾아야 하는 답은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 잘 해결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볼 여유도 많고요. 시간은 넘치도록 많으니까요.”

제프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착각인지 알고 있었다.

 

매번 삶이 재생될 때마다 그들은 늘 다른 선택을 했고 세상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늘 예측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쪽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제프는 잠재적인 실패를 감내하는 법을 배웠다. 실패로 얻은 것도 많았다. 그가 보기에 가장 완전하고 슬픈 실패는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인생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더 이상 ‘다음번’은 없다. 오직 ‘이번’이 있을 뿐이다. 방향과 결과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유한한 시간이 있을 뿐. 단 한순간도 낭비하거나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접한 시간 여행에 대한 역대 문학이나 영화 중 단연 이 책을 으뜸으로 놓고 싶다. 1986년, 내가 태어나던 그 시기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 어떤 시간 여행에 관한 작품도 판타지라고 치부할 수 있었으나 이 책은 현격히 다르다. 나또한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시간 여행을 경험할지 모르며, 어쩌면 지금 몇 번의 리플레이를 겪고 있는 도중이지만 아직 재생의 시점이 아니어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세의 많은 시간 여행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제일 감탄한 점은, 매번 생이 리플레이 될 때마다 그 시점이 점점 뒤로 늦춰진다는 점이다. 즉, 두 번째 재생에서는 첫 번째 재생보다는 바뀔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며, 세 번째 재생에서는 두 번째 재생보다는 더 줄어들게 된다. 즉 재생이 반복될수록 재생 이전의 최초의 삶으로부터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최초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최초의 삶에서 좀 더 다르게 살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게 하며, 나또한 이게 내 최초의 삶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게 하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시간 여행에 대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Carpe diem.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라.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작품은 처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친구와 선배들의 조언도 지겨울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거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는 영화 <아일랜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누구냐고?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간절히 찾는 사람이지. 신은 그때 우릴 외면하는 사람이고.”

그래도 신이 공평해 보일 때가 있다. 안 보는 척하지만 시큰둥하게 하늘 위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재채기를 하듯 선행을 베푼다.

옛다. 미운 놈 떡 하나!




나는 종종 패션계 사람들의 속 안이 공갈빵 같다고 생각한다. 예금 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나라 보험 회사들은 전부 다 망할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부도 수표에 가깝다.




이곳에서 비밀이란 없다. 화장실에서도 말은 냄새처럼 퍼지게 되어 있다. 나쁜 소문일수록 퍼지는 속도는 빠르다. 소문은 변기 안의 지저분한 배설물을 처리하듯 버튼 하나로 간단히 내려버릴 수 없다.




편집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라.

결국 스테이크보단 제대로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었다.




내가 닥터 레스토랑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는 건 그가 누구보다 정직했기 때문이다. 잘난 수식어와 히스테릭한 공격들로 레스토랑을 초토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들에선 자신의 시선과 해석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돈이라고?

천만에!

21세기엔 돈이 시간이다.

돈은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해준다. 내가 돈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바로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에 늘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닥터 레스토랑이 정확한 비평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자기 돈을 주고 음식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취재나, 협찬이나, 요청이 아닌 자기 돈을 낸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通俗’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울고 웃게 만드는 힘, 내 꿈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란 믿음, 세상이 어쩌면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드라마가 가진 통속의 힘이라고 믿는다.




갈등을 다루지 않는 것은 드라마라고 할 수 없다!

소설이나 시와 달리 스무 살짜리 천재 드라마 작가가 나오지 않는 건 드라마가 갈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갈등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증폭된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패션잡지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건 앞으로 내가 쓸 드라마의 자산이 될 만한 갈등들이야! 이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저런 괴상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겠어. 잊지 말자. 그래야 나중에 내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우에게 저 동작을 설명해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것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남들은 고사하고 내 갈등 상황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신은 어떻게 써야 하고 클라이맥스의 갈등은 어떻게 폭발시켜야 할까.

마지막 엔딩은?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식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이곳에선 소문이 늘 사실처럼 유통된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신문의 ‘바로잡습니다’ 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은 절대 어린 기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관리자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울고 있는 어린애를 자를지언정 회사가 자진해서 윗선을 자르는 일은 결코 없다. ‘하극상’이란 단어는 회사 밖에나 있는 말이다. 그 애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진해서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다.




누군가에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시골이 고향이겠지만, 내겐 현대식 백화점이 세워지고, 새로 개통한 지하철이 들어서던 그곳이 고향이었다. 금강산의 비경秘境보다, 벚꽃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단지 풍경에서 더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나 같은 아이들은 놀이터와 주변 상가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유년기를 보낸다. 내게 압구정동은 시인 유하가 ‘바람 부는 날엔 반드시 가야 한다’고 노래하던 욕망의 집착지가 아니었다.




진정한 망각이란, 결국 그 단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미래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언제든 이 삶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데, 현재를 빼면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뭔가.

미래를 준비한다고?

그건 마치 결혼과 함께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리 같다. 성대한 결혼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커플들의 심리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안전이 최고?




하긴 식감이 발달하지 않은 20대에 무슨 음식 평을 쓴단 말인가. 라면 끓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엉터리들이 온갖 재료들이 섞이고, 삭아 결국엔 전혀 다르게 통합되는 요리의 세계에 대해 알 리 없다. 어떤 재료들로 소스가 만들어지는지, 뼛속에서 어떻게 국물이 우러나고, 좋은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에서 얼마만큼의 글루텐을 뽑아내는지 알지 못한다면 좋은 음식 평론은 불가능하다. 고작 남들이 써놓은 칼럼을 자기 식대로 변형한 가짜 정보들만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백발의 현장 기자가 거의 없다.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관리자가 되어 후배들을 닦달하거나, 광고주들과 씨름하고, 조직의 윗선들에게 아부하는 데 현장의 노하우를 전부 다 쓴다. 지금이 나이와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가 중요시되는 시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엔 역설적으로 느림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한 시간이나 하루가 아닌 한 달씩 뭉텅이로 사라지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병원에선 천천히 흘러갔다. 시간이 침대 위에, 창가 옆에 자꾸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었다. 문장이 아닌 내 삶에 단단히 밑줄을 그으며, 몇 가지 단어 위엔 방점을 찍었다. 내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혁신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그저 조용히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란 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탔던 회전목마같이 돌고 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포개지고 겹쳐져서 어떤 것이 과거였고, 현재이며, 미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서늘한 눈빛에 질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런 눈빛엔 언제나 솔직함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산다. 이게 옳은 일일까. 이런 삶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패션지 기자들이 사용하는 ‘시크’, ‘엣지’, ‘잇 백’,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이 일상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이런 외국어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패션지를 고작 명품광고나 싣는 한심한 된장녀 잡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렵게 섭외한 소설가 폴 오스터나 샐먼 루시디의 10페이지짜리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한들, 사람들이 그 기사의 진정성을 믿어줄까?

하지만 누군가는 내가 만든 잡지를 보며 꿈을 꾸고 위안을 얻는다. 잡지의 독창적인 화보나 훌륭한 기사를 통해 누군가는 패션디자이너로서의 희망을 다지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이상을 엿본다. 내가 하는 일은 디테일과 꿈을 파는 일이다. 더 이상 무얼 바란단 말인가.




2호선 ‘서울대 입구역’이 서울대 입구가 아니듯, 7호선 ‘청담역’ 역시 진짜 청담동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명명해 놓은 것들 중, 그렇지 않은 건 얼마나 될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들을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에 필요한 사람을 구분하는 건 비즈니스에서 아주 중요한 거야. 대부분은 그걸 구분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지. 그게 우리 여자들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해. 바로 너 같은 사람의 단점이지.”




어느 아티스트가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감동받았었다. 바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의 고귀함 때문에 내 삶이 문득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패션을 위해 내 삶을 희생시키진 않겠다. 더 이상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무모한 다이어트를 감행하지도, 15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구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뚱뚱해지는 게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뚱뚱한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얘기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라는 여자는 아직도 건강에 나쁘니까 담배를 끊으라는 얘기보단, 피부에 최악이니까 담배 끊으라는 피부과 의사들의 협박이 조금 더 사실적으로 들린다.

나라면 키가 작으면 하이힐을 신고,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화장을 하라는 빅토리아 베컴의 말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 그렇지만 성형 중독으로 하루가 다르게 일그러지고, 미라처럼 말라가는 미세스 베컴의 부푼 입술과 갈비뼈에선 섬뜩함을 느낀다. 결국 모든 건 균형이다. 과도함은 추남 추녀를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갈등을 다루는 건 드라마 작가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살벌하고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누군가 깊숙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는다는 건,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민준 선배를 위해 울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 우는 대신, 그의 미래를 위해 웃어주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해가 풀리고 그래서 기자 선배를 이해하게 되었다, 라고도 쓰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받은 상처만큼 그녀 역시 내게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젠 적어도 소문 속에서,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갑자기 마음속 깊이 응어리졌던 한숨이 한꺼번에 새어나왔다.

그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겠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했던 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겠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나 또한 얽혀 있는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지 늘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치열하게 일하는 이 시대 도시 여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날씬하면서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근사한 여행을 하면서 돈 많은 여행사가 아닌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사회에서 더 이상 단선적으로 설명되는 ‘이즘’이나 ‘고민’같은 건 실종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나는 감히 ‘화해’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의 화해, 원수라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화해,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화해,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들과의 화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없는 이야기 (올컬러 양장) - 너무너무 흥미진진한 메르헨의 여정
미카엘 엔데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깨비는 없어.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걸.”

그렇다면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어째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도깨비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한결같이 도깨비가 겁이 나 그러는지도 모른다.




“아우린은 환상 세계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힘이 있어. 그 존재가 빛의 피조물이든 암흑의 피조물이든 간에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 너와 나를 지배하는 힘도 갖고 있어. 그런데도 어린 여왕은 결코 힘을 행사하지 않거든. 여왕은 마치 없는 것 같아. 그러면서도 모든 것 안에 있어. 여왕도 우리와 같아?”

“아니,”

푸쿠르는 말했다.

“여왕은 우리와 달라. 여왕은 환상 세계의 피조물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여왕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그렇지만 여왕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




“왜 여왕님은 새 이름을 얻어야만 건강해지실 수 있나요?”

“올바른 이름만이 모든 존재와 사물에 그 실재를 부여하는 거란다. 옳지 않은 이름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되게 하지.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 하는 일이란다.”




“그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를 발견할 거다.”

“그리고 내가 그를 발견한다면 그는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임에도 동시에 태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과거란 그 이야기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지요.”




“환상 세계의 길은 오로지 주인님의 소망을 통해서만 열립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언제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지요. 주인님이 원치 않는 것은 주인님께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가깝고 먼’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 장소에서 떠나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장소를 향한 노력을 기울어야 하죠. 주인님의 소망이 주인님을 안내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간단히 소망할 수 없다니 이상해. 우리 마음속의 소망이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도대체 소망이라는 것이 뭘까?”




“이게 무슨 뜻일까? 네가 뜻하는 바를 행하라는 건 내가 행할 기분이 나는 것은 뭐든지 해도 좋다는 걸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인님이 자신의 참된 의지를 행해야만 한다는 뜻이지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답니다.”

“그게 대체 뭐지?”

“그것은 주인님도 모르는 주인님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이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하나의 소망에서 또 다른 소망으로, 그렇게 마지막 소망까지 소망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이 주인님을 주인님의 참된 의지로 안내할 겁니다.”




바스티안은 한 개인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자들과 똑같은 한 명이 아니라 어느 누구가 되고 싶었다. 바스티안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사랑받고 싶었다. 바스티안은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힘센 사람, 또는 가장 재치 있는 사람이 될 뜻은 없었다. 바스티안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사랑받기를 갈망했다. 좋든 나쁘든, 아름답든 추하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자기의 결함까지도 포함해서-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결함 때문에-사랑받기를 갈망했다.

그럼 대체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떠한가?

이제 바스티안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환상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고, 이 모든 선물과 힘에 눌려 더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어린 여왕이 죽을 병에 걸렸었단다. 여왕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는데 그 이름은 오직 사람의 아들만이 지어 줄 수가 있었지.......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여기로 왔어........ 그 아이가 어린 여왕에게 어린 달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단다. 여왕은 건강이 회복되었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린 여왕은 소년에게, 소년의 모든 소망이 환상 세계에서는 이루어지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어. 소년이 참된 뜻을 발견하기까지 말이지....... 그 가운데에는 좋은 소망뿐 아니라 나쁜 소망들도 있었지. 하지만 어린 여왕은 어느 것에도 차별을 두지 않거든. 여왕에게는 그녀 왕국 안의 모든 것이 똑같았고, 똑같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소망이 이루어질 때마다 어린 소년은 자기가 있었던 인간 세계의 기억을 한 조각씩 잊어 갔단다. 그것조차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 애당초 그리로 돌아갈 뜻이 없었으니까. 소년은 계속해서 소망을 했지만, 이제는 그 애의 기억이 거의 바닥나 버렸어. 기억이 없으면 더는 소망할 수도 없는 법이야....... 그런데 아직도 자기의 참된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자기의 마지막 기억을 다 써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어. 그건 말하자면 소년이 다시는 자기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거든. 그러다가 이윽고 소년은 변화의 집으로 안내되어 온 거야. 여기에 머물면서 자기의 참된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 변화의 집은 집 자체가 변화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단다. 이 변화야말로 어린 소년에게는 아주 중요했어. 지금껏 소년은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려고 했을 뿐 자기 자신을 바꾸려 하지는 않았거든.”




“너는 너의 소망의 길을 걸어온 거야. 다만 그 길이 똑바르지 못했던 것뿐이지. 너는 멀리 돌아서 갔지만 그것이 너의 길이었어. 왜 그런지 아니? 너는 생명의 물이 솟는 샘을 발견하고 나서야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 속해 있기 때문이야. 물론 거기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지만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떤 것이든 결국엔 올바른 길이란다.”




“아무것도 잃는 것은 없단다. 모든 것은 그저 변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라. 결국 시간은 걸릴 만큼 걸리는 거야.”




온갖 가능성을 다 늘어놓고 그중 한 가지를 골라내라 하더라도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이제 소년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기쁨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모두가 단 하나의 기쁨, 곧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그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그리고 먼 훗날, 바스티안이 자기의 세계로 되돌아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이 기쁨을 완전히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서도 바스티안은 마음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 남아 있어 미소를 짓고,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저마다 하나의 끝없는 이야기란다........어린 달님에게 너는 분명 두 번 다시 갈 수 없단다. 그녀가 어린 달님인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으면,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다시 만날 때마다, 그것은 처음이자 단 한 번의 만남이 되는 거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이런 풍요로운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했다. 뭄바이에서 살림과 나는 공짜로 배를 채우려고 부잣집 결혼식에 몰래 끼어들기는 했지만 그들의 넉넉한 삶을 시샘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대학생들이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쓰는 것을 보자 내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내 궁핍한 삶과 너무 달라서 온몸이 쑤시고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눈앞에 구미가 당기는 요리가 산더미처럼 놓여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허기마저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원하면 뭐든지 돈으로 해결해왔기 때문에 어떤 욕망도 느낄 수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 욕망 없는 삶이 지독히 가난한 삶보다 나은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은 구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풍선을 터뜨리듯 사람을 쉽게 죽였는데.......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 거침없이 총을 쏘아댑니다. 우리가 개미를 밟아 죽이듯이 그들은 사람을 죽입니다. 실제로는 총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풋내기 주인공도 저 멀리 악당 소굴에 있는 악당들을 단 번에 열 명씩이나 손쉽게 쏘아 죽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총을 장전해서 누군가의 얼굴을 겨누기는 그런대로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 총알이 진짜 심장을 꿰뚫는다고 생각하면, 선홍빛 액체가 토마토 케첩이 아니라 피라고 생각하면 방아쇠를 당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그 지경까지 몰고 온 과거를 생각하며 분노를 끌어내려고 애썼습니다. 닐리마 쿠마리와 니타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닐리마의 몸에서 본 까만 담뱃불 자국, 붉은 채찍 자국이 선명한 니타의 등, 시퍼렇게 멍든 얼굴, 검게 변한 눈두덩, 탈구된 턱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일기는커녕 슬펐습니다. 총구에서 총알이 나가기는커녕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다른 데서 방아쇠를 당길 구실을 찾으려고도 해보았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겪었던 모욕과 경멸, 내가 그때까지 참아야만 했던 굴욕과 상처를 떠올렸습니다. 내게 자상한 아버지와도 같았던 티모시 신부의 피투성이로 변한 주검, 내가 만난 아이 중 가장 착했던 샹카르의 축 늘어진 몸뚱이도 떠올렸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겪었던 악랄한 사람들도 기억해내려 애썼습니다. 그런 감정을 순간적으로 압축시켜 방아쇠를 당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내 모든 불행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순 없었습니다. 그런 놈은 죽어도 괜찮다고 정당화시킬 만큼 분노를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사람을 죽일 정도로 냉혈한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프렘 쿠마르 같은 망나니조차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조용히 총을 내렸습니다.




"아니……. 양쪽 모두 앞면이군요!"

"그렇습니다. 그게 내 행운의 동전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했듯이 운은 그 동전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나는 스미타에게 동전을 받아 하늘 높이 던졌다. 동전이 위로, 위로 올라가 푸른 하늘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다에 떨어져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왜 행운의 동전을 던져버렸나요?"

"이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인도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청년은 매 순간 생존본능에 따라 살아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청년은 정말 충실히 살았다. 시간을 죽이듯이 삶을 대충 살지 않았다.




청년의 이름은 람 모하마드 토머스였다.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냄새를 동시에 지닌 이름이다.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말하듯이 인도의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에는 종교 간의 알력까지 담겨 있다. 어떤 종교나 관용을 말하지만 결코 관용적이지 못한 종교에 대한 냉소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기도 하다. 위선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약 없이도 언제든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생애는 감동적이다.  

 

현대 인도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의 삶과 그것을 퀴즈쇼와 연결시킨 구성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못하게 한다. 몇 개의 단어, 한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걸작이다. 정말 천재적이면서도 감동적이고 모든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니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진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경우처럼 소설을 제대로 영화화했다는 평이 많은데, 실제 인도의 모습을 활자를 통한 상상이 아니라 영상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하다. 인도라는 나라가 너무나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