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리플레이 판타 빌리지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놀랍고도 괴이한 시간 이동의 현실이 이대로 쭉 계속된다면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반복해서 삶을 다시 살아가는 수밖에. 이 대체된 현실은 시시각각 한층 구체적이고 견고한 삶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흔세 살까지 산 그는 이제 여기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학 1학년생이며 열여덟 살이라는 것,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나이이며 졸업할 때까지 유치하고 지긋지긋한 수업 수십 개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어마어마한 부의 제국도, 더체스군의 집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호리호리한 몸집에 숙녀로 완성되어 가던 그레천,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눈빛의 귀여운 딸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는 지독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딸은 죽은 것도 아니고 이번 생에서는 아예 태어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다리를 부순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 하지만 디어더 선생은 그를 용서해주었고 그 일로 곤란을 겪지 않게 보호해 주었으며 섣부르게 용서해주겠노라는 말을 해서 그를 모욕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분별 있는 분이었다. 그가 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이 외로움과 까닭 없는 분노 때문이고 남편과 아기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일종의 배신으로 해석했기 때문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인생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제프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았고 남자로서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물질적인 성공, 낭만적인 사랑,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냈으나……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그는 빈손으로 무력하게 홀로 내던져졌다. 최선을 다해 살아도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은 이렇게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는 걸까?

 

“당신이 만든 작품만 사라지는 거죠.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노력에 있는 것이고, 그 노력은 삶이 재생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내면에 있으니까.”

 

“어떤 인생이든 잃는 부분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실감을 감당해 내기까지 나 역시 정말 오랜 세월이 결렸고, 삶이 재생될 때 잃는 부분에 대해 앞으로도 완전히 달관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외면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대충 살아서도 안 되겠죠. 우리 몫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보람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언제 이 아이들을 잃을지 정확히 아는 거잖아요.”

 

“우린 세상에 변화를 주고 나아지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그저 매번 세상을 그 전과 달라지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처음에 그들은 무한한 선택과 기회를 제공받으며 영원히 살 줄 알았다. 그래서 재생 때마다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을 비통함과 죄책감,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낭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찾아야 하는 답은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 잘 해결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볼 여유도 많고요. 시간은 넘치도록 많으니까요.”

제프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착각인지 알고 있었다.

 

매번 삶이 재생될 때마다 그들은 늘 다른 선택을 했고 세상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늘 예측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쪽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제프는 잠재적인 실패를 감내하는 법을 배웠다. 실패로 얻은 것도 많았다. 그가 보기에 가장 완전하고 슬픈 실패는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인생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더 이상 ‘다음번’은 없다. 오직 ‘이번’이 있을 뿐이다. 방향과 결과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유한한 시간이 있을 뿐. 단 한순간도 낭비하거나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접한 시간 여행에 대한 역대 문학이나 영화 중 단연 이 책을 으뜸으로 놓고 싶다. 1986년, 내가 태어나던 그 시기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 어떤 시간 여행에 관한 작품도 판타지라고 치부할 수 있었으나 이 책은 현격히 다르다. 나또한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시간 여행을 경험할지 모르며, 어쩌면 지금 몇 번의 리플레이를 겪고 있는 도중이지만 아직 재생의 시점이 아니어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세의 많은 시간 여행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제일 감탄한 점은, 매번 생이 리플레이 될 때마다 그 시점이 점점 뒤로 늦춰진다는 점이다. 즉, 두 번째 재생에서는 첫 번째 재생보다는 바뀔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며, 세 번째 재생에서는 두 번째 재생보다는 더 줄어들게 된다. 즉 재생이 반복될수록 재생 이전의 최초의 삶으로부터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최초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최초의 삶에서 좀 더 다르게 살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게 하며, 나또한 이게 내 최초의 삶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게 하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시간 여행에 대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Carpe diem.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라.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작품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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